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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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당 합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의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고, 각 당 대표들의 집권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합의였다. 3당 합당은 결과적으로 거대 여당의 탄생을 가져왔지만, 민주 진영의 분열, 지역주의 심화, 과거사 청산 미흡 등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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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3당 합당 |
시기 | 1990년 1월 22일 |
배경 | |
정치적 배경 |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여소야대 정국 형성 민주정의당의 정치적 위기 심화 |
추진 세력 |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
합당 과정 | |
합당 선언 | 1990년 1월 22일 |
참여 정당 |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
신설 정당 명칭 | 민주자유당 |
합당 이유 | 정치적 안정 추구 여소야대 국면 타개 보수 세력 통합 |
결과 및 영향 | |
정치적 변화 | 거대 여당 탄생 야당 세력 약화 |
평가 | 권위주의 정권 연장 비판 정치적 기회주의 논란 지역주의 심화 주장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
2. 배경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는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이나,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은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넘고, TK, PK, 충청 지역 기반의 3당 통합으로 호남을 제외한 지역들이 연합하는 구도가 되어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렸다. 3당 합당으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2. 1. 정치적 상황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이나,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영삼, 김종필 등은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2. 2. 각 당의 이해관계
3당 합당에는 각 정당의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했다.정당 | 합당 배경 및 목적 |
---|---|
민주정의당 | 5·3 인천 사태 이후 좌파 세력 견제 및 보수 세력 결집을 위해 신한민주당에 보수대연합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13대 총선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한 후 정국 주도권 회복을 위해 보수 정당 통합을 추진했다. 당초 평화민주당과 합당을 추진했으나 무산되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추진했다.[1] |
통일민주당 |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평민당)보다 많은 득표를 하고도 의석수가 적어 제2야당이 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김대중 총재와의 대권 경쟁에서 불리함을 느껴 여당 후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서석재 의원 구속으로 합당 결심을 굳혔다. 이기택, 노무현 등 8명은 민정당과의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1] |
신민주공화당 | 13대 총선에서 35석을 확보했으나 충청도 지역에서 부진했다. 민정당과 차별성 부족, 보궐선거 패배, 당내 불만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김종필 총재는 내각제 개헌을 통한 집권을 기대하며 합당에 참여했다.[1] |
2. 2. 1. 민주정의당
민주정의당(민정당)은 19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급진 좌파 세력을 견제하고 보수 세력 결집을 위해 신한민주당에 보수대연합을 제안했으나, 당시 야권은 민정당이 곧 사라질 정당이라고 판단하여 호응하지 않았다.[1] 13대 총선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하고 야당에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자, 민정당은 다시 보수 정당 대통합을 추진했다.[1] 당초 민정당은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과반 의석 확보와 호남 지역 지지 기반 마련을 추진했으나,[1] 평민당이 호응하지 않자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을 추진했다.[1]2. 2. 2. 통일민주당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23.8%의 득표율로 19.3%를 얻은 평화민주당(약칭 평민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당의 70석에 못 미치는 59석으로 제2야당이 되었다.[1] 김영삼 총재와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는 야권의 차기 대권 주자 자리를 놓고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이러한 결과로 김영삼 총재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4당 구도가 대선 때까지 유지될 시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다.[1] 김영삼 총재는 야권에 남아 김대중 후보와 경쟁하는 대신 여권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1]김영삼 총재는 민주정의당과 비밀리에 합당 협상을 진행했고, 측근인 서석재가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 결심을 굳혔다.[1]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명은 독재 정부의 후신인 민주정의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1]
2. 2. 3. 신민주공화당
신민주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 등 35석을 확보했으나, 충청도 지역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민정당과 차별성이 부족했고, 보궐선거에서 패배했으며, 당내 불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 김종필 총재는 대권 도전을 위해 내각제 개헌을 기대하며 합당에 참여했다.[1]3. 3당 합당의 전개
제5공화국의 후신 세력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6월 민주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및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정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민정당이 1986년 신한민주당에 처음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에는 야권에서 호응이 없어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이 4당 구도로는 각자 본인들의 집권이 요원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이다. 3당은 1990년 내각제 개헌 등을 조건으로 통합에 합의했으며,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 아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3당의 국회 의석 수를 합치면 개헌선인 200석을 훌쩍 넘긴다는 점, 각각 TK, PK,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3당의 통합으로 사실상 호남 외의 지역들이 모두 연합하는 구도가 됐다는 점 등에서 통합 신당은 '괴물 여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4. 결과 및 영향
이로써 민주 진영의 양대 주자였던 김영삼, 김대중 2인의 통합은 끝내 이뤄지지 않게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당 혁신을 명분으로 민정계와 공화계를 탄압·축출했고, 이에 반발한 김종필 등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4. 1. 단기적 결과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으로 정국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2년 후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299석 중 149석으로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1] 이는 계파 간 공천 갈등으로 낙천자 상당수가 무소속 또는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했기 때문이다.[1] 여러 계파가 한 당에 섞이면서 나타난 부작용이었다.[1]그러나 1992년 말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후 야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하여 다시 국회 과반수를 확보했다.[1]
4. 2. 장기적 영향
김영삼 대통령은 당 혁신을 명분으로 민정계와 공화계를 탄압·축출했고, 이에 반발한 김종필 등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1]5. 비판
3당 합당은 민주주의 원칙 훼손, 지역주의 심화, 과거사 청산 방해 등의 비판을 받는다.
특히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과거사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사건 책임자들이 거대 보수 정당의 중심이 되면서 정부의 진상 규명 노력이 미흡하다는 것이다.[1] 지만원 등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여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받는다.[1] 유신헌법 무효 요구와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보는 주장도 논란이 되는데,[3][4][5] 이 역시 3당 합당의 영향이라는 비판이 있다.[2]
5. 1. 민주주의 원칙 훼손
민주진영에서는 3당 합당이 민주진영의 분열과 불신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를 "기회주의적 거대 보수 연합"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3당 합당은 지역감정을 부추겨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 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과, 군사정권과의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정당 성립과 발전에 있어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장기 집권을 획책한 '정당 쿠데타'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3당 합당으로 인해 호남이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되었다는 비판도 있다.[1] 가수 정태춘은 5집 수록곡 <아, 대한민국···>에서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라는 가사로 김영삼을 비판하였다.5. 2. 지역주의 심화
3당 합당은 지역 감정을 부추겨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 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 특히,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 가수 정태춘은 5집 수록곡 <아, 대한민국···>에서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라는 가사로 김영삼을 비판하였다.[1]5. 3. 과거사 청산 방해
3당 합당으로 인해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군사정권 시절의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1]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할 인사들이 거대 보수 정당의 중심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과 문제 해결 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1]지만원 등 일부 보수 인사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정부 발표와 다른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여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1] 부마항쟁 피해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 유신헌법 무효 선언을 요구하는 학계의 주장과[2] 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미화하는 일부 보수 언론 및 인사들의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이 커지는 등,[3][4][5] 이러한 문제들이 3당 합당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3][4][5]
5. 4. 기타
가수 정태춘은 5집 수록곡 〈아, 대한민국···〉의 가사 중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라는 구절로 김영삼의 3당 합당을 비판하였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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