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고에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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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고에번은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 지방으로 이봉되면서 사카이 시게타다가 1만 석으로 봉해져 성립된 번이다. 이후 여러 번의 번주 교체와 영지 변동을 겪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에도 방위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1868년 마쓰다이라 야스히데가 신정부에 귀순하고 가와고에 성을 보존하여 전쟁을 피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가와고에현이 되었다가 사이타마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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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고에번 - 가와고에성
가와고에성은 무로마치 시대에 축성되어 센고쿠 시대에는 호조 씨의 거점, 에도 시대에는 가와고에 번의 번청 소재지였으며,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에 의해 확장되어 '소 에도'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혼마루 어전 일부가 남아 일본 100명성으로 지정되었다. - 가와고에번 - 마에바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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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번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가와고에 번 |
로마자 표기 | Kawagoe-han |
다른 이름 | 川越藩 |
종류 | 번 |
국가 |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
수도 | 가와고에 성 |
현재 위치 | 사이타마 현 일부 |
존속 기간 | 1590년 ~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역사 | |
시작 | 1590년 |
종료 | 1871년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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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의 역사
가와고에번(川越藩)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에서 후호조씨를 패배시킨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을 영지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에야스는 사카이 시게타다를 초대 번주로 임명하고 1만 석의 영지를 주었다.[1]
가와고에번은 무사시국 중앙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우에스기 모치토모의 명으로 가신인 오타 미치자네와 오타 도칸 부자가 성을 축조한 이래, 우에스기씨와 고호조씨의 무사시국 지배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다.[2]
에도 시대에는 여러 후다이 다이묘 가문들이 번갈아 통치했으며, 다이로나 로주 등 막부의 중직에 오른 유력 다이묘나 신판인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등이 번주로 봉해졌다.[1][2] 특히 막부의 로주직에 오른 다이묘의 수는 도쿠가와 제번 중 사쿠라번 다음으로 많았다.[2]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분가는 17만 석의 고쿠다카로 1767년부터 1867년까지 가장 오랫동안 번을 다스렸다.[1]
성 아랫마을인 가와고에는 에도와 신가시강의 주운 및 가와고에 가도로 연결되어 에도의 북쪽 방어 거점이자 물자 집산지로 발전했으며, '고에도(小江戸, 작은 에도)'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2] 가와고에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사이타마현의 일부가 되었다.[1]
2. 1. 16세기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라 정벌에서 후호조씨를 패배시킨 후, 간토 지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가 되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가신 사카이 시게타다를 가와고에 성의 성주로 임명하고 1만 석의 영지를 주어 가와고에번이 처음 성립되었다. 이는 16세기 말의 일이다.2. 1. 1. 입번
1590년(天正1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 과정에서 마에다 도시이에가 이끄는 북국군에 의해 가와고에 성이 함락되면서 후호죠씨(성 관리자는 다이도지씨)의 지배가 끝났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관동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면서, 가케가와 전투 때부터 이에야스를 섬겨온 미카와 국 출신의 오랜 가신이자 사카이씨 우타노카미 가문의 시조인 사카이 시게타다가 1만 석의 영지를 받아 가와고에에 봉해졌다. 이로써 가와고에번이 처음 성립되었으며, 시게타다는 도쿠가와 가문과 가까운 신판 다이묘와 같은 격으로 대우받았다.시게타다는 가와고에번에 부임한 후 각종 부역을 면제하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펼쳐 영지 내 경제를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또한 분로쿠의 역(임진왜란) 당시에는 루스이야쿠(留守居役, 주군 부재 시 성을 지키는 직책)를 맡아, 이에야스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에도 성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자신의 중신인 토다 카즈니시에게 고라이 군 쿠지라이(현재의 가와고에시 쿠지라이) 지역의 5천 석 영지를 주었다. 이로 인해 카즈니시가 오미 국 젠쇼 번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약 10년 동안 쿠지라이 번이라는 작은 번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했다.
2. 2. 17세기
1601년(게이초 6년), 초대 번주 사카이 시게타다가 덴카이 승정의 주선으로 고즈케국 마에바시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가와고에는 에도 방어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후임 번주를 정하는 데 혼란이 있었고, 8년간 번주 부재 상태로 유지되었다. 1609년(게이초 14년), 시게타다의 동생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재종질인 사카이 다다토시가 스루가국 다나카번에서 2만 석으로 가와고에번주가 되었다. 다다토시는 오사카 전투 당시 에도 성의 루스이 역할을 맡았으며, 기타인에서 천태종 관련 논의를 들은 이에야스의 명으로 덴카이가 주지였던 기타인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다다토시는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로주가 되었고, 영지가 추가되어 3만 7천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1627년(간에이 4년) 다다토시가 사망하자, 무사시국 후카야번 5만 석의 영주이자 다다토시의 맏아들인 사카이 다다카쓰가 8만 석으로 뒤를 이었다. 다다카쓰 역시 로주로서 이에미쓰를 보좌하였고, 1632년(간에이 9년) 2만 석이 추가되어 영지는 10만 석이 되었다. 다다카쓰는 도키노카네(時の鐘) 건립 등 성 아랫마을 정비에 힘썼다. 1634년(간에이 11년), 다다카쓰는 11만 3천 석으로 와카사국 오바마번으로 옮겨가 고쿠슈 다이묘의 지위에 올랐으며, 훗날 다이로를 역임하기도 했다. 다다카쓰가 떠난 후에는 소마 요시타네가 잠시 조다이(성 관리 책임자)를 맡았다.
1635년(간에이 12년), 로주 중 한 명인 홋타 마사모리가 3만 5천 석으로 가와고에번주가 되었다. 마사모리는 가스가노 쓰보네의 손자로, 다이로를 배출한 홋타씨 가문의 시조이다. 1638년(간에이 15년) 가와고에 대화재로 소실된 기타인 등 성과 성 아랫마을의 재건을 지휘했으며, 이에미쓰의 명으로 센바 도쇼궁 창건 공사를 감독했다. 이후 마사모리는 시나노국 마쓰모토번으로 옮겨갔고, 미즈노야 가쓰타카가 조다이를 맡았다.
1639년(간에이 16년), 마쓰다이라 노부쓰나(오코치 마쓰다이라가)가 시마바라의 난 진압의 공으로 무사시국 오시번에서 3만 석이 추가된 6만 석으로 가와고에번주가 되었다. 1647년(쇼호 4년)에는 영지가 더욱 늘어나 7만 5천 석이 되었다. 노부쓰나는 뛰어난 행정 능력으로 이에미쓰의 어린 시절부터 로주 수장으로서 그와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했으며, 그의 관직명인 이즈노카미를 따 "지혜로운 이즈"(知恵伊豆)라고 불렸다. 번 통치에 있어서는 가와고에 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5개의 구루와, 3개의 야구라, 8개의 문 신설), 성 아랫마을을 정비했다(사무라이 저택, 상인 마을(町人 마을), 사찰 구역 설정). 또한 가와고에 번사 야스마쓰 기자에몬에게 다마가와 상수와 노비도메 용수 개착을 명하는 등 농업 정책을 적극 추진하여 번 통치의 기반을 다졌다. 신가시강에는 운송을 위한 수로가 정비되었고, 가와고에 고카시(河岸, 강변 선착장)가 설치되어 에도와 가와고에를 잇는 야부네(夜舟, 야간 운항선)가 왕래했다.
노부쓰나의 아들 마쓰다이라 데루쓰나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노비도메 용수 지역 개발을 계속하고 헤이린지를 이곳으로 이전시켰다. 에도로 이어지는 가와고에 가도의 정비가 이루어진 것도 데루쓰나 시대이다. 1694년(겐로쿠 7년), 3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테루는 시모사국 고가번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2. 3. 18세기
겐로쿠 7년(1694년)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7만 2천 석으로 가와고에번의 번주가 되었다. 요시야스는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깊은 신임을 얻어 두 차례에 걸쳐 영지가 추가되어 석고는 11만 2천 석에 달했다. 쓰나요시의 측용인(대로격)으로서 막부 정치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번의 통치에도 힘써 삼부신전 개발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며 능력을 보였다. 요시야스는 유학자 오규 소라이를 등용했고, 소라이는 가와고에 성 아래 미야시타마치에 거주하며 삼부신전 개발 등에 조언했다. 이는 북송 시대 왕안석의 정책을 참고한 소라이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호에이 원년(1704년), 요시야스는 가이국 고후번으로 15만 석을 받아 옮겨갔다.요시야스가 떠난 후, 쇼토쿠 원년(1711년)에 가이국 다니무라번에서 아키모토 다카토모가 5만 석으로 들어왔고, 곧 6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났다. 다카토모는 겐로쿠 시대 문치를 이끈 로주로 알려져 있으며, 입봉 당시 가이국에서 기능공들을 데려와 가와고에 영내에서 감 재배, 양어 등 농업 외 소득 증대와 비단 직물 생산 같은 척산 정책을 추진했다. 다카토모의 치세에는 다카야마 시게토미와 같은 유능한 가신들이 활동했다.
4대 번주 아키모토 스케토모 시대인 간포 2년(1742년) 8월, 큰 홍수로 아라카와강, 이루마강, 아야세강 등이 범람하여 무사시국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간포2년 에도 홍수). 스케토모는 잇따라 농민 구제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히라가 겐나이를 번에 초청하여 오쿠치치부의 오타키무라 나카쓰쿄에서 광산을 개발하기도 했다. 스케토모가 로주 자리에서 물러난 후, 나카센도 덴마 소동이 발생하여 가와고에 번 영내도 혼란을 겪었다. 스케토모는 다누마 오키쓰구의 강압적인 정치에 반대했기 때문에, 메이와 4년(1767년) 데와국 야마가타번으로 전봉되었다. 스케토모는 에도의 번저를 옮기지 않았고, 적자인 아키모토 나가토모가 야마가타번으로 갔다.
메이와 4년(1767년), 아키모토 스케토모가 야마가타번으로 옮겨간 후, 고즈케국 마에바시번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도모노리가 15만 석 영지의 일부로 가와고에를 편입하면서 기존의 가와고에번은 소멸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시조로 하는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마에바시번의 거성이었던 마에바시성이 도네강의 침식으로 큰 피해를 입어 폐성하게 되자, 거성을 가와고에성으로 옮겼다. 이 때문에 이후 마에바시번은 가와고에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도모노리는 가와고에번의 일부가 된 옛 마에바시 영지에 가와고에번의 진야를 설치하고, 마에바시 분령 7만 5천 석을 관리하기 위해 유수거역(留守居役)을 두어 다스렸다(마에바시 진야).
2. 4. 19세기
에도 시대 후기, 가와고에번은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越前松平氏)의 분가인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結城松平家일본어)이 1767년부터 1867년까지 17만 석의 석고(石高)로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다. 그러나 이 가문은 히메지번, 시라카와번 등지로 자주 전봉(転封)되면서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제4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리쓰네(松平斉典, 재임 1817년~1850년) 시대에 번의 재정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리쓰네는 부유한 데와국 쇼나이번으로의 이봉(移封)을 꾀하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家斉)의 아들 마쓰다이라 나리사다(松平斉省)를 양자로 삼았으나, 쇼나이번 영민들의 격렬한 반대 운동(三方領知替え)으로 무산되었다. 대신 막부로부터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석고는 17만 석이 되었다. 나리쓰네는 재정 개혁을 위해 호상(豪商) 요코타 고로베에(横田五郎兵衛)를 등용하고, 번사 야스이 마사아키(安井政章)에게 명하여 가와시마(川島)에 도바이 둑(鳥羽井堤일본어)을 쌓아 농지를 개발했다. 또한 번교 '하쿠유도(博喩堂)'를 열고, 번의 유학자 야스오카 레이난(保岡嶺南)에게 명해 가와고에판 『일본외사』(日本外史일본어)를 간행했으며, 맹인 의사이자 국학자였던 누마타 요시노리(沼田順義)를 초빙했다. 성문에 메야스바코(目安箱)를 설치하여 민의를 듣는 등 '학문을 좋아하는 명군'으로 평가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가와고에성의 혼마루 어전(本丸御殿일본어)도 나리쓰네 시대에 건축된 것이다.
한편, 무사시국 최대 석고를 보유했던 가와고에번은 1820년(분세이 3년) 무사시 1만 5천 석을 사가미(相模) 1만 5천 석과 교환하고, 사가미 연안 경비 임무(相州警固役)를 맡게 되었다. 이는 나리쓰네가 전봉을 시도하게 된 계기 중 하나였다. 우라가 부교(浦賀奉行)의 지휘 아래 아이즈번을 대신하여 미우라반도의 번 영지에 미사키(三崎), 오쓰(大津), 간논자키(観音崎) 등에 해안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500명 이상의 번 병력을 주둔시켰다. 1837년(덴포 8년) 모리슨호 사건 당시 이국선 타격령(異国船打払令)에 따라 모리슨 호를 포격한 것은 우라가의 가와고에번 병력이었다. 1846년(고카 3년)에는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군함 2척을 이끌고 조가시마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작은 배를 타고 빈센스 호(USS Vincennes)에 올라 접촉한 인물도 가와고에 번사 우치이케 무사에몬(内池武者右衛門)이었다.
1847년(고카 4년), 막부는 에도만 방어를 위해 '오카타메 욘케'(御固四家일본어, 어고가 4가) 체제를 구축하여 가와고에번, 히코네번, 아이즈번, 오시번 등 4개 유력 번에 방어 임무를 맡겼다. 가와고에번은 우라코(浦郷)에서 미사키에 이르는 미우라 반도 일대와 그 해상을 담당했다. 1853년(가에이 6년) 매슈 페리가 내항했을 때, 가와고에번은 가모이(鴨居)에서 오쓰 일대에 병력을 배치했으며, 페리가 상륙한 구리하마는 가와고에번 병력 500명과 히코네번 병력이 방어했다. 제5대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쿠니(松平典則, 재임 1850년~1854년)는 페리 일행을 수행하기도 했다. 1854년(가에이 7년) 페리가 다시 내항하자 막부는 시나가와 다이바를 축조하고 방어선을 에도만 안쪽으로 옮겼는데, 가와고에번은 아이즈번, 오시번과 함께 이 다이바 방어를 맡았다(가와고에번은 제1 다이바 담당). 번은 다카나와에도 진지를 구축하고, 번의 주물 장인 오가와 고로에몬(小川五郎右衛門)에게 캐넌포를 주조하게 하여 배치했다. 시세가 급변함에 따라 무력을 증강했으며, 당시 에도 최고의 도공으로 불린 후지에다 다로 히데요시(藤枝太郎英義)는 이 시기 가와고에번에서 활동한 도검 장인이었다. 미우라 반도 방어를 인계받을 구마모토번의 준비가 늦어지면서, 가와고에번은 미우라 반도와 시나가와 양쪽에 총 6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하는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고다마군에는 번의 철포 사격장도 건설되었다. 제6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히사(松平直侯,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8남,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동생, 재임 1854년~1861년)는 이러한 막대한 군사 비용 지출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제7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카쓰(松平直克, 재임 1861년~1867년)는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서양식 포술인 다카시마류(高島流)를 도입하고, 농민 출신 번사 오카와 헤이베에(大川平兵衛)가 지도하던 신도무넨류 검술을 중용하여 다른 유파와의 교류 시합(他流試合)을 활성화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교토로 갈 때 에도 경비를 맡았으며, 자신도 교토로 올라가 고메이 천황으로부터 소장(少将)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요코하마항 개항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 속에서 막부의 정치총재직(政治総裁職, 다이로 격)에 있었음에도 쇼군 이에모치의 방침과 맞지 않았고, 덴구토의 난 진압 방식을 놓고 강경파인 미토번과 대립하다 결국 군대를 움직이지 않아 정치총재직에서 파면되었다. 1866년(게이오 2년)에는 부슈 잇키(武州一揆)가 발생하자 번의 쌀 천 섬을 풀어 민심을 달래려 했으나, 가와고에 번영 내 여러 마을에서 혜택을 받지 못해 봉기(打毀し)가 확산되자 총포 부대를 동원하여 진압하고 성 안으로의 진입을 막았다.
한편, 가와고에번은 개항 이후 경제 상황 변화에 밝은 번 중 하나였다. 100년간 번의 영지였던 고즈케국 마에바시(마에바시시)의 주력 상품인 생사는 번사 하야미 겐조(速水堅曹), 후카자와 유조(深沢雄象) 등의 노력으로 품질 향상과 증산이 이루어졌다. 생사는 번의 전매품으로서 요코하마항을 통해 번의 어용 상인 요시다 고베에(吉田幸兵衛) 등에 의해 수출되어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오랜 숙원이었던 마에바시성의 재건축이 이루어져, 1867년(게이오 3년) 나오카쓰는 가와고에번 시대의 석고를 유지한 채 거성을 마에바시성으로 옮겼다. 이로써 마에바시번이 부활하게 되었다. 가와고에 지역은 히키군, 고마군, 사이타마군 주변의 6만 2천 석 규모의 비지(飛地)가 되었고, 히키군 마쓰야마(현 히가시마쓰야마시)에 마쓰야마 진야(松山陣屋)가 설치되었다.
마에바시번 부활로 가와고에성이 비게 되자, 이와미국 하마다번에서 울릉도 사건(竹島事件)으로 인해 징벌적으로 무쓰국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던 마쓰이 마쓰다이라 가문(松井松平家)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康英)가 1867년(게이오 3년) 8만 4천 석으로 가와고에번의 새로운 번주가 되었다. 야스히데는 외국봉행, 가나가와 부교, 간조부교, 오메쓰케, 미나미마치부교, 지샤부교, 로주 등을 역임했으며, 에도 막부 최초의 유럽 사절단인 분큐 견구사절의 부사로 유럽 6개국을 방문하여 개항 연기 교섭을 벌인 인물이었다. 그는 다나구라 번주 시절인 1866년(게이오 2년)에 번교 '조젠칸'(長善館일본어)을 개설했으며, 가와고에번주가 된 이후에도 로주 및 회계총재직(会計総裁職, 현재의 재무대신에 해당)을 겸임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2. 4. 1. 폐번
게이오 4년(1868년) 번주 마쓰다이라 야스히데松平 康英일본어는 신정부에 귀순하여 藩論|한론일본어(번의 의견)을 통일하고 로쥬 직을 사임했다. 교토로 상경했으나, 신정부는 오미국에 있던 번의 도비치飛地領|도비치료일본어 2만 석을 몰수하고 야스히데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그럼에도 야스히데는 가와고에 성의 해자를 메워 관군에 대한 순응 의지를 보였고, 이로써 가와고에 지역이 전화(戰火)를 피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가와고에번은 우에노 전쟁에서 이탈한 쇼기대彰義隊일본어의 분파인 신부군振武軍일본어을 노닌지能仁寺일본어(현재의 한노시) 전투(보신 전쟁의 일부인 한노 전쟁)에서 소탕하는 데 기여했다.메이지 2년(1869년), 야스히데는 영지를 보전하기 위해 양자인 마쓰다이라 야스토시松平 康載|마쓰다이라 야스토시일본어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야스토시는 번주가 된 지 불과 16일 만에 반세키호칸版籍奉還|한세키호칸일본어을 신청하여 지번사(知藩事)가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廃藩置県|하이한치켄일본어이 단행되면서 가와고에번은 폐지되고 가와고에현(川越県)이 설치되었다. 이후 가와고에현은 현청 소재지였던 이루마현(入間県)과 구마가야현(熊谷県)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이타마현에 편입되었다.
폐번 후, 번주 가문이었던 마쓰이 마쓰다이라 가문松井松平家일본어은 마쓰다이라(松平) 성씨를 버리고 본래 성씨인 마쓰이(松井)로 復姓|후쿠세이일본어(복성)했다. 메이지 12년(1879년), 야스토시는 야스히데의 친아들인 마쓰이 야스요시松井 康義일본어에게 가독을 양위하고 마쓰이 가문을 떠났다. 야스요시는 메이지 17년(1884년) 화족령에 따라 자작위를 받았다. 한편, 야스토시는 메이지 19년(1886년)에 옛 안중번(安中藩) 번주였던 이타쿠라 가문板倉家일본어에 다시 양자로 들어가 이타쿠라 가쓰미板倉 勝観일본어로 개명하고, 이타쿠라 가문으로서 자작위를 받았다.
3. 역대 번주
가와고에번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 이름 | 재임 기간 | 예우 칭호 | 궁중 계급 | 고쿠다카 | 비고 |
---|---|---|---|---|---|---|
1 | 사카이 시게타다 (酒井重忠) | 1590년–1601년 | 가와치노카미 (河内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10,000 고쿠 | 마에바시번으로 이봉 |
![]() | ||||||
1 | 사카이 다다토시 (酒井忠利) | 1609년–1627년 | 분고노카미 (備後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20,000 → 37,000 고쿠 | 다나카번에서 이봉 |
2 | 사카이 다다카쓰 (酒井忠勝) | 1627년–1634년 | 사쇼쇼 (左少将) | 종사위하 (従四位下) | 80,000 → 100,000 고쿠 | 오바마번으로 이봉 |
1 | 홋타 마사모리 (堀田正俊) | 1635년–1638년 | 가가노카미 (加賀守) | 종사위하 (従四位下) | 35,000 고쿠 | 마쓰모토번으로 이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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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松平信綱) | 1639년–1662년 | 이즈노카미 (伊豆守) | 종사위하 (従四位下) | 70,000 고쿠 | 오시번에서 이봉 |
2 | 마쓰다이라 데루쓰나 (松平輝綱) | 1662년–1672년 | 가이노카미 (甲斐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70,000 고쿠 | |
3 | 마쓰다이라 노부테루 (松平信輝) | 1672년–1694년 | 이즈노카미 (伊豆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70,000 고쿠 | 고가번으로 이봉 (동생 마쓰다이라 데루사다에게 5천석 분지) |
1 |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柳沢吉保) | 1694년-1704년 | 미노노카미 (美濃守); 지쥬 (侍従) | 종사위하 (従四位下) | 72,000 → 112,000 고쿠 | 고후번으로 이봉 |
1 | 아키모토 다카토모 (秋元喬知) | 1704년–1714년 | 다지마노카미 (但馬守) | 종사위하 (従四位下) | 50,000 → 60,000 고쿠 | 다니무라번에서 이봉 |
2 | 아키모토 다카후사 (秋元喬房) | 1714년–1737년 | 다지마노카미 (但馬守) | 종사위하 (従四位下) | 60,000 고쿠 | |
3 | 아키모토 다카모토 (秋元喬求) | 1738년–1742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60,000 고쿠 | |
4 | 아키모토 스케토모 (秋元凉朝) | 1742년–1767년 | 다지마노카미 (但馬守) | 종사위하 (従四位下) | 60,000 고쿠 | 야마가타번으로 이봉 |
1 | 마쓰다이라 도모노리 (松平朝矩) | 1767년–1768년 | 야마토노카미 (大和守); 지쥬 (侍従) | 종사위하 (従四位下) | 150,000 고쿠 | 마에바시번에서 이봉 |
2 | 마쓰다이라 나오쓰네 (松平直恒) | 1768년–1810년 | 야마토노카미 (大和守); 지쥬 (侍従) | 종사위하 (従四位下) | 150,000 고쿠 | |
3 | 마쓰다이라 나오노부 (松平直温) | 1810년–1816년 | 야마토노카미 (大和守); 지쥬 (侍従) | 종사위하 (従四位下) | 150,000 고쿠 | |
4 | 마쓰다이라 나리쓰네 (松平斉典) | 1816년–1850년 | 사콘노쇼쇼 (左近衛少将); 지쥬 (侍従) | 종사위상 (従四位上) | 150,000 → 170,000 고쿠 | |
5 | 마쓰다이라 쓰네노리 (松平典則) | 1850년–1854년 | 야마토노카미 (大和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170,000 고쿠 | |
6 |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松平直侯) | 1855년–1861년 | 야마토노카미 (大和守); 지쥬 (侍従) | 종오위하 (従五位下) | 170,000 고쿠 | |
7 | 마쓰다이라 나오카쓰 (松平直克) | 1861년–1867년 | 사콘노쇼쇼 (左近衛少将); 지쥬 (侍従) | 종사위상 (従四位上) | 170,000 고쿠 | 마에바시번으로 이봉 |
1 | 마쓰다이라 야스히데 (松平康英) | 1866년–1869년 | 스오노카미 (周防守); 지쥬 (侍従) | 종오위하 (従五位下) | 84,000 고쿠 | 다나구라번에서 이봉 |
2 | 마쓰다이라 야스토시 (松平康載) | 1869년–1871년 | 스오노카미 (周防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84,000 고쿠 | 폐번치현 |
3. 1. 사카이 우타노카미 종가
후다이 가문으로, 고쿠다카는 1만 석이었다.# | 이름 | 재임 기간 | 예우 칭호 | 궁중 계급 | 고쿠다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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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씨 (후다이) 1590–1601 | ||||||
1 | 사카이 시게타다 (酒井重忠) | 1590–1601 | 가와치노카미 (河内守) | 종오위하 (従五位下) | 10,000 고쿠 | 마에바시번으로 이봉 |
3. 2. 사카이 우타노카미 분가(오바마 번계)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고쿠다카는 초기에 2만 석이었으나, 사카이 다다토시 대에 3만 7천 석으로, 사카이 다다카쓰 대에 8만 석을 거쳐 최종적으로 10만 석까지 증가하였다.# | 이름 | 재임 기간 | 예우 칭호 | 궁중 계급 | 고쿠다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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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사카이 다다토시|酒井忠利일본어 | 1609년 ~ 1627년 | 분고노카미|備後守일본어 | 종오위하|従五位下일본어 | 20,000석 → 37,000석 | 다나카번에서 이봉 |
2 | 사카이 다다카쓰|酒井忠勝일본어 | 1627년 ~ 1634년 | 사쇼쇼|左少将일본어 | 종사위하|従四位下일본어 | 80,000석 → 100,000석 | 오바마번으로 이봉 |
3. 3. 홋타 가
후다이 다이묘인 홋타 가문은 1635년부터 1638년까지 고쿠다카 3만 5천 석으로 가와고에번을 다스렸다.- 홋타 마사모리(堀田正盛일본어): 재임 1635년 ~ 1638년. 관위는 종사위하(従四位下), 가가노카미(加賀守)였다. 고쿠다카는 3만 5천 석이었으며, 이후 마쓰모토번으로 이봉되었다.
3. 4. 오코치 마쓰다이라 가
(松平信綱|마쓰다이라 노부쓰나jpn)종사위하 (従四位下)
(松平輝綱|마쓰다이라 데루쓰나jpn)
종오위하 (従五位下)
(松平信輝|마쓰다이라 노부테루jpn)
종오위하 (従五位下)
고가번으로 전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