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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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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발생한 심각한 경제난과 대기근을 일컫는 용어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방비 증대, 석유 파동, 소련의 붕괴, 김일성 사망 등의 요인으로 경제가 악화되었고, 1993년 흉작과 1990년대 중반의 대홍수로 배급제가 붕괴되면서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했다.

이 시기 북한은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으나, 식량 배급 시스템 붕괴, 탈북자 증가, 군사적 영향, 정치적 숙청, 국제 관계 변화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사망자 수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2010년 대한민국 통계청은 약 33만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김정은 시대에도 '고난의 행군'이 언급되며 체제 결속을 다지는 데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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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행군
기본 정보
집을 잃고 바락에서 생활하는 빈민 (2008년 촬영)
집을 잃고 바락에서 생활하는 빈민 (2008년 촬영)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치전국
기간1994년 - 1998년
초과 사망자 수150만 명 - 350만 명 (여러 설 존재)
질병으로 인한 사망해당 사항 없음
총 사망자 수해당 사항 없음
사망률해당 사항 없음
원인하천 범람으로 인한 대홍수
이론적 배경소련 붕괴 등으로 인한 동구권 국가들의 지원 중단
주체농법 등의 농업 정책 실패
구호 활동해당 사항 없음
순 식량 수입해당 사항 없음
인구 통계탈북자 증가
심화조 사건 등 숙청 사건
결과경제의 군사화
한국, 미국, 중국, 일본, EU의 식량 지원
기념해당 사항 없음
선행 사건해당 사항 없음
후행 사건해당 사항 없음
각주해당 사항 없음
사건 정보
사건고난의 행군
날짜1996년 ~ 1999년
원인공산권의 붕괴
소련의 붕괴
1995년 대홍수
미국의 경제 제재
결과배급제의 후퇴
장마당의 형성
약 33만 명의 아사
대다수 조선 인민의 영양실조
북한이탈주민의 급증
보고된 사망자약 33만 명 ~ 약 60만 명
매장지해당 사항 없음
조사해당 사항 없음
관련 문서
관련 문서북한의 역사
역사적 맥락
관련 사건조선반도 분단 (1945–48)
조선인민공화국 (1945–46)
소비에트 민정청 (1945–48)
(1946–47)
북조선인민위원회 (19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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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 및 인권
관련 항목북한 경제사
북한인권 문제

2. 배경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방비를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30.4%까지 치솟아, 1966년에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3년 연장해야 했다.[71]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전쟁으로 소련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등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중국이 물물교환 방식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대량 아사 사태를 초래했다.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항일빨치산의 투쟁을 상기시켰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관련 서정시, 가요, 영화 등이 잇따라 발표되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71]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대포동 1호 발사에는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국제 시장에서 옥수수를 구매하면 약 350만 톤이 되어, 북한 전국민의 1년분과 가까운 식량이 된다고 보도했다.[5]

안명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 김정일은 "반란이 일어나면 전부 죽여라. 굶어 죽는 사람은 죽게 놔두어라. 나에게는 2천만 명의 전체 조선 인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의 당원이 있으면 된다"라고 발언했다.[5]

하기와라 료는 인구 2천만 명 남짓한 북한에서, 그 10%가 기아로 사망하는 기근의 발생은, 20세기 후반 세계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고 언급하고 있다.[6]

1991년평양에 유학한 이영하에 따르면, 1991년 11월에 받은 조선사회과학원의 농업 전문가에 의한 "특별 강의"에서 전문가는 이러한 기아가 발생할 사태를 완전히 예측하고 있었다고 한다.[7]

2. 1. 경제난의 심화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비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30.4%까지 치솟아, 1966년에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3년 연장해야 했다.[71]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전쟁으로 소련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등 외부적 요인도 겹쳤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중국이 물물교환 방식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대량 아사 사태를 초래했다.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항일빨치산의 투쟁을 상기시켰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관련 서정시, 가요, 영화 등이 잇따라 발표되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71]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 옥수수 생산량은 다음과 같다.[72]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 경제권의 종언은 북한의 경제난을 더욱 심화시켰다.[9] 연료 부족도 심각하여, 1990년 252만 톤이었던 원유 수입량은 1997년 51만 톤으로 급감했다.[8] 전력 사정도 좋지 않아 일반 가정에는 하루 2~3시간 정도밖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8]

이영하는 북한 농업 정체 및 쇠퇴의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했다.[10]

# 집단화로 인한 농민들의 생산 의욕 저하

# 공업 부진에 따른 기계화 및 화학화 지연

# 만성적인 무역 적자와 누적 부채 문제로 인한 농업 기계, 부품, 화학 비료, 제초제살충제 등의 수입 중단

또한, 도로, 철도 등 인프라의 미비 및 노후화, 저장 시설 부족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0]

2. 2. 자연재해와 식량난

1990년대 중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수해로 인한 대흉작을 겪으면서 배급제가 붕괴되고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1993년 흉작[71]에 이어 1995년에는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역사적인 대홍수가 발생하여[11][12][13][14][15][16][17][18][19][20] 많은 논밭과 비축 식량이 유실되어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그러나 시게무라 토모아키는 농업 생산 감소와 식량난의 진정한 원인이 수해가 아니라, 농업 정책의 실패와 "주체 농법"에 있다고 주장한다.[23]

2. 3. 주체농법의 실패

대기근의 원인으로 농업 정책의 실패, 특히 주체농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자들이 많다.[21][22][23][24] '주체' 농법은 농민의 자율적인 판단이 아닌, 중앙의 지시에 따르는 농법이다.[23]

"식량이 부족하면 산림을 농지로 바꾸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산림을 개간하여 산 정상까지 논밭과 밭을 만들었지만, 경사 15도 이상의 산비탈이 많아 충분한 농업 생산이 어려웠다.[23] 김일성이 토류가 없는 논밭을 만들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논밭이 붕괴되었다.[21][22] 다락밭에는 과수 같은 다년생 작물이 적합하지만, 옥수수를 심어 토사 유출이 심했다.[22] 민둥산이 되어 보수력을 잃은 산의 토사가 강으로 흘러들어 수위가 높아져 범람이 잦아졌고,[21][22] 대량의 토사가 바다로 흘러가 연안 생태계가 파괴되어 어업도 부진해졌다.[21]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모방하여 과 옥수수를 빽빽하게 심는 '밀식'도 주체농법의 특징이다.[21][25] 화학 비료를 대량 투여하여 일시적으로 생산량이 늘었지만, 밀식으로 토양 소모가 심해져 농지 생산력이 붕괴되었다.[22][23] 옥수수 밭에서는 연작 장해로 흉작을 초래했고,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의 화학 비료 원조가 끊기자 많은 농지가 '사막화'되었다.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1985년 이후 급속히 하락했다.[23] 주체농법에서는 특수한 옥수수 재배법도 채택되었는데,[22] 퇴비 볼 안에 종자를 넣어 난방비 없이 묘목을 길렀다.[22] 그러나 이 육묘법은 햇볕을 쬐지 못해 연약한 묘목만 자라고, 밀식으로 햇빛과 바람도 부족했다.[22]

토류가 없는 다락밭과 밀식은 김일성의 '교시'에 근거하며, 전통 농법과 과학적 농업 관점에서도 불합리하다.[21] 생산자가 식재 방법을 개선하면 '교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수 있고, 최고 지도자에게 의견을 말할 수도 없다. 북한에서는 헌법보다 최고 지도자의 '교시'가 우선되어 농업 전문가도 '교시'에 거스를 수 없다.[21][26] 재일 한국·조선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선총련) 중진 리우홍은 1989년 《밑바닥의 공화국 - 북한 흉작의 구조》에서 주체농법을 흉작의 원인 중 하나로 꼽았다.[27] 와다 하루키는 주체농법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있으며, 흉작은 자연의 반격이라고 지적했다.[22]

1995년 대수해 이후 세계 식량 계획(WFP) 등이 북한 농업 실태를 조사한 결과, 쌀과 옥수수만 재배하는 것이 밝혀졌다.[23] 전문가들은 겨울철 보리 재배를 제안했지만, 김일성의 '교시'에 없다는 이견 때문에 1년 이상 논의한 후에야 인정되었다.[23]

3. 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을 겪으며 국방비를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했던 국방비는 1967년에 30.4%로 급증했다.[71] 이로 인해 1966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은 3년 연장되어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소련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그리고 1994년 김일성 사망은 고난의 행군을 초래했다. 경제는 파탄났고,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중국이 물물교환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대량 아사 사태를 야기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어려움 극복을 호소했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 서정시, 가요, 영화 등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71]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어려운 행군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는 대포동 1호 발사에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옥수수를 구매하면 북한 전국민의 1년분 식량이 된다고 보도했다.[5] 1999년 4월 22일 로동신문김정일이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키기 위해" 자금을 미사일 개발에 투입했다고 보도했다.[5]

안명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은 "반란이 일어나면 전부 죽여라. 굶어 죽는 사람은 죽게 놔두어라. 나에게는 2천만 명의 전체 조선 인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의 당원이 있으면 된다"라고 발언했다.[5]

3. 1. 경제적 요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을 겪으며 국방비를 대폭 증액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했던 국방비는 1967년에 30.4%로 급증했다.[71] 이로 인해 1966년 시작된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은 3년 연장되어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소련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그리고 1994년 김일성 사망은 고난의 행군을 초래했다. 경제는 파탄났고,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중국이 물물교환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대량 아사 사태를 야기했다.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이영하는 북한 농업 정체 및 쇠퇴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했다.[10]

# 집단화로 인한 농민들의 생산 의욕 저하

# 공업 부진에 따른 기계화 및 화학화 지연

# 만성적인 무역 적자와 누적 부채 문제로 인한 농업 기계, 부품, 화학 비료, 제초제, 살충제 등(특히 일본으로부터의) 수입 중단

도로철도 등 인프라 미비 및 노후화, 저장 시설 부족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10]

연료 부족 또한 심각했다.[8] 1990년 252만 톤이었던 북한의 원유 수입량은 1997년 51만 톤으로 급감했다.[8] 전력 사정도 좋지 않아, 호텔에서도 정전이 잦았고 일반 가정에는 하루 2~3시간 정도만 전기가 공급되었다.[8]

3. 2. 정치적 요인

1960년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소 국경 분쟁을 겪으며 국방비를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1960년 전체 예산의 1%에 불과했던 국방비는 1967년 30.4%로 급증했다.[71] 이로 인해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은 3년 연장되어야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전쟁은 소련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4년 김일성 사망은 고난의 행군을 불러왔다. 경제는 악화되어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중국이 물물교환 대신 경화 결제 방식을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아사자 속출을 야기했다.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어려움 극복을 호소했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 서정시, 가요, 영화 등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71]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어려운 행군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는 대포동 1호 발사에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옥수수를 구매하면 북한 전국민의 1년분 식량이 된다고 보도했다.[5] 1999년 4월 22일 로동신문김정일이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키기 위해" 자금을 미사일 개발에 투입했다고 보도했다.[5]

안명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은 "반란이 일어나면 전부 죽여라. 굶어 죽는 사람은 죽게 놔두어라. 나에게는 2천만 명의 전체 조선 인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의 당원이 있으면 된다"라고 발언했다.[5]

3. 3. 농업 정책 실패

대기근의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농업 정책의 실패, 특히 주체농법의 문제점이 지적된다.[21][22][23][24] '주체' 농법은 농민의 자율적인 판단이 아닌, 중앙의 지시와 결정에 따르는 농법이다.[23]

구체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면 산림을 농지로 바꾸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산림을 개간하여 산 정상까지 논밭을 만들었지만, 경사도가 높은 산비탈은 농업 생산에 적합하지 않았다.[23]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토류가 없는 논밭을 만들 것을 지시했기 때문에, 적은 비에도 쉽게 붕괴되었다.[21][22] 다락밭에는 과수와 같은 다년생 작물이 적합하지만, 옥수수를 심어 토사 유출을 막을 수 없었다.[22] 민둥산이 된 산은 보수력을 잃고 토사가 강으로 흘러들어 하천범람을 유발하고, 연안 생태계 파괴로 어업까지 어려움을 겪었다.[21][22] 1990년대 북한의 수해는 주체농법으로 인한 인재였다.[21]

과 옥수수를 빽빽하게 심는 '밀식'은 주체농법의 큰 특징이다.[21][25] 화학 비료를 대량 투여하여 일시적으로 생산량이 늘었지만, 밀식은 토양 소모를 가속화시켜 농지 생산력을 떨어뜨렸다.[22][23] 옥수수 밭은 연작 장해로 흉작을 불렀고, 동유럽의 원조 중단 후 많은 농지가 사막화되었다. 북한 농업 생산량은 1985년 이후 급감했다.[23] 주체농법은 특수한 옥수수 재배법을 채택했는데, 퇴비 볼 안에 종자를 넣어 난방 없이 묘목을 길렀다.[22] 그러나 이 방법은 햇볕 부족으로 연약한 묘목만 자랐고, 밀식으로 통풍도 되지 않았다.[22]

토류 없는 다락밭과 밀식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것으로, 전통 농법과 과학적 농업 관점에서 모두 비합리적이었다.[21] 생산자가 개선하면 '교시'를 어겼다고 처벌받을 수 있었고, 최고 지도자에게 의견을 낼 수도 없었다. 북한은 헌법보다 '교시'가 우선시되어 농업 전문가도 거스를 수 없었다.[21][26] 재일 조선인 리우홍은 1989년, 주체농법을 북한 흉작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했다.[27] 와다 하루키는 주체농법에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있으며, 흉작은 자연의 반격이라고 지적했다.[22]

1995년 대수해 이후, 세계 식량 계획(WFP) 등의 조사 결과 북한은 쌀과 옥수수만 재배하는 것으로 밝혀졌다.[23] 전문가들은 겨울 보리 재배를 제안했지만, 김일성의 '교시'에 없다는 이유로 1년 넘게 논의한 후에야 허가되었다.[23]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년1990년1991년1992년1993년1994년1995년1996년1997년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3. 4. 자연재해

1995년 7월 30일부터 8월 18일까지 북한은 역사적인 대홍수를 겪었다.[11][12][13][14][15][16][17][18][19][20] 이로 인해 많은 논밭과 비축 식량이 유실되어 농업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시게무라 토모아키는 식량난의 원인이 수해가 아니라 농업 정책 실패와 "주체 농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23]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아사자 속출로 이어졌다.[71]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4. 사망자 규모 논란

고난의 행군 시기 사망자 규모는 정치적 요인, 통계 자료 부족, 조사 방법의 한계 등으로 인해 연구자마다 크게 다르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일부 미국 언론은 사망자가 300만 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평양 특파원 출신 하기와라 료(萩原遼)의 저서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실증적인 근거는 부족하다.[73]

1990년대 중반 북한은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기근을 겪었다. 1995년 여름 대수해를 계기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으며, 1998년 말까지 30만 명[2]에서 300만 명[3]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가 정점에 달한 것은 1997년이었다.

필립 본즈는 1995년 추정치에서 4년간 35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보았으나,[31] 북한 당국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간주하는 비정부 기구에서는 이 수치에 의문을 제기한다.[32]

4. 1. 대한민국 통계청 추산

2010년 11월 22일 대한민국 통계청이 발표한 북한 인구 추계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1996~2000년) 시기에는 33만여 명이 사망했다. 북한이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1994~2005년)간 식량난으로 61만 명의 인구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됐다.[69] 기초자료는 유엔의 지원 아래 인구센서스를 실시한 1993년과 2008년의 통계였다. 통계청은 1993년 통계를 나이와 사망률, 탈북 인구, 연령별 출산율을 고려한 뒤 2008년 통계와 비교·분석했다. 통계청 관계자는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추계한 만큼 이번에 발표한 숫자가 실제와 가장 근접할 것”이라고 말했다.[69]

4. 2. 다른 추정치

2000년대 초중반까지 일부 미국 언론은 고난의 행군 동안 사망자가 300만 명이라는 주장을 제기했지만, 이는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의 평양 특파원 출신 하기와라 료(萩原遼)의 저서에 처음 나온 것으로, 실증적인 근거는 없다.[73]

2010년 11월 22일 대한민국 통계청은 1993년과 2008년 북한 인구 센서스를 바탕으로 '고난의 행군(1996~2000년)' 시기에 33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간(1994~2005년) 식량난으로 인한 인구 손실은 61만 명으로 추산됐다.[69] 통계청 관계자는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추계한 만큼 이번에 발표한 숫자가 실제와 가장 근접할 것이라고 말했다.[69]

굶어 죽은 사람의 수는 정치적 요인, 통계 제도 및 조사 방법의 불비로 인해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르다.

;10만 명 ~ 100만 명 규모

  • 무토 마사토시는 1995년 전후 아사자 수가 10만 명에서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김정일 정권은 국민 구제가 아닌 핵 개발에 재원을 사용했다고 언급했다.[33]
  •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 사무총장 찰스 카트먼은 미국 국무부는 지난 3년간 100만 명이 사망했다는 통계도 타당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5]
  • 미무라 미쓰히로는 1990년대 중반 굶어 죽은 사람은 3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언급했다.[34]
  • 마키노 아이히로(『아사히 신문』서울 지국장)는 적어도 30만 명 정도, 많게는 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했다고 말했다.[35]
  • 북한의 인구 조사를 토대로 추산한 결과, 북한 대기근으로 24만 명에서 42만 명이 사망했으며, 1993년부터 2008년까지의 전체 기간 동안 초과 사망자는 60만 명에서 85만 명에 달했다.[36]


;300만 명 ~ 350만 명 규모

  •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황장엽1996년11월까지 100만 명이 사망했고, 1997년에도 100만 명, 1998년까지 300만 명이 사망할 것이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증언했다.[56]
  • 1996년11월, 김덕홍에게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조직부의 사망자 통계 담당자가 1995년에 50만 명, 1996년11월까지 이미 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전했다.[45]
  • 이영훈은 김일성 주석 사망(1994년)부터 1997년까지 김일성의 를 위해 사용된 자금은 9억달러였다며, 그 돈이 있었다면 1995년부터 1998년에 걸쳐 3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진 대기근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40]
  • 1998년7월부터 9월까지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조사에 따르면, 440명의 난민이 속한 가족과 친척의 사망률은 12~13%였다.[5]
  • 주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서에는 1995년 이후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북한 전체 인구의 10%에서 15%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5]
  • 중국 국무원 산하 연구 기관의 보고서는 1995년부터의 흉작으로 북한 인구가 300만 명 감소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고 밝혔다.[5]
  • 조갑제는 탈북한 북한 정부 고위 간부로부터 2005년에 노동당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위한 인구 조사를 했을 때 1800만 명이라는 숫자가 나왔다는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56][41]
  • 이상철은 200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를 낸 1990년대 후반의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했다.[42]
  • 니시오카 쓰토무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직후부터 배급이 거의 전면적으로 중단되어 인구의 15%, 300만 명이 굶어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56]
  • 구출회 사무국장 히라타 류타로는 300만 명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때, 3년 동안 북한 인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8.9억달러를 들여 자신의 아버지 김일성의 시신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다고 말했다.[44]
  • 구보타 루리코(『산케이 신문』서울 지국 특파원)는 1996년부터 1997년, 악천후와 북한식 농업의 실패로 북한에서는 약 300만 명 규모로 추정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1]
  •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5년8월부터 1998년7월까지 3년간 350만 명이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45]


;500만 명, 수백만 명 규모

  • BBC 기자는 1995년 유엔이 조사한 북한의 인구는 2400만 명이었으나, 2005년에는 1900만 명으로 급감하여, 불과 10여 년 사이에 500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고 지적했다.[46]
  • 미야즈카 도시오는 2012년에 10년 동안 5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하며, 현재는 (북한의 인구는) 2000만 명을 밑돌고 있다고도 한다고 말했다.[47]
  • 곤도 다이스케는 북한에서는 1994년 후반부터 1997년에 걸쳐 3년 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고 말했다.[48]

5. 영향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 이후 북한은 국방비를 크게 늘려 1967년에는 전체 예산의 30.4%를 사용했다. 이로 인해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은 3년 연장되었다.[71] 1970년대 중반부터 석유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의 몰락,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경제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중국의 지원에 의존했으나, 중국이 물물교환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 흉작과[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아사자 속출을 야기했다.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어려움을 헤쳐나가자고 호소했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이 보도되고, 관련 예술 작품들이 발표되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 1998년 북한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동안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일부 미국 언론은 300만 명 사망설을 제기했으나, 이는 하기와라 료의 저서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실증적인 근거는 없다.[73] 2010년 대한민국 통계청은 유엔 지원 아래 실시된 1993년과 2008년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고난의 행군' 시기(1996~2000년)에 33만여 명이 사망했고, 1994~2005년간 식량난으로 61만 명의 인구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산했다.[69]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는 대포동 1호 발사에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국제 시장에서 옥수수를 구매하면 약 350만 톤, 즉 북한 전국민의 1년분 식량이 된다고 보도했다.[5] 1999년 4월 22일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키고 내일의 부강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미사일 개발에 사용했다고 보도했다.[5]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스위스 대사 리수용에게 국제 사회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5] 리수용은 기아 문제 해결과 함께 서방 국가와의 교류 확대를 통해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5] 김정일은 이에 동의했고, 리수용은 국제기구 대표단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왔다.[55] 외국 대표단은 북한의 참혹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고, 국제기구와 세계 NGO들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 시작했다.[55] 미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본합의 직후 이루어진 식량 지원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일시적인 데탕트를 가져왔다.[55]

5. 1. 식량 배급 시스템 붕괴

1957년 11월부터 북한에서는 협동농장 농민을 제외한 전국민에게 식량 배급 제도가 실시되었다. 일반 노동자는 하루 700그램, 군인은 800그램, 15세 이하 어린이와 노인은 직업과 연령에 따라 100그램에서 500그램까지 배급받았다.[30] 1990년대 초에는 평균 450그램 정도가 배급되었지만, 1995년의 수해로 그 절반으로 줄었고, 이후에도 계속 감소했다.[30]

1995년 대홍수 이후, 국가의 식량 배급은 거의 중단되었다. 1999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산하 연구 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 청진시무산군에서는 설날, 태양절, 광명성절, 건국 기념일에만 2일치 식량이 배급되었다. 즉, 1년 중 8일치 식량만 배급되었고, 나머지는 주민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5]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자유 시장에서 비싸게 식량을 살 수 있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나무 껍질, 풀뿌리, 산나물 등으로 연명해야 했다.[5]

식량 분배는 '출신 성분'이라는 정치적 지위와 국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이루어졌다.[54] 세계식량계획은 하루 600g의 곡물을 생존의 경계선으로 보았는데, 배급 시스템은 다음과 같았다.

분류배급량
특권적인 산업 노동자900g/일
일반 노동자700g/일
퇴직 시민300g/일
2~4세 아동200g/일



그러나 식량 부족이 장기화되면서 배급 시스템에 의존하던 인구의 62%가 영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인구의 6%에게만 식량이 공급되었다.

연도변화
198710% 삭감
1992추가 10% 삭감
1994470g/일 에서 420g/일로 축소
1997128g/일



1995년 수해로 식량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든 후, 몇 년 동안 더욱 감소했다.[30] 결국 2002년에는 식량 배급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었지만, 조선로동당 간부들에게는 특별 배급이 계속되었다고 한다.[30]

5. 2. 탈북자 증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러시아의 산림 (북양재) 벌목 현장이나 중동의 건설 현장에 스스로 돈벌이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58]

1990년대 초 이미 식량난은 시작되었고, 1995년경부터 대규모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1996년부터 1998년 사이에 엄청난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7] 유례없는 대기근 속에서 굶주림을 피해 북한을 간신히 탈출한 사람들 (탈북자)이 급격히 증가했다.[6][7] 탈북자들은 입을 모아 "만약 수령님 (김일성)이 살아계셨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6] 이는 김일성 시대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고, 김정일 시대에 들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6]

5. 3. 경제 시스템 변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소 국경 분쟁 이후 국방비를 크게 늘려 1967년에는 전체 예산의 30.4%를 국방비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을 3년 연장해야 했다.[71] 1970년대 중반부터 석유파동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었고, 1980년대 소련의 몰락과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 경제난이 심화되었다.

중국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으나, 중국이 물물교환 방식 대신 경화 결제 방식을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93년 흉작과[71]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으로 배급제가 붕괴되며 아사자가 속출했다.

1989년에서 1997년까지 북한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어려움을 헤쳐나가자고 호소했다. 이후 항일빨치산 1세대들의 증언이 보도되고, 관련 예술 작품들이 발표되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공식 선언했다.

5. 4. 군사적 영향

1994년 북한은 징병 검사 기준을 "신장 150cm 이상, 체중 48kg 이상"에서 "신장 148cm 이상, 체중 43kg 이상"으로 낮추었고,2008년부터는 징병 검사 기준을 철폐하여 건강한 모든 청년을 징병 대상자로 변경했다.[56] 이는 청소년들의 성장 부진과 "고난의 행군"으로 인한 인구 감소로 병사 충족률이 급감했기 때문이다.[56]

CIA 등 5개 정보 기관이 공동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대 기아 이후 북한의 심각한 영양 부족 상태가 지속되어 아동 절반 이상이 성장 장애나 저체중을 겪고, 청년층 3분의 2는 영양실조빈혈을 겪는다고 한다.[56] 또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징집 대상자 중 17~29%는 지적 능력 결함으로 군 복무 부적격자가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56]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출산율도 약 30% 감소했다.[57] 2014년에는 이 시기에 태어난 세대가 징병되면서 1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민군 병력 유지가 어려워지자, 북한은 여성 징병 의무화를 발표했다.[57]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는 대포동 1호 발사에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국제 시장에서 옥수수를 구매하면 약 350만 톤, 즉 북한 전국민의 1년분 식량이 된다고 보도했다.[5] 1999년 4월 22일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키고 내일의 부강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미사일 개발에 사용했다고 보도했다.[5]

5. 5. 정치적 영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60년대 중소 국경 분쟁을 겪으며 국방비를 크게 늘렸고, 1967년에는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30.4%까지 치솟았다.[71] 이로 인해 1966년 제1차 7개년 계획(1962~1970년)은 3년 연장되었고, 1970년대 중반부터 석유 파동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다.[71]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략 전쟁,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9년 동구권 붕괴, 1990년 독일 통일, 1994년 김일성 사망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71]

경제난 속에서 중국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중국이 물물교환 대신 경화 결제를 요구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71] 1993년 흉작과 1990년대 중반 수해로 인한 대흉작은 배급제 붕괴와 아사자 속출을 야기했다.[71]

1989년부터 1997년까지 북한의 쌀, 옥수수 생산량[72]
198919901991199219931994199519961997
쌀 (정미 100만 톤)3.243.363.073.343.562.181.400.981.10
옥수수 (100만 톤)4.343.904.203.723.943.551.370.831.01



1996년 1월 1일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며, 항일빨치산의 투쟁을 상기시켰다.[71] 이후 관련 증언, 서정시, 가요, 영화 등이 잇따라 발표되며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다.[71]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는 경제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강행군'을 제시했고, 2000년 1월 1일 《로동신문》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여러 해째 계속된 어려운 행군이 마침내 '구보(驅步) 행군'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71]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 체제로 이행되면서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기근이 발생했고, 1995년 여름 대수해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2] 1998년 말까지 30만 명[2]에서 300만 명[3]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아는 1997년에 정점에 달했다.[4]

1999년 4월 30일 조선일보는 대포동 1호 발사에 최소 3억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이 돈으로 옥수수를 구매하면 북한 주민 전체의 1년치 식량에 가깝다고 보도했다.[5] 1999년 4월 22일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국가와 민족의 존엄과 운명을 지켜내고 내일의 부강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미사일 개발에 투입했다고 보도했다.[5]

안명진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은 "반란이 일어나면 전부 죽여라. 굶어 죽는 사람은 죽게 놔두어라. 나에게는 2천만 명의 전체 조선 인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백만 명의 당원이 있으면 된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5]

이 시기 김정일과 그의 처남 장성택은 "심화조 사건"이라는 대규모 숙청을 주도했다.[59] 1996년부터 2000년까지 2단계로 진행된 숙청으로 약 2만 5,000명이 숙청되었고, 이 중 1만 명이 살해, 1만 5,000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62] 서관희 당 중앙위원회 농업담당 비서, 문성술 당 중앙위원회 책임비서 등이 처형되었고,[60][61] 전설적인 여성 공작원 리선실도 강제 수용소에서 고문사했다.[63]

5. 6. 국제 관계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한 후, 8월에 황해도에서 대홍수가 발생했다.[55] 김정일은 스위스 대사 리수용에게 국제 사회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55] 리수용은 기아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와의 교류 및 접촉을 넓혀 북한의 국제적 고립을 타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5] 김정일은 리수용의 의견에 동의하여 그에게 추진을 지시했고, 리수용은 국제기구 대표단과 함께 북한으로 돌아왔다.[55]

외국 대표단은 홍수로 황폐해진 지역의 참혹한 상황과 굶주림으로 뼈만 남은 아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55] 이러한 북한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국제기구와 세계 NGO들은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기 시작했다.[55] 미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본합의 직후 이루어진 식량 지원은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일시적인 데탕트를 가져왔다.[55]

6. 김정은 시대의 '고난의 행군' 언급

김정일이 사망하고 김정은이 실권을 잡은 직후인 2012년 봄, 북한의 곡창 지대인 황해남도에서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65] 정확한 숫자는 불분명하지만,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65] 이는 김정은 정권 발족을 축하하는 "축제 소동"과 연회를 위해 당국이 황해남도의 식량을 싹쓸이 징발했기 때문이다.[65] 황해남도의 마을에서는 예고 없이 식량이 사라져 굶주림에 대비할 수 없었다.[65]

2021년 4월 조선로동당 제6차 세포비서대회에서 김정은은 "인민에게 최대한의 물질적·문화적 복리를 가져다주기 위해" "더욱 어려운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발언하며, ''고난의 행군''을 언급하여 체제 결속을 높이는 방침을 제시했다.[66][67][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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