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달카날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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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배경
- 3. 연합군의 상륙 작전
- 4. 초기 지상 작전 (1942년 8월 ~ 9월)
- 5. 테나루 전투 (1942년 8월 21일)
- 6. 동부 솔로몬 해전 (1942년 8월 24일 ~ 8월 25일)
- 7. 헨더슨 비행장 공중전과 룽가 방어선 강화 (1942년 8월 ~ 9월)
- 8. 도쿄 익스프레스 (1942년 8월 ~ 11월)
- 9. 에드슨 능선 전투 (1942년 9월 12일 ~ 9월 14일)
- 10. 연합군 증원 (1942년 9월 ~ 10월)
- 11. 마타니카우 강 전투 (1942년 9월 ~ 10월)
- 12. 에스페란스 곶 해전 (1942년 10월 11일 ~ 10월 12일)
- 13. 헨더슨 비행장 포격 (1942년 10월 13일 ~ 10월 15일)
- 14. 헨더슨 비행장 전투 (1942년 10월 23일 ~ 10월 26일)
- 15.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 (1942년 10월 26일)
- 16. 11월 지상 작전
- 17. 과달카날 해전 (1942년 11월 12일 ~ 11월 15일)
- 18. 타사파롱가 해전 (1942년 11월 30일)
- 19. 일본군의 철수 결정 (1942년 12월)
- 20. 오스틴 산, 질주하는 말, 바다뱀 전투 (1942년 12월 ~ 1943년 1월)
- 21. 케호 작전 (1943년 2월)
- 22. 전후
- 23. 의의
- 24. 빌루 전쟁 박물관과 과달카날 미국 기념관
- 25. 잔존 병기
- 참조
1. 개요
과달카날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과 일본 제국 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로,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 섬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제공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치열한 육해공 전투 끝에, 일본군은 병력과 자원 부족으로 철수했고, 이 전역은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로 기록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의 태평양 전선 확장을 종식시키고 연합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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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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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1년 12월,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말레이 작전, 필리핀 항공 격멸전 등 남방 작전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1942년 3월 9일 란령 작전으로 란령군이 항복하면서 남방 작전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일본군은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에 고무되어 1942년 1월, 버마 전투, 안다만 제도, 포트모르즈비 공략을 발령하며 전략 태세를 강화했다.[211]
1942년 4월, 대일본제국 해군은 제2차 작전을 입안했다. 군령부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연결을 끊기 위해 피지 방면 공략을 주장했고, 연합함대는 미국의 조기 항복을 위해 미드웨이 작전과 하와이 공략을 주장했다. 결국 미드웨이 작전이 채택되었고, 연합함대는 군령부에 협력하여 뉴칼레도니아, 피지는 점령하고, 사모아는 공격 후 철수하는 방안을 승인했다.[212]
일본 해군은 적극적인 침공으로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분리하려 했지만, 대일본제국 육군은 중일 전쟁 해결을 우선시하며 동남아시아 점령지 유지를 원했다. 육군은 전선 확대를 꺼려 대규모 병력을 중국과 만주에서 차출해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공략에 소극적이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고립에는 해군과 의견을 같이했다.
미·호주 분단 작전은 뉴기니 섬 동남부 포트모르즈비 공략(MO 작전)과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공략(FS 작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어 FS 작전은 일시 중단되었다. 1942년 7월 11일, 일본은 미드웨이 및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제도 공략 임무 해제를 발령하며 제2차 작전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호주 분단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라바울 남쪽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솔로몬 제도 제공권을 확보하려 했다. 과달카날 기지 건설은 군령부에서 참모본부에 통보되었으나, 육군 내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육군은 기지 건설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대본영은 연합군의 반격을 1943년 이후로 예상하여 과달카날에 설영대와 호위 해군 육전대를 합쳐 600명 정도만 배치했지만, 1942년 8월 5일, 미군 상륙 직전 활주로 1차 공사가 완료되었다. MO 작전 당시 툴라기 섬에는 수상기 기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미군은 1942년 7월 2일 워치타워 작전을 발령했다. 미국 육군 더글러스 맥아더는 라바울 공격을 주장했지만, 미국 해군 작전 부장 어니스트 킹은 미 해군 태평양 함대 항공모함 전력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여 과달카날 공격으로 결정되었다. 7월 4일 이후 과달카날 정찰·폭격이 강화되며 상륙 작전 준비가 진행되었다.
2. 1. 전략적 고려 사항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하와이에 주둔한 미해군 태평양 함대에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미국의 많은 전투함들이 손상을 입었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211] 일본군 지휘부는 미 해군을 무력화하고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며, 태평양과 아시아 지역에서 미군의 공격에 대항한 방어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필리핀, 타이,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버마, 네덜란드령 동인도, 웨이크섬, 길버트 제도, 뉴브리튼섬, 괌을 순차적으로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로써 해당 지역을 식민 지배하던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에 이어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공식 참전하게 되었다.[211]
일본 제국은 방어선을 확장하고 미국 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등에 대한 공세적 우위를 유지하려 했으나,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에서 좌절되었다. 연합군은 산호해 해전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는 연합군이 일본군에 대해 얻은 첫 번째 명백한 승리였으며, 일본 항공모함 세력의 공격 능력을 크게 줄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후 몇 달 동안 자신의 처지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까지 연합군은 태평양 전역에서 수세에 몰려 있었으나, 두 번의 승리를 통해 공세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212]
연합군은 솔로몬 제도에서 남쪽의 과달카날, 툴라기, 플로리다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선정했다.[213] 1942년 5월, 일본 제국 해군은 툴라기를 점령하고 해군 항공기지를 건설했다. 1942년 6월 초, 일본 해군이 과달카날 근처의 룽가 포인트에 대규모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연합군은 해당 기지가 미국 서해안과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연락선을 위협하는 장거리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사용될 것을 우려했다. 1942년 8월, 툴라기와 근처 섬에는 900명 가량의 일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과달카날에는 2,800명 가량의 건설 인력(그 중 2,200명은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이 있었다. 이 전진기지들은 라바울의 일본군 주력 기지를 보호하고, 연합군의 병참선 및 통신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피지, 뉴칼레도니아 및 사모아 등에 대한 공세작전(FS 작전)의 수행 기반이 되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에 45기의 전투기 및 60기의 폭격기를 배치하고자 하였다. 1942년 시점에서 이 항공 전력은 일본 해군의 남태평양 지역 전개에 충분한 공중 지원 전력이었다.[214]
남솔로몬 제도 공격 계획은 미국 함대 최고사령관인 어니스트 킹 제독이 처음 제안했다. 그는 일본군이 솔로몬 제도를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보급선을 위협하는 거점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고, 연합군이 솔로몬 제도를 일본군에 대한 전진기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암묵적 지지를 얻은 킹 제독은 과달카날 공격을 주장했으나, 미 육군의 조지 마셜 장군은 반대했다. 당시 미국은 유럽 전선 우선주의에 따라 태평양 전구에서의 작전은 제한된 자원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킹 제독은 해군과 해병대 병력만으로 솔로몬 제도에 대한 공격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작전 초안을 입안할 것을 명하였다. 결국 킹 제독은 마샬 장군을 설득했으며, 공격작전은 합동사령부 차원에서 진행되었다.[215]
합동사령부는 1942~43년 태평양 지역에서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과달카날 공격작전은 애드미럴티 제도와 비스마르크 제도를 탈환하고 라바울에 위치한 일본군 주요 기지를 공격하기 위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지휘의 뉴기니아에 대한 공격과 동시에 진행한다. 작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필리핀 탈환이다.[216] 이를 위하여 합동참모부(Joint Chiefs of Staff)에서는 남태평양 전구(South Pacific theater)를 구상하였으며, 로버트 곰리 제독에게 6월 19일 지휘를 맡기고 솔로몬 제도에 대한 공격을 명하였다. 진주만에 주둔하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 방면 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17]
2. 2. 작전 부대
1942년 5월, 미군 해병대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소장은 휘하의 미국 1 해병사단을 뉴질랜드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른 연합군의 육군, 해군, 항공 전력들도 피지, 사모아, 뉴헤브리디스 및 뉴칼레도니아에 진주하였다.[218] 에스피리투산토섬에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1942년 8월 7일 개시를 목적으로 암호명 '''감시탑 작전(Operation Watchtower)'''을 시작한다.초기 연합군의 공격 목표는 툴라기섬과 산타크루즈 제도였으나, 과달카날에서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찰되면서 작전이 변경되었다. 최종적으로 과달카날 및 비행장 탈취가 목표가 되었고, 산타크루즈 제도는 목적에서 제외되었다.[219]
1942년 7월 26일, 감시탑 작전을 위해 75척의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전투함이 피지 근처에 집결, 7월 31일 과달카날로 출발하기 전 상륙작전 훈련을 실시하였다.[221] 원정군 사령관은 미해군 프렝크 젝 플레쳐 제독이었으며, 기함은 사라토가였다. 미해군 리치몬드 더너 제독이 상륙부대 총지휘를 맡았으며,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제독이 실제 상륙작전을 펼칠 16,000명(대부분 미 해병)을 이끌었다.[222]
과달카날에 투입된 병력은 대부분 훈련을 막 수료한 신병이었으며, 볼트 액션 소총인 M1903 스프링필드로 무장, 10일 분의 탄알만 보급받았다. 신속한 전투 투입을 위해 다른 보급 기준들도 "90일 기준"이 아닌 "60일 기준"으로 설정되어 보급 부족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1해병 사단은 "신발끈 부대(Operation Shoestring)"로 불렸다.[223]
3. 연합군의 상륙 작전
1942년 8월 6일 악천후 덕분에 연합군은 일본군에게 들키지 않고 과달카날 근처로 이동하여 8월 7일에 기습할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과달카날 자정의 난동'''[224]으로도 불린다. 상륙부대는 2개 그룹으로 나뉘어 과달카날과 나머지 주변의 작은 섬들(툴라기, 플로리다 제도, 가부투-타남보고)로 각기 진격하였다.[225] 연합군 전투함들이 포격을 가하고 함재기들이 공습을 지속하면서 툴라기에서는 15기의 일본군 수상기와 근처의 기지를 파괴하였다.[226]
툴라기와 가부투-타나보고에는 윌리엄 루퍼투스 준장의 지휘아래 3,000여명의 미 해병대가 공격을 개시, 각 섬에 주둔하고 있던 886명의 일본 제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228] 8월 8일에 툴라기를 점령하였으며, 가부투-타남보고는 8월 9일에 점령하였다.[229] 일본군은 대부분 전사하였으며, 미 해병대는 122명이 전사하였다.[230]
과달카날에서는 밴더그리프트 소장과 11,000명의 미 해병대가 8월 7일 09:10에 상륙하여 룽가 포인트로 전진하였다. 울창한 열대우림 숲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저항이 없었으며, 다음날 16:00 무렵에 룽가 포인트를 점령하였다. 몬젠 가나에 대위 지휘하의 일본 해군 건설대는 식량과 보급품, 건설 장비 및 차량 등을 버리고 룽가 포인트에 있던 비행장에서 도주하였다.[231]
8월 7~8일의 작전 과정에서 라바울에 위치한 야마다 사다요시 지휘하의 일본 해군 항공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에 의하여 연합군 상륙부대가 피해를 입었다. 수송함 USS 조지 F. 엘리엇(USS George F. Elliott AP-13)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이틀 뒤에 침몰하였다. 구축함 USS 자비스(USS Jarvis DD-393)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232] 이틀에 걸친 항공 공격 과정에서 일본군은 36기의 항공기를 잃었고, 미군은 19기를 잃었으며, 그중 14기는 함재기였다.[233]
상륙작전 과정에서 플레처 제독은 함재기의 손실과 연료 소모를 걱정하여 8월 8일에 솔로몬 제도 근처의 자신의 기동 함대를 철수 시켰다.[234] 함재기에 의한 공중 지원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터너 제독은 장비 및 보급품의 상륙이 절반도 완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함대를 과달카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235] 터너 제독은 8월 8일 저녁늦게까지 최대한 하역 작업을 진행하고 8월 9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하였다.[236]
3. 1. 툴라기 전투 (1942년 8월 7일 ~ 8월 9일)
1942년 8월 6일, 연합군은 악천후를 틈타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과달카날 근처로 이동하여 8월 7일에 기습 상륙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과달카날 자정의 난동'''[224]으로도 불린다. 상륙 부대는 과달카날과 주변의 작은 섬들(툴라기, 플로리다, 가부투-타남보고)로 나뉘어 진격했다.[225] 연합군 전투함들의 포격과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툴라기에서는 일본군 수상기 15기와 근처 기지가 파괴되었다.[226]윌리엄 루퍼투스 준장의 지휘 아래, 3,000여 명의 미 해병대가 툴라기와 인근의 작은 섬인 가부투, 탄암보고를 공격했다.[37] 세 섬의 해군 및 수상기 기지를 운영하는 886명의 일본 해군 병력은 해병대의 상륙에 격렬하게 저항했다.[38] 8월 8일에 툴라기를 점령했으며,[229] 가부투-타남보고는 8월 9일에 점령했다.[39] 일본군 방어군은 거의 전멸했고,[40] 미 해병대는 122명이 전사했다.[230]
3. 2. 과달카날 상륙 (1942년 8월 7일 ~ 8월 8일)
툴라기, 가부투-타남보고와 달리 과달카날에서는 큰 저항이 없었다. 1942년 8월 7일 09:10, 미국 해병대 11,000명이 과달카날 해안에 상륙하여 룽가 포인트를 향해 전진했다. 울창한 열대우림 숲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으며, 룽가 포인트에서 100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숙영했다. 다음 날(8월 8일) 가벼운 저항이 있었으나, 16:00 무렵에 룽가 포인트를 점령하였다. 일본 해군 건설대는 식량, 보급품, 건설 장비 및 차량 등을 버리고 룽가 포인트에 있던 비행장에서 도주하여 서쪽으로 3km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였다.[231]3. 3. 사보섬 해전 (1942년 8월 8일 ~ 8월 9일)
연합군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 해군은 현지 라바울 제25항공전대(육공 27기, 함폭 9기, 전투기 17기, 총 53기)와 제8함대(미카와 군이치 중장, 증강되어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에 반격을 지시했다.미군 상륙 당일부터 다음 날까지 제25항공전대에 의한 폭격은 직전 적 함상 전투기 및 적 급강하 폭격기의 교란 사격을 받아 효과가 미미했지만, 이 지역에 미 항공모함 부대가 진출하고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제25항공전대는 34기 손실의 큰 피해를 입었고, 그중 함폭대는 처음부터 항속력 부족으로 인한 불시착을 각오하고 출격했기 때문에 전 기체가 손실되었지만, 승무원 구조를 위해 구축함을 긴급 파견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수용된 승무원으로부터 연합군 함대의 상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이끄는 제8함대는 8월 8일 밤에 전장 해역에 도달하여 제1차 솔로몬 해전이 발생했다. 중순양함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대파시켰지만, 전투 함정 격파에는 성공했으나 본래의 목적이었던 수송 선단에 대한 공격은 중지되었다.
하지만, 상륙 첫날부터 일본군의 반격, 제1차 솔로몬 해전에서의 큰 손해로 인해 테나루의 미군 양륙 지점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플레처 중장은 양륙 작업을 중단하고 항공모함과 수송 선단을 남쪽으로 퇴피시켰다.
4. 초기 지상 작전 (1942년 8월 ~ 9월)
1942년 8월 7일, 미국 해병대 제1해병사단을 주력으로 하고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은 10,900명의 해병대원이 함포 사격과 항공기의 지원 하에 과달카날섬 테나루 강 동쪽 해안 부근에 상륙했다. 상륙 초, 가장 적에 가까운 룽가 강의 비행장 지구에 제11설영대의 진지가 있었고, 룽가 강을 사이에 두고 제13설영대, 해군 육전대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각 부대의 진지는 방공호 외에 진지 정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적 병력의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룽가 강 동쪽 해안의 제11설영대 약 1,350명은 격퇴되었고, 완공 직전의 비행장을 포함한 룽가 강 동쪽 해안 일대는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상륙 첫날부터 일본군의 반격, 제1차 솔로몬 해전에서의 큰 피해로 인해 테나루의 미군 양륙 지점을 위험하다고 판단한 플레처 중장은 양륙 작업을 중단하고 항공모함군과 수송 선단을 남쪽으로 퇴피시켰다. 따라서 제1해병사단도 충분한 물자를 양륙하지 못했고, 상륙 작전 완료 후 해병대의 하루 식사는 2끼로 제한되었다.
8월 18일, 반데그리프트는 가와니시 기슭의 일본군을 위험시하여 이를 배제하기 위해 제5해병연대 3개 중대를 투입했다. 다음날 19일, 동 연대 B중대는 해안을 따라 서진하여 마타니카우 강 동쪽 기슭으로 향했고, 마타니카우 마을을 향해 엄호 사격을 가했으며, L중대는 동 강 하구 상류를 도하하여 서쪽 기슭을 북상하며 마타니카우 마을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격렬하게 항전했고, 특히 일본 측 저격병에 의해 미군 측 지휘관이 잇따라 쓰러졌다. 해병대도 정찰 저격반을 편성해 대항했고, I중대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쿠쿰에서 서쪽의 코쿰보나에 상륙을 감행했다. 오후에는 일본군이 전투에서 이탈하여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병대 측에는 추격을 시도할 만한 병력이나 물자가 없었고, 제5연대는 원래의 진지로 귀환했다.
이치키 기요나오 대좌가 이끄는 제7사단의 보병 제28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이치키 지대는 8월 7일 연합군의 과달카날 상륙이 시작되자 트럭 제도로 수송되었다. 8월 18일에 과달카날 섬 타이보 곶에 무혈 상륙한 이치키 지대는,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해안을 따라 모래사장을 주로 야간 행군으로 진행하여, 20일 저녁 무렵까지 테나루 강을 넘어 일천 서안 지역까지 도달했다.
일본군과는 대조적으로, 미국 해병대는 18일에 코스트워처의 통보로 타이보 곶 앞바다로부터의 일본군 상륙을 감지하고 있었다. 19일 낮에는, 쓰러뜨린 일본군 정찰병의 계급장으로부터, 타이보 곶에 상륙한 일본군이 육군 부대라는 것을 깨닫고, 20일 저녁까지 룬가 지구 일천 동안의 방비를 굳히고 있었다.
8월 20일 18:00에 일천을 넘어 선행하고 있던 장교 정찰병 34명 중 31명이, 미국 해병대의 공격으로 전사하였다. 2시간 후에 생환한 병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치키 대좌는 격노하여, 불명 장교의 수색을 명하며 "행동 즉 색적 즉 공격"을 각 중대에 명령했다.
8월 20일, 헨더슨 비행장에 해병대의 와일드캣 19기와 돈틀리스 12기가 도착하여 항공 기지로서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5. 테나루 전투 (1942년 8월 21일)
이치키 기요나오 대좌가 이끄는 대본영 직할 이치키 지대(제7사단 보병 제28연대를 주축으로 함) 약 2,300명은 본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드웨이 섬 공략 부대로 투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패하면서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고, 잠시 괌에서 휴양을 겸해 머물렀다. 같은 해 8월 7일 연합군의 과달카날 상륙이 시작되자, 이치키 지대는 트럭 제도로 수송되었다. 트럭 제도에서 과달카날까지는 구축함 6척에 제1제단으로 지대 본부 163명, 대대 본부 23명, 보병 4개 중대 420명(경기관총 36정, 척탄통 24문), 기관총대 110명(중기관총 8정), 대대포 1개 소대 50명(보병포 2문), 공병 1개 중대 150명이 승선하여 급파되었다. 지대의 나머지는 해군의 요코스카 제5특별육전대 주력과 함께 수송선으로 제2제단으로 보내질 예정이었으나, 동시에 출항했음에도 불구하고 9.5노트의 저속으로 인해 일루강 전투(미국명: 테나루 전투)에는 늦고 말았다. 이 외에 요코스카 제5특별육전대의 선견 부대(다카하시 중대)가 구축함으로 수송되어 8월 16일에 상륙에 성공하여 설영대 등과 합류했다.
구축함 수송이었기 때문에, 이치키 지대는 실질적으로 1개 대대 상당의 전력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치키 지대에 전달된 정보는 "연합군 병력은 약 2,000명", "적 상륙 목적은 비행장 파괴에 있으며, 현재는 섬에서 탈출에 고심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대본영 해군부에서는 처음에는 본격적인 상륙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러한 정보들로 인해 주력은 철수했다고 오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제1제단은 경장(1인당 소총탄 250발, 식량 7일분)으로 급행하여 해군 부대를 보호하고, 즉시 적을 공격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8월 18일 과달카날 섬 타이보 곶에 무혈 상륙한 이치키 지대는 서쪽을 향해 전진했다. 해안을 따라 모래사장을 주로 야간 행군으로 진행하여, 20일 저녁 무렵까지 테나루 강을 넘어 일루 강 서안 지역까지 도달했다. 당초 구상에서는 해군 제11설영대 터(헨더슨 비행장 동쪽의 언덕 지형)에 지대 본부를 두고, 비행장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적 잔존 병력을 공격하기로 했으며, 이치키 대좌는 비행장에서 3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루 강 동안에 적 방어 진지가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군과는 대조적으로, 미국 해병대는 18일에 코스트워처의 통보로 타이보 곶 앞바다로부터의 일본군 상륙을 감지하고 있었다. 19일 낮에는 쓰러뜨린 일본군 정찰병의 계급장으로부터 타이보 곶에 상륙한 일본군이 육군 부대라는 것을 깨닫고, 20일 저녁까지 룬가 지구 일루 강 동안의 방비를 굳히고 있었다.
8월 20일 18:00에 일루 강을 넘어 선행하고 있던 장교 정찰병(시부야 대위·다테 중위 등) 34명 중 31명이 미국 해병대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2시간 후에 생환한 병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치키 대좌는 격노하여 불명 장교의 수색을 명했다. 21:00경에는 이치키 지대의 선봉 중대가 일루 강 서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적의 총포격을 받아 옴짝달싹 못하는 가운데 지대 본부가 합류했다. 22:30부터 보병포 포격을 신호로 일루 강 도하를 결정했다.
화력 차이는 명백했다. M3 37밀리 대전차포, M1A1 75밀리 곡사포, M2A1 105밀리 곡사포 등을 보유한 강력한 포병에 지원된 기관총좌 진지를 앞에 두고, 100명 남짓의 손해를 내고 일단 공격을 정지했다. 적 병력이 10,900명을 헤아리는 대군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치키 대좌는 1시간 후에 비슷한 백병 공격을 명하고, 마찬가지로 기총 진지로부터의 십자포화를 받아 200명이 넘는 손해를 입었다. 또한, 그 사이에도 적 포병 진지로부터의 포격, 특히 박격포에 의한 포화는 가혹했으며, 일본군의 반격은 도하에 성공한 소수의 병사에 의한 경기관총과 수류탄 공격에 그쳤다. 일부 장교는 후퇴를 간언했지만, 이치키 대좌는 공격을 속행했다.
다음날 21일 오전 5시경, 이치키 대좌는 일루 강 좌안 해안부에 남은 병력을 모아 상황 파악에 힘썼지만, 날이 밝으면서 적기가 상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육상에서는 해병 제1연대가 일루 강을 넘어 이치키 지대의 퇴로를 끊는 듯한 우회 공격을 가해 왔기 때문에, 포위된 이치키 지대는 고전했다. 같은 날 오후부터 투입된 스튜어트 경전차 6량에 의해 지대 본부는 괴멸되었다. 해안에서 파도에 밀려난 병사는 집요한 포위 사격에 의해 모조리 섬멸되었다. 해안에서의 해병대에 의한 소탕전은 21일 14시에 대략 종료되어, 의식 불명의 부상병 15명이 포로가 되었다.
결국, 8월 25일까지 살아 상륙 지점인 타이보 곶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916명 중 126명(그 중 전상자 30명)이며, 790명(전사 및 행방불명자 777명, 포로 15명)의 손해를 내고 전투는 끝났다. 미국군의 손해는 전사자 40명 남짓이라고 한다. 전사자 수는 일본 측 자료, 포로 수는 미국 측 자료에서 발췌하여 합계 수는 일치하지 않는다. 지대장 이치키 대좌는 21일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상황은 불명하다.
전투 개시 시에 총원 배낭 유기가 명해졌기 때문에, 이치키 지대의 잔존병은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미국군도 이 전투로 물자 탄약의 고갈이 표면화되기 시작했지만, 전투 후 수송 선단에 의한 물자와 증원 병력 수송이 성공하여 위기는 사라지고, 이 시점에서 병참 면에서의 승패는 결정되어 있었다.
6. 동부 솔로몬 해전 (1942년 8월 24일 ~ 8월 25일)
1942년 8월 24일~8월 25일에 벌어진 해전이다. 이 해전에서 미군은 엔터프라이즈가 폭탄 3발을 맞아 대파되었고, 일본군은 류조가 폭탄 4발을 맞아 침몰했다. 이 해전 외에도 일본군은 B-17에 의해 경순양함 진츠가 대파되고 구축함 무츠키가 침몰했다.[69][70]
8월 중순부터 가와구치 기요타케 소장 지휘하의 가와구치 부대(제35여단 사령부 및 보병 제124연대 기간) 약 4,000명의 수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8월 20일에 "과달카날 섬 부근에서 적 기동부대가 출현"이라는 보고를 받고 가와구치 부대의 선단 수송을 일시 중지했으며, 과달카날 섬 해역의 항공 우세 확립을 위해 트럭 섬의 기동부대(항공모함 쇼카쿠, 즈이카쿠, 류조 기간)에 출격을 명령했다. 미일 양군 기동부대 사이에서 8월 23일부터 24일에 걸쳐 동부 솔로몬 해역에서 제2차 솔로몬 해전이 벌어졌다.
해전 결과, 미일 양군 모두 항공모함 전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은 호위 항공모함롱 아일랜드를 사용하여 헨더슨 비행장에 항공기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문에 헨더슨 기지 항공 부대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일목 부대 제2수송선단은 공중 공격으로 수송선 1척, 구축함 1척을 잃고 쇼트랜드 정박지로 퇴피했다. 제2차 솔로몬 해전 후에도 과달카날 섬 해역에 잠시 머물렀던 항공모함 즈이카쿠가 지원했지만(8월 25일)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보고 가와구치 부대의 선단 수송도 중지되었고, 수송은 구축함에 의한 "쥐 수송"과 섬을 거치는 주정 기동 (대발동정 등)에 의한 "개미 수송"에 의존하게 되었다.
7. 헨더슨 비행장 공중전과 룽가 방어선 강화 (1942년 8월 ~ 9월)
8월 내내 소수의 미국 항공기와 승무원들이 과달카날에 계속 도착했다. 8월 말까지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 64대가 헨더슨 비행장에 배치되었다.[75] 9월 3일, 미국 해병대 제1 항공사단 사령관 로이 가이거 준장이 참모들과 함께 도착하여 헨더슨 비행장의 모든 항공 작전을 지휘했다.[76] 헨더슨 비행장의 연합군 항공기와 라바울에서 출격한 일본군 폭격기 및 전투기 간의 공중전은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8월 26일부터 9월 5일 사이에 미국은 일본군에게 약 19대의 항공기를 잃은 반면, 약 15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격추된 미군 항공 승무원의 절반 이상이 구조되었지만, 대부분의 일본군 항공 승무원은 회수되지 못했다. 라바울에서 과달카날까지 왕복 8시간, 약 약 1802.46km 비행 거리는 일본군의 제공권 장악 노력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부건빌 섬과 뉴조지아 섬의 호주 해안 감시병들은 과달카날의 연합군에게 접근하는 일본군의 공습에 대한 사전 통보를 제공하여, 미군 전투기들이 일본군 항공기가 섬에 접근할 때 이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출격하고 위치를 잡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일본 공군은 과달카날 상공에서 소모전에서 서서히 제공권을 상실해 갔다.[77][78]
이 기간 동안 반데그리프트는 룽가 방어선의 강화 및 개선을 계속 지시했다. 8월 21일부터 9월 3일 사이에 그는 제1 레인저 대대를 포함한 세 개의 해병대 대대를 메리트 A. 에드슨 휘하로 이전하고, 제1 공수 대대를 툴라기 및 가부투에서 과달카날로 이전했다. 이 부대들은 헨더슨 비행장을 방어하는 반데그리프트의 기존 병력 11,000명에 약 1,500명의 병력을 추가했다.[79]
8월 23일, 29일, 9월 1일 및 8일에 소규모 연합군 해군 호송대가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룽가의 해병대에게 더 많은 식량, 탄약, 항공기 연료, 항공기 기술자 및 기타 보급품을 제공했다. 9월 1일의 호송대는 또한 헨더슨 비행장을 유지 및 개선하기 위해 392명의 시비즈를 데려왔다.[83] 9월 3일, 해병 항공단 25가 인원, 항공 가솔린, 탄약 및 기타 보급품을 포함한 우선 순위 화물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공수하기 시작했다.[84]
8. 도쿄 익스프레스 (1942년 8월 ~ 11월)
일본군은 구축함을 이용하여 과달카날 섬에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작전을 실시했는데, 이는 미군에게 '도쿄 익스프레스', 일본군에게는 '쥐 수송'으로 불렸다.[85] 이 수송 작전은 사보섬 해전 직후 시작되었다. 구축함을 이용한 수송은 밤에만 이루어졌으며, 중장비와 충분한 보급품을 수송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이 작전으로 인해 일본 해군은 태평양의 다른 지역에서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데 필요한 구축함을 묶어두는 결과를 낳았다.[85]
1942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일본 경순양함, 구축함, 초계정은 제35보병여단의 대부분, 아오바(제4) 연대의 상당 부분, 이치키 연대의 나머지를 포함하여 거의 5,000명의 병력을 타이부 포인트에 상륙시킬 수 있었다.[87] 8월 31일 타이부 포인트에 상륙한 가와구치 장군은 과달카날의 모든 일본군을 지휘하게 되었다.[87]
당시 전술적 상황은 일본 해군이 밤에 자유롭게 작전을 수행하고 연합군 항공기가 낮에 국지적인 제공권을 누리는 형태였으며, 이는 캠페인의 다음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86]
9. 에드슨 능선 전투 (1942년 9월 12일 ~ 9월 14일)
9월 7일, 가와구치 기요타케 소장은 "과달카날 섬 비행장 근처의 적을 격파하고 전멸"시키기 위한 공격 계획을 발표했다. 가와구치의 계획은 세 부대로 나뉜 휘하 병력이 내륙의 룽가 방어선을 접근하여 기습 야간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오카 부대는 방어선을 서쪽에서 공격하고, 이치키의 제2지대(쿠마 대대로 개칭)는 동쪽에서 공격하며, 룽가 방어선 남쪽의 정글에서 가와구치의 "중앙 부대"(3개 대대 3,000명)가 주요 공격을 수행하는 것이었다.[89] 9월 7일까지 가와구치 부대 병력 대부분은 타이부에서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룽가 포인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약 250명의 일본군이 타이부에 있는 여단의 보급 기지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90]
한편, 영국령 솔로몬 제도 보호령 방위군 소속 해안 감시원 장교이자 과달카날의 영국 지방 행정관인 마틴 클레멘스의 지휘를 받는 현지 정찰병들이 타심보코 마을 근처의 타이부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미 해병대에 가져왔다. 에드슨은 이후 타이부에 있는 일본군에 대한 습격을 계획했다.[91] 9월 8일, 보트로 타이부 근처에 내려진 에드슨의 부대는 타심보코를 점령하고 일본군 수비대를 정글로 후퇴시켰다.[92] 타심보코에서 에드슨 부대는 가와구치의 주요 보급 창고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대량의 식량, 탄약, 의약품, 강력한 단파 라디오가 포함되어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일부 문서와 장비를 회수하여 해병대는 룽가 방어선으로 돌아갔다. 획득한 문서에 따르면 최소 3,000명의 일본군이 섬에 주둔하고 있으며, 곧 비행장에 대한 대규모 지상 공격을 시작할 계획이었다.[93]
에드슨은 반데그리프트의 작전 장교인 제럴드 C. 토마스 대령과 함께, 주요 일본군 공격이 헨더슨 비행장 바로 남쪽의 룽가 강과 나란히 뻗어 있는 좁고 풀이 무성한 산호 능선인 룽가 능선에 집중될 것이라고 정확히 예상했다. 능선은 비행장으로 접근하는 자연스러운 통로를 제공하고 주변 지역을 감시하며, 거의 방어되지 않았다. 9월 11일, 에드슨의 대대 병력 840명이 능선에 배치되어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94]
9월 12일 밤, 가와구치의 제1대대는 룽가 강과 능선 사이에서 레인저를 공격하여, 일본군이 밤에 공격을 중단하기 전에 해병대 1개 중대가 능선으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다음 날 밤, 가와구치는 에드슨의 레인저 840명에 3,000명의 병력과 약간의 포병을 증원하여 맞섰다. 일본군은 밤이 되자마자 공격을 시작했고, 가와구치의 제1대대는 능선 서쪽에서 에드슨의 우익을 공격했다. 해병대 방어선을 돌파한 후, 대대의 공격은 결국 능선의 북쪽 부분을 점령한 해병대 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95]
가와구치의 제2대대 소속 2개 중대는 능선의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돌격하여 에드슨의 병력을 능선 중앙 부분의 힐 123까지 밀어냈다. 밤새 이 위치의 해병대는 룽가 포인트에서 투입된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반복되는 일본군 보병의 정면 공격을 격퇴했으며, 그중 여러 차례는 백병전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반복된 공격으로 해병대는 비행장에서 400m 이내로 밀려났다. 이때, 소규모 일본군 부대가 에드슨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비행장 가장자리에 도달하기도 했다. 일부 일본군은 주차된 항공기에 올라타 파괴하려다 사살되었고, 반데그리프트 장군의 지휘소는 새벽에 직접 공격을 받아, 여러 일본군 침투병이 장군 눈앞에서 사살되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와구치의 부대는 지쳐 더 이상 공격을 하지 못했고, 에드슨의 진지에 대한 주요 일본군 공격은 중단되었다. 쿠마 대대와 오카 부대의 룽가 방어선 다른 지역에서의 지원 공격 역시 격파되었다. 9월 14일, 가와구치는 파괴된 부대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5일간 서쪽으로 행군하여 마타니카우 계곡에서 오카 부대와 합류했다.[96] 가와구치 부대는 총 850명 정도가 사망했고, 해병대는 104명이 사망했다.[97]
9월 15일 라바울에서, 햐쿠타케 하루요시는 가와구치의 패배를 알게 되었고, 이 소식을 일본 대본영에 전달했다. 긴급 회의에서 일본 육군 및 해군의 고위 지휘부는 "과달카날이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로 발전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전투의 결과는 태평양의 다른 지역에서 일본 작전에 상당한 전략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햐쿠타케는 뉴기니에서 진행 중인 코코다 트랙 공세를 지원하면서 과달카날의 연합군을 격파하기에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햐쿠타케는 본부의 동의를 얻어, 과달카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포트 모레스비에서 떨어진 뉴기니에 있는 자신의 병력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햐쿠타케는 헨더슨 비행장을 재탈환하기 위해 과달카날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낼 준비를 했다.[98]
10. 연합군 증원 (1942년 9월 ~ 10월)
일본군이 마타니카우 서쪽에서 재정비하는 동안, 미군은 룬가 방어선을 강화하고 병력을 증원했다. 1942년 9월 14일, 반데그리프트는 제2해병연대 제3대대를 툴라기에서 과달카날로 이동시켰다. 9월 18일, 연합군 해군 호송대는 제3임시 해병 여단(제7해병연대와 제11해병연대의 대대, 그리고 몇몇 추가 지원 부대) 소속 병력 4,157명, 차량 137대, 텐트, 항공 연료, 탄약, 식량, 공병 장비를 과달카날로 수송했다.[99] 이 증원으로 반데그리프트는 9월 19일부터 룬가 방어선 주변에 끊어지지 않는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호송대를 엄호하는 동안 항공모함 USS 와스프(CV-7)는 과달카날 남동쪽에서 일본 잠수함 I-19의 어뢰 공격을 받고 자침되었다.[99] 이로 인해 연합군 해군 항공력은 약화되었고, 남태평양 지역 전체에서 가동 가능한 항공모함은 단 한 척(USS 호넷(CV-8))만 남게 되었다.[100]
반데그리프트는 또한 전투 부대의 고위 지휘관 일부를 변경하여, 성과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장교들을 섬에서 이동시키고 그 자리를 증명한 하급 장교들로 승진시켰다. 그들 중 한 명은 최근에 대령으로 승진한 메리트 에드슨이었으며, 그는 제5해병연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01]
9월 14일부터 27일까지는 악천후로 인해 일본군의 공습이 없어 과달카날 상공의 공중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 동안 양측은 각자의 항공 부대를 증강했다. 일본군은 85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라바울의 항공 부대로 수송했고, 미국은 23대의 전투기와 공격기를 헨더슨 비행장으로 추가로 보냈다. 9월 20일 기준으로 일본군은 라바울에 총 117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연합군은 헨더슨 비행장에 7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102] 9월 27일 일본군의 과달카날 공습으로 공중전이 재개되었고, 헨더슨 비행장의 미국 해군 및 해병대 전투기들이 이에 맞섰다.[103]
11. 마타니카우 강 전투 (1942년 9월 ~ 10월)
밴더그리프트와 그의 참모들은 가와구치 병력이 마타니카우 서쪽 지역으로 후퇴했고, 여러 무리의 일본군 잔류병들이 룬가 방어선과 마타니카우 강 사이 지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밴더그리프트는 마타니카우 계곡 주변에서 일련의 소규모 부대 작전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목적은 마타니카우 동쪽에 흩어져 있는 일본군 부대를 소탕하고, 일본군 주력이 룬가 포인트의 해병대 주요 방어선과 너무 가까운 곳에서 진지를 굳히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105]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세 개의 미 해병대대 병력이 마타니카우 서쪽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오카 아키노스케의 지휘를 받는 가와구치 병력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작전에서 세 개의 해병대 중대가 마타니카우 서쪽의 크루즈 곶 근처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고, USS 몬센 구축함과 미국 해안 경비대 요원이 조종하는 상륙정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다. 그 중 한 명인 더글러스 먼로는 탈출하는 해병대를 보호하기 위해 함선을 조종하다가 전사했으며,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해안 경비대원이 되었다.[106]
10월 6일부터 9일까지 더 큰 규모의 해병대가 마타니카우 강을 건너 마루야마 마사오와 나스 유미오 장군이 지휘하는 제2 보병 사단에서 새로 상륙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일본 제4 보병 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작전으로 일본군은 마타니카우 동쪽의 진지에서 후퇴해야 했고, 미군의 룬가 방어선에 대한 일본군의 계획된 대규모 공세를 방해했다.[107]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제1대대, 제2해병대는 아올라 만 근처 구라부수와 코이로투마리아에서 룬가 방어선에서 약 약 48.28km 떨어진 두 개의 작은 일본 전초 기지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일본군 35명이 사망했으며 해병 17명과 미 해군 3명이 사망했다.[108]
9월 23일부터 9월 27일 사이에, 마타니카우 강 동안에 주둔하는 가와구치 부대를 상대로 미군은 9척의 선박에 의한 역상륙을 포함한 6차례의 공격을 가했지만, 가와구치 부대의 제2 대대·제3 대대에 격퇴당했고, 미군은 다수의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10월 7일에는 먼저 도착했던 증원 병력인 보병 제4연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사정권 안에 넣기 위해 불가결한 마타니카우 강 동쪽 강안으로 진출을 꾀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예상외의 반격에 부딪혀 제2차 총공격을 앞두고 전력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개 대대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마타니카우 강 서쪽 강안으로 격퇴되었다.
12. 에스페란스 곶 해전 (1942년 10월 11일 ~ 10월 12일)
1942년 9월 마지막 주와 10월 첫째 주 동안, 도쿄 급행은 일본 제2 보병 사단의 병력을 과달카날에 계속 수송했다. 일본 해군은 필요한 병력, 장비 및 물자를 섬에 수송하고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공습을 강화했으며, 군함을 보내 비행장을 포격하여 일본 육군(IJA)의 계획된 공세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109]
한편, 남태평양 주둔 미 육군 사령관 밀라드 F. 하먼은 과달카날의 미 해병대 병력이 다음 예상되는 일본 공세로부터 섬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려면 즉시 증원되어야 한다고 고름리를 설득했다. 따라서 10월 8일, 아메리칼 사단의 제164 보병 연대 소속 2,837명의 병력이 과달카날로 향하는 배에 뉴칼레도니아에서 탑승하여 10월 13일 도착할 예정이었다. 164 연대를 과달카날로 수송하는 수송선을 보호하기 위해 고름리는 미 해군 노먼 스콧 소장이 지휘하는 4척의 순양함과 5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64 기동 부대에 과달카날에 접근하여 수송 호위대의 도착을 위협하는 모든 일본 함선을 요격하고 교전하라고 명령했다.[110]
미카와의 제8 함대 참모는 10월 11일 밤 대규모 급행 작전을 계획했다. 2척의 수상기 모함과 6척의 구축함이 728명의 병사와 포병 및 탄약을 과달카날에 상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별도의 작전으로 아리토모 고토 소장의 지휘를 받는 3척의 중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은 캑터스 항공대와 비행장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특수 폭발탄으로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로 했다. 미 해군 군함이 아직 과달카날로 향하는 도쿄 급행 임무를 차단하려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군은 그날 밤 연합군 해군 수상 세력의 어떠한 반격도 예상하지 않았다.[111]
자정이 되기 직전, 스콧의 군함은 사보섬과 과달카날 사이 해협 입구 근처에서 고토 부대를 레이더로 감지했다. 스콧의 부대는 고토의 방심한 대형에 대해 T자형 선회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발포한 스콧의 군함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키고 다른 순양함 1척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으며 고토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고토의 나머지 군함에게 포격 임무를 포기하고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교전 중 스콧의 구축함 1척이 침몰하고, 순양함 1척과 다른 구축함 1척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 동안 일본 수송선은 과달카날에서 성공적으로 하역을 완료하고 스콧 부대에 발각되지 않고 귀환했다.[112]
10월 12일 아침 늦게, 수송선에서 4척의 일본 구축함이 고토의 후퇴하는 손상된 군함을 지원하기 위해 돌아왔다. 헨더슨 비행장의 캑터스 항공대 항공기의 공습으로 그날 늦게 이 구축함 2척이 침몰했다. 한편, 미 육군 병력 수송선은 10월 13일에 예정대로 과달카날에 도착하여 화물과 승객을 섬에 성공적으로 수송했다.[113]
13. 헨더슨 비행장 포격 (1942년 10월 13일 ~ 10월 15일)
10월 13일, 구리타 다케오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제2차 공격대(함포 사격대 제3전대 《기함 콩고, 하루나》), (직위대 제15구축대 《오야시오, 구로시오, 하야시오》, 제24구축대 《우미카제, 가와카제, 스즈카제》), (전로 경계대 제2수뢰전대 경순양함 이스즈(기함), 제31구축대 《다카나미, 마키나미, 나가나미》)가 출격하여 과달카날 섬에 야간 함포 사격을 실시했다.
다음 날인 10월 14일 아침에는 라바울에서 비행한 일본 해군 항공 부대에 의한 공습, 10월 14일 밤에는 중순양함 조카이, 기누가사에 의한 함포 사격이 가해졌다.
이를 받아 제2사단을 태운 고속 수송선단 6척이 정박지에 닻을 내리고 양륙 작업을 시작했다. 일련의 사전 포격 및 폭격으로 인해 미국 해군 항공 부대는 비행기의 절반 이상과 휘발유의 대부분을 소실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미국 해병대는 이미 헨더슨 비행장과는 다른 소규모의 전투기용 활주로를 완성해 놓고 있었고, 그쪽은 가동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제2사단의 양륙 작업 중 현지 상공의 항공 우세 확보는 달성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병력의 상륙은 끝났지만 식량은 50%, 중화기류는 20%의 양륙이 끝난 시점에서 수송선단에 피해가 눈에 띄기 시작하여, 선단을 북방으로 대피시키게 되었다.
10월 15일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인 니미츠는, 그전까지 남태평양 전역의 미국군을 통괄 지휘했던 남태평양군 사령관 로버트 고름리 해군 중장을 패배주의자라고 하여 해임하고 대신 윌리엄 할제이 해군 중장을 기용했다. 할제이는 곧 현지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철수하려는 건가, 아니면 확보하려는 건가?"라고 질문했다. 밴더그리프트는 "저는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보다 더 적극적인 지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했고, 할제이는 "좋다. 마음껏 해보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 약속한다"고 확언했다.[195]
14. 헨더슨 비행장 전투 (1942년 10월 23일 ~ 10월 26일)
1942년 10월 24일, 일본 육군은 미군 진지에 공격을 개시했다. 가와구치 소장이 해임된 탓에 우익 방면의 연락 체계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비행장 1킬로미터 전방까지 도달했을 때 사령부에 작전 성공을 의미하는 "반자이" 전보를 보냈다. 이는 오보였지만, 장교들은 서로 "축하한다"고 기뻐했으며, 이모토 참모는 일지의 한 페이지를 덮는 큰 글씨로 "천하제일의 밤"이라고 적었다.
육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일본 해군 외남양부대(제8함대)는[197], 제6구축대 사령 야마다 유스케 대좌가 지휘하는 구축함 3척 (아카츠키, 이카즈치, 시라츠유)과 제4수뢰전대(사령관 다카마 칸 소장)가 24일 심야부터 25일 아침에 걸쳐 룬가 정박지에 돌입했다.[198] 돌격대는 소형 수송선 1척, 가상 순양함 1척 격침을 기록했다.[198] 이어 해병대 진지를 향해 함포 사격을 시작했지만, 해병대 진지의 5인치 해안포로부터 반격과 긴급 발진한 F4F 와일드캣 전투기의 기총 소사로 손상을 입었다.[198]
돌격대는 무사히 룬가 정박지에서 탈출했지만, 과달카날 섬에 돌입하려던 다카마 칸 제4수뢰전대 사령관 지휘하의 6척 (아키즈키(제4수뢰전대 기함), 유라, 무라사메, 사미다레, 유다치, 하루사메)은 헨더슨 비행장에서 날아온 미국군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와 F4F 와일드캣 전투기의 파상 공격을 받아 아키즈키는 중파, 유라는 침몰했다.[199]
좌익 방면은 적에게 돌격하여 초계선을 돌파했지만 포화에 노출되어 큰 손해를 입었다. 25일부터 26일 아침까지 제2사단은 반복적으로 야습을 가했지만, 장비 부족 등으로 인해 맹렬한 포화를 받아 전상자를 포함한 손해가 절반 이상으로 괴멸 상태에 빠졌다. 25일부터 비행장에서 발진한 미 공격기에 의한 공습이 시작되었고, 고급 장교 다수가 전사했다. 라바울 기지의 일본 해군 항공 부대의 제로센은 비행장 점령 오보를 받고 과달카날 기지를 향했지만,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던 비행장에서 F4F가 요격해 왔기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던 스미요시 지대에서는 스미요시 마사시 소장이 작전 확대를 급하게 결정하고, 전차 부대에 마타니카우 강 도하를 명령했다. 미군은 37mm 대전차포와 75mm 자주포를 배치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대는 강 중앙 부근에서 십자 포화를 받아 차례로 격파되었고, 강가에 도달한 2대도 지뢰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곳에서 75mm 자주포에 의해 격파되었다.
10월 26일에는 사단 참모가 과달카날 탈환은 불가능하다는 취지를 쓰지 마사노부 참모에게 보고하여 작전은 중지되었다. 전투에서의 전체 전사자 자료는 없어서 불명확하지만, 제2사단 휘하의 보병 제29연대에서는 병력 2,554명에 대해 전사·행방불명 553명이 발생했다.
15. 산타크루즈 제도 해전 (1942년 10월 26일)
이 해전은 과달카날 전역에서 벌어진 네 번째 주요 해상 전투였다. 일본 해군은 쇼카쿠, 즈이카쿠를 포함한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미 해군 함대를 공격했다. 미 해군은 USS 호넷을 잃었고, USS 엔터프라이즈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 해군 역시 많은 항공기와 조종사를 잃었고, 항공모함 2척이 손상되었다. 이 전투는 일본 해군이 전술적으로 승리했지만, 전략적으로는 미 해군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124]
16. 11월 지상 작전
1942년 11월 1일, 미 해병대는 헨더슨 비행장 전투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마타니카우 강 서쪽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코쿰보나를 점령하려 했다. 미 해병대는 크루스 곶 지역을 방어하던 일본군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126]
11월 3일, 일본군은 콜리 포인트 근처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미 해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127] 11월 4일, 에반스 칼슨 중령이 이끄는 제2해병대 습격대대 소속 2개 중대가 아올라 만에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을 위한 정찰을 실시했다.[127] 11월 5일, 칼슨과 그의 부대는 콜리 포인트를 탈출한 쇼지 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29일간의 순찰을 시작했다. 같은 날 일본군은 도쿄 익스프레스를 통해 제38보병사단의 추가 병력을 과달카날에 수송했다.[127]
17. 과달카날 해전 (1942년 11월 12일 ~ 11월 15일)
1942년 11월 10일, 제38사단장 사노 타다요시 중장이 이끄는 선견대가 상륙했다. 14일에 사단 주력의 수송이 시작되었고, 일본 해군은 제해권 확보와 비행장 재포격을 위해 전함 2척을 포함한 제11전대를 파견했다. 이를 막으려는 미군과 제3차 솔로몬 해전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전함 2척 (히에이, 기리시마)을 잃고 비행장 공격도 막혔기 때문에 수송선단은 미군기의 공습을 받게 되었다.[201]
수송선 11척 중 6척이 침몰, 1척(사도마루)이 중파되어 이탈했고, 다음 날 강행 돌입한 수송선 4척은 해변에 좌초되었지만, 새벽과 함께 시작된 미군의 육해상 포격과 미군기의 총폭격으로 인해 모두 불탔다. 간신히 양륙한 병기·탄약·식량의 대부분도 수송선에서 해변의 집적지에 모으는 것이 고작이었고, 헨더슨 비행장에서 출격해 오는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소사에 의해 하역 조직력이 마비되었으며, 더욱 반복된 집요한 미군기의 공격으로 물자는 쌓인 채로 소실되었다. 최종적으로 양륙이 확인된 병력은 2,000명, 중화기는 전무, 소량의 탄약과 식량이 4일분이었다.
이로 인해 과달카날 섬의 병력은 수치상으로는 약 2~3만 명에 달했지만, 전염병에 걸린 자나 아사 직전인 자가 대부분이었고, 통상 전투가 가능한 병원은 8,000명 정도였다. 이때 미국의 방위 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에, 상륙한 제38사단은 비행장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202] 11월 18일, 제38사단에 의한 야습이 이루어졌지만 실패했고, 이후 오스틴 산의 서쪽 능선 수비대로 전용되어, 이듬해 1월 미국의 반전 공세를 받게 된다.
제38사단의 과달카날 섬에서의 상황은 "NHK 전쟁 증언 아카이브스 증언 기록 병사들의 전쟁"의 "[https://www2.nhk.or.jp/archives/movies/?id=D0001210032_00000 과달카날 섬 마지막 부대 반복된 실패 ~ 나고야 보병 제228연대 ~]"에 많은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203]
18. 타사파롱가 해전 (1942년 11월 30일)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 전투에서 패배한 후, 1942년 11월에 비행장을 다시 탈환하려 했으나, 이를 위해서는 추가 병력이 필요했다. 일본 제국 육군은 야마모토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했고, 야마모토는 38 보병 사단의 나머지 7,000명의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11척의 대형 수송선을 제공했다. 또한 히로아키 아베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지원 함대를 파견하여, 히에이와 키리시마를 포함한 2척의 전함으로 11월 12-13일 밤에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여 항공기를 파괴하고 수송선단의 안전한 도착을 지원할 계획이었다.[135][136]
11월 초, 연합군 정보부는 일본군이 헨더슨 비행장을 다시 탈환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37] 이에 미국은 11월 11일 터너의 제67 기동 부대를 파견하여 해병대 교체 병력, 육군 보병 대대, 탄약 및 식량을 수송했다. 이 보급선들은 대니얼 J. 캘러핸 소장과 노먼 스콧 소장이 지휘하는 2개의 기동 그룹과 헨더슨 비행장의 항공기에 의해 보호받았다.[138] 이 배들은 11월 11일과 12일에 부인 (부겐빌)에 기지를 둔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화물을 피해 없이 하역했다.[139]
미국의 정찰 항공기는 아베의 포격 부대 접근을 발견하고 연합군 지휘관들에게 경고했다.[140] 터너는 캘러핸 휘하의 전투함들을 파견하여 일본 해군 공격에 대비하고, 보급선들에게는 11월 12일 저녁까지 출발하라고 명령했다.[141] 캘러핸의 부대는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8척으로 구성되었다.[142]
11월 13일 오전 1시 30분경, 캘러핸의 부대는 과달카날과 사보 섬 사이에서 아베의 포격 부대를 가로막았다. 아베 부대는 전함 2척 외에 경순양함 1척과 구축함 11척을 포함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143] 두 함대는 근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하기 전에 서로 뒤섞였다. 혼전 속에서 아베의 군함들은 캘러핸 부대의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한 척을 제외한 모든 함선을 격침시키거나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캘러핸과 스콧 모두 사망했다. 일본 구축함 2척이 격침되었고, 다른 구축함 1척과 전함 ''히에이''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아베는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지 않고 퇴각했다. ''히에이''는 헨더슨 비행장과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의 항공기에 의한 반복된 공습을 받은 후 침몰했다. 아베가 헨더슨 비행장을 무력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야마모토는 다나카의 수송선단에게 하루 더 대기하라고 명령했다. 야마모토는 곤도 노부타케에게 트루크의 군함들과 아베의 부대를 사용하여 11월 15일에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도록 또 다른 포격 부대를 편성하라고 명령했다.[144]
한편, 11월 14일 오전 2시경, 미카와 군치의 순양함과 구축함 부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했지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헨더슨 비행장이 파괴되었다고 믿은 다나카의 수송선단은 과달카날로 향하기 시작했다. 11월 14일 하루 종일 헨더슨 비행장과 ''엔터프라이즈''의 항공기가 미카와와 다나카의 함선을 공격하여 중순양함 1척과 수송선 7척을 격침시켰다. 대부분의 병력은 다나카의 호위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어 쇼트랜드로 돌아갔다. 해가 진 후, 다나카와 나머지 수송선 4척은 곤도의 부대가 헨더슨 비행장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동안 과달카날로 계속 향했다.[145]
곤도의 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할시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기동 부대에서 전함 2척 (워싱턴, 사우스다코타)과 구축함 4척을 파견했다. 윌리스 A. 리가 ''워싱턴''에 탑승하여 지휘하는 이 부대는 11월 14일 자정 직전, 곤도의 포격 부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과달카날과 사보 섬에 도착했다. 곤도의 부대는 전함 ''키리시마'',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9척으로 구성되었다. 두 부대가 접촉한 후, 곤도의 부대는 미국의 구축함 3척을 빠르게 격침시키고 4번째 구축함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일본 군함들은 ''사우스다코타''를 발견하고 포격을 가해 손상시켰다. 곤도의 군함들이 ''사우스다코타''에 집중하는 동안, ''워싱턴''은 일본 함선에 발각되지 않고 접근하여 ''키리시마''를 공격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러셀 제도 방향으로 ''워싱턴''을 쫓아갔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곤도는 자신의 군함들에게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지 않고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곤도의 구축함 중 1척도 교전 중에 격침되었다.[146]
곤도의 함선들이 퇴각하면서, 일본 수송선 4척은 04:00에 과달카날의 타사파롱가 곶 근처에 좌초되었다. 05:55에 미국 항공기와 포병이 좌초된 수송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수송선 4척과 그들이 운반하던 대부분의 보급품을 파괴했다. IJA 병력 중 2,000~3,000명만이 해안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병력과 보급품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에 대한 11월 공세를 취소해야 했고, 이 전투는 연합군에게 중요한 전략적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일본의 헨더슨 비행장 탈환 시도의 종말을 알렸다.[147]
19. 일본군의 철수 결정 (1942년 12월)
1942년 12월 7일까지 햐쿠타케 하루요시의 병력은 영양실조, 질병, 연합군의 지상 또는 공중 공격으로 인해 매일 약 50명의 병력을 잃고 있었다.[155] 다나카 라이조의 구축함 부대가 12월 3일, 7일, 11일에 물자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 다나카의 구축함 중 한 척은 미국 PT 보트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156] 다나카는 미카와 군이치 제독에게 과달카날의 일본군이 더 이상 해상으로 보급될 수 없으며, 섬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알렸다. 이후 다나카는 싱가포르로 전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 수뇌부는 과달카날에서의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12월 초, 육군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중장은 16만 5000톤의 함선을 과달카날에 보낼 것을 주장했지만, 도조 히데키 수상 등은 이를 거부했다. 도조는 이 방면의 작전에 반대했고, 이전의 함대 투입이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참모 본부나 해군의 요구를 수용하면 남방으로부터의 자원 수송 및 물자 수송이 지연되어 전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결국 12월 31일, 쇼와 천황이 주재하는 어전 회의에서 "계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과달카날 섬으로부터의 철수가 결정되었다.
20. 오스틴 산, 질주하는 말, 바다뱀 전투 (1942년 12월 ~ 1943년 1월)
1942년 12월, 미군은 오스틴 산에 포진한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미군의 공격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스틴 산의 기프 고지 등에 틀어박힌 일본군 수비대는 12월 초 1,300명에서 포격과 굶주림으로 인해 1943년 1월에는 50명으로 줄었고, 결국 1월 15일에 함락되었다.[202]
1943년 1월, 미군은 오스틴 산과 인근의 두 능선(해마, 질주마)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일본군을 몰아붙였고, 1월 23일까지 세 곳 모두를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약 250명이 사망했고, 일본군은 약 3,000명이 사망했다.
미국 육군 제25보병사단에 종군했던 제임스 존스는 이 전투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씬 레드 라인』을 집필했다.
21. 케호 작전 (1943년 2월)
1943년 2월 1일부터 2월 7일까지, 일본군은 '케호 작전'을 통해 과달카날에서 철수했다. 일본 해군은 구축함을 동원하여 약 10,652명의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203] 일본군과 미군은 철수 작전과 관련된 공중 및 해상 공격으로 각각 구축함 1척을 잃었다. 2월 9일, 미군은 일본군이 철수했음을 확인하고 과달카날의 안전을 선언했다.
22. 전후
일본군 철수 이후 과달카날과 툴라기는 솔로몬 제도 전선을 따라 진격하는 연합군을 지원하는 주요 기지로 개발되었다. 헨더슨 비행장 외에도 룽가 포인트에 두 개의 전투기 활주로가 추가로 건설되었고, 콜리 포인트에는 폭격기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과달카날, 툴라기, 플로리다에는 광범위한 해군 항만 및 물류 시설이 구축되었다.[167]
23. 의의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은 솔로몬 제도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공세를 유지했다. 연합군의 과달카날, 밀른 만 전투 및 부나-고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이러한 대규모 일본의 공세가 중단되었다.[173] 전략적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갔고, 이는 영구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은 태평양에서의 모든 일본의 확장 시도를 종식시키고 연합군을 명확한 우위의 위치에 놓았다.[174] 과달카날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결국 일본의 항복과 일본 점령으로 이어진 일련의 성공적인 작전의 첫 번째 단계였다.[175][176]
연합군이 합의한 "유럽 우선주의" 정책은 처음에는 독일을 격파하는 데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 일본의 팽창에 대한 방어적인 조치만 허용했다. 그러나 킹 제독의 과달카날 침공 주장에 대한 성공적인 실행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태평양 전선에서도 공세를 펼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177] 1942년 말까지 일본이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배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이는 일본 제국 방어에 대한 일본의 전략적 계획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미국에 의한 예상치 못한 패배였다.[178]
항공기 손실은 미드웨이 해전의 약 3배에 달했고, 탑승원 손실은 이를 훨씬 넘어섰으며, 일본의 탑승원 수와 숙련도는 현저히 감소했다. 대량의 수송선 격침으로 인해 초기 작전 완료 후 징용 해제가 진행될 시기였음에도 추가적인 상선 징용이 이루어져 해상 수송과 군수 생산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 장병의 사상자 수는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의 사상자 수와 비교하여 특별히 많은 것은 아니지만, 태평양 전쟁의 분기점이라고 불리는 것은 일련의 전투에서 다수의 수송선과 선원을 잃어 수송력을 크게 상실했기 때문이다. 해군은 함대의 손발이 되는 구축함을 수송 임무 중에 대량으로 잃은 것이 항공 부대 소모와 더불어 이후 작전 수행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일련의 전투가 발생한 과달카날 섬 주변 해역에는 다수의 군함과 항공기가 침몰했으며, 이후 아이언바텀 사운드라고 불리는 다이빙 명소가 되었다. 육상에서는 일본과 미국 양측이 다수의 수류탄과 포탄 등을 남겨 전후 현지 주민이 부상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2024년, 일본 육상자위대 무기학교의 교관들이 수도 호니아라의 경찰을 방문하여 사고 방지를 위해 구 일본군의 탄종과 구조에 대한 설명을 했다.
태평양 전면의 전투는 제공권 획득을 위한 항공기지 획득전이었으며, 그 조성 속도와 질이 제공권 획득을 좌우했다. 일본은 전시대적인 인력에 의존한 비능률적인 방법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비행장을 조성했지만, 미군은 건설 기계를 전폭적으로 활용하여 며칠 만에 활주로를 조성하고 항공 병력을 전개하여 국지적인 제공권을 획득했다. 그에 따라 일본 측은 육해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점령지를 빼앗겼다. 과달카날 섬에 2개 설영대, 2000명 이상을 보내 한 달에 걸쳐 육상 비행장을 조성하여 활주로가 완성되더라도, 비행기가 오기 전에 곧바로 미군에 상륙되어 빼앗기는 형편이었다.(헨더슨 비행장)
제국 해군이 계획한 과달카날 섬의 비행장 조성은, 그것을 둘러싼 전투에서도 육해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았다. 군령부 작전과 항공 주무 참모인 미요시 다쓰키치 중좌는 과달카날에 육상 비행장의 적지는 있지만, 비행기를 배치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므로 수상기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비행장 조성에 관해서는 군령부는 알지 못하고 현지 부대인 제4함대가 마음대로 시작한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설영대 본대의 과달카날 섬 상륙 다음 날인 7월 7일, 군령부 작전과는 참모 본부 작전과에 "FS 작전의 일시 중지"를 공식적으로 신청하고, "과달카날 육상 비행 기지 (최근 조성에 착수, 8월 말 완성 예정)"라는 문서를 제시했다.
23. 1. 자원
과달카날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선에서 벌어진 초기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연합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병참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었다. 특히, 미국은 이 전투를 통해 효과적인 전투 항공 수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32]당시 미군은 신속한 병력 투입을 위해 보급품을 90일분에서 60일분으로 줄여야 했다.[32] 반면, 일본군은 바지선, 구축함, 잠수함을 이용하여 병력을 증원해야 했지만, 이는 매우 불안정한 방식이었다.
23. 2. 전략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지지만, 일본 제국은 솔로몬 제도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공세를 유지했다. 연합군의 과달카날, 밀른 만 전투 및 부나-고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이러한 대규모 일본의 공세가 중단되었다.[173] 전략적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갔고, 이는 영구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은 태평양에서의 모든 일본의 확장 시도를 종식시키고 연합군을 명확한 우위의 위치에 놓았다.[174] 과달카날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결국 일본의 항복과 일본 점령으로 이어진 일련의 성공적인 작전의 첫 번째 단계였다.[175][176]1941년 12월, 하와이 공습, 말레이 반도 북부 상륙, 필리핀 항공 격멸전으로 시작된 일본군의 남방 작전은 예상 이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2년 3월 9일란령군의 항복으로 대략 완성되었다. 예상 이상으로 진전되었기 때문에, 1942년 1월에는 버마, 안다만 제도, 포트모르즈비 등의 공략을 발령하여 전략 태세 강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1942년 4월, 일본 해군에서는 제2차 작전이 입안되었지만, 군령부는 미·호주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피지 방면 공략을 주장했고, 연합함대는 미국을 조기에 전의 상실시키기 위해 미드웨이 작전과 하와이 공략을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미드웨이 작전이 인정되어 연합함대도 군령부에 접근하여 뉴칼레도니아, 피지는 공략 확보, 원방의 사모아는 공략 파괴 후 철수하는 것을 인정했다.
일본 해군은 적극적인 침공 작전을 통해 연합국의 반격 거점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의 분단을 생각했지만, 일본 육군은 중일 전쟁 해결을 중시하고, 동남아시아의 점령지·자원 지대는 현상 유지로 하고, 그 이상의 태평양 방면은 해군의 작전 담당 지역이라는 인식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전선 확대에는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대병력을 중국의 중국 파견군이나, 만주의 관동군에서 차출해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 공략 작전에 소극적이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고립에 대해서는 해군과 견해가 일치했다.
이 미·호주 분단 작전은 뉴기니 섬 동남 연안의 포트모르즈비 공략 작전(MO 작전)과 뉴칼레도니아, 피지, 사모아 공략 작전(FS 작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게 되어, FS 작전 실시는 일시 중지되었다. 1942년 7월 11일, 대해령 제20호는 '대해령 제18호에 의거한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미드웨이" 섬 공략 및 대해령 제19호에 의거한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뉴칼레도니아",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제도 방면 요지 공략 임무 해제'를 발령하였다. 이것으로 MI 작전, FS 작전 중지가 결정되었고, 제2차 작전 계획은 파탄났다.
하지만 일본은 미·호주 분단 목적을 포기하지 않고, 라바울 이남의 과달카날 섬에 전진 항공 기지를 건설하고, 기지 항공 부대를 진출시켜 솔로몬 제도의 제공권을 확장하려 했다. 이 과달카날 섬 기지 건설은 군령부 작전과(대본영 해군부)에서 참모본부 작전과(대본영 육군부)에 문서로 통지되었지만, 육군에서는 작전과 간의 의견 교환에 그쳤고 육군 내부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후에 '기지 건설에 대한 것을 육군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대본영은 연합군의 태평양 방면 반격 개시를 1943년 이후로 예상했기 때문에 과달카날 섬의 인원은 설영대와 호위 해군 육전대(제18경비대 간부)를 합쳐도 600명에 불과했지만, 미국군 상륙 직전인 8월 5일에는 활주로의 제1기 공사가 완료되었다. 또한 이에 앞서 MO 작전 시, 인접한 툴라기 섬에는 수상기 기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예측은 빗나가, 미국군은 1942년 7월 2일 대일 반격 작전인 워치타워 작전을 발령했다. 미국 육군맥아더 대장은 워치타워 작전 목표를 필리핀에 더 가까운 라바울로 할 것을 주장했지만, 미국 해군 작전 부장어니스트 킹 대장은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전력이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비행장 건설이 진행되고 있던 과달카날 섬을 공략하는 것으로 쌍방 간에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7월 4일 이후 과달카날 섬에 대한 정찰·폭격이 강화되었고, 상륙 작전에 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23. 3. 심리적 영향
미드웨이 해전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은 솔로몬 제도 침공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공세를 유지했다. 연합군의 과달카날과 밀른 만 및 부나-고나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에야 이러한 대규모 일본의 공세가 중단되었다.[173] 전략적 주도권은 연합군에게 넘어갔고, 이는 영구적인 것으로 입증되었다. 과달카날 전역은 태평양에서의 모든 일본의 확장 시도를 종식시키고 연합군을 명확한 우위의 위치에 놓았다.[174] 과달카날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결국 일본의 항복과 일본 점령으로 이어진 일련의 성공적인 작전의 첫 번째 단계였다.[175][176]군사적 승리만큼 중요한 것은 심리적 승리였다. 동등한 조건에서 연합군은 일본의 최정예 육해공군을 격파했다. 과달카날 이후, 연합군 장병들은 이전보다 일본군을 훨씬 덜 두려워하고 경외했다. 또한 연합군은 태평양 전쟁의 최종 결과를 크게 낙관적으로 전망했다.[179]
>도쿄 익스프레스는 더 이상 과달카날을 종착역으로 삼지 못한다.
> : — 알렉산더 패치(Alexander Patch) 미 육군 소장, 과달카날 주둔 미군 사령관
>과달카날은 더 이상 일본 군사 역사에서 단순히 섬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군의 묘지 이름이다.
> :— 가와구치 기요타케(Kiyotake Kawaguchi) 일본 육군 소장, 과달카날 제35보병여단 사령관[180]
가와구치 기요타케를 넘어, 호시노 나오키, 나가노, 가와베 도라시로를 포함한 여러 일본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은 전쟁 직후 과달카날이 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가와베는 "전쟁의 전환점에 대해 말하자면, 긍정적인 행동이 멈추거나 심지어 부정적으로 변했을 때는 과달카날에서였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181]
24. 빌루 전쟁 박물관과 과달카날 미국 기념관
빌루 전쟁 박물관은 솔로몬 제도 수도 호니아라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과달카날에 있다. 야외 박물관에서는 군사 장비와 여러 항공기의 잔해를 볼 수 있다. 그곳에는 전사한 미국, 호주, 피지, 뉴질랜드 및 일본 군인들을 위한 여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82]
레드 비치 상륙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과달카날 미국 기념관이 1992년 8월 7일 호니아라에서 헌정되었다.
25. 잔존 병기
과달카날 전투에서 사용된 불발탄의 양은 알 수 없으나, 섬에는 여전히 상당한 양의 불발탄이 남아 있다. 섬 주민들은 숨겨진 폭발물로 인해 예기치 못한 폭발로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불발탄으로 인한 인명 피해 위험은 여전히 높다.[183] 솔로몬 제도 경찰은 발견된 대부분의 폭탄을 처리했지만, 제거 작업에는 비용이 많이 들고 섬에는 잔여 폭발물을 제거할 충분한 자원이 없다. 솔로몬 제도는 미국과 일본 정부에 섬에 남아 있는 폭탄을 제거해 줄 것을 촉구했다.[183] 2012년, 미국이 남태평양 원조 프로그램을 종료한 지 18년 만에, 미국은 불발탄을 찾아 제거하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호주와 노르웨이도 솔로몬 제도의 불발탄 제거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설립했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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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00 Imperial Japanese Army troops and 4,800 men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were deployed to Guadalcanal during the campaign. Jersey states that 50,000 Japanese army and navy troops were sent to Guadalcanal and that most of the original naval garrison of 1,000–2,000 men was successfully evacuated in November and December 1942 by Tokyo Express wars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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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Australians were killed in the Battle of Savo Island. Total Solomon Islander deaths are unknown. Most of the rest, if not all, of those killed were American. Numbers include personnel killed by all causes including combat, disease, and accidents. Losses include 1,768 dead (ground), 4,911 dead (naval), and 420 dead (aircrew). Four U.S. aircrew were captured by the Japanese during the Battle of the Santa Cruz Islands and survived their captivity. An unknown number of other U.S. ground, naval, and aircrew personnel were, according to Japanese records, captured by Japanese forces during the campaign but did not survive their captivity and the dates and manners of most of their deaths are unknown. Captured Japanese documents revealed that two captured Marine scouts had been tied to trees and then vivisected while still alive and conscious by an army surgeon as a medical demonstration. Ships sunk includes both warships and "large" auxiliaries. Aircraft destroyed includes both combat and operational losse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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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19,200 dead, only 8,500 were 'killed in actual combat,' the majority perishing by malnutrition, malaria, diarrhea, and beriberi. Naval personnel deaths both on land and at sea are not inclu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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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s include personnel killed by all causes including combat, disease, and accidents. Losses include 24,600–25,600 dead (ground), 3,543 dead (naval), and 2,300 dead (aircrew). Most of the captured personnel were Korean slave laborers assigned to Japanese naval construction units. Ships sunk includes warships and "large" auxiliaries. Aircraft destroyed includes both combat and operational lo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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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가달카날섬에서 불발탄 처리 지원 자위대, 대중을 염두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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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달카날섬」위령식전에 칼남, 해자대원습격…가위같은 흉기로 목에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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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자위대원 1명 습격 위령식에 참석중―솔로몬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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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dalcanal Echoes, Volume 21, No. 1 Winter 2009/2010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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