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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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도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1948년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여 투옥되었고, 이후 미국 유학을 거쳐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제헌 국회의원, 재무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4.19 혁명 이후 민주당 내에서 활동하며, 제2공화국에서 신민당을 창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여러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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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정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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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김도연 |
한자 표기 | 金度演 |
로마자 표기 | Kim Do-yeon |
출생일 | 1894년 6월 16일 |
사망일 | 1967년 4월 19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김포군 양천면 (현 서울 강서구)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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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정치인, 독립운동가 |
학력 | |
학력 |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정치 활동 | |
정당 | 신민당 |
직책 | 초대 재무부 장관 신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 |
임기 | 1948년 8월 2일 ~ 1950년 4월 22일 |
대통령 |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
부통령 | 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 |
총리 | 이범석 대한민국 국무총리 |
차관 | 장희창 재무부 차관 김유택 재무부 차관 직무대행 서리 김유택 재무부 차관 |
수상 | 안재홍 미군청정 민정장관 |
가족 | |
배우자 | 노광임 |
자녀 | 아들 김병대(金秉大) 아들 김병국(金秉國) |
부모 | 아버지 김종원(金鍾遠) 어머니 초계 정씨 부인(草溪 鄭氏 夫人) |
기타 | |
경력 |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전임강사 |
웹사이트 | 상산 김도연 기념사업회 |
2. 생애
김도연은 경기도 김포 양동면(현 서울 강서구)에서 태어나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1] 긴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반도중학회'를 조직하고, 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에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및 ymca한인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했다.[1] 1915년 신익희 등이 창립한 조선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1]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가하여[1]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고 게이오 대학을 수료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고,[2]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2]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0개월간 함흥형무소에 복역했다.[2]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6년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11][3] 및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나,[1] 곧 민주국민당에 참여하며 야당 노선을 걸었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했고, 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55년 민주당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8년 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5월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7월, 제2공화국 출범 후 윤보선 대통령이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부결되었다. 1961년 신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가 1963년 민주당 재건에 참여했다. 1963년 국민의당 창당,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 반대 투쟁을 벌이다 의원직을 사퇴하고, 신한당에 입당하여 당 정무위원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이 되었다.
2. 1. 생애 초기
경기도 김포 양동면(현 서울 강서구)에서 아버지 김종원(金鍾遠)과 어머니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는 계모를 맞이하였다.7세 무렵에 한학을 배우고 태극학교(太極學校)에 입학하였으며, 태극소학교 졸업 후 보성중학교로 진학하였다.[1]
2. 2. 청년기
김도연은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1913년 일본 긴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졸업 후에는 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에 진학하여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및 ymca한인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했다.[1]1915년 12월 신익희,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이 창립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1]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가했다.[1]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받아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이승만 등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다는 소식에 유학생 대표들과 독립을 토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독립 청년단(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본국의 민족 지도자들과 연락하기 위해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같은 날, 조선 독립 청년단 대표 11명 중 한 명으로 동경 YMCA 강당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여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체포되었고,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1] 이로 인해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하였다.
2. 2. 1. 학창시절
1913년 일본 긴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으며, 긴조중학교 재학 중 '반도중학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졸업 이후 게이오 대학 이재학과에 들어가 일본 유학생의 중추 조직이었던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총무로서 학우회의 각종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한인 청년회 총무 백남훈을 도와 청년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다.[1]1915년 12월 신익희,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이 발기하여 창립한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1]
2. 2. 2. 2.8 독립 선언 참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가했다.[1] 1918년 12월 하순, 도쿄에서 열린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주최 YMCA 웅변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유학생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받아 조국 독립운동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때 그는 최팔용(崔八鏞)·백관수(白寬洙)·김철수(金喆壽)·이광수(李光洙)·송계백(宋繼白) 등과 대표위원으로 선발되어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이승만 등이 한국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학생 대표들과 함께 독립에 대하여 토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8일 재일본 동경 조선독립 청년단(在日本東京朝鮮獨立靑年團)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본국의 민족 지도자들과 연락하기 위해 송계백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 독립 청년단 대표 11명 중 한 사람으로 동경 YMCA 강당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유학생 학우회 총회장인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최팔용의 조선 청년 독립단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그가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서춘이 연설하기 위해 등단할 무렵, 일본 경찰이 해산을 요구하였고 유학생들과 일본 경찰 간에 대격전이 벌어져, 대다수의 참석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그도 체포되어 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기소되어 6월 26일 9개월 금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수감으로 그는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하였다.
2. 3. 일제 강점기 후반
1927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0년대 후반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으며, 1938년 5월 18일 서대문경찰서에서는 구류 중이던 윤치영의 진술을 근거로 김도연이 흥업구락부 참가자라고 보고했다.[2]이후 조선제사회사 감사역으로 활동했고, 자본금 30만엔을 투자하여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반일 활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김도연은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었다. 이후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2. 3. 1. 교육, 기업 활동
1927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2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있다가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초빙되었다.[2]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취체역 대표로 취임하였다. 1935년 조선흥업주식회사 감사를 겸하였다.1930년대 후반에는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다. 1938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구류 중이던 윤치영의 진술을 근거로 김도연이 흥업구락부 참가자라고 보고했다.[2]
이후 조선제사회사에 참여하여 감사역으로 활동했고, 자본금 30만엔을 투자하여 조선흥행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반일 활동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김도연은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류되었다. 이후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2. 3. 2. 흥업구락부 사건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5월 18일,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을 근거로, 서대문경찰서장은 김도연이 흥업구락부 동지회원 중 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10][2]2. 3. 3. 태평양 전쟁 무렵
1940년 5월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강요했으나 그는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는 총독부의 감시 대상인 불령선인 2호로 선정되었다.그 뒤 조선제사회사(朝鮮製絲會社)에 입사하여 감사역으로 활동하고, 자본금 30만엔을 투자하여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 전쟁 발발 후 국내에서의 반일 인사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면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김도연도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1942년 12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다가 함흥으로 이감되었다. 이후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함흥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1945년 봄에 출감하였다.[2]
2. 4. 정치 활동
8·15 광복 후 김도연은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11][3] 1946년 2월 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그해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2월 과도입법위원회 의원(민선)으로 취임하였다.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서대문구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출마, 5월 30일 당선되어 제헌국회의원으로 취임하였다. 6월 제헌국회에서 각 분과 위원장을 선출할 때 국회 재경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측 대표로 활약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측 대표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곧 1949년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고, 이후 야당 노선을 걸었다. 1950년 5월 2대 민의원 선거 때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피난갔다가 휴전 후 되돌아왔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고 이때 곽상훈, 김준연, 박순천,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1954년 민주 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취임,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이 되었고, 민주당 고문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구파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윤보선,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6년 민주당 구파의 부통령후보로 지목되었으나 신파의 장면과의 경쟁에서 패하였다. 1958년 민의원의원에 재선되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59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4·19 혁명 직후 자유당과 민주당 간에 정쟁이 발생했을 때 그는 싸움을 피해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1960년 5월 제5대 민의원에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그해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인 허정과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영접, 면담하였다.
1960년 7월, 의원내각제를 골격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같은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3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틀 후, 대신 지명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승인받았다. 김도연은 이에 반발하여,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구파는 분당을 선언했다. 1961년 2월 신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당수)에 취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한때 정계를 은퇴했으나, 1963년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박순천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했다.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거두지 않자, 3월 19일 그는 윤보선·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과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16]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17]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17]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하여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하였다. 그해 민정당 부총재직에 피선되었다.
1965년 박순천, 장택상, 함석헌, 윤보선, 장준하 등과 한일 기본조약 반대 투쟁을 벌였다.[1] 그해 8월 한일조약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같은 해 윤보선이 민중당을 이탈하여 신한당을 창당하자, 신한당에 입당하여 당 정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직에 선출되었다.
2. 4. 1. 한민당 창당
8·15 광복 후 김도연은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11][3]2. 4. 2. 대한민국 초기
1945년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28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11] 1946년 2월 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그 해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2월 과도입법위원회 의원(민선)으로 취임하였다.이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서대문구(西大門區)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5월 30일 당선, 제헌국회의원으로 취임하였다. 6월 제헌국회에서 각 분과 위원장을 선출할 때 국회 재경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편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측 대표로 활약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재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한·미 경제협정 교섭 한국측 대표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곧 1949년 민주국민당에 참여하였고, 이후 야당 노선을 걸었다. 1950년 5월 2대 민의원 선거 때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피난갔다가 휴전 후 되돌아왔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고 이때 곽상훈, 김준연, 박순천,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1954년 민주 국민당 최고위원으로 취임,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이 되었고, 민주당 고문이 되었다. 이후 민주당 구파의 중진으로 활약했다. 1956년 8월 자유당의 선거방해에 항의하여 조병옥, 윤보선, 현석호, 양일동 등과 서울 태평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1956년 민주당 구파의 부통령후보로 지목되었으나 신파의 장면과의 경쟁에서 패하였다. 1958년 민의원의원에 재선되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재선출되었다.
2. 4. 3. 4.19 전후
1959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이 되었다. 4·19 혁명 직후 자유당과 민주당 간에 정쟁이 발생했을 때 그는 싸움을 피해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1960년 5월 제5대 민의원에 민주당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후 민의원 부의장에 피선되었다. 그 해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인 허정과 함께 대한민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영접, 면담하였다.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후, 같은 해 7월 민의원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2표를 획득했다.[4]
1960년 7월, 의원내각제를 골격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8월 16일, 윤보선 대통령은 같은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3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틀 후, 대신 지명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승인받았다. 김도연은 이에 반발하여,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구파는 분당을 선언했다. 1961년 2월 신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당수)에 취임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한때 정계를 은퇴했으나, 1963년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박순천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했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서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2. 4. 4. 제2공화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후, 같은 해 7월 민의원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2표를 획득했다.[4] 1960년 7월 내각책임제 하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고, 윤보선 대통령이 같은 민주당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하였으나,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인준되었다.장면이 총리로 당선되자 이에 반발하여 구파동지회를 결성하고, 1960년 12월 민주당 구파 계열을 이끌고 탈당,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11월에는 신민당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민의원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63년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박순천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2. 4. 5. 군정 기간 중
1963년 3월 16일 오후 2시 55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초대로 윤보선 전 대통령, 장택상 전 국무총리,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 등과 함께 박정희와 면담하였다.[13] 김희덕(金熙德) 외무 겸 국방위원장, 유양수 재경위원장, 홍종철(洪鍾哲) 문사위원장 등이 3.16 성명을 발표하게 된 동기를 번갈아가며 설명하였다.[13][14] 그는 미국같은 나라도 대통령 후보가 열 아홉명이나 나오는 때가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뭐 정당이 많다고 우려할 것은 없지 않느냐고 정치활동정화법에 문제를 삼았다.[15] 그러자 박정희는 나라가 망한 후 애국자라는 말을 듣기보다는 역적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응수하였다.[15] 결국 협상점을 찾지 못한 채 회의는 종결되었다.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거두지 않자, 3월 19일 그는 윤보선·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과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였다.[16]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17]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17] 그 해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장(1963)을 수여받았다.
2. 4. 6. 야당 지도자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상에 반대하여 한일협상 반대운동을 하였다. 그 해 민정당 부총재직에 피선되었다.1965년 박순천, 장택상, 함석헌, 윤보선, 장준하 등과 한일 기본조약 반대 투쟁을 벌였다.[1] 그해 8월 한일조약 국회비준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고, 같은 해 윤보선이 민중당을 이탈하여 신한당을 창당하자, 신한당에 입당하여 당 정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직에 선출되었다.
3. 사후
사회장으로 엄수된 뒤 서울 시내를 돈 후 노제를 지내고, 서울 성북구 수유동 묘지에 안장되었다.[1]
사망 직후 상산김도연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상산김도연선생숭모회가 결성되었다.[1] 1991년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
4. 평가와 비판
현재 김도연 (정치인)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은 상태이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모두 내용이 비어있다.
4. 1. 긍정적 평가
(현재 섹션은 비어있음)4. 2. 부정적 평가
내용 없음5. 학력
6. 약력
- 1944년 여름 조선어학회를 후원한 혐의로, 조선총독부 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 1944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 1946년 한국무역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서대문구)에 당선되었다.
- 1949년 대한수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하였다.
-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 구국총력연맹을 결성하고 부위원장에 취임, 상이장병 위문과 이재민 구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 1953년 민주국민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 1960년 6월 국무총리 허정과 함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를 영접, 면담하였다.
- 1961년 회고록 《나의 인생백서: 상산회고록》을 집필하였다.
-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정화법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 1963년 1월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제되자, 그해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가 탈당, 자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 제1대 국회의원 (한국민주당, 서대문구)
- 제3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 서대문갑구)
- 제4대 국회의원 (민주당, 서대문갑구)
- 제5대 국회의원 (민주당, 서대문갑구)
- 제6대 국회의원 (자유민주당, 전국구)
- 제7대 국회의원 (신민당, 전국구)
7. 상훈
- 대통령 표창 (1963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9년)
- 건국공로훈장 애국장 (1991년)
8. 저서
- 《나의 인생 백서》
- 《한국 농촌 경제》
- 김도연, 《나의 인생 백서: 상산 회고록》, 일신문화사, 1968년.
- 김도연, 《나의 인생 백서: 상산 회고록》, 강우출판사, 1967년.
9. 가족
항목 | 내용 |
---|---|
아버지 | 김종원(金鍾遠) |
어머니 | 초계 정씨(草溪鄭氏) |
부인 | 노광임 |
첫째 아들 | 김병대(金秉大,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
둘째 아들 | 김병국(金秉國) |
10. 김도연을 연기한 배우
11.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48년 |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 한국민주당 | 31,181표 (56.67%) | 1위 | 당선 | 초선 |
1950년 |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국민당 | 12,887표 (41.33%) | 2위 | 낙선 | |
1954년 |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국민당 | 9,681표 (38.97%) | 1위 | 당선 | 재선 |
1958년 | 대한민국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당 | 26,638표 (69.33%) | 1위 | 당선 | 3선 |
1960년 |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당 | 36,707표 (71.14%) | 1위 | 당선 | 4선 |
1963년 | 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자유민주당 | 752,026표 (8.1%) | 전국구 1번 | 당선 | 5선 |
1967년 |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신민당 | 3,554,224표 (32.7%) | 전국구 2번 | 당선 | 6선 |
참조
[1]
웹사이트
김도연(金度演)
https://encykorea.ak[...]
2023-08-14
[2]
서적
雲南李承晩研究
歴史批評社
2005
[3]
서적
大韓民国臨時政府30年史
国学資料院
2006
[4]
서적
韓国政治論
オルム出版社
2006
[5]
서적
零時の松明 - 朴正煕大統領に付いて7年
翰林出版社
1966
[6]
서적
草根木皮から先進国への証言
韓国経済新聞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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零時の松明 - 朴正煕大統領に付いて7年
翰林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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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서적
韓国政治論
オルム出版社
2006
[9]
서적
派閥で見る韓国野党史
エディト出版社
2006
[10]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11]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12]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13]
서적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한림출판사
1966
[14]
서적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
한국경제신문사
2006
[15]
서적
영시의 횃불-박정희대통령 따라 7년
한림출판사
1966
[16]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4
[17]
서적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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