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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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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상헌은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1570년에 태어나 1652년에 사망했다. 그는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척화론을 주장하며 청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청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며 6년간 심양에 억류되기도 했다. 그는 명필로도 이름을 떨쳤으며, '청음전집'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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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1570년(선조 3년) 6월 3일 한성 남쪽 외가에서 돈녕부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유길의 딸이다. 3세 때, 후사 없이 별세한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친아버지 김극효 슬하에서 성장했다.

1585년(선조 18년)부터 이황의 문인 월정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우계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4]

1590년(선조 2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선조 34년)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기록을 남긴 것이 제주 기행문《남사록(南槎錄)》이다.

김상헌은 정인홍 등이 성혼 등을 비판할 때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고산찰방, 경성판관 등을 지내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이황을 배척하려던 정인홍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황, 이언적 등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놓고 1611년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둘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규탄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617년 10월부터 1618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었고,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파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예법에 어긋남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 등과 갈등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육조판서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35년 대사헌으로 다시 기용되어 후금에 대비하여 군비를 정비하고 군사 시설 확충을 주장했으며,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12월, 청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자(병자호란),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봉건제주군중국천자에게 충실한 제후로서, 또한 중화 제국의 가장 충실한 모범 속국으로서 명나라에 성심성의껏 섬길 것을 주장[1]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홍익한 등과 척화론을 펼쳤다. 현실에 입각한 주화론을 펼친 최명길과 대립하여 그를 끝까지 배척했지만, 1637년 음력 1월 30일, 인조한강 남안의 삼전도에 있는 청군 본영에 나아가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배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게 되자, 안동으로 은거했다. 조선이 청에 항복하자,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했다고 전해진다[2]

1639년 청나라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구했을 때, 김상헌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결국 1640년 12월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5] 그는 만주 심양 감옥에서 4년, 평안도 의주 감옥에서 2년, 도합 6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6] 선양에 갇혀 있는 동안, 여진족은 끊임없이 김상헌을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강직한 성격과 굳은 기개로 청의 타협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청나라 사람들은 그를 의롭게 여겨 "감히 김상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4]

삼전도비


1650년 5월 28일 녹봉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여 효종이 녹봉을 내려 승지가 달구지에 싣고 갔으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받지 못한다며 도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해 8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불허하였다.[7]

1651년 5월 28일 영돈녕부사 직 등 모든 직함을 사직하였으나 불허하였고, 11월 13일 병이 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1652년 4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7]

1639년에 청의 인질이 되기도 하였던 그는, 1653년 특명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되었다.[7]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청음전집》 40권이 있다. 시문 및 '조천록', '청평록', '남한기략' 등으로 구성된 『청음집(清陰全集)』 전 40권의 저서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 1. 생애 초반

1570년(선조 3년) 6월 3일 한성 남쪽 외가에서 돈녕부 도정을 지낸 극효(金克孝)의 사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동래 정씨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유길의 딸이다. 3세 때, 후사 없이 별세한 백부 김대효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나, 친아버지 김극효 슬하에서 성장했다.

1585년(선조 18년)부터 이황의 문인 월정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우계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4]

1590년(선조 2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 중인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601년(선조 34년) 제주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때의 기록을 남긴 것이 제주 기행문《남사록(南槎錄)》이다.

2. 2. 북인과의 갈등

김상헌은 정인홍 등이 성혼 등을 비판할 때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고산찰방, 경성판관 등을 지내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이황을 배척하려던 정인홍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황, 이언적 등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놓고 1611년 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둘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규탄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617년 10월부터 1618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2. 3.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었고,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파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예법에 어긋남을 들어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 등과 갈등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육조판서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2. 4. 병자호란과 척화론

1639년 청나라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군사 지원을 요구했을 때, 김상헌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청나라는 지속적으로 조선을 압박했고, 결국 1640년 12월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5] 그는 만주 심양 감옥에서 4년, 평안도 의주 감옥에서 2년, 도합 6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6] 선양에 갇혀 있는 동안, 여진족은 끊임없이 김상헌을 회유하려 했지만, 그는 강직한 성격과 굳은 기개로 청의 타협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청나라 사람들은 그를 의롭게 여겨 "감히 김상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라고 칭찬할 정도였다.[4]

2. 4. 1. 인질 생활

1639년 청나라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의 거듭된 요구로 1640년 12월 심양으로 압송되어[5] 만주 심양감옥에서 4년 그리고 평안도 의주감옥에서 2년 옥고후 6년뒤에야 완전히 풀려났다.[6] 선양(瀋陽)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4]

2. 5. 생애 후반

1650년 5월 28일 녹봉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여 효종이 녹봉을 내려 승지가 달구지에 싣고 갔으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받지 못한다며 도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해 8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불허하였다.[7]

1651년 5월 28일 영돈녕부사 직 등 모든 직함을 사직하였으나 불허하였고, 11월 13일 병이 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1652년 4월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7]

1639년에 청의 인질이 되기도 하였던 그는, 1653년 특명으로 의정부영의정이 증직되었다.[7]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청음전집》 40권이 있다. 시문 및 '조천록', '청평록', '남한기략' 등으로 구성된 『청음집(清陰全集)』 전 40권의 저서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 6. 사후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종묘배향 되었다. 《김상헌선생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안동김씨분산에 있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로는 문인석이 1쌍 배치되어 있는데, 묘비는 현종 10년(1669)에 세워진 것이다. 묘의 오른쪽에는 현종 12년(167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비문은 앞면에 손자 곡운 김수증이 쓴 글이 있고 뒷면에 동춘당 송준길이 쓴 글이 있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3. 가계

김상헌의 조부는 김생해(金生海, 1512 ~ 1558)이다.[8] 양부는 김대효(金大孝, 1531 ~ ?)이며,[8] 양모는 참판(參判) 이영현(李英賢)의 딸 광주 이씨, 정태형(鄭泰亨)의 딸 연일 정씨, 보천부정(甫川副正) 이억정(李億正)의 딸 전주 이씨이다.[8] 생부는 김극효(金克孝, 1542 ~ 1618)이고,[8] 외조부는 정유길(鄭惟吉, 1515 ~ 1588), 외조모는 원대은개(元大隱介, 1514 ~ ?)이다.[8] 생모는 정말정(鄭末貞, 1542 ~ ?)이다.[8]

형제로는 형 김상용(金尙容, 1561 ~ 1637),[8] 김상관(金尙寬, 1566 ~ 1621),[8] 김상건(金尙謇, 1567 ~ 1604)과[8] 남동생 김상복(金尙宓, 1573 ~ 1652)이 있었다.[8]

정부인은 선부관(宣傳官) 증 참의(贈 參議) 이의로(李義老)의 딸 정경부인 성주 이씨이다.[8]

양자는 김광찬(金光燦, 1597 ~ 1668)으로,[8] 형 김상관(金尙寬)의 차남이다.[8] 며느리는 김내(金琜)의 딸 연안 김씨이다.[8][9] 슬하에 손녀 김복희(金復喜, 1614 ~ ?),[8] 김계희(金繼喜, 1616 ~ ?),[8] 김영희(金永喜, 1620 ~ ?),[8] 손자 김수증(金壽增, 1624 ~ ?),[8] 김수흥(金壽興, 1626 ~ 1690),[8] 김수항(金壽恒, 1629 ~ 1689),[8] 손녀 김태희(金兌喜, 1632 ~ ?),[8] 김묘현(金妙賢, 1633 ~ ?)을 두었다.[8] 김수흥은 형 김상관(金尙寬)의 장남 김광혁(金光爀)의 양자로 출계하였다.[8]

양첩 며느리의 이름은 미상이며, 서손자로 김수징(金壽徵, 1636 ~ ?),[8] 김수응(金壽應, 1640 ~ ?),[8] 김수칭(金壽稱, 1642 ~ ?),[8] 김수능(金壽能, 1644 ~ ?)과[8] 서손녀 양천 허씨 허서(許墅)의 처를 두었다.[8]

김상헌은 후사가 없었던 백부의 양자가 되었다. 친아들 김종경이 있었으나 3세에 요절하였고, 이후 후사를 얻지 못하여 조카 김광찬을 양자로 삼았다. 김수증은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의 조부이며, 김수항의 증손 김창집은 순조의 정실 순원왕후의 5대조, 헌종의 정실 효현왕후, 철종의 정실 철인왕후의 6대조가 된다. 김상헌의 자손들로부터 조선 왕조 후기에 실권을 잡은 인물들이 태어났고, 안동 김씨 출신의 3명의 왕비는 모두 그의 자손이다.

김상헌의 조모는 전주 이씨 부인 (이련환)으로, 성종의 손녀 (아버지는 성종의 서자 경명군)이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 부인으로, 광해군의 정실 폐비 유씨의 숙모이다. 양아버지 김대효는 아버지 김극효의 형이며, 양어머니는 전주 이씨 부인이다. 형 김상용은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외조부이자 현종의 외증조부이다. 처는 성주 이씨 부인이며, 양자 김광찬은 형 김상관의 아들이다. 며느리는 연안 김씨 부인으로, 선조의 계실 인목왕후의 조카이다.

4. 저서


  • 《야인담록(野人談錄)》
  • 《독례수초(讀禮隨)》
  • 《남사록(南槎錄)》
  • 《청음전집》 40권

5. 시조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구영언)

청나라에 압송되어 가면서 조국의 산천을 돌아보며 남긴 시조가 널리 회자되었다.

6. 관련 문화재 및 유적지

조천신장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이고, 설교시첩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문정공 김상헌 진적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8호이고, 문정공왕고간독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2호이며, 석실갈초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3호이다. 김상헌의 고조부인 사헌부장령 김영수의 생가고택인 양소당(養素堂)과 김영수 형제들이 건립한 삼구정(三龜亭) 정자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으며, 증조부 김번이 최초 건립하고 김상헌이 새로 중건한 청원루(淸遠樓)가 있다. 소산리 마을 뒷산 역동묘역에는 김상헌의 5대조부인 한성부판관 김계권의 묘를 위시하여 고조부 김영수와 그의 형제 김영전, 김영추 등 여러 기의 묘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에는 증조부 평양서윤 김번의 묘를 필두로 하여 조부 김생해, 아버지 김대효, 김극효, 김상헌, 김상용, 아들 김광찬 묘 등이 있다. 그의 집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효자동, 궁정동, 청와대 일대의 장동에 있었으며, 신안동 김씨였던 그의 집안이 장동 김씨로 불리는 이유가 됐다.

7. 관련 작품

7. 1. 드라마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는 임동진이, 1986년 MBC 드라마 《남한산성》에서는 정욱이 김상헌 역을 연기하였다.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는 한인수가,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이재용이 김상헌 역을 맡았다. 2023년 MBC 드라마 《연인》에서는 최종환이 김상헌 역을 연기했다.

7. 2. 연극

김성원은 1990년 연극 《남한산성》에 출연하였다. 손광업은 2010년 연극 《남한산성》에 출연하였다.

7. 3. 영화

황동혁 감독의 2017년 영화 《남한산성》에서 김윤석이 김상헌 역을 연기했다.

7. 4. 소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2007년)이 출간되었다.

참조

[1] 서적 李朝五百年史 https://www.google.c[...] 朝鮮研究会 1912
[2] 뉴스 日本の侵奪に対する韓国の人々の認識 https://dokdo.mofa.g[...] 外交部
[3] 문서 金昌緝. 緝의 음이 '''즙'''도 있고 '''집'''도 있기 때문에 '''김창집'''이라고도 하고 그의 큰형과 구별하여 '''김창즙'''이라고도 한다.
[4] 웹사이트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yoksa.aks.ac.[...]
[5] 문서 조선왕조실록, 인조 18년 12월 8일의 기사, 김상헌이 서울에 와 왕에게 하직을 고하다
[6] 문서 조선왕조실록, 인조 46권, 23년(1645 을유 / 청 순치(順治) 2년) 2월 23일(병자) 2번째기사 전 영의정 [[최명길 (1586년)|최명길]], 영[[중추부]]사 이경여, 전 판서 김상헌이 심양에서 돌아오다
[7] 문서 《[[효종실록]]》 8권, 효종 3년 6월 25일 을축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
[8] 문서 "[[정종]](定宗)의 14남 [[정석군]](貞石君)의 고손녀
[9] 문서 [[김제남]]의 장남이자 [[인목왕후]]의 오빠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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