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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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넷째 아들 마쓰다이라 요스케가 미카와국 가타하라를 영유하면서 시작된 가문이다. 센고쿠 시대에는 이마가와 씨,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속되었으며, 에도 시대에는 가타노하라번, 다카쓰키번, 사쿠라번, 사사야마번, 가메야마번을 거치며 후다이 다이묘로서 발전했다. 막말에는 사쿠보파에 속했으나,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가메오카 번 지사를 거쳐 자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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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시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로서 사료에서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며, 가문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자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닦았다. - 마쓰다이라씨 - 고이 마쓰다이라가
고이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국 고이 지역을 발상지로 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지류로, 마쓰다이라 타다카게를 시조로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시대에 요리아이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분가에서는 막신과 봉행 등을 배출했다. -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마쓰다이라 이에타다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의 당주였으며,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었다가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독립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다 1582년에 사망했다. -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씨 - 사쿠라번
사쿠라번은 다케다 노부요시가 시작하여 도이 도시카쓰가 사쿠라성을 축성하고 호리타 가문이 노중을 배출했으며 홋타 마사요시가 쇄국 정책 종식을 주장하다 폐번치현으로 폐지된 번이다.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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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가명 |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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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 | '칭'・청화원씨신전씨 지류' |
가조 | 마쓰다이라 요후쿠 |
종류 | 무가 화족(자작) |
출신지 | 미카와국호이군 가타노하라 |
근거지 | 미카와국 호이군 가타노하라 교토부교토시가미교구 |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이에노부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
지류 | 해당사항 없음 |
2. 역사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넷째 아들로 알려진 요스케(미쓰타다였다는 설도 있음[5])가 미카와 국 호이 군 가타하라(현 아이치현 가마고리시 가타하라초)를 영지로 삼아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을 창시했다.[3] 센고쿠 시대 초기에는 인근 세력과의 영토 분쟁을 겪었으며, 이마가와 씨의 영향 아래 놓이기도 했으나, 4대 당주 이에히로 대에 복잡한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휘하에 들어갔다.[7] 5대 이에타다와 6대 이에노부는 나가시노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공을 세웠고, 이에야스의 간토 이주에 따라 가즈사 국 고이 번으로 옮겨갔다.[8]
에도 시대인 1618년, 이에노부가 고향인 미카와 국 가타노하라번 1만 석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가문은 셋쓰국 다카쓰키번, 시모사국 사쿠라번, 단바국 사사야마번 등으로 여러 차례 영지를 옮겼으며, 1748년 단바 가메야마번 5만 1천 석으로 이봉되어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곳을 다스렸다.[9]
막말 시기 마지막 번주 노부마사는 왕정복고 이후 관군에 합류했다.[10][11] 메이지 시대에 들어 판적봉환으로 가메오카 번지사(가메야마에서 개칭)가 되었고, 폐번치현으로 면직되었다. 이후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은 화족이 되었고, 1884년 화족령에 따라 노부마사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2. 1. 센고쿠 시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넷째 아들 요스케(요시쓰구라고도 함[3])가 미카와 국 호이 군 가타하라(현 아이치현 가마고리시 가타하라초) 750관문을 영유하며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을 칭한 데서 시작되었다. 요스케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미쓰시게(오쿠사 마쓰다이라 가) 및 그의 셋째 아들인 사다미쓰도 가타하라에 거점을 두었으며, 초기(덴분 연간까지)에는 요스케 계통과 사다미쓰 계통이 나뉘어 있었다는 설도 있다.[4] 또한, 요스케라는 이름은 2대 사다스케의 오기(誤記)가 아버지의 실명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고, 실제 이름은 미쓰타다였다는 설도 존재한다.[5]가타하라는 천연의 좋은 항구였기 때문에, 이 땅을 노리는 인근의 후카고 마쓰다이라 가나 핫즈 오가사와라 씨와의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행보는 이 두 가문과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4대 당주인 마쓰다이라 이에히로 때부터 안쇼 마쓰다이라 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랐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과정은 더 복잡했다. 이에히로 시대에는 이마가와 씨에게 가타하라를 빼앗겨 이마가와 측의 오쿠다이라 사다토모가 잠시 지배했던 시기가 있었고[6],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에는 후카고 마쓰다이라 가문과의 싸움을 계기로 이마가와 우지자네에게 잠시 복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마가와 측의 핫즈 오가사와라 씨와의 분쟁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로 들어갔다.[7]
5대 당주 마쓰다이라 이에타다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6대 당주 이에노부 역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오다와라 정벌에서 활약하며 무공을 인정받았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자,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도 가즈사 국 고이 번으로 이동했다. 고이는 지리적 조건이 가타하라와 유사하여, 당시 도쿠가와 수군의 일부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8]
2. 2. 에도 시대
겐나 4년(1618년), 이에노부는 고향인 미카와국 가타노하라번 1만 석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셋쓰국 다카쓰키번 2만 석으로, 간에이 12년(1635년)에는 시모사국 사쿠라번 4만 석으로 영지를 옮겼다. 다카쓰키와 사쿠라로 이봉되면서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가는 해안 지역에서 멀어져 후다이 다이묘로서 새로운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9]야스노부 시대인 간에이 17년(1640년)에는 다시 다카쓰키번으로 옮겨가 3만 6천 석을 받았다. 이후 게이안 2년(1649년)에는 탄바국 사사야마번 5만 석으로 이봉되었다. 노부미네 시대인 간엔 원년(1748년)에는 탄바 가메야마번 5만 1천 석으로 옮겨갔으며, 이후 폐번치현 때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다.
마지막 번주인 노부마사는 막말 시기 사쿠보파에 속했으나, 왕정복고 이후 구 막부 세력이 조적(조정의 적)으로 규정되자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는 도세이군의 산인도 친무 총독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귀순하여 관군에 합류했다.[10][11]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마지막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노부마사는 1869년 (메이지 2년) 6월 19일 판적봉환에 따라 가메오카 번 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번의 이름이 가메야마에서 가메오카로 변경되었다. 그는 1871년 (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이 시행될 때까지 번 지사직을 유지했다.1869년 6월 17일, 행정관의 포고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역시 다이묘 가문으로서 화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884년 (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어 화족이 5단계의 작위(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로 나뉘자, 다음 날인 7월 8일 노부마사는 구 소번 지사구 가메오카 번은 현미 2만 8380석(표고 5만 석)으로, 현미 5만 석 미만의 구 소번에 해당했다. 자격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노부마사는 이후 도서두, 대장성 용무계, 4등 검사관, 제실제도 조사계 검사원 제2과장, 원로원 서기관, 귀족원의 자작 의원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3대 자작인 마쓰다이라 노부요시 시대에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교토시 가미교구 기누가사토노초에 있었다.
3. 가계도
'''범례'''
#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 숫자는 가독 계승 순서.
3. 1. 주요 인물
- 마쓰다이라 요스케 (요시쓰구라고도 함[3]):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넷째 아들로, 미카와 국 호이 군 가타하라(현 아이치현 가마고리시 가타하라초)를 영지로 삼아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을 일으킨 시조이다. 그의 실명은 미쓰타다이며, 요스케는 2대 사다스케의 이름이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5].
- 마쓰다이라 이에타다: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5대 당주로, 나가시노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 마쓰다이라 이에노부: 6대 당주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오다와라 정벌에서 활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로 옮겨갈 때 함께 가즈사 국 고이 번으로 이주했으며, 이곳은 지리적으로 가타하라와 유사하여 도쿠가와 수군의 일익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1618년(겐나 4년)에는 고향인 미카와 국 가타노하라번 1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1619년에는 셋쓰국 다카쓰키번 2만 석, 1635년(간에이 12년)에는 시모사국 사쿠라번 4만 석으로 영지를 옮겼다.
- 노부마사: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지막 번주이다. 막말에는 사쿠보파였으나 왕정복고 후, 구 막부 세력이 조적이 되자 외면하고, 도세이군산인도 친무 총독사이온지 긴모치에게 귀순한 이후, 관군에 참가했다[10][11]。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에 의해 가메오카번 지사로 임명되었고 (이때 번 이름을 가메야마에서 가메'''오카'''로 개명했다), 1871년(메이지 4년)의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5작제로 되자, 자작에 열했다. 노부마사는 도서두, 대장성용무계, 4등 검사관, 제실제도 조사계 검사원 제2과장, 원로원 서기관, 귀족원의 자작 의원 등을 역임했다.
- 노부요시: 3대 자작으로, 그의 시대에 가타노하라 마쓰다이라 자작가의 저택은 교토시가미교구 기누가사토노초에 있었다.
참조
[1]
Kotobank
松平氏
[2]
웹사이트
形原松平家についてご存じですか?
https://www.city.sas[...]
[3]
서적
新訂寛政重修諸家譜
[4]
서적
[5]
논문
大草・岡崎松平家の光重・貞光父子と初期形原松平家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Kotobank
松平 信正
2022-11-08
[11]
Kotobank
松平信正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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