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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탐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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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견탐라사는 고대 탐라(제주도)가 백제 멸망 이후 당나라,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맺었던 외교 관계를 설명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3세기부터 일본과 교류했으며, 백제에 조공하다가 멸망 후 당, 일본, 신라와 독자적인 외교를 펼쳤다. 탐라는 660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661년에는 일본에 왕자 아파기를 보내 조공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했다. 679년 신라에 복속되기 전까지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백강구 전투에 참여하는 등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생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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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탐라사

2. 역사적 배경

탐라(제주)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3세기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이는 주호가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려사》 지리지에는 왜와의 관계를 전하는 전설도 기재되어 있어서, 고대로부터 제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탐라는 3세기부터 쓰시마, 일기국, 노국 등 규슈 일대의 크고 작은 왕국들과 더불어 야마타이국과도 교류하고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미 한반도의 고대 삼한이 왜국과 교류하고 있었고, 주호는 진한 등과도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주호는 왜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 함께 존재하므로, 주호 즉 제주도와 왜 소국들이 직접 교류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5]

그 뒤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삼국사기》의 기사에 보이듯, 탐라는 백제에 조공을 바치고 복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6]수서》에는 에서 왜국으로 가는 사신이 남쪽으로 담모라(탐라)를 보며 항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7] 일본이 당에 파견한 4차 견당사는 지금의 중국 절강 성 지역인 월주(越州)를 출항해 귀국하는 길에 표류하여 일부가 탐라도에 닿기도 했다.[8]

3. 백제 멸망 이후 탐라의 외교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탐라당나라, 일본, 신라와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모색했다. 그 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9], 662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했다.[10] 661년부터 일본과도 교류하며 사신을 주고받았다. 백강구 전투(663년)에서 탐라국사가 백제, 일본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한 기록이 있어[11], 탐라가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1. 대(對) 일본 관계

660년 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탐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구책을 모색하고자 했다. 같은 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9], 661년 일본이 파견한 제4차 견당사가 탐라에 표착하자,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인을 일본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일본서기》) 665년부터 667년까지, 그리고 669년에도 탐라는 왕자를 사신으로 일본에 보냈다.

덴무 천황 3년(674년), 5년(676년), 7년(678년) 등 2~3년마다 한 번씩, 총 9회에 걸쳐 탐라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다.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 일본군과 함께 유인궤에게 항복한 사람 중에 '탐라국사(耽羅國使)'가 확인되는데[11], 이를 통해 탐라 수군이 백강구 전투에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덴무 천황 8년(679년)과 13년(684년) 일본은 탐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첫 번째 사신은 기록에 없지만, 두 번째 사신(덴무 13년 10월)은 《일본서기》에 대사(大使) 이누카이노 무라치(犬養連) 다마키(手纏), 소사(小使) 가와바라노 무라치(川原連) 가니(加尼)로 기록되어 있다.[12] 지토 천황 2년(688년)과 7년(693년)에도 탐라 사신이 일본에 왔지만, 수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자이후에 머물렀다.

3. 2. 대(對) 신라 관계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후, 탐라662년(문무왕 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했다.[10] 679년에는 신라에 복속되었다.[2]

참조

[1] 서적 日本書紀
[2] 역사서 삼국사기 662
[3] 역사서 旧唐書
[4] 서적 「白村江」以後
[5] 기타
[6] 기타
[7] 역사서 수서
[8] 기타 778
[9] 역사서 당회요 661-08
[10] 역사서 삼국사기 662-02
[11] 역사서 구당서
[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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