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신분제도
1. 개요
고려의 신분 제도는 문벌과 중소 지배층, 평민과 종속 구역민, 그리고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문벌은 5품 이상 고관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음서와 과거를 통해 관직 진출에 유리했으며, 지방 호족 출신은 향리로 편제되어 지방 지배층을 형성했다. 평민은 농민이 주를 이루었으며, 조세와 역역을 부담했다. 종속 구역민은 향·소·부곡 등에 거주하며 차별을 받았고, 천민은 노비 등이 포함되어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고려는 여성의 지위가 비교적 높았으며, 재산 상속과 제사, 음서 등에서 남녀 차별이 적었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으나, 법적으로 보호를 받기도 했다.
-
고려의 사회 제도 -
도첩제
도첩제는 국가가 승려의 출가와 득도를 관리하기 위해 발급한 증명서 제도로, 중국, 한국, 일본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운영되었으며, 승려의 수를 제한하거나 재정 수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
한국의 신분 제도 -
천민
천민은 전통 사회 최하층 계급으로 세습되었으며 특정 직업에 종사하며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조선시대에는 사회적 상승이 어려웠지만, 직업에 근거한 차별의 잔재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한국의 신분 제도 -
노비
조선시대 신분제에서 양반을 제외한 계층인 노비는 시대에 따라 형태와 기능이 변화했으며 관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어 재산처럼 취급되었고 갑오개혁 때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차별은 지속되었다.
2. 문벌과 중소 지배층
고려 초기 중앙 정계는 호족 출신과 신라 6두품 출신 문인들이 주도했다. 호족들은 지방에서 고위 향리층으로 있으면서, 과거제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다수의 중앙 관리를 배출하였다.
현종 대 무렵부터는 여러 대에 걸쳐 5품 이상의 고관을 배출하는 가문인 문벌(門閥)이 형성되어, 이들은 정치적인 제도들을 통해 대대로 고관 신분을 유지했다.
각 지방 호족 출신들은 지방의 이(吏)라는 의미에서 향리(鄕吏)로 편제되었다.
2.1. 문벌의 형성
현종 대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세습하는 문벌(門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문벌은 명문법(明文法)으로 규정된 신분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배층이었다.
문벌 출신은 좋은 교육 환경 덕분에 과거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고위 관직자나 공신이었던 조상의 덕택으로 관직을 받을 수 있는 음서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문벌 출신은 사실상 관직 진출이 보장되었다. 과거든 음서든 일단 하위 관리로 진출한 문벌 출신은 고려 조정의 최고위 관리들인 친인척의 비호를 받으며 쉽게 고위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반면 하위 지배층 출신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관리로서 업적을 쌓아도 낮은 관직에 머무르는 경우가 있었다.
2.2. 문벌의 특권
문벌 출신은 유리한 교육 환경 덕분에 다수의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고관이나 공신이었던 선대의 덕택으로 관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음서(蔭敍)의 기회가 있어, 관리로의 진출이 사실상 보장되었다. 과거든 음서든 일단 하위관리로 진출한 문벌 출신은 고려 조정의 최고위 관리들인 내외 친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쉽게 고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반면 하위 지배층 출신은 과거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관리로서 치적을 쌓아도 낮은 품관직에서 정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2.3. 중소 지배층과 향리
고려 초 지방 호족 출신들은 향리(鄕吏)로 편제되었으며, 성종 대부터는 무산계(武散階)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호족 출신들은 향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호장·부호장을 대대로 배출하는 지방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고, 통혼(通婚) 관계나 과거 응시 자격에서도 하위 향리층들과 구별되었다. 이들은 계층 내에서 폐쇄적으로 혼인하는 계급내혼적(階級內婚的) 단위를 이루는 한편 중앙의 하위 품관들과도 통혼하였다. 또한 이들은 예전처럼 중앙의 품관과 마찬가지로 향직을 받는 대상이었으며, 과거 등을 통해 계속 중앙의 품관으로 진출해갔다.
3. 평민과 종속 구역민
고려의 피지배층은 양인(良人) 중 평민층, 공적·사적 권리가 일부 제한되어 천민(賤民)처럼 대우받은 향·부곡 등의 종속 구역민, 그리고 공민 자격이 완전히 박탈된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3.1. 평민 (백정)
평민은 고려 시대 양인(良人)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주로 농민이었다. 이들은 직역이 없는 백정(白丁)이었다. 농민들은 자기 소유의 소규모 농지를 경작하거나 타인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경우 수확량의 절반을 지대로 내야 했고,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더라도 생산량의 10분의 1을 조(租)로서 국가 기관이나 전시과 제도에 의해 지정된 수조권자(收租權者)에게 내야 했다. 백정은 이외에도 지방별로 할당된 물품을 징수하는 공부(貢賦)와 노동력을 징발하는 역역(力役)을 부담해야 했다.
백정 농민은 법적으로 과거 시험 중 명경과(明經科)와 잡과(雜科)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고, 수조지를 받는 군인 등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한편 양인 신분인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백정 농민보다 천시되어 문무 관직에 나가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양인으로서 공부와 역역의 의무는 졌다.
3.2. 종속 구역민 (향, 소, 부곡, 역, 진)
피지배층은 공민(公民)인 양인(良人) 중 평민층, 공적·사적 권리의 일부가 박탈되어 어느 정도 천민(賤民)같이 대우받은 향·부곡 등의 종속 구역민, 공민으로서의 자격이 완전히 박탈된 천민 등 세 가지 신분층으로 구성되었다. 양인층보다 하층에는 신분적으로 양인에 가까우면서도 천민과 같은 신분적 제약이 일부 가해진 향·소·부곡이나 역·진 등의 종속 구역민이 존재하였다(이들 종속 구역민들을 천민이나 양인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군현민과 달리 천시되고 차별받은 이들은 거주가 소속 집단 내로 제한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문무 관직을 갖는 것도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종속 구역을 벗어나 일반 군현에 나가 살게 해주는 것이 국가적 포상이 되곤 하였다. 또한 종속 구역 주민들의 전공(戰功) 등에 대한 포상으로 종속 구역 자체를 군현으로 승격시켜주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반란을 일으킨 군현 지역을 집단적으로 처벌하여 부곡 등으로 강등하는 경우도 있었다. 곡·장·처의 주민은 농업 생산에, 소의 주민은 수공품이나 광산품 생산에, 역과 진의 주민은 각각 육로교통과 도선(渡船)의 임무에 종사하였다.
4. 여성의 지위
고려 시대 여성은 조선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뿐만 아니라 장인,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4.1. 재산 상속과 호적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4.2. 제사와 음서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 혜택이 있었다. 공을 세운 사람의 부모는 물론, 장인과 장모도 함께 상을 받았다.
5. 천민
천민은 노비가 다수를 차지하였고, 그 외에 유기(柳器)를 만들어 팔거나 수렵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는 화척(楊水尺, 일명 ='楊水尺중국어'), 광대인 재인(才人) 등도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5.1. 천민의 지위와 종류
천민은 공민으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고, 공민으로서의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 천민의 다수는 노비였고, 유기(柳器)를 만들어 팔거나 수렵을 하며 유랑생활을 하는 화척(楊水尺), 광대인 재인(才人) 등도 천민으로 대우되었다.
노비는 사인(私人)에 예속된 사노비(私奴婢)와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로 나뉘었다. 일천즉천에 따라 부모 중 한 명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었고,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었다. 노비와 양인의 결혼 자체도 불법이었다. 그래서 원래 노비였던 이들만 대물림됐기 때문에 노비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노비는 매매·증여·상속의 객체가 되어 주인에게 예속되었다. 생계가 어려워진 양인이 재물을 받고 타인의 노비가 되기도 하였고, 반란을 꾀한 지배층의 가족들이 형벌로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와는 달리 승려, 무속인을 사회에서 하층 계급으로 박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종교 단체인 절(寺)의 재산으로 예속되어 절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노비가 존재하였다.
5.2. 노비 신분 세습
노비는 천민의 다수를 차지했으며, 신분은 세습되었다. 부모 중 한 명만 노비여도 자식은 노비가 되는 일천즉천(一賤卽賤)의 원칙이 적용되었다. 노비와 양인의 결혼은 불법이었다. 노비는 대물림되었기 때문에 그 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5.3. 노비의 발생
노비는 사인(私人)에 예속된 사노비와 국가기관에 예속된 공노비로 나뉘었다.
일천즉천(一賤卽賤) 원칙에 따라 부모 중 한 명이라도 노비이면 그 자식은 노비가 되었고, 노비 신분은 세습되었다. 노비와 양인의 결혼은 불법이었다.
노비는 매매,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으며 주인에게 예속되었다. 생계가 어려워진 양인이 재물을 받고 노비가 되거나, 반란을 일으킨 지배층의 가족이 형벌로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와 달리 고려 시대에는 절에 예속되어 절의 살림을 담당하는 노비도 존재하였다.
5.4. 노비의 생활과 사회적 지위
광종 때 시행된 노비안검법은 권세가들이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든 양인들을 해방시키는 개혁 조치였다.
노비의 다수는 외거노비로서, 독립된 농가를 이루고 농사를 지으면서 상전이나 관청에 정해진 액수의 재물을 바쳤다. 이들은 상전이 아닌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짓거나,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여 재산을 모을 수도 있는 등 독립적인 경제생활을 하였다.
사노비 중 솔거노비는 상전의 집에서 숙식하며 잡일을 했고, 공노비 중 공역노비는 관청에서 잡역을 하며 급료를 받았다.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이러한 의무에서 벗어났다.
노비는 상전에게 중요한 재산이었지만, 단순한 재물이 아닌 인격체로 대우받아 법의 보호를 받았다. 상전에게 사적인 체벌을 받기도 했지만, 생명은 법으로 보호되었고 국가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작성하는 호적에도 등재되었다. 외거노비는 독립된 호(戶)를 이루며 노비 자신이 호주가 되었고, 솔거노비는 상전의 호적에 함께 등재되었다.
이러한 고려 시대 노비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노예나 농노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