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행단현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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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자행단현가도는 공자의 생전 일화인 '행단예악'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 1887년 나능호가 이모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오도자가 그렸다는 궐리 공자 영정을 함헌이 선물받아 오봉서원 등에 봉안되었고, 1866년 서원철폐 이후 완산 향교 대성전에 이안되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추정되는 '나'에 의해 나능호가 이모하여 보관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화축 형식이며, 19세기 후반 조선 시대 화풍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닌다. 공자의 책가도가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제자들이 둘러싼 모습이며, 청록산수 기법과 명암 표현이 특징이다. 국내에 현전하는 작례가 드물고 제작 시기와 화가가 명확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될 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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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행단현가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그림 정보 | |
![]() | |
| 문화재 정보 | |
| 이름 | 공자행단현가도 |
| 국가 | 대한민국 |
| 위치 | 서울특별시 |
| 유형 | 유형문화재 |
| 지정 번호 | 340 |
| 지정일 | 2012년 9월 13일 |
| 해제일 | 2016년 6월 9일 |
| 문화재청 ID | 21,03400000,11 |
2. 제작 배경 및 경위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행단예악(杏亶禮樂)’을 내용으로 한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고 화축 형식으로 보존되고 있다.[1] 화면에는 가로로 꺾인 자국이 많지만, 장황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하다.[1]
1887년 음력 9월, 이 그림의 제작 배경과 경위를 설명하는 글이 화면 상단에 적혀 있다.[1] 글쓴이는 자신을 ‘나[余]’로 지칭하며, 그림 제작을 주도한 인물로 보인다. 글 말미의 ‘완산세장(完山世藏)’이라는 표현과 향교에 있던 그림을 감영의 선화당으로 옮겨 이모한 정황을 볼 때, 1887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1]
이모된 그림은 완산 지방에 대대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된 작품은 1887년 당시 완산 향교에 있던 중국 화가의 ‘행단도’를 지방 화가 나능호가 이모하여 완산에 세장해 온 것으로 해석된다. 현 소장자는 ‘나[余]’를 신긍휴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 않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1]
2. 1. 원본 그림의 유래
순치 2년(1645), 칠봉(七峯) 함헌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궐리(闕里)에서 공자의 후손 공대춘에게 오도자가 그렸다는 공자의 영정 한 폭과 함께 ‘행단도’를 선물받았다.[1] 강릉 사람 함헌은 만년에 강릉에 오봉서원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곳에 중국에서 가져온 ‘행단도’를 보관하였다.[1]1675년,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으로 귀양을 갔는데, 이 ‘행단도’를 함경도로 옮기라고 명령하였다. 송시열이 귀양에서 풀려난 후에는 황해도 문회서원에 보관되었다.[1] 1866년 서원철폐 후에는 완산의 향교 대성전으로 옮겨졌는데, 이 글을 쓴 ‘나[余]’는 ‘행단도’를 존경하여 [감영의] 선화당으로 옮겨 화가 나능호에게 모사하게 하여 ‘완산세장(完山世藏)’하였다고 한다.[1]
함헌은 중국에서 그림을 받을 때 공대춘에게 작가를 물었는데, 공대춘은 오도자 그림이라고 하였으나 현재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를 찾을 수 없다.[1] 또, 순치 2년(1645)이라는 연도는 함헌의 생몰년과 맞지 않고, 1552년이라는 실제 함헌의 중국행 연도와도 일치하지 않아 의문이 생긴다. 아마 오래전의 일에 대해 쓰면서 착오를 일으켰던 것 같다.[1]
2. 2. 1887년 이모 과정
1887년에 쓰인 기록에 따르면, 1645년 함헌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공자의 후손에게서 오도자가 그렸다는 공자 영정과 '행단도'를 선물받았다. 함헌은 강릉시에 오봉서원을 짓고 '행단도'를 봉안했다.[1]1675년 송시열은 '행단도'를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라 명했고, 이후 황해도 문회서원에 봉안되었다. 1866년 서원철폐 후 완산 향교 대성전으로 옮겨졌는데, '나(余)'는 '행단도'를 경모하여 감영의 선화당으로 옮겨 화사 나능호에게 이모하게 하고 '완산세장(完山世藏)'하였다.[1]
여기서 '나(余)'는 1887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1] 이모된 그림은 완산 지방에 대대로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조사된 작품은 1887년 당시 완산 향교에 있던 중국 화가의 '행단도'를 나능호가 이모하여 완산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1]
2. 3. 신덕선의 추기 (1990년)
1990년(경오년) 입하(立夏)에 서예가 인전(仁田) 신덕선이 그림에 추가 기록(추기)을 작성하였다. 이 그림은 고령 신씨 집안에 대대로 전해져 온 것으로, 1990년 당시에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리 별묘(別廟)에 소장되어 있었다.[1]3. 그림의 내용 및 양식
이 그림은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하나인 杏亶禮樂|행단예악중국어을 묘사한 것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고 화축 형식으로 보존되고 있다.[1] 화면에 가로로 꺾인 자국이 많으나, 장황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하다.[1] 국내에 현전하는 작례가 매우 드문 그림이며, 제작 시기 및 제작 화가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화풍 또한 19세기 후반의 양식과 일치한다.[1]
3. 1. 행단예악의 내용
이 그림은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하나인 '행단예악'을 묘사하고 있다.[1] 행단예악은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함께 거문고를 연주하며 경전을 연구하고 가르침을 전한 것을 의미한다.[1]그림 속에서 공자는 책가도가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있으며, 좌우의 인물들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1] 주변에는 분홍색 꽃이 만발한 살구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제자들이 공자를 둘러싸고 있다.[1] 이러한 묘사는 공자가 행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했던 모습을 보여준다.[1]
3. 2. 도상 및 화풍
청록산수는 녹색과 청색을 칠하고 윤곽선 부근에 짙은 청색 혹은 먹색의 동그란 태점을 밀집하여 표현하였다. 인물의 얼굴과 의습선, 가구, 계단에는 명암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도상은 중국 그림을 이모한 것이지만, 인물 묘법과 채색, 청록산수 기법, 명암 사용 등에서 조선시대 말기 화풍이 뚜렷이 느껴진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채색화 양식을 보여주므로 조선시대 화가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특히 공자 뒤에 설치된 삽병(揷屛)에는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책가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화단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1]4. 지정 사유 및 가치
이 작품은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행단예악(杏亶禮樂)’을 내용으로 한 그림으로서 국내에 현전하는 작례가 매우 드물고, 제작 시기(1887년) 및 제작 화가(나능호)가 분명히 밝혀져 있으며, 화풍상으로도 조선 19세기 후반에 제작될 그림들의 양식과 부합한다.[1]
그림은 비단 바탕에 채색되었고 화축 형식으로 보존되고 있다.[1] 화면에는 가로로 꺾인 자국이 많으나 장황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상태는 양호하다.[1] 화면 상단에는 이 그림이 제작된 배경과 경위가 1887년 음력 9월 일자로 적혀 있다.[1]
기록에 따르면, 1645년 칠봉(七峯) 함헌(咸軒)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사행했을 때 공자의 후손에게서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공자의 영정과 ‘행단도(杏亶圖)’를 받았다. 함헌은 강릉에 오봉서원(五峯書院)을 짓고 ‘행단도’를 봉안하였다.[1] 이후 1675년 송시열이 ‘행단도’를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옮기라 명하였고, 송시열의 해배(解配) 후에는 황해도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봉안되었다. 1866년 서원철폐 후에는 완산 향교 대성전으로 옮겨졌다가, 1887년 전라도 관찰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나능호에게 이모하게 하여 ‘완산세장(完山世藏)’하게 되었다.[1]
그림을 쓴 사람의 이름은 본문에 ‘나[余]’로 언급될 뿐 이름을 알 수 없으나, 그림 제작을 주도한 사람으로 1887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던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
함헌이 그림을 받을 때 공자의 후손에게 작가를 물었으나, 공자의 후손은 오도자의 그림이라고 했지만 현재는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또한 순치 2년(1645)은 함헌의 생몰년 및 실제 사행 연도와 일치하지 않아 의문이 제기되지만, 오래전 일에 대해 쓰면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이모된 그림은 완산 지방에 대대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에는 서예가 신덕선이 추기를 작성하였는데, 그림은 고령 신씨 집안에 전해져 오다가 당시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구문천리 별묘에 소장되어 있었다.[1]
그림의 내용은 성적도(聖蹟圖)의 ‘행단예악’과 상통한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온 후 등용되지 못하자 벼슬을 구하지 않고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함께 경전을 다듬고 역경을 찬술했다는 내용이다. 그림에는 책가도가 그려진 병풍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공자와 거문고를 타는 인물들, 분홍색 꽃이 만발한 살구나무, 공자를 에워싼 제자들이 묘사되어 있다.[1]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작품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1]
4. 1. 희귀성
이 작품은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행단예악(杏亶禮樂)을 내용으로 한 그림으로서, 국내에 현전하는 작례가 매우 드물다.[1]4. 2. 제작 시기 및 화가
이 작품은 제작 시기(1887년) 및 제작 화가(나능호)가 분명히 밝혀져 있으며, 화풍상으로도 조선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그림들의 양식과 부합한다.[1] 1887년 당시 완산 향교에 봉안되어 있던 중국 화가의 '행단도'를 지방 화가 나능호가 옮겨 그려 완산에 전해지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1]1887년에 쓰인 글 아래에는 서예가 인전(仁田) 신덕선(申德善)이 1990년(경오년) 입하(立夏)에 쓴 추기(追記)가 적혀 있다.[1]
비록 도상은 중국 그림을 옮겨 그린 것이지만, 인물 묘사법과 채색, 청록산수 기법, 명암 사용 등에서 조선시대 말기 화풍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19세기 후반 조선시대 채색화 양식을 보여주어 조선시대 화가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특히 공자 뒤에 설치된 삽병(揷屛)에는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책가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화단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1]
4. 3. 화풍
이 작품은 공자의 생전 일화 중 '행단예악(杏亶禮樂)'을 내용으로 한 그림으로, 국내에 현전하는 작례가 매우 드물다. 제작 시기(1887년) 및 제작 화가(나능호)가 분명히 밝혀져 있으며, 화풍상으로도 조선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그림들의 양식과 부합한다.[1]5. 추가 연구 과제
이 그림의 원작자에 대해서는, 함헌이 중국에서 그림을 받을 때 공대춘에게 물었으나 오도자의 그림이라고만 했을 뿐,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1] 순치 2년(1645)이라는 연도는 함헌의 생몰년 및 실제 사행 연도(1552년)와 일치하지 않아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오래전 일에 대해 기록하면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
그림 제작 배경을 기록한 글을 쓴 '나[余]'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글 말미의 '완산세장(完山世藏)'이라는 표현과 향교에 있던 그림을 감영의 선화당으로 옮겨 이모하게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1887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을 가능성이 높다.[1] 현 소장자는 '나[余]'를 신긍휴로 추정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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