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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재독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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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재독서지》는 북송 말, 남송 시대의 학자 조공무가 편찬한 서적으로, 장서가 정도가 기증한 장서를 바탕으로 약 25,000권의 도서를 해제하여 45류로 분류한 목록 해설서이다. 조공무는 이 책을 통해 당나라와 오대십국의 문헌을 보충하고, 송나라 왕응린의 저서 등을 수록하여 학문적 가치를 높였다. 《군재독서지》는 여러 판본으로 간행되었으며, 특히 청나라 강희제 때 간행된 원주본이 《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 조선 후기 학자들에게도 널리 읽혔으며, 서형수, 정조, 성해응, 서유구, 정약용, 김정희, 이규경 등의 저술에서 인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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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재독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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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재독서지
정보
저자조선의 문신, 학자 서거정
종류서목
언어한문
국가조선
발표일성종 15년 (1484년)
내용
설명서거정이 관료 생활 중 틈틈이 읽었던 책들을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사부에 따라 나누어 간단한 해제를 붙인 것이다.
권질총 4권
수록 도서1,577부
구성경부 389부
사부 320부
자부 428부
집부 440부

2. 저자: 조공무(晁公武)

조공무는 산둥성(山東省) 단주(澶州) 출신으로, 자는 자지이며, 제주 거야현 출신이다. 북송 말, 금나라를 피해 사천으로 이주했다.[1] 소흥 연간(1141년~1147년)에 사천전운사 정도(井度)의 휘하에 있었고, 건도 6년(1170년)까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장서가였던 정도는 임종 전에 자신이 소장한 책을 모두 조공무에게 넘겨주었고, 이를 계기로 조공무는 《군재독서지》를 편찬하였다. 《군재독서지》는 당대나 오대 문헌이 대부분이라, 《당서》나 《송사》 예문지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는데 도움이 된다. 왕응린(王应麟)의 《곤학기문》, 《한서예문지고증》, 《옥해》 등도 대부분 《군재독서지》에 실려 있다.

2. 1. 생애와 활동

조공무는 산둥성(山東省) 단주(澶州) 출신으로, 자는 자지이며, 제주 거야현 출신이다. 북송 말, 금으로부터 피난하여 사천으로 이주했다. 소흥 11년(1141년)부터 17년(1147년)까지 남송의 사천전운사(四川轉運司)로 재직하던 정도(井度)의 휘하에 있었으며,[1] 이후로도 건도 6년(1170년)까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장서가로도 유명했던[1] 정도는 임종하기 전에 자신이 평생에 걸쳐 모으고 소장한 책을 예전 자신의 휘하 관료였던 조공무에게 넘겨 주었고, 이를 계기로 조공무는 이 책을 편찬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흥 21년(1151년), 조공무는 지영주(知榮州) 관직으로 부임해 있으면서 남는 시간을 활용해 소장 도서 약 25,000권의 제요(해제)를 저술, 《군재독서지》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때의 일을 "아침저녁으로 손수 주황색으로 빠지고 틀린 부분을 교정해서 마침내 그 대체와 요점을 간추려 논한 이 책을 완성하였다"(日夕躬以朱黃,讎校舛誤,終篇輒撮其大旨論之)고 술회하고 있다. 조공무가 영주 지주 시대에 소장하고 있던 약 25,000권의 서적에 대한 제요(해제)를 저술한 것이 곧 이 책이다. 그의 집이 과거 개봉부의 소덕방에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별명으로 '''소덕선생군재독서지'''라고도 불린다.

조공무는 만년에 사천 가정부(嘉定府)의 부문향(符文鄉)에 머물러 살면서 「군재」(郡齋)라는 이름의 자신의 장서를 보관할 건물을 짓고 쉬지 않고 책의 수정과 보충 작업을 수행하였다.

2. 2. 장서가 정도(井度)와의 관계

조공무는 소흥 11년(1141년)부터 17년(1147년)까지 남송 사천전운사(四川轉運司)로 재직하던 정도(井度)의 휘하에 있었고, 이후 건도 6년(1170년)까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장서가로 유명했던[1] 정도는 임종 전에 평생 소장한 책을 조공무에게 넘겨주었고, 조공무는 이를 계기로 이 책을 편찬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3. 구성 및 간행

《군재독서지》는 초간본 4권에서 시작하여 내용이 추가되고 보정되는 과정을 거쳐 여러 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두황거(杜鵬舉)가 간행한 초간본 이후, 저자 조공무는 내용을 보정하고 2류를 추가하여 20권으로 증보하였다. 그의 제자 요응(姚應)이 이 증보된 판본을 다시 간행하였다.

《군재독서지》의 주요 간본은 다음과 같다.

간본 이름권수특징간행 시기 및 간행자
구주본20권남송 이종 순우 9년(1249년) 유약이 구주에서 중간.
원주본7권조희변(趙希弁)이 초간본 4권본과 구주본 20권본을 대조, 교감하고 《후지》(後志) 2권과 《독서부지》(讀書附志) 1권을 추가. 강희 61년(1722년) 진사증(陳師曾)이 구초원본(舊鈔袁本)을 얻어 간행.
장사 왕씨 간본-왕선겸(王先謙)이 구주본을 저본으로 원주본의 《독서부지》를 붙이고 교감하여 광서 10년(1884년)에 간행.
국립 북평 고궁박물원 소장본-1930년대에 발견된 송판(宋版) 원주본. 「사부총간(四部叢刊)」 삼편(三編)으로 영인.
상해 고적서점 점교본-1987년 상하이 고적서점(上海古籍書店)에서 간행.



사고전서》(四庫全書)에는 원주본이 채택되었으나, 청말의 왕선겸이 두 간본(구주본, 원주본)을 합쳐 교감해 광서 10년(1884년)에 간행하면서 구주본을 저본으로 원주본의 《독서부지》를 뒤에 붙였다. 이 판본은 왕선겸의 가문인 장사 왕씨(長沙王氏)의 간본이 중시되었다.

3. 1. 목록 구성

《군재독서지》는 경(經) 10류, 사(史) 13류, 자(子) 18류, 집(集) 18류로 총 45류로 구성되어 있다. 《직재서록해제》를 펴낸 학자 진진손은 이 책에 대해 "밝혀낸 바가 명확하니 읽기에 충분하다"라고 평했으며, 《군재독서지》의 목록 구성 방식에 따라 《직재서록해제》의 목록을 구성하고 분류하기도 하였다.

《군재독서지》 초간본은 4권이었는데, 두황거(杜鵬舉)가 간행한 뒤에 저자 조공무가 보정하여 2류씩 늘어나 내용이 많아졌다. 그의 문하생 요응(姚應)이 다시 간행한 판본은 전체 20권이었다. 남송 이종 순우(淳佑) 9년(1249년) 유약이 구주[2]에서 이 20권본을 중간하였다. 조공무가 편찬한 《후지》(後志) 2권도 있다.

《군재독서지》의 주요 간본으로는 남송 순우 연간의 구주본(20권)과 원주에서 간행한 원주본(4권)이 있다. 원주간본은 조희변(趙希弁)이 초간본 4권본과 구주본 20권본을 대조, 교감하여 쓴 《후지》(後志) 2권과 자신의 장서목록인 《독서부지》(讀書附志) 1권을 부록으로 더해 7권으로 엮은 것이다. 원주본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淸) 강희 61년(1722년) 해녕(海寧)의 진사증(陳師曾)이 구초원본(舊鈔袁本)을 얻어 간행하여 유통되었으며, 후에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사고전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総目提要)」에 따르면 해당 도서에 실린 《군재독서지》는 원주본을 채용하였는데, 청말의 왕선겸(王先謙)이 두 간본을 합쳐 교감해 광서 10년(1884년)에 간행하면서 구주본을 저본으로 원주본의 《독서부지》를 뒤에 붙였다. 해당 판본은 왕선겸의 가문인 장사 왕씨(長沙王氏)의 간본이 중시되었다.

1930년대에 국립 베이핑 고궁박물원(国立北平故宮博物院)에서 송판(宋版) 원주본이 발견되었고 「사부총간(四部叢刊)」 삼편(三編)으로 영인 수록되었다. 1987년 상하이 고적서점(上海古籍書店)에서 점교본이 간행되었다.

3. 2. 간행 과정

《군재독서지》 초간본은 4권으로, 두황거(杜鵬舉)가 간행하였다. 이후 저자 조공무가 내용을 보충하고 2류를 추가하여 20권으로 증보하였고, 그의 제자 요응(姚應)이 다시 간행하였다. 남송 이종 순우 9년(1249년)에는 유약(游鈞)이 구주(衢州)에서 20권본을 중간하였다.[2] 조공무는 《후지》(後志) 2권도 편찬하였다.

《군재독서지》의 주요 간본으로는 남송 순우 연간의 구주본(20권)과 원주(袁州)에서 간행된 원주본(4권)이 있다. 원주본은 조희변(趙希弁)이 초간본 4권과 구주본 20권을 대조하고 교감하여 《후지》 2권과 자신의 장서목록인 《독서부지》(讀書附志) 1권을 추가하여 7권으로 엮은 것이다. 원주본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강희 61년(1722년) 진사증(陳師曾)이 오래된 필사본을 찾아 간행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

《사고전서》에는 원주본이 채택되었으나, 청말 왕선겸(王先謙)이 두 간본을 합쳐 교감하고 광서 10년(1884년)에 간행하면서 구주본을 저본으로 하고 원주본의 《독서부지》를 뒤에 붙였다. 이 판본은 장사 왕씨(長沙王氏) 가문의 간본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국립 베이핑 고궁박물원(国立北平故宮博物院)에서 송판 원주본이 발견되어 《사부총간삼편》에 영인 수록되었다. 1987년에는 상하이 고적서점(上海古籍書店)에서 점교본이 간행되었다.

간본은 크게 구주본원주본 두 종류로 나뉜다.

  • 구주본: 순우 9년(1249년) 유균이 구주에서 출판한 20권본이다.
  • 원주본: 조희변이 초간본 4권과 구주본을 대조하여 《후지》 2권과 《부지》 1권을 추가한 7권본이다.


이후 구주본에 조희변의 《부지》와 청나라 학자 왕선겸의 교감을 더한 장사 왕씨 간본(1884년)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1930년대에는 국립 북평 고궁 박물원에서 송판 원주본이 발견되어 《사부총간》 삼편에 영인 수록되었고, 1987년에는 상해 고적 서점에서 점교본이 간행되었다.

3. 3. 주요 간본

《군재독서지》의 주요 간본으로는 남송 순우 연간의 구주본(20권)과 원주(袁州)에서 간행한 원주본(4권)이 있다. 원주간본은 조희변(趙希弁)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간본 4권본과 구주본 20권본을 서로 대조하고 교감해서 쓴 《후지》(後志) 2권과 자신의 장서목록인 《독서부지》(讀書附志) 1권을 부록으로 더해서 7권으로 엮은 것이다. 원주본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강희 61년(1722년) 진사증(陳師曾)이 구초원본(舊鈔袁本)을 얻어 간행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2]

《사고전서》「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総目提要)에 따르면 해당 도서에 실린 《군재독서지》는 원주본을 채용하였는데, 청말의 왕선겸(王先謙)이 두 간본을 합쳐 교감해 광서 10년(1884년)에 간행하면서 구주본을 저본으로 원주본의 《독서부지》를 뒤에 붙였다. 이 판본은 왕선겸의 가문인 장사 왕씨(長沙王氏)의 간본이 중시되었다고 한다.[2]

1930년대에 국립 베이핑 고궁박물원(国立北平故宮博物院)에서 송판(宋版) 원주본이 발견되었고 「사부총간삼편」(四部叢刊三編)으로 영인 수록되었다. 1987년 상하이 고적서점(上海古籍書店)에서 점교본이 간행되었다.[2]

간본에는 다음 2종이 있다.

  • '''구주본''': 순우 9년(1249년)에 구주에서 유균이 출판한 텍스트이다. 전 20권.[2]
  • '''원주본''': 조희변이 소지하고 있던 촉각의 4권본과 구주본을 대조하여 "후지" 2권을 엮고, 자신의 장서 목록 "부지" 1권을 더한 7권본이다.[2]


사고전서총목제요」는 원주본을 채택하고 있지만, 이후 구주본에 조희변의 "부지" 및 청나라 유학자 왕선겸의 "교보"를 더한, 광서 10년(1884년) 출판의 '''장사 왕씨'''의 '''간본'''이 중시되게 되었다.[2]

1930년대 들어서 국립 북평 고궁 박물원에서 송판의 원주본이 발견되어, 「사부총간 삼편」에 영인 수록되었다.[2]

별도로, 1987년 상해 고적 서점 간, 점교본을 볼 수 있다.[2]

4. 한국 전래 및 영향

서형수(1749~1824)의 《명고전집》 권12 대책 재적대, 정조의 《홍재전서》 권161 일득록1 문학1, 성해응(1760~1839)의 《연경재전집》 권22 총경류, 서유구(1764~1845)의 《풍석전집》 금화지비집 권10 대책 십삼경대, 정약용의 《경세유표》 권15 하관수제 무과와 《여유당전서》 1집 권제25 소학주곶 칠서, 김정희의 《완당전집》 권1 변 상서고금문변 하,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3, 석전류1, 석전총설에서 모두 《군재독서지》를 언급하고 있어, 조선 후기 학자들과 호서가들에게 두루 열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1] 서적 군재독서지
[2] 문서 저장성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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