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문헌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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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동문헌총록》은 광해군-인조 시대의 학자 김휴가 1616년부터 1637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편찬한 문헌 해제집이다. 김휴는 스승 장현광의 권유로 영남 지역 명문가의 소장 문헌을 조사하여 《고려사》 등 역사서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총 670여 종의 문헌을 수록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문화유산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기에 개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서지학적 성과로 평가받으며, 특히 현존하는 문헌이 부족한 고려 이전 시기의 문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1969년과 2008년에 영인본이 출간되었다.
김휴는 광해군-인조 시대 조정의 어지러움을 보고 관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힘썼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1]
《해동문헌총록》은 크게 총론, 20류 분류 체계, 부록(도동록 목록)으로 구성되며, 대부분의 수록 문헌에 해제가 붙어 있다. 서목만 소개된 경우는 23종, 찬자의 저서까지 함께 논급된 경우는 38종이지만, 전체 470종 중 68건에 달하는 두주가 있을 정도로 해제가 중심을 이룬다.[7] 이러한 분류 방식은 자료 이용의 효율성을 고려한 것으로 평가받는다.[8]
2. 간행 배경
《해동문헌총록》은 1616년 스승 장현광의 권유로 시작되어 1637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김휴는 서문을 작성할 당시 병환이 깊어 직접 글을 쓸 수 없을 정도였음에도, 초고를 불러주고 받아쓰게 할 정도로 이 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2]
2. 1. 의성 김씨 가문과 학문적 환경
김휴의 집안인 의성 김씨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명망 있는 집안이었으며, 여러 인맥들과 두루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종조부 김성일은 퇴계학파 내에서 위상이 높았고, 그의 집안은 퇴계학의 중심 집안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환경은 김휴가 안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 가문에 소장되어 있는 전적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수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훗날 《해동문헌총록》을 편찬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1]
2. 2. 장현광의 권유와 저술 시작
1616년 겨울, 김휴가 스승 장현광 문하에 입문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장현광은 김휴에게 자신이 발췌해 놓은 《문헌통고》 경적고를 보여주었다. 그는 "이 책 한 권만 보면 고금 전적의 성쇠를 알 수 있다"며, "동국 사람이면서 동국의 문헌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박식하고 재량이 있다. 그대가 살고 있는 주변 지역이 병화를 면한 곳이어서 온전한 서적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니 이를 조사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긴다면 우리나라의 문헌을 밝힐 수 있고, 또 고증 자료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공적이 옛 사람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김휴에게 권유하였다. 이것이 《해동문헌총록》 저술의 한 동기가 되었다.[4]
스승의 권유에 따라 김휴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안동, 의성, 군위, 선산,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영양, 예산 등의 명문 대갓집을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그 집안에 소장된 문헌들을 확인하고 해제를 붙이는 작업에 착수했다.[4]
2. 3. 자료 수집과 편찬 과정
김휴는 스승 장현광의 권유에 따라 낙동강을 중심으로 안동, 의성, 군위, 선산,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영양, 예산 등 명문가를 방문하여 그 집에 소장된 문헌들을 확인하고 해제를 붙이는 작업을 시작했다.[4] 20여 년간 지속된 이 작업으로 얻은 결과물은 여헌 장현광을 비롯한 주변 인사들의 감수를 거쳤고, 김휴 자신의 검토 작업도 함께 병행되었음을 초고 곳곳에 남은 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4]
김휴는 전적을 수집, 조사하는 과정에서 영남 지역에 흩어져 있는 전적들을 확인하면서 범위 확대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와 여러 문헌에서 특정한 인물의 문집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는 기록에 의지해 일부 문헌을 포함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2] 즉, 처음에는 영남 지역의 전적을 수집, 정리하려던 의도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통시대적으로 범위를 확대하여, 실물의 존재 여부가 가능할 경우 당시까지 편찬된 문헌 자료를 망라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2]
다만 《해동문헌총록》에 실린 서목 중에는 고구려의 역사서라는 이문진의 《유기》처럼 김휴 본인이 직접 실물을 확인하지 않고 포함시킨 서적도 있었다.[2]
2. 4. 저술 범위의 확대
김휴는 처음에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안동, 의성, 군위, 선산,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영양, 예산 등 영남 지역의 전적을 수집하고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범위를 넓혀, 실물 확인이 가능한 경우 당시까지 편찬된 문헌 자료를 모두 포함하고자 했다.[2]
이러한 범위 확대는 《고려사》를 비롯한 역사서와 여러 문헌에서 특정 인물의 문집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다만, 고구려의 역사서인 이문진의 《유기》처럼 김휴가 직접 실물을 확인하지 않고 포함한 서적도 있었다. 김휴는 《주역관상편》이나 《패관소설》에서도 "실화로 전해지지 않으니 안타깝다", "내가 보지 못하였는데 혹 병란 중에 소실된 것이 아닌가 한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했다.[2]
3. 구성
3. 1. 문헌의 종류와 분류 기준
《해동문헌총록》에 수록된 문헌은 670여 종에 이른다. 시기적으로는 고구려 이문진의 《유기》, 신라 원효의 《화엄경소》로부터 장현광이 생존했던 조선 인조 때까지, 구체적으로는 고구려 1종, 신라 20종, 고려 149종, 그리고 장현광이 생존해 있던 조선 인조 때까지 간행된 전적 470종에 이른다. 고려를 포함한 이전 시기 전적이 전체 중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현존하는 고려 이전 시기의 전적이 부족한 상황을 고려하면 특별히 기록할 만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3]
《해동문헌총록》 서문에는 장현광이 김휴에게 "문헌을 고증하고자 하는 자는 그 인물의 성쇠와 문장의 높낮이,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알고자 한다"라고 권하였다고[4] 되어 있는데, 이는 김휴가 《해동문헌총록》에서 인물의 행적을 중요시하는 것과 상통한다. 670여 종의 문헌은 저자별로 어제 10종, 봉명찬 84종, 개인찬 491종, 저자 미상 55종으로 분류된다.
구체적인 분류에 앞서 장현광은 '총론'을 두어 16항을 덧붙였다. 《삼봉집》 발문, 《보한집》 서문 등을 수록하는 등 대체로 여러 저서에 첨부된 서문과 발문이고, 그 내용은 조선 문헌에 관한 언급으로 조선의 문헌이 매우 융성했음을 제시하는 내용이다.[4] 그리고 670여 종에 이르는 이들 문헌들을 20류로 나누어 배열하였는데, 경, 사, 자, 집으로 나누는 전통적인 사부분류법을 따랐다. 경류는 예악을 포함하여 70종, 사류는 병정, 법전, 천문, 지리, 보첩을 합하여 151종, 자류는 143종, 집류는 214종에 달한다. 이는 장현광이 김휴에게 보여준 《문헌통고》의 체제를 참조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여기서도 김휴 자신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분류하여 배열의 순서를 정하는 부분에서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5]
이렇게 20류로 구분하여 배열한 뒤에는 부록으로 도동록(道東錄) 목록 7항목을 덧붙였다. 김휴는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저술을 통하여 인물의 행적을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에 경, 사, 자보다 집을 내세우면서 임금의 어제를 맨 앞에 배치하였다.[6] 큰 항목으로 분류한 '류' 중에서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은 1, 2, 3 혹은 시대별로 나누었으며, 두 번째인 제가시문집은 신라, 고려, 본조, 규수, 선귀, 석가 등 시대와 신분으로 세분하였다. 그리고 큰 분류 체계인 '류' 안에 정리된 문헌들은 시대순으로 배열하였으며, 혹 배열이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어디어디 아래 두어야 한다'라고 세주를 달아 두었는데, 이러한 세주가 적혀 있는 것은 《해동문헌총록》이 초고 상태에서 필사되었기 때문이다.[6]
3. 2. 20류 분류 체계
김휴는 전통적인 사부분류법(경, 사, 자, 집)을 따르면서도 《문헌통고》의 체제를 참고하여 독자적인 20류 분류 체계를 수립하였다.[5] 경, 사, 자, 집으로 나누는 전통 분류법에 따라 경류는 예악을 포함하여 70종, 사류는 병정, 법전, 천문, 지리, 보첩을 합하여 151종, 자류는 143종, 집류는 214종을 포함한다. 《해동문헌총록》의 20류 분류 체계는 다음과 같다.[5]
# 어제
# 제가시문집
# 경서류
# 사기류
# 예악류
# 병정류
# 법전류
# 천문류
# 지리류
# 보첩류
# 감계류
# 주해류
# 소학류
# 의약류
# 농상류
# 중국시문찬술
# 동국시문찬술
# 중국동국시문합집
# 유가잡저술
# 제가잡저술
분량이 많은 류는 1, 2, 3 혹은 시대별로 나누었으며, 제가시문집은 신라, 고려, 본조, 규수, 선귀, 석가 등 시대와 신분으로 세분하였다. 큰 분류 체계인 '류' 안에 정리된 문헌들은 시대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배열이 잘못된 경우 '마땅히 어디어디 아래 두어야 한다'라고 세주를 달아 두었다.[6]
3. 3. 부록: 도동록(道東錄) 목록
김휴는 부록으로 도동록(道東錄) 목록을 7항목으로 첨부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저술을 통하여 인물의 행적을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에 경, 사, 자보다 집을 내세우면서 임금의 어제를 맨 앞에 배치하였다.[6]
3. 4. 해제 방식
《해동문헌총록》에 수록된 각 항목의 해제 방식은 먼저 문헌명을 제시하고, 그 아래에 저자를 밝힌다. 이어서 해당 문헌의 편찬 동기, 저자의 가계, 학식, 관직, 시호, 교유 관계, 내용 등을 기술한다.[7] 또한 다른 문헌에서 해당 문헌이나 저자에 대해 평가한 내용과 저자 자신의 평문도 덧붙였다.[7]
4. 평가
《해동문헌총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된 상황에서, 전적 정리 및 목록화 작업을 개인의 노력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9] 이는 당시 장현광을 비롯한 영남 성리학자들의 우리 문화와 학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10]
영조 때의 《동국문헌비고》, 정조 때의 《누판고》 등 도서 해제 관련 저술이 등장했지만, 《해동문헌총록》은 이보다 앞서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된 수준 높은 해제집이라는 점에서 서지학 및 한국학 분야에 중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9]
특히 현전하는 문헌이 부족한 고려 이전 문헌에 대해서도 전래 문헌을 인용하여 해제함으로써, 망실된 문헌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11]
4. 1. 전란 이후 문화유산 정비의 중요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 문화유산 파괴와 전적(典籍) 소실로 인해 문화유산 및 전적 정리 작업이 시급했다. 이때 김휴가 개인적으로 《해동문헌총록》 편찬을 시도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9] 이는 당시 영남 성리학자 등 지식인들의 우리 문화와 학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10]영조 46년(1770년) 《동국문헌비고》, 정조 20년(1796년) 《누판고》 등 도서 해제 관련 저술이 나왔지만, 이보다 앞서 개인이 노력하여 완성한 《해동문헌총록》은 서지학 및 한국학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이다.[9] 김휴는 안동 주변 소장처를 방문해 문헌을 꼼꼼히 읽고 내용을 정리했다.[9]
《해동문헌총록》은 현전(現傳)하는 문헌이 부족한 고려 이전 문헌도 전래 문헌에서 인용, 해제하여 망실된 문헌의 대략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1]
김휴 사후, 《해동문헌총록》은 초고본 외 몇몇 필사본만 유통되었고, 대부분 후손이나 인근 집안에 보관되었다. 족손 김성탁(1684~1747)은 《해동문헌총록》이 화재로 3권 소실 후, 종가 인근 필사본을 모아 6권 체제를 갖추었다고 기록했다.[12]
이후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해동문헌총록》 인용이 확인된다.
4. 2. 개인의 노력과 학문적 성취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 전란으로 소실된 전적에 대한 정리 및 보완 작업이 절실했던 시대적 요구에 따라 김휴는 《해동문헌총록》 집필을 시작했다. 국가나 기관이 아닌 개인의 노력으로 이 방대한 작업이 시도되었다는 점은 큰 의의를 가지며,[9] 이는 장현광 등 영남 성리학자들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의 우리 문화와 학문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10]영조 46년(1770년) 《동국문헌비고》, 정조 20년(1796년) 《누판고》 등 도서 해제 관련 저술이 등장했으나, 이보다 앞서 형태나 내용 면에서 손색없는 해제집을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했다는 것은 서지학 및 한국학 분야 전반에 걸쳐 주목할 만한 성과이다.[9] 김휴는 안동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 소장처를 방문하여 문헌을 꼼꼼히 읽고 내용을 정리하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며,[9] 이는 《해동문헌총록》에 잘 드러난다.
4. 3. 서지학 및 한국학 분야의 기여
《해동문헌총록》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직후, 문화유산과 전적이 크게 소실된 상황에서 집필되었다. 국가 차원의 전적 정리 및 목록화 작업이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개인이 이 방대한 작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9] 이는 당시 영남 성리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우리 문화와 학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10]영조 46년(1770년) 《동국문헌비고》, 정조 20년(1796년) 《누판고》와 같은 도서 해제 관련 저술이 등장하였으나, 《해동문헌총록》은 이보다 앞서 개인의 노력으로 완성된 수준 높은 해제집이라는 점에서 서지학뿐만 아니라 한국학 분야 전반에 걸쳐 중요한 성취로 평가받는다.[9] 저자인 김휴는 안동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소장처를 직접 방문하여 문헌을 꼼꼼히 읽고 내용을 정리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9]
《해동문헌총록》은 문헌의 성립 시기와 양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잊혀 가던 문헌의 소재를 확인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현전하는 문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려 이전 문헌에 대한 해제는, 비록 김휴가 직접 실물을 확인하지 못하고 전해지는 문헌을 인용하여 작성한 것이지만, 소실된 문헌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11]
김휴가 세상을 떠난 후 《해동문헌총록》의 후속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초고본 외에 몇몇 필사본만이 유통되었을 뿐이며, 대부분은 그의 후손이나 인근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 족손 김성탁(1684~1747)의 기록에 따르면, 《해동문헌총록》은 본래 6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3권이 소실되었다고 한다.[12] 이후 여러 필사본을 찾아 내용을 보완하여 6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등 일부 학자들의 문헌에서 《해동문헌총록》을 언급한 내용이 확인된다.
4. 4. 망실된 문헌 연구의 단서 제공
《해동문헌총록》은 현전하는 문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려 이전의 문헌에 대해, 비록 김휴(경와)가 실물을 직접 보고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전래 문헌에서 인용하여 해제함으로써 망실된 문헌의 대략적인 내용이나마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11] 서명 정도만 확인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해당 문헌의 성립 시기와 양상을 정리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향후 각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문헌의 소재 확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5. 후대의 평가와 영인본
《해동문헌총록》은 1969년 한국서지학연구회 정기 연구발표회에서 처음 소개된 이후 서지학계와 한국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영인본 출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1969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영인본이 출간되었다.[13][14]
5. 1. 1969년 영인본 출간과 한계
1969년 한국서지학연구회 정기 연구발표회에서 김약필의 '경와 김휴의 해동문헌록에 관한 연구'가 발표되면서, 서지학계를 비롯한 한국학 연구자들에게 《해동문헌총록》의 실체와 의미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서지학계를 중심으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영인 작업에 대한 의견이 모였다. 상운 강주진(1919~1914)의 주선으로 김휴의 후손인 김약복이 경와 종가를 비롯하여 인근 집안에 소장되어 있던 경와 자필 초고본과 기타 필사본을 자료로 제공하여, 학문각에서 처음으로 영인본을 출간했지만, 발행 부수가 100부에 불과하여 한계가 있었다. 이때 편집은 춘호 이종규가 맡았고, 영인본 말미 부록 '인명색인'과 '서명색인'은 당시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재직하고 있던 윤병태가 작성하였다.[13]5. 2. 2008년 재영인과 개선점
2008년 사단법인 여헌학연구회가 《해동문헌총록》의 재영인을 추진, 여헌학연구회의 후원을 받아 여헌사상학술대회를 주관해 왔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가 영인 작업을 맡아 《해동문헌총록》 영인본을 다시 출간하였다. 초판 영인본의 저본은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크기가 작아 글자를 보기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판본 크기를 확대하고, 이용 편의를 위해 편집을 개선하였다. 또한 초판 영인본 부록인 '인명색인'과 '서명색인'의 미흡한 점을 보완하고자 기존 색인을 바탕으로 새로운 색인 작업을 진행하여 더 완비된 색인을 첨부하였다.[14] 이 작업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의 남지만, 라우권 연구원이 담당하였으며, 영인 관련 실무와 인쇄는 도서출판 학민문화사가 맡았다.[14]참조
[1]
논문
『海東文獻總錄』과 敬窩 金烋
2008
[2]
논문
2008
[3]
논문
2008
[4]
서적
해동문헌총록
[5]
논문
2008
[6]
논문
2008
[7]
논문
敬窩의 『해동문헌총록』 연구
1987
[8]
논문
『해동문헌총록』 소재 고려문집 연구
2007
[9]
논문
2008
[10]
논문
2008
[11]
논문
2008
[12]
서적
경와집
[13]
논문
2008
[14]
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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