궐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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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궐수도는 칼자루 끝부분이 고사리처럼 둥글게 말린 곡철 모양을 특징으로 하는 칼로, 7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명칭은 현대 연구자들이 붙였으며, 1882년 문헌에서 처음 사용된 기록이 있다. 궐수도는 자루의 형태, 칼날의 휨새 등을 통해 4가지 형태로 변천했으며, 동일본 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궐수도는 에미시에게 받아들여져 개량되었으며, 기마전의 발달과 관련하여 칼날이 길어지고 휨새가 더해지는 등 변화를 겪었다. 9세기 후반에는 털 뽑기 형태의 궐수도가 등장했고,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털 뽑기 형태의 태도 등으로 대체되었다. 궐수도는 신사의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현대에는 영화 '원령공주'의 칼 디자인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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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수도 | |
---|---|
개요 | |
![]() | |
종류 | 도검 |
사용 시기 | 고훈 시대 말기 ~ 헤이안 시대 |
제작 지역 | 일본 동북 지방 |
명칭 | |
일본어 | ja |
특징 | |
형태 | 칼자루 끝이 고사리(와라비) 싹 모양으로 굽은 형태 |
재료 | 철 |
용도 | 실전용 무기 |
발견 지역 | 주로 일본 동북 지방에서 출토 |
중요 지정 | 야요이 시대 말기 고분에서 출토된 와라비테토가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지정됨 |
역사적 의의 | 일본 고유의 도검 형태 중 하나 동북 지방의 독자적인 문화와 기술력을 보여주는 유물 |
역사 | |
기원 | 고훈 시대 말기 |
발전 | 궐수도에서 발전 |
사용 | 헤이안 시대 전기까지 사용 |
분포 | |
출토 지역 | 일본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홋카이도, 간토 지방에서도 출토 쓰가루 평야의 다테야마 고분군에서 다수 출토 |
참고 문헌 |
2. 명칭
자루 머리가 고사리처럼 둥글게 된 것에서 유래된 이름이지만[2], 곡수도라는 호칭은 현대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8세기 경에는 와라비테도의 손잡이(柄頭|츠카가시라)가 고(鼓)와 같은 형태로 변화한 "입고병도(立鼓柄刀, 류고즈카토)"도 등장하여, 뱀 무덤 고분(蛇塚古墳)의 부장품으로 와라비테도와 함께 출토되었다.[8][9]
문헌에서 가장 오래된 사용례는 메이지 15년 (1882년)에 마츠우라 무시로가 편집한 도록 『발운여흥』 제2집이다.[2] 이와테현 각총고분에서 출토된 칼과 도다이지 쇼소인 전래 칼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곡수도"라고 기재하고 있다.[2]
이름의 유래가 된 특징적인 자루 머리의 용도・목적은 불분명하지만, 칼을 손에서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끈과 자루 머리에 있는 끈을 통과시키는 구멍과 자루 축이 이루는 각도를 예각으로 함으로써 강한 쥐는 힘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논자도 있다.[3]
3. 기원과 발전
9세기 후반 무렵으로 여겨지는 와라비테도에는 칼날에 휨새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10]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자루에 털 뽑는 형태의 투각이 들어간 털 뽑기 형태의 와라비테도(毛抜形蕨手刀)가 만들어졌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와라비테도는 자취를 감추고, 털 뽑기 형태의 태도(毛抜形太刀)나 털 뽑기 형태의 칼(毛抜形刀)가 등장한다.
야마토 왕권은 권위의 증표로서 각지의 호족에게 장식 부착 대도를 주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에미시에게도 이러한 칼이 전해졌다.[11] 도호쿠 지방의 고분에서는 쇠로 된 장구를 갖춘 와라비테도 외에도 장식 부착 대도, 은장 칼 장구를 갖춘 방두 대도(方頭大刀), 조선에서 전해진 사자 모양의 손잡이(柄頭|츠카가시라) 등 교역을 통해 입수한 칼 종류도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다.[12]
신사의 보물이 된 칼도 존재한다.[13]
3. 1. 기원
일본에 말이 도입된 고분 시대에, 말 생산이 활발했던 동일본에서는 말 위에서 싸우거나 호신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짧은 산칼과 같은 직도가 생겨났다. 이 칼은 특징적인 손잡이를 한 손으로 쥐고 자세를 잡으면 칼날이 상대를 향하고, 내려쳐 베면 절단력이 뛰어났다.
에미시(도호쿠 지방)는 와진으로부터 말을 들여와 와라비테도를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궁술과 조합하여 독특한 기마술(전술)을 만들었다. 또한 와라비테도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손잡이 부분을 굽히고 칼날을 길게 만들었으며, 칼에 휘어짐(만도)을 주었다.[4]
와진은 전통적인 긴 직도를 개량하여 위력이 높은 칼과 제작 기술을 받아들였고,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일본도를 만들었다. 또한 기마술도 받아들였다.
이시이 마사쿠니는 와라비테도 연구의 큰 틀을 만들었고, 이후 연구를 통해 鐔(쓰바, 칼날과 자루 사이에 손을 보호하는 장치)이나 鞘(사야, 칼집)에 장착하는 刀装具(도소구, 칼 장식구), 柄頭(츠카가시라, 자루 끝부분)의 형태, 칼날이나 柄(츠카, 자루)의 휨새를 통해 1기부터 4기까지 변화를 파악했다. 와라비테도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약 2세기 동안 제작되었다.
와라비테도는 柄頭가 고사리의 어린 싹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자루에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쇠 칼자루(茎 (刀)|나카고)에 끈이나 실 등을 감아 쥔 共鉄柄(토모가네츠카)이다.
초기 형태는 칼날이 짧고, 특징적인 柄頭도 그리 크지 않으며, 군마, 나가노, 후쿠시마에 한정된다. 특히 고분 시대 이후 철검이 풍부한 군마가 와라비테도의 시원지로 유력하다. 초기 형태는 자루와 칼날이 직선적이다(직도). 그러나 자루를 쥐면 칼날이 약간 상대 방향으로 향하여 베는 순간 위력이 있었다. 낫처럼 폭이 넓은 것과 가느다란 것 모두 만들어졌다. 7세기 후반 무렵 도호쿠 지방 북부 고분 부장품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와라비테도는 에미시에게 받아들여져 개량되면서 위력이 더해졌다. 점차 자루의 휨새가 더해지고 칼날이 길어졌으며, 칼날에 휨새가 생겼다. 이로 인해 칼끝이 상대에게 더 가까워졌다. 만곡도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은 기마전이 성행했기 때문이라고 시모무카이 타츠히코는 지적한다. 에미시가 기마전에 능숙했다는 것은 『속일본기』 쇼와 4월 조에 "육오국(陸奥國) 언(言). ~ 세탁복궁마전투(洗復弓馬戦闘). 이지생습(夷之生習)."이라는 문면에서 엿볼 수 있다.
3. 2. 에미시와 와라비테도
고분 시대에 일본에 말이 도입된 이후, 동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말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말 위에서 사용하는 칼(혹은 호신용)로 와라비테도가 처음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산칼과 같은 짧은 직도 형태였으나, 특징적인 손잡이를 한 손으로 쥐면 칼날이 상대를 향하고 내려쳐 베는 방식으로 절단력이 뛰어났다.
에미시(도호쿠 지방)는 와진으로부터 말을 들여와 와라비테도를 받아들였고, 이를 그들의 전통적인 궁술과 조합하여 독특한 기마술(전술)을 개발하였다. 또한 와라비테도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개량을 거듭하여 손잡이 부분이 굽어지고 칼날이 길어졌으며, 칼에 휘어짐(만도)이 생겨났다.[4][5]
와진은 이러한 위력이 높은 칼(및 제작 기술)과 기마술을 받아들여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일본도를 만들어냈다. 와라비테도는 홋카이도(오호츠크 문화 포함)에도 에미시로부터 전래되었다.
히로사키 시립 히로사키 도서관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 전국에서 약 250점 가량의 와라비테도가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출토되었고, 나머지도 기타칸토 지역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분포는 에미시가 주로 사용하던 무기였음을 보여준다. 서일본에서도 몇 건의 출토 사례가 있으며[4], 쇼소인과 오미야 이와츠즈미 신사에는 전세도가 보존되어 있다.
야기 미츠노리는 와라비테도가 일본 전국에서 약 280점 정도 확인되었으며, 그 중 8할이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출토되어 에미시가 주로 사용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에미시만의 독점물은 아니며, 가고시마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분포가 확산되었다고 주장한다.
서국의 와라비테도는 에미시(후슈)가 휴대했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동국과 서국의 와라비테도 형식에 차이가 있어 이 설은 부정된다. 와라비테도는 릿코헤이 손잡이 칼과 마찬가지로 에미시의 고분이나 유적에 부장되었고, 에미시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와라비테도의 칼 휘어짐은 모누키형 와라비테도, 모누키형 태도로 변화하며 발전했고, 일본도의 조형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6] 그러나 츠노 히토시는 방두 대도 중 공철조의 것이 일본도의 출발점이라 주장하며, 일본도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이시이 마사쿠니의 연구 이후, 와라비테도는 칼 장식, 손잡이 형태, 칼날 및 손잡이의 휨새 등을 통해 1기부터 4기까지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와라비테도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약 2세기 동안 제작되었다. 출토 분포는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동일본의 말 생산지와 검은 흙(黑ボク土) 분포와 일치한다.
와라비테도는 칼자루(茎 (刀)|나카고)에 끈이나 실 등을 감아 쥔 共鉄柄(토모가네츠카)이며, 손잡이(柄頭|츠카가시라)가 고사리의 어린 싹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형태는 칼날이 짧고 손잡이도 크지 않으며, 군마, 나가노, 후쿠시마 지역에 한정된다. 특히 철검이 풍부한 군마 지역이 와라비테도의 시원지로 유력하다. 초기에는 자루와 칼날이 직선 형태(직도)였으나, 자루를 쥐면 칼날이 약간 상대 방향으로 향하여 베는 순간 위력이 있었다. 낫처럼 폭이 넓은 것과 가느다란 것 모두 제작되었다. 7세기 후반 무렵 도호쿠 지방 북부 고분 부장품의 대표적인 예시가 되었다.
에미시는 와라비테도를 개량하여 위력을 더했다. 점차 자루의 휨새가 더해지고 칼날이 길어졌으며, 칼날에도 휨새가 생겨 칼끝이 상대에게 더 가까워졌다. 시모무카이 타츠히코는 만곡도 형태에 가까워진 것이 기마전의 영향이라고 지적한다.[7] 에미시의 기마전 실력은 『속일본기』 쇼와 4월 조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6]
8세기 경에는 와라비테도의 손잡이가 고(鼓)와 같은 형태로 변화한 "立鼓柄刀(류고즈카토)"도 등장하였으며, 뱀 무덤 고분(蛇塚古墳)에서 와라비테도와 함께 출토되었다.[8][9]
9세기 후반 무렵의 와라비테도에는 칼날에 휨새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10]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자루에 털 뽑는 형태의 투각이 들어간 털 뽑기 형태의 와라비테도(毛抜形蕨手刀)가 제작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와라비테도는 자취를 감추고, 털 뽑기 형태의 태도(毛抜形太刀)나 털 뽑기 형태의 칼(毛抜形刀)가 등장한다.
야마토 왕권은 각지의 호족에게 장식 부착 대도를 주어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에미시에게도 이러한 칼이 전해졌다.[11] 도호쿠 지방의 고분에서는 쇠로 된 장구를 갖춘 와라비테도 외에도 장식 부착 대도, 은장 칼 장구를 갖춘 방두 대도(方頭大刀), 조선에서 전해진 사자 모양 손잡이 등 교역을 통해 입수한 칼 종류도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다.[12]
일부 와라비테도는 신사의 보물이 되기도 했다.[13]
3. 3. 일본도에 미친 영향
고분 시대에 말이 일본에 도입된 이후, 동일본 지역을 중심으로 말 위에서 싸우거나 호신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칼이 등장했다. 초기에는 산칼과 같은 짧은 직도 형태였으나, 점차 손잡이를 한 손으로 쥐고 휘두르기 편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칼은 상대를 향해 내려치면 절단력이 뛰어나 위력이 있었다.
에미시(도호쿠 지방)는 와진으로부터 말을 들여와 와라비테도를 받아들였고, 이를 전통적인 궁술과 결합하여 독특한 기마술(전술)을 개발했다. 또한 와라비테도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 개량을 거듭하여 손잡이 부분이 굽어지고 칼날이 길어졌으며, 칼 휘어짐(만도)이 생겨났다.
와진은 이러한 위력이 높은 칼과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일본도를 만들어냈다. 또한 기마술도 함께 받아들였다. 홋카이도(오호츠크 문화 포함)에도 에미시로부터 위력이 높은 칼로 전래되었다.
와라비테도는 모누키형 와라비테도, 모누키형 태도로 변화하면서 일본도의 조형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6] 그러나 츠노 히토시는 방두 대도 중 공철조의 것이 일본도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며, 일본도의 기원에 대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6]
4. 특징
신일본제철 연구소에서 궐수도를 분석한 결과, 사철을 원료로 사용했으며 탄소량이 적고 혼입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14] 칼날 부분만 탄소량이 많은 철로 감싼 경우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탄소량이 매우 적어 철의 경도가 약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것도 있어 품질 차이가 컸다. 규산염 등 혼입물이 많은 '''품질이 좋지 않은 철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나리야마 철검과의 정제도 차이를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궐수도는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처음부터 부장용 의례도로서 강도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를 입은 궐수도를 복원하면서 이와테현립박물관에서 보관하던 시료를 통해 금속 고고학적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궐수도에 포함된 구리, 니켈, 코발트의 3성분비를 기준으로 분류한 결과, 궐수도는 여러 장소에서 제작되었으며, 각 제작 장소에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칼 제작에 필요한 지금(地金)을 조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또한, 홋카이도 지역과 함께 고찰하여, 율령기에 상반국을 중심으로 하는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 북부 태평양 연안 지역 사이에서 철의 물질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그 영향이 홋카이도까지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한다.[15]
4. 1. 형태
고사리처럼 둥글게 말린 곡철(蕨手) 형태의 자루 머리에서 궐수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지만, 이는 현대 연구자들에 의한 명칭이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사용 예는 1882년(메이지 15년) 마츠우라 무시로가 편집한 도록 『발운여흥』 제2집이다.[2] 여기에는 이와테현 각총고분 출토 칼과 도다이지 쇼소인 전래 칼 그림을 나란히 놓고 "곡수도"라고 기재하였다.이름의 유래가 된 자루 머리의 용도와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손에서 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끈(테누키오)과 자루 머리의 끈을 통과시키는 구멍(카케토시코)과 자루 축이 이루는 각도를 예각으로 만들어 강한 쥐는 힘을 낸다는 설도 있다.[3]
이시이 마사쿠니가 蕨手刀(와라비테도) 연구의 큰 틀을 만든 후, 여러 연구를 통해 칼날과 자루의 휨새, 칼집(鞘)과 칼자루(鐔)에 장착하는 도장구(刀装具), 자루 머리(柄頭) 형태를 통해 1기부터 4기까지의 변천이 밝혀졌다. 궐수도가 제작된 시기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이다.
궐수도는 자루 머리(柄頭, 츠카가시라)가 어린 고사리 싹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전통적인 특징이다. 자루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쇠 칼자루(茎 (刀)|나카고)에 끈이나 실 등을 감아 쥔 공철병(共鉄柄, 토모가네츠카)이다.
초기 형태는 칼날이 짧고 자루 머리(柄頭)도 그리 크지 않으며, 군마, 나가노, 후쿠시마 지역에 한정된다. 특히 고분 시대 이후 철검이 풍부한 군마 지역이 궐수도의 시원지로 유력하다. 초기에는 자루와 칼날이 직선(직도)이었으나, 자루를 쥐면 칼날이 약간 상대 방향으로 향해 베는 순간 위력이 있었다. 낫처럼 폭이 넓은 것과 가는 것 모두 제작되었다. 7세기 후반 무렵 도호쿠 지방 북부 고분 부장품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궐수도는 에미시에 의해 개량되면서 위력이 더해졌다. 점차 자루의 휨새가 더해지고 칼날이 길어졌으며, 칼날에도 휨새가 생겼다. 이로 인해 칼끝이 상대에게 더 가까워졌다. 만곡도 형태에 가까워진 것은 기마전이 성행했기 때문이라고 시모무카이 타츠히코는 지적한다.[7] 에미시가 기마전에 능숙했다는 것은 『속일본기』 쇼와 4월 조의 "육오국(陸奥國) 언(言). ~ 세탁복궁마전투(洗復弓馬戦闘). 이지생습(夷之生習)."이라는 문구에서 엿볼 수 있다.[6]
8세기 무렵에는 궐수도의 자루 머리(柄頭)가 북(鼓)과 같은 형태로 변화한 "입고병도(立鼓柄刀, 류고즈카토)"도 등장하여, 뱀 무덤 고분(蛇塚古墳)에서 궐수도와 함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8][9]
9세기 후반 무렵으로 여겨지는 궐수도에는 칼날에 휨새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10]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자루에 털 뽑는 형태의 투각이 들어간 털 뽑기 형태의 궐수도(毛抜形蕨手刀)가 만들어졌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궐수도는 자취를 감추고, 털 뽑기 형태의 태도(毛抜形太刀)나 털 뽑기 형태의 칼(毛抜形刀)가 등장한다.
4. 2. 재질과 제작 기술
이시이 마사쿠니의 연구 이후, 궐수도(蕨手刀, 와라비테도)는 칼자루 끝부분(柄頭, 츠카가시라)의 형태, 칼날 및 칼자루(柄, 츠카)의 휨새 등 칼의 형태와 칼집(鞘, 사야) 등의 칼 장식(刀装具, 도소구)을 기준으로 1기에서 4기까지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궐수도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까지 약 2세기 동안 제작되었다.궐수도는 칼자루(茎 (刀)|나카고)에 끈이나 실 등을 감아 쥔 공철자루(共鉄柄, 토모가네츠카) 방식으로,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쇠로 만들었으며, 칼자루 끝부분(柄頭, 츠카가시라)이 어린 고사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형태는 칼날이 짧고 칼자루 끝부분도 크지 않았으며, 군마현, 나가노현, 후쿠시마현 지역에 한정되어 출토되었다. 특히 고분 시대 이후 철검이 많이 출토된 군마현이 궐수도의 시원지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초기에는 칼자루와 칼날이 직선 형태(직도)였지만, 칼을 쥐면 칼날이 약간 상대 방향으로 향하여 베는 순간 위력을 발휘했다. 7세기 후반 도호쿠 지방 북부 고분 부장품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에미시는 궐수도를 개량하여 자루의 휨새를 더하고 칼날을 길게 만들었으며, 칼날에도 휨새를 넣어 위력을 높였다. 시모무카이 타츠히코는 이러한 만곡도 형태가 기마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7] 8세기 무렵에는 궐수도의 칼자루 끝부분(柄頭)이 고(鼓)와 같은 형태로 변화한 "입고병도(立鼓柄刀, 류고즈카토)"도 등장하여, 뱀 무덤 고분(蛇塚古墳)에서 궐수도와 함께 출토되었다.[8][9]
9세기 후반 무렵의 궐수도에는 칼날에 휨새가 있는 것이 확인된다.[10]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칼자루에 털 뽑는 형태의 투각이 들어간 털 뽑기 형태의 궐수도(毛抜形蕨手刀)가 만들어졌고, 헤이안 시대 중기에는 궐수도가 사라지고 털 뽑기 형태의 태도(毛抜形太刀)나 털 뽑기 형태의 칼(毛抜形刀)이 등장한다.
신일본제철 연구소의 분석 결과, 궐수도는 사철을 원료로 사용했으며 탄소량이 적고 혼입물이 많았다.[14] 칼날 부분만 탄소량이 많은 철로 감싼 경우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탄소량이 매우 적어 철의 경도가 약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것도 있어 품질 차이가 컸다. 규산염 등 혼입물이 많은 '''품질이 좋지 않은 철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이나리야마 철검과의 정제도 차이를 보여준다. 현재 남아있는 궐수도는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인데, 처음부터 부장용 의례도로서 강도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를 입은 궐수도를 복원하면서 이와테현립박물관에서 보관하던 시료를 통해 금속 고고학적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궐수도에 포함된 구리, 니켈, 코발트의 3성분비를 기준으로 분류한 결과, 궐수도는 여러 장소에서 제작되었으며, 각 제작 장소에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칼 제작에 필요한 지금(地金)을 조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또한, 홋카이도 지역과 함께 고찰하여, 율령기에 상반국을 중심으로 하는 간토 지방과 도호쿠 지방 북부 태평양 연안 지역 사이에서 철의 물질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그 영향이 홋카이도까지 미쳤을 가능성을 제시한다.[15]
4. 3. 종류
고사리처럼 둥글게 된 곡철(蕨手)로 만들어진 자루 머리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지만, 곡수도라는 명칭은 현대 연구자들이 붙인 것이다.문헌상 가장 오래된 사용 예는 1882년(메이지 15년) 마츠우라 무시로가 편집한 도록 『발운여흥』 제2집이다.[2] 이와테현 각총고분에서 출토된 칼과 도다이지 쇼소인에 전해져 내려오는 칼의 그림을 나란히 놓고 "곡수도"라고 적고 있다.
이름의 유래가 된 특징적인 자루 머리의 용도와 목적은 불분명하지만, 손에서 칼이 떨어지지 않도록 자루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한 끈(테누키오)과 자루 머리에 있는 끈을 통과시키는 구멍(카케토시코)과 자루 축이 이루는 각도를 예각으로 만들어 강하게 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3]
이시이 마사쿠니에 의해 와라비테도(蕨手刀) 연구의 큰 틀이 만들어졌고, 그 후의 연구를 통해 칼날이나 자루의 휨새, 칼집(鞘)에 장착하는 칼 장식(刀装具), 자루 끝(柄頭)의 형태를 통해 1기부터 4기까지 변화 과정을 파악하게 되었다. 와라비테도가 제작된 시기는 7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친 약 2세기 동안이다. 출토 분포는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동일본의 말 생산지와 공통되며 검은 흙(黑ボク土)의 분포와 일치한다.
와라비테도는 자루 끝(柄頭)이 어린 고사리 싹과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이 전통적인 특징이다. 자루에는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쇠 칼자루(茎 (刀)|나카고)에 끈이나 실 등을 감아 쥔 공철자루(共鉄柄, 토모가네츠카)이다.
초기 형태는 칼날이 짧고, 특징적인 자루 끝(柄頭)도 그리 크지 않으며, 군마, 나가노, 후쿠시마에 한정된다. 특히 고분 시대 이후의 철검이 풍부한 군마가 와라비테도의 시원지로 유력하게 꼽힌다. 초기 형태는 자루와 칼날이 직선적이다(직도). 그러나 자루를 쥐면 칼날이 약간 상대 방향으로 향하여, 베는 순간의 위력이 있었다. 낫처럼 폭이 넓은 것과 가느다란 것 모두 만들어졌다. 7세기 후반 무렵 도호쿠 지방 북부의 고분 부장품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와라비테도는 에미시에게 받아들여져 개량되면서 위력이 더해졌다. 점차 자루의 휨새가 더해지고, 칼날이 길어지며, 칼날에 휨새가 생겼다. 이로 인해 칼끝이 상대에게 더 가까워졌다. 만곡도의 형태에 가까워진 것은 기마전이 성행했기 때문이라고 시모무카이 타츠히코는 지적하고 있다.[7] 에미시가 기마전에 능숙했다는 것은 『속일본기』 쇼와 4월 조에 "육오국(陸奥國)은 말하기를, ~ 활과 말을 씻고 전투를 반복한다. 이것은 오랑캐의 타고난 습성이다.(洗復弓馬戦闘. 夷之生習)"라는 문면에서 엿볼 수 있다.[6]
8세기 무렵에는 와라비테도의 자루 끝(柄頭)이 고(鼓)와 같은 형태로 변화한 "입고병도(立鼓柄刀, 류고즈카토)"도 등장하여, 뱀 무덤 고분(蛇塚古墳)의 부장품으로 와라비테도와 함께 출토되었다.[8][9]
9세기 후반 무렵으로 여겨지는 와라비테도에는 칼날에 휨새가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10] 게다가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자루에 털 뽑는 형태의 투각이 들어간 털 뽑기 형태의 蕨手刀(毛抜形蕨手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와라비테도는 자취를 감추고, 털 뽑기 형태의 태도(毛抜形太刀)나 털 뽑기 형태의 칼(毛抜形刀)가 등장한다.
야마토 왕권에서는 권위의 증표로서 각지의 호족에게 장식 부착 대도를 줌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관련이 깊은 에미시에게도 전해졌다고 한다.[11] 도호쿠 지방의 고분에서는 쇠로 된 장구를 갖춘 와라비테도 외에도, 장식 부착 대도, 은장 칼 장식(刀装具)을 갖춘 방두 대도(方頭大刀), 조선에서 전해진 사자 모양의 자루 끝(柄頭) 등 교역을 통해 입수한 칼 종류도 부장품으로 출토되고 있다.[12]
신사의 보물이 된 칼도 존재한다.[13]
5. 분포와 출토 현황
히로사키 시립 히로사키 도서관이 공표한 일본 전국의 궐수도(와라비테도) 분포도에 따르면, 현재까지 약 250점 가까이가 일본 전국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대부분이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출토되었고, 나머지도 기타칸토가 대부분이다.[4][5] 이 점으로 보아 에미시가 주로 사용하던 무기라고 생각되며, 서일본에서도 몇 건의 출토 사례가 있다.[4] 쇼소인과 오미야 이와츠즈미 신사에는 전세도가 보존되어 있다.
야기 미츠노리는 궐수도는 현재까지 약 280점 정도가 일본 전국에서 확인되었으며, 그 8할이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에미시가 즐겨 사용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반드시 에미시의 독점물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수는 적지만 가고시마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분포가 확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국의 궐수도는 에미시(후슈)가 이배와 함께 휴대했던 것으로 여겨졌지만, 동국과 서국에서는 궐수도의 형식에 차이가 있으므로, 이 설은 부정된다. 릿코헤이 손잡이 칼과 마찬가지로 궐수도는 에미시의 고분이나 유적에 부장되었고, 에미시 문화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를 입은 궐수도를 복원하는 동시에, 이와테현립박물관에서 미리 보존 처리 시 채취하여 보관하고 있던 시료를 사용하여 금속 고고학적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궐수도에 포함된 구리, 니켈, 코발트의 3성분비를 A~G로 분류한 결과, 궐수도의 제작이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며, 각 제작 장소에서 다른 지역으로부터 작도에 필요한 지금(地金)을 조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홋카이도 지역과 함께 고찰하여, 율령기에 상반국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 지방과 도호쿠 지방 북부의 태평양 연안역 사이에서 철의 물질 문화 교류가 활발해졌고, 그 영향이 홋카이도에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
6. 와라비테코(蕨手刀子)
손잡이 끝 모양에 주목했을 때, 손잡이의 끝부분(자루 밑)이 고사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칼날 길이가 1척(30.3cm)에 미치지 못하는[16] 칼자루는 '''고사리 손잡이 칼자루'''라고 불린다.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다수 출토되었으며, 이 또한 공철 손잡이이며, 10cm 전후에서 20cm가 넘는 것들이 발굴되고 있다[17]。이 고사리 손잡이 칼자루는 한반도에서는 대구광역시 달성 55호분 등 몇몇 고분에서 확인될 뿐이다. 마츠이 카즈유키에 따르면, 자루 부분이 칼날과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진 굽은 칼자루가 고사리 손잡이 칼자루의 기원으로, 부산광역시 노포동 유적 33호분(3세기 후반)이나 후쿠오카현 이케노우에 분묘군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18]。
이바라키현의 십오랑혈에서는 고사리 손잡이 칼과 함께 칼집 끝 장식이나 띠 고리 등의 장식 금속이 달린 칼자루가 출토되었다[19]。쇼소인에도 고사리 손잡이 칼("검은색 가로칼")이 보존되어 있다[20]。
야마가타현의 미사키야마 유적에서는 대륙과의 교역을 통해 입수한 것으로 보이는 약 3000년 전의 청동 칼자루가 출토되었다[21]。 크기는 15cm 전후에서 20cm를 넘으며 손잡이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 또한 조몬 시대 후기・만기에는 청동제 칼자루의 모조품으로 보이는 돌칼의 출토가 보인다[22]。
교역품인 청동 칼자루와 국산 돌칼과의 관계, 주로 서일본에서 보이는 고사리 손잡이 칼자루와의 관계, 어떤 경로와 경위를 거쳐 동북 지방에서 무기인 칼로서 대형화되어 보급되었는지 등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7. 현대의 와라비테도
궐수도는 에도 시대부터 확인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기록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편집한 『집고십종』에 실린 것이다. 간세이 12년(1800년)에 쓰인 수필 『계림만록(けいりんまんろく)』에는 칼끝에서 머리까지 2척 5촌 4분(약 77cm) 길이의 궐수도 그림이 실려 있으며, 현재의 이와테현와가군에서 출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이치노세키의 무쿠사도[23]가 궐수도의 작도 및 감정 연구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오슈(奥州) 대장장이(넓은 의미로는 데와 갓산 대장장이 포함)들이 야마토나 규슈로 초빙되어 야마토 센주인, 분고 유키히라, 사쓰마 나미히라 등의 유파로 이어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에조와의 교역을 통해 오호츠크 문화인에게도 궐수도가 전래되었다. 에사시정 메나시도마리 유적에서 발굴된 궐수도는 일본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25] 우사쿠마이 A 유적 부근에서 발견된 두 자루는 지토세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26]
7. 1. 대중문화 속 와라비테도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화 원령공주에서 주인공 아시타카가 허리에 차고 다니는 칼은 궐수도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다만, 칼자루는 청동 칼자루처럼 둥근 구멍이 있으며, 작화상의 이유로 칼날은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2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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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戸市の丹後平古墳群出土品が国重文に 末期古墳で初指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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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東日本の出土刀にみる彎刀の起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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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前市立弘前図書館 古代の生産活動と生活用具(9)蕨手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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刀姿・刀装具の様式変化―直刀から日本刀発生に至る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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蝦夷-古代エミシと律令国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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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墳時代の刀の楽しみ方 なぶんけんブロ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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黒作横刀 雛形 (柄 共鉄 蕨手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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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ホーツクミュージアムえさし(枝幸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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ふゅーじょんぷろだく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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