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아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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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귄터 아이히는 독일의 시인이자 라디오 극작가로, 1907년 레부스에서 태어나 1972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법학 및 중국학을 전공했으나 학업을 중단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시집 출판, 라디오 드라마 각본 집필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포로 생활을 겪었으며, 전후 47그룹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시집 『변방의 농장』, 라디오 드라마 ''황금 도시의 반란'' 등이 있으며, 1953년 작가 일제 아이힝거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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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아이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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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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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귄터 에리히 |
출생 | 1907년 2월 1일 |
출생지 | 레부스, 독일 제국 |
사망 | 1972년 12월 20일 |
사망지 |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 |
국적 | 독일 |
배우자 | 일제 아이힝거(1953년–1972년, 그의 죽음) |
직업 | |
직업 | 독일의 극작가 시인 작가 방송극 작가 |
수상 | |
수상 | 전쟁맹인 라디오극상 (1952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 (1959년) |
2. 생애
귄터 아이히는 독일 레부스(Lebus)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 베를린, 파리 등지에서 성장하며 법학과 중국학을 공부했으나 1930년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작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최신 시 선집'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고, 1929년 첫 라디오 드라마를 상연하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군 통신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1945년 미군 포로가 되었다가 1946년 석방되었다.[1] 전후 그는 1947년 47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시집 『변방의 농장』(Abgelegene Gehöfte|압겔레게네 게회프테de)으로 1950년 47년 그룹상을 수상했다. 1955년에는 중요한 시집 『비의 소식』(Botschaften des Regens|보트샤프텐 데스 레겐스de)을 발표했으며, 1959년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53년, 그는 오스트리아 작가 일제 아이힝거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아이히는 소설, 시, 라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1972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귄터 아이히는 독일 레부스(Lebus)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이프치히, 베를린, 파리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대학에서는 법학과 중국학을 전공했다. 1930년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는 '최신 시 선집'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처음 등장했다. 1929년에는 마르틴 라슈케와 공동으로 집필한 첫 라디오 드라마를 상연했으며, 같은 해 첫 시집 『시집』을 출판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아이히는 드레스덴, 베를린, 발트해 연안의 포비에로보(Pobierowo) 등지를 거점으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주로 라디오 드라마를 썼다.[1] 1931년에는 작가 그룹 "콜로네"에 소속되었다.
2. 2. 작가 활동
귄터 아이히는 ''최신 시 선집''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했다. 마르틴 라슈케와 공동으로 집필한 그의 첫 번째 라디오 드라마는 1929년에 상연되었으며, 같은 해 첫 시집 『시집』을 출판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아이히는 드레스덴, 베를린, 발트해 연안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주로 라디오를 위한 작품을 썼다. 1931년에는 작가 그룹 "콜로네"에 소속되었다. 그는 형성기를 라이프치히, 베를린, 파리에서 보내며 법학과 중국학을 전공했으나, 1930년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베를린과 발트해 연안의 포비에로보(Pobierowode)를 거점으로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군 통신 부대에서 복무하며 종군했다. 1943년에는 공습으로 인해 다수의 원고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그는 미군 포로 수용소에 억류되었고, 이듬해인 1946년 석방되어 바이에른의 가이젠하우젠으로 이주했다.[1]
전쟁 포로로 억류되었던 경험 이후, 그는 1947년 47 그룹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1948년에는 시집인 『변방의 농장』(Abgelegene Gehöftede)을 발표했으며, 이 시집에 실린 (당시 미발표 상태였던) 시들로 인해 1950년 47 그룹상(젊은 작가를 위한 문학상)의 첫 수상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55년에는 전후 독일 서정시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 시집 『비의 소식』(Botschaften des Regensde)을 발표했다. 또한 1960년경까지 다양한 방송극의 각본을 집필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53년, 그는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일제 아이힝거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클레멘스(1954년 출생)와 딸 미르얌(1958년 출생)을 두었다. 1959년에는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했다. 아이히는 남은 생애 동안 소설, 시, 라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으며, 1972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2. 3. 나치 시대와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5월 1일, 아이히는 나치당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9]나치 시대 동안 그의 라디오 드라마는 종종 나치 정권의 선전 요구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를 들어, 블루트 운트 보덴(Blut und Boden) 이데올로기에 따른 농촌 생활을 찬양하고, 정권이 적으로 규정한 이들의 '퇴폐적인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식이었다. 아이히가 이러한 라디오 드라마를 집필한 주된 이유는 생계유지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군 통신 부대원으로 종군했다.[1] 1943년에는 공습으로 인해 다수의 원고를 잃기도 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1946년에 석방되었다.[1]
전쟁 이후 아이히는 억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만약 우리의 작품이 비판, 반대, 저항으로 이해될 수 없다면 [...] 우리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도살장에 제라늄을 장식하는 셈이다."[10]라고 말했으며, 특히 "불편하게 굴어라, 세상의 톱니바퀴 속 기름이 아닌 모래가 되어라!(Seid unbequem, seid Sand, nicht das Öl im Getriebe der Welt!|자이트 운베크벰, 자이트 잔트, 니히트 다스 욀 임 게트리베 데어 벨트!de)"[11]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들은 나치 시대 그가 보여준 행적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미국 시인 제임스 디키는 일본 벳푸에 대한 야간 공습을 다룬 자신의 시 '화염 폭탄 투하(The Firebombing)' 서문에 아이히의 글 일부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Denke daran, dass nach den großen Zerstörungen|뎅케 다란, 다스 나흐 덴 그로센 체르슈퇴룽엔de''
::''Jedermann beweisen wird, dass er unschuldig war.|예더만 베바이젠 비르트, 다스 에어 운슐디히 바르.de''
대략적인 의미는 '기억하라: 거대한 파괴가 끝난 뒤에는 / 모든 사람이 자신이 무죄였음을 증명하려 할 것이라는 점을.'과 같다.
2. 4.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 통신 부대에서 복무했던 귄터 아이히는 1945년 미국 포로 수용소에 억류되었다. 1946년 석방된 후 바이에른의 가이젠하우젠으로 이주했다.[1] 전쟁 포로 경험은 그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석방 이듬해인 1947년, 그는 전후 독일 문학의 중요한 그룹인 47 그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1948년에는 포로 체험 등을 바탕으로 한 시집 『변방의 농장』(Abgelegene Gehöftede)을 발표했다. 이 시집에 실린 미발표 시들로 1950년에 47년 그룹상의 첫 수상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53년에는 유대계 오스트리아 작가 일제 아이힝거와 결혼하여, 아들 클레멘스(1954년 출생)와 딸 미르얌(1958년 출생)을 두었다. 1955년에는 전후 독일의 대표적인 서정시로 평가받는 시집 『비의 소식』(Botschaften des Regensde)을 발표했다.
1960년경까지 다양한 방송극 각본을 집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소설과 시도 꾸준히 발표했다. 1959년에는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했다.
아이히는 1972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
2. 5. 결혼
1930년대에 첫 번째 아내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1951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53년, 그룹 47의 동료 멤버이자 작가인 일제 아이힝거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클레멘스(1954년생)와 딸 미르얌(1958년생)이 있다.2. 6. 사망
아이히는 1972년 잘츠부르크에서 사망했다.3. 작품 세계
- Changed Landscape
- Clearings in the Woods (테오 세이버리 역)
- Dreams
- Inventory
3. 1. 초기 작품 경향 (1929-1932)
1929년 첫 시집 『시집』을 출판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아이히는 문학 잡지 Ana Victoria|아나 빅토리아deu[2]와 Die Kolonne에 글을 기고했다.《디 콜로네》는 동시대 모더니즘 문학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가받으며, "내면 생활의 본질적인 영원성,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의 개념, 예술의 종교적 기능"이라는 세 가지 중심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3] 아이히는 시와 정치 사이에는 근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 Bemerkungen über Lyrik|서정시에 대한 고찰deu에서 시인을 als Lyriker|시인으로서deu와 als Privatmann|사적인 인물로서deu로 구분하며, 시인이 작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5]
이러한 경향 때문에 아이히는 문학적 보수주의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요하네스 R. 베허(Johannes R. Becher)의 시 Der Große Plan|거대한 계획deu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에 공개적으로 연대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6] 연구자 쿠오모(Cuomo)에 따르면, 《디 콜로네》의 전반적인 특징은 자유주의적이거나 진보적이라기보다는 보수적이라고 평가된다.[6] 《디 콜로네》는 아이히 자신의 미학적, 이념적 견해를 강하게 대변했으며, 대체로 비정치적인 성격을 표방했음에도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 잡지는 문학을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분리하려는 목표를 분명히 했다.[1]
1931년에는 작가 그룹 "콜로네"에 소속되었다. 이는 그가 라이프치히, 베를린, 파리 등에서 법학과 중국학을 공부하다 1930년대에 학업을 중단하고, 베를린과 발트해 연안의 포비에로보(Pobierowo) 등지를 거점으로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3. 2. 나치 시대의 작품 (1933-1945)
1933년 5월 1일, 아이히는 나치당에 입당 신청을 했지만 거부당했다.[9]이 시기 아이히의 문학 작품 대부분은 라디오 연극이었으며, 그 수는 160편에 달했다.[7]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황금 도시의 반란''이다. 이 연극은 괴벨스 선전부가 주도한 반(反)영국 라디오 캠페인 기간 중인 1940년 5월 8일에 방송되었다. 내용은 남아프리카의 한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명백히 자본주의적인 영국인 소유주 펨브로크 경에게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파업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이히 본인의 필체로 된 방송 대본이 남아있지 않아, 그가 이 연극의 완전한 저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8]
아이히의 라디오 드라마는 종종 나치 정권의 선전 요구에 부합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를 들어, 피와 땅(Blut und Boden) 이데올로기를 반영하여 농촌 생활을 찬양하거나, 정권이 적으로 규정한 세력의 '퇴폐적인'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식이었다. 아이히가 이러한 라디오 드라마를 다수 집필한 주된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
:: Eichs Rundfunktätigkeit beschränkte sich auf den Hörspielbereich und diente dem Broterwerb. [...] Wie viele Hörspiele, Märchenbearbeitungen, Kalenderblätter Eich auch schrieb, niemals hat er damit «Karriere« gemacht.|아이히스 룬트풍크테티히카이트 베슈렝크테 지히 아우프 덴 회어슈필베라이히 운트 딘테 뎀 브로터베르프. [...] 비 필레 회어슈필레, 메르헨베아르바이퉁엔, 칼렌더블레터 아이히 아우흐 슈리프, 니말스 하트 에어 다미트 카리에레 게마흐트.de[12]
:: (아이히의 방송 활동은 라디오 드라마 분야에 한정되었으며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 아이히가 아무리 많은 라디오 드라마, 동화 각색, 달력 원고를 썼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으로 '출세'를 하지는 못했다.)
전쟁 후, 아이히는 억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많은 공개적인 발언을 남겼다.
- "만약 우리의 작품이 비판, 반대, 저항으로 이해될 수 없다면 [...] 우리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도살장에 제라늄을 장식하는 셈이다."[10]
- Seid unbequem, seid Sand, nicht das Öl im Getriebe der Welt!|자이트 운베크벰, 자이트 잔트, 니히트 다스 욀 임 게트리베 데어 벨트!de (불편하게 행동하라, 세상의 톱니바퀴 속 기름이 아닌 모래가 되어라!)[11]
그러나 이러한 전후 발언들은 나치 시대 그가 보여준 행동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는 비판이 있다.
아이히의 작품은 후대 작가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미국 시인 제임스 디키는 1965년 일본 벳푸에 대한 야간 공습을 다룬 자신의 시 "화염 폭탄 투하(The Firebombing)"를 아이히의 시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 Denke daran, dass nach den großen Zerstörungen Jedermann beweisen wird, dass er unschuldig war.|뎅케 다란, 다스 나흐 덴 그로센 체르슈퇴룽엔 예더만 베바이젠 비르트, 다스 에어 운슐디히 바르.de
:: (기억하라: 거대한 파괴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무죄였음을 증명하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아이히의 전집은 1991년에 4권으로 출판되었다.
3. 3. 전후 작품의 특징
전쟁 후, 아이히는 억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많은 공개적인 발언을 했다. "만약 우리의 작품이 비판, 반대, 저항으로 이해될 수 없다면 [...] 우리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도살장에 제라늄을 장식하는 셈이다."[10] 또한 Seid unbequem, seid Sand, nicht das Öl im Getriebe der Welt!deu 즉 "불편하게 굴어라, 세상의 톱니바퀴 속 기름이 아닌 모래가 되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1]그러나 이러한 전후의 발언은 나치 시대 그의 실제 행동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그의 라디오 드라마는 종종 나치당의 선전 요구에 부응했으며, 피와 땅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농촌 생활을 찬양하고 정권이 적으로 규정한 이들의 '퇴폐적인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심지어 1933년 5월 1일에는 나치당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거부당한 기록도 있다.[9] 아이히가 나치 정권 하에서 라디오 드라마를 쓴 데에는 생계를 위한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Eichs Rundfunktätigkeit beschränkte sich auf den Hörspielbereich und diente dem Broterwerb. [...] Wie viele Hörspiele, Märchenbearbeitungen, Kalenderblätter Eich auch schrieb, niemals hat er damit «Karriere« gemacht.deu[12]
> 아이히의 방송 활동은 라디오 드라마에 국한되었고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가 쓴 많은 라디오 드라마, 동화 각색, 달력 페이지처럼 그는 결코 그것으로 '출세'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전집은 1991년에 4권으로 출판되었다.
미국의 시인 제임스 디키는 1965년 일본 벳푸에 대한 야간 공습을 다룬 자신의 시 "화염 폭탄 투하"를 아이히의 작품에서 인용한 다음 구절로 시작했다.
::Denke daran, dass nach den großen Zerstörungendeu
::Jedermann beweisen wird, dass er unschuldig war.deu
::대략적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 점을 기억하라: 거대한 파괴 이후에::모든 사람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할 것이다.
4. 주요 작품
- ''Changed Landscape''
- ''Clearings in the Woods'' (테오 세이버리 역)
- ''Dreams''
- ''Inventory''
5. 수상 경력
귄터 아이히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1950년에는 그가 회원으로 활동했던 문학 단체인 47 그룹이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 1953년에는 그의 라디오 드라마 Die Andere und ich|그 여자와 나de로 전쟁 맹인 라디오 극상을 수상했다.[13] 또한 1959년에는 게오르크 뷔히너 상[14]을, 1968년에는 실러 기념상을 수상했다.
참조
[1]
서적
Günter Eich
https://archive.org/[...]
Twayne Publishers, Inc.
1971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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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
2003
[3]
서적
[4]
논문
The Theory and Practice of Apolitical Literature: Die Kolonne 1929–1932‘
1977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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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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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Opposition or Opportunism? Gunter Eich’s Status as Inner Emigrant
Berghahn Books
2005
[8]
서적
Flight of Fantasy
Berghahn Books
2005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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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Fischer
2007
[10]
서적
Vermischte Schriften
Suhrkamp
1991
[11]
서적
Träume (1950)
1981
[12]
서적
"Unsere Sünden sind Maulwürfe": die Günter-Eich-Debatte
Editions Rodopi
1996
[13]
웹사이트
Hörspielpreis der Kriegsblinden
http://www.kriegsbli[...]
Bund der Kriegsblinden Deutschlands e.V.
2012-04-07
[14]
웹사이트
Günter Eich
https://www.deutsche[...]
202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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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Günter Eich
https://www.poetryfo[...]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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