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갑 (1936년)
1. 개요
김용갑은 1936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다.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서 근무했으며, 노태우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15대, 16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보이며 사회 현안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현재는 국민의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름 | 김용갑 |
|---|---|
| 출생일 | 1936년 9월 28일 |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밀양군 초동면 |
| 국적 | 대한민국 |
| 학력 |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
| 군복무 | 육군소령 전역 |
| 종교 | 불교 |
| 본관 | 김해 |
| 정당 | 국민의힘 |
| 지역구 | 경남 밀양시(15) 경남 밀양시·창녕군(16·17) |
| 의원 선수 | 3 |
| 의원 대수 | 15·16·17 |
| 당내 직책 | 상임고문 |
| 웹사이트 | 대한민국헌정회 김용갑 |
| 주요 경력 | 중앙정보부 검찰국장 국가안전기획부 감찰실장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청와대 민정수석 제22대 총무처 장관 새누리당 상임고문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국민의힘 상임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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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 -
추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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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부 -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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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총무처 장관 -
허정
허정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 교통부 장관, 사회부 장관, 서울특별시장 등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로, 4·19 혁명 후 대통령 권한대행 및 국무총리를 지내며 제2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
대한민국의 총무처 장관 -
이상배 (1939년)
이상배는 행정고시 합격 후 울진군수, 안동시장, 경상북도지사, 환경청장, 서울특별시장 등 주요 행정 관료를 역임하고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
경상남도의 국회의원 -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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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의 국회의원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2. 생애
1936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 17기로 졸업하고 군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 후 1971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서 근무했으며, 노태우 정부 시절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시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신한국당에 입당했으며, 2000년 제16대 총선과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의원 시절 강경 보수 성향을 보이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이후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 현재 국민의힘 상임고문으로 있다.
2.1. 군 복무 및 공직 생활
1936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1961년 육군사관학교를 17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베트ナム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1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에는 공직자로 전환하여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근무했다. 유신 체제 후반기에 중앙정보부 감찰국장으로 승진했으며, 1981년에는 안기부 감찰실장을 거쳐 기획조정실장이 되었다. 5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기조실장직을 유지했다. 1985년 2월, 후배 양성을 이유로 대통령에게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고 미국 UC 버클리에서 연수하던 중,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1986년에는 당시 야당인 신한민주당이 추진하던 대통령 직선제 개헌 관련 행사장에 잠입하여 현장 상황을 파악하고 이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때는 시위대가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에 직접 들어가 최루탄을 맞아가며 현장의 목소리를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강하게 건의했다. 얼마 후 전두환 대통령은 직선제 수용 의사를 밝혔고,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는 이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총무처 장관 재직 중에는 공무원의 처우 개선에 힘썼으며,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공휴일로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공무원 출근부를 폐지하고 원탁회의나 와이셔츠 차림의 편안한 회의 방식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하여 시행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당시 총무처 직원들 사이에서는 유연하고 기발한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88년 8월, 장관 재직 중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여소야대 국회 구도로는 좌경화를 막기 불가능하며, 대한민국은 월남식 공산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발언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으로 국회에 출석하여 야당 의원들의 거센 추궁을 받았으나, 그는 오히려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느냐"고 맞받아치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그에게는 '우익의 기수', '우익의 대변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1989년 3월, 김용갑은 좌익 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총무처 장관직에서 사퇴했다. 그의 이러한 사퇴는 보수 진영과 반대 진영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장관직 사퇴 후에는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인 '민주개혁 범국민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2.2. 총무처 장관 시절
노태우 정부에서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장관 재직 중에는 공무원 처우 개선에 힘썼으며, 민속 명절인 설날을 공휴일로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공무원 출근부를 폐지하고 원탁회의를 도입하는 등 업무 방식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했으며, 와이셔츠 차림의 편안한 회의 문화를 장려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당시 총무처 직원들 사이에서는 유연하고 기발한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1988년 8월, 총무처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 여소야대 구도로는 좌경화를 막기 불가능하고 대한민국은 월남식 공산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발언을 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발언으로 인해 국회에 출석하여 야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추궁을 받았으나, 그는 국회 질의 과정에서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느냐"며 강하게 맞받아쳤다. 이 사건 이후로 그에게는 '우익의 기수', '우익의 대변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1989년 3월, 김용갑은 좌익 세력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장관직에서 사퇴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퇴는 보수 우익 진영과 상대 진영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3. 정치 활동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서 근무하였다. 유신 후반 중앙정보부 감찰국장으로 승진했고, 1981년에는 안기부 감찰실장을 거쳐 기조실장이 되었다. 5공 출범 후에도 기조실장에 유임되었다가 1985년 2월 후배 양성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후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임명되어 귀국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총무처 장관을 지냈다.
1986년에는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 추진 행사장에 잠입하여 정세를 파악하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에는 명동성당 농성 현장에 직접 들어가 시위대의 목소리를 수집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달하며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전두환은 직선제를 수용했고,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총무처 장관 재직 중에는 공무원 처우 개선에 힘썼으며, 민속 명절인 설날을 공휴일로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공무원 출근부를 폐지하고 원탁회의나 와이셔츠 차림 회의를 도입하는 등 유연한 조직 문화를 시도하여 당시 총무처 직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88년 8월, 총무처 장관 재직 시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여소야대 국회 구도로는 좌경화를 막기 불가능하며 대한민국은 월남식 공산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발언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으로 국회에 출석하여 야당 의원들의 추궁을 받았으나, 그는 "이 땅의 우익은 죽었느냐"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그에게는 '우익의 기수', '우익의 대변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1989년 3월, 김용갑은 좌익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장관직을 사퇴하였다. 사퇴 후에는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인 '민주개혁 범국민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고향인 경남 밀양시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의원이 된 이듬해 신한국당에 입당하였고, 당내에서 '나라의 안보를 걱정하는 국회의원 모임'을 조직하여 대표를 맡았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그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는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을 향해 조선로동당 2중대라고 비난하여 논란을 빚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대북 퍼주기 정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강경한 대북 노선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일관되게 지키며 소신 발언을 이어가 국회 내에서 소신파 의원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2002년 한나라당 내에서 이른바 '5·6공 인사 용퇴론'이 제기되자, 김용갑은 "나는 5·6공 때의 내 역할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발언하여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는 용퇴론에 반발하는 모임을 주도하며 소장파 의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2004년 2월에는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한나라당 내 소장파 의원들로부터 공천 반대 움직임이 있었으나,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이었던 김문수는 그를 공천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정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나라당이 여당이 된 후에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 보수 진영 내에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보수 인사의 대명사'로 불리며 일부 인사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후 한나라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을 거쳐 현재 국민의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3. 학력
* 1955년 밀양농잠고등학교 졸업
* 1961년 육군사관학교 17기 (이학사)
* 1961년 육군보병학교 졸업
* 1980년 국방대학원 졸업
* 1985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수학
4. 저서
* 1999년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
5. 가족 관계
* 배우자: 김하야
* 자녀: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