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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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학은 대한민국의 드라마 PD로, 1951년 제천 출생이다.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MBC에 입사하여, 1981년 《수사반장》으로 데뷔했다. 송지나 작가와 여러 작품을 함께하며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을 연출하여 높은 시청률을 기록, 스타 PD 반열에 올랐다. 1995년 제작사 제이콤을 설립하고, 이후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2013년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분당의 고시텔에서 자살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드라마의 시각적 패러다임을 바꾸고 황금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모래시계》 등은 한국 텔레비전의 상징적인 걸작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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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종학 |
한글 표기 | 김종학 |
한자 표기 | 金鍾學 |
로마자 표기 | Gim Jong-hak |
출생일 | 1951년 11월 5일 |
출생지 | 제천, 충청북도, 대한민국 |
사망일 | 2013년 7월 23일 |
사망지 | 분당구, 경기도, 대한민국 |
사망 원인 | 자살 ( 일산화탄소 중독) |
직업 |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 영화 제작 |
활동 기간 | 1981년-2013년 |
학력 |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 학사 |
가족 | |
경력 | |
데뷔 | 1977년 (프로듀서) |
2. 생애
김종학은 1951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4남 4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25] 휘문고등학교와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20] 1977년 MBC에 입사하여, 범죄 추리극 《수사반장》(1981년)으로 PD 경력을 시작했다.[1][25]
1991년 《여명의 눈동자》로 최고 시청률 58.4%를 기록하며 스타 PD가 되었다.[25] 1995년 MBC를 떠나 제작사 제이콤을 설립, 《모래시계》를 제작하여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했다. 1999년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2013년 7월 2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고시텔에서 연탄가스를 피워 자살했다.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과 관련된 배임, 횡령, 사기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26] 검찰의 사전구속영장 청구 후 영장실질심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27] 영등포경찰서는 사망으로 인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한다고 밝혔다.[26] 유해는 경기도 성남 영생원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26]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김종학은 1951년 11월 5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4남 4녀 중 7번째이자 막내로 태어났다.[25][20]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전국고교연극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25][20]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였다.[20]2. 2. MBC 입사, 드라마 PD 데뷔
1977년 MBC에 입사했다. 첫 작품은 범죄 추리극으로 유명했던 《수사반장》(1981년)이다.[1][25] 대부분의 신입 연출가(한국에서는 PD라고 부른다)들처럼 베테랑들을 보조하며 경력을 쌓았다.[1] 스승인 이병훈의 사극 중 하나인 '암행어사'에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연출을 맡으며 실력을 쌓았다.2. 3. 송지나 작가와의 협업
송지나 작가와 1987년 MBC 드라마 '퇴역전선'으로 처음 호흡을 맞춘 뒤 '우리읍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대망', '태왕사신기', '신의'까지 모두 7편의 드라마에서 함께 작업했다.[28] 김종학은 2012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송 작가와는 '애증의 관계'라며 "작품을 할 때마다 대본 때문에 만날 싸우다 끝날 때는 다시는 보지 말자 맹세하고 돌아서길 몇 번 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28]2. 4. 《여명의 눈동자》와 《모래시계》
1991년 송지나 작가와 함께 제작한 《여명의 눈동자》는 최고 시청률 58.4%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김종학을 스타 PD 반열에 올려놓았다.[25] MBC 창사 3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김성종의 10권짜리 장편소설(1981년 출간)을 각색하여 한국 텔레비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90년 6월에 촬영을 시작하여 필리핀과 하얼빈(당시 한국과 중국은 수교 전)에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제작비는 72억원(당시 평균 드라마 제작비의 5~10배)에 달했으며, 270명이 넘는 배우와 2만 1천 명의 단역 배우가 참여했다. 최재성, 박상원, 채시라가 주연을 맡아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까지 격동의 역사 속에 휘말린 젊은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1991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58.4%를 기록했다.[2]1995년 MBC를 떠나 제작사 제이콤을 설립하고 처음 제작한 《모래시계》는 '귀가시계'로 불리며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는 당시 신생 방송사였던 SBS가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모래시계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한국 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논평을 담고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재현 장면 사이사이에 당시의 기록 영상이 삽입되었다). 국내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 중 하나로, 방송이 되는 동안 서울 거리가 한산했다고 전해진다. 평균 시청률 50.8%, 최고 시청률 64.5%(역대 3위)를 기록한 모래시계는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 이정재를 최고 스타로 만들었고, 김종학을 한국 텔레비전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3]
《모래시계》와 《여명의 눈동자》는 김종학과 송지나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그들 간의 협업이나 다른 협력자들과의 작품은 비평적, 상업적 성공 면에서 이 두 작품의 높이에 도달하지 못했다.
2. 5. 제작사 설립과 이후 활동
1995년 MBC를 떠나 제작사 제이콤을 설립하고 처음 제작한 《모래시계》가 '귀가시계'로 불리며 최고 시청률 64.5%까지 오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당시 신생 방송사였던 SBS가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25] 1999년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했다.[4]1991년은 SBS가 개국하여 현재까지 존재하는 한국의 3대 방송사 체제가 형성된 해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송국의 등장은 양적, 질적 경쟁을 격화시켰고, SBS는 경쟁 방송사에서 작가와 PD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김종학은 1992년 MBC를 떠나 프리랜서 프로듀서가 되었고, 송지나와 함께 설립한 제작사 Jcom을 운영했다. 1995년, 그는 송지나와 함께 SBS로 자리를 옮겨 모래시계를 제작했다. 모래시계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같은 한국 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논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으며, 국내 역사상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 중 하나가 되었다. 방송이 되는 동안 서울 거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평균 시청률 50.8%, 최고 시청률 64.5%(역대 3위)를 기록한 모래시계는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 이정재를 최고 스타로 만들었고, 김종학을 한국 텔레비전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3]
모래시계와 여명의 눈동자는 김종학과 송지나의 최고작이었으며, 그 이후 그들 간의 협업이나 다른 협력자들과의 작품은 비평적, 상업적 성공 측면에서 같은 높이에 도달하지 못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김종학은 브라운관에서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추격자(Push! Push!)를 포함한 네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1998년에는 3.98 백야로 다시 텔레비전에 복귀했다. 3.98 백야는 김종학의 이전 드라마만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못했다.[1]
1999년, 김종학은 자신의 회사 이름을 김종학프로덕션으로 변경했다.[4] (2018년 현재, 이 회사는 이에스에이(주)(ESA Co., Ltd.)의 자회사이다.)[5]
그는 2002년 대망(Daemang)에서 송지나 작가와 여섯 번째로 협업했다.
김종학 프로덕션을 설립한 이후로는 제작자로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인순이는 예쁘다'와 영화 '인샬라', '산부인과' 등에 참여했다. 연출과 제작을 병행하면서 제작비 관련 소송에 여러 번 휘말리기도 했다.[24]
2. 6. 죽음과 그 이후
2013년 7월 23일, 김종학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의 한 고시텔에서 연탄가스를 이용해 자살했다. 그는 드라마 출연료 미지급과 관련해 배임, 횡령, 사기 혐의로 서울 영등포경찰서와 강남경찰서의 조사를 받아왔다.[26]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김종학은 영장실질심사에 참석하지 않았다.[27] 영등포경찰서는 "대상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해당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26] 그의 유해는 경기도 성남 영생원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다.[26]경찰은 숯불을 이용한 자살로 추정하며, 김종학이 문과 창문을 테이프로 막았고 시신 근처에서 반쯤 탄 숯이 발견되었다고 밝혔다.[16]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고, 시신에 외상도 없었다. 그는 유족에게 사과하고 검찰을 비판하는 내용의 4쪽짜리 유서를 남겼다.[16] 유서에서 김종학은 검찰 수사에 대해 "김 검사(이름 생략), 당신의 야망, 그리고 음반업계와의 공모에 분노합니다. 드라마를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사과하십시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을 모래성으로 만들고 정의의 손이라고 말하는 당신. 유령들이 당신의 말을 애통해 합니다. 당신이 기소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결론을 강요했고, 그다음은요? 나는 조작당했습니다."라고 적었다.[16]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은 성명에서 김종학을 "불완전한 외주 제작 시스템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라고 규정하며, "방송사만 이익을 보는 외주 제작 시스템이 근절되지 않는 한 이러한 비극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12]
김종학과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한 작가 송지나는 드라마 '신의' 주연 배우 김희선이 드라마 제작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는 스태프와 신인 배우들에게 접근받았고, 김종학의 사망 후 다른 출연진과 함께 죄책감을 느꼈다고 밝혔다.[17][18]
3. 작품 목록
체이컴 설립 후 첫 작품,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제작 겸임
극본 송지나 외, 제작 겸임
극본 송지나, 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