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 (1923년)
1. 개요
김형일은 1923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8연대장, 육군본부 정보국장, 제2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육군참모차장으로 재직 중 박정희의 신원조회에 '좌익'이라고 답변하여 박정희와 갈등을 겪었고,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4선을 역임했다. 1978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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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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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출생 -
잭 킬비
잭 킬비는 미국의 전자 공학 기술자이자 집적 회로의 공동 발명가로, 1958년 단일 반도체 재료에 회로 부품을 집적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1959년 최초의 집적 회로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으며, 200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
1923년 출생 -
밥 바커
밥 바커는 《진실 혹은 결과》와 《정가는 얼마일까요》를 진행하며 큰 인기를 얻은 미국의 텔레비전 게임 쇼 진행자이자, 은퇴 후 동물 권리 운동가로 활동하며 동물 보호를 위한 기부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 생애
1961년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0월 기소유예되었고, 같은 해 11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2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귀국,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78년 56세로 사망할 때까지 9대 국회의원을 포함하여 내리 4선을 하였으며, 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하였다. 6대 국회 때에는 정부전복 음모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군 복무
1923년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났다. 1945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학도병으로 일본군 소위로 복무했다.
1946년 2월 9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번 10045번) 제8연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8년 8월 8일, 제8연대장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5월 표무원, 강태무 대대의 월북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49년 6월 20일, 육군본부 병기감에 임명되었다. 1950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미군 제7사단에서 연수를 받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같은 해 8월, 육군본부 부 전황시찰관(소장)에 임명되었고, 10월에는 육군본부 특무부대장이 되었다. 1951년 제7사단장(준장)을 거쳐, 같은 해 10월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역임했다. 1952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되었다.
1953년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 다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았다. 1956년 12월, 합동참모본부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3월 2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2일 제2군단장을 역임했다. 1960년 9월 3일 육군참모차장으로 임명되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61년 3월 2일,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2.2. 박정희와의 갈등 및 예편
1960년 민주당 집권 후 이종찬 장군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했다. 그러나 장면은 확답을 주지 않고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다. 얼마 후 매그루더는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박정희의 신원 조회를 요청했다.
당시 육군참모차장이던 김형일은 '박정희는 레프트(좌익)다'라고 답변했다. 이 말을 들은 매그루더는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했다.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던 박정희는 이 일로 인해 2군 부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이처럼 박정희의 신원을 매그루더에게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국방부 장관 특별 보좌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2.3. 정치 활동
1960년 민주당 집권 후 이종찬 장군이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 장군의 중용을 건의했으나, 장면은 매그루더 사령관과 논의했다. 매그루더는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했고, 당시 육군참모차장이던 김형일은 '박정희는 좌익'이라고 답했다. 매그루더는 장면에게 항의했고,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으로 전출되었다.
이 일로 김형일은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 국방부 장관 특별 보좌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6대 국회 때 정부전복 음모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9대까지 4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신민당 원내총무 등을 역임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정당)으로 당선되어 민정당 당무위원, 경기 제10지역 당위원장을 역임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화성군, 신민당)으로 당선되어 신민당 정무위원, 중앙훈련원 원장을 역임했다. 1970년에는 신민당 정무위원 겸 당기위원이 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화성군, 신민당)으로 당선되어 신민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화성군, 신민당)으로 당선되어 신민당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3. 상훈
| 훈장 | 내용 |
|---|---|
| 을지무공훈장 | 3개 |
| 충무무공훈장 | 1개 |
| 화랑무공훈장 | 2개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1957년 7월 31일 |
4.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선거명 | 대수 | 직책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선 여부 | 비고 |
|---|---|---|---|---|---|---|---|---|---|
| 1963년 | 총선 | 6대 | 국회의원 | 민정당 | 1,870,976표 (20.1%) | 전국구 7번 | 당선 | 초선 | |
| 1967년 | 총선 | 7대 | 국회의원 | 경기 화성군 | 신민당 | 36,852표 (48.89%) | 1위 | 당선 | 재선 |
| 1971년 | 총선 | 8대 | 국회의원 | 경기 화성군 | 신민당 | 42,197표 (58.88%) | 1위 | 당선 | 3선 |
| 1973년 | 총선 | 9대 | 국회의원 | 경기 수원시·화성군 | 신민당 | 61,150표 (41.74%) | 2위 | 당선 | 4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