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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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스르 왕조는 1232년 무함마드 1세가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건국한 이슬람 왕조이다.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에 조공을 바치며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으며, 특히 알함브라 궁전을 건설하여 예술적, 건축적 발전을 이루었다. 1469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통합 이후 공격이 본격화되었고, 내부 내분과 그리스도교 세력의 공세로 1492년 무함마드 12세가 항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나스르 왕조는 정교한 공예품과 알함브라 궁전으로 대표되는 독창적인 예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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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스르 왕조 - 알람브라
알람브라는 스페인 그라나다에 위치한 붉은 성이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된 궁전이자 요새 도시로, 나스르 왕조 시대에 이슬람 건축과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 왕궁으로 사용되면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 추가되었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나스르 왕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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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بنو نصر (아랍어) La dinastía Nazarí (스페인어) 나스르 왕조 (한국어) |
다른 이름 | بنو الأحمر (아랍어) Banū 'l-Aḥmar (로마자 표기) Nazarí (스페인어) |
국가 | 그라나다 토후국 |
모계 가문 | 바누 카즈라즈 |
창건자 | 무함마드 1세 |
창건 시기 | 1232년 |
마지막 통치자 | 무함마드 12세 |
폐위 시기 |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 조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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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 | |
표어 | ولا غالب إلا الله (아랍어) |
표어 의미 | 알라 외에는 승리자가 없다.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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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보 | |
공식 언어 | 안달루시아 아랍어 |
수도 | 그라나다 |
통치자 칭호 | 에미르 |
역사 | |
건국 | 1232년 |
멸망 | 1492년 (레콩키스타) |
선대 국가 | 무와히드 왕조 |
후대 국가 | 스페인 제국 |
역대 통치자 | |
초대 에미르 | 무함마드 1세 (1232년 ~ 1273년) |
26대 에미르 | 아불 하산 알리 (1464년 ~ 1482년) |
마지막 에미르 | 무함마드 11세 (보아브딜) (1482년 ~ 1492년) |
현재 영토 | |
해당 국가 |
2. 역사적 배경
الدولة النصرية|알다울라 알나스리야ar 또는 나스르 왕조는 무함마드 1세가 이베리아 반도에 건국한 이슬람 왕조이다. 이 왕조는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하엔, 알메리아, 말라가 지역을 통치했다.
13세기 초, 안달루시아를 지배하던 무와히드 왕조가 하프스 왕조, 마린 왕조와의 분쟁에 휘말리면서 안달루시아에서 사실상 철수하게 되었다.[11] 이로 인해 안달루시아는 여러 소왕국으로 분열되는 "제3차 타이파 시대"를 맞이했고, 각 도시의 유력자나 군사 지도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11]
나스르 왕조가 성립되기 전, 이베리아 반도는 국토 회복 운동의 영향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는 마치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발렌시아, 하티바, 하엔은 이미 기독교 세력에게 정복당했고, 1243년부터 나스르 왕조는 카스티야에 조공을 바치는 봉신(vassal) 관계가 되었다.[3] 이러한 상황은 고려가 몽골의 침입 이후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라나다는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남아 번영하였다. 특히, 9세기 바그다드의 기술을 사용한 히스파노-무어풍 도자기는 말라가, 무르시아, 알메리아 등지에서 생산되었으며, 이는 이후 이탈리아의 마욜리카 도자기에 영향을 주었다.[3] 또한, 14세기에는 이스마일 1세, 무함마드 5세 등의 노력으로 알람브라 궁전이 건축되어 나스르 왕조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었다.[3]
3. 건국과 발전
이러한 혼란 속에서 1232년, 안달루시아계 군사 집단의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1세가 하엔 근처의 아르호나에서 봉기하여 타이파 국가를 세웠다.[14] 그는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동료였던 사드 이븐 우바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8] 1237년(1238년이라는 설도 있다.[15]), 무함마드 1세는 수도를 그라나다로 정하고,[15] 알메리아, 말라가로 세력을 확장하여 안달루시아 남부를 장악했다.[14]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카스티야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 레콩키스타(재정복 운동)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었다.[16] 많은 이슬람 소왕국들이 카스티야 왕국에 정복당했지만,[17]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로 남게 되었다.[17]
무함마드 1세는 하프스 왕조에 복속하는 듯 보였으나, 압바스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 주변 세력의 상황에 따라 종주권을 바꾸는 유연한 외교 전략을 펼쳤다.[14] 그는 1232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가 코르도바를 정복하는 데 협력하기도 했다.[14]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하엔을 공격하자, 무함마드 1세는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공납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1246년에는 하엔 일대를 카스티야 왕국에 할양해야 했다.[14] 이로써 무함마드 1세는 무슬림 군주이면서 동시에 카스티야 왕의 봉건적 가신이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16]
과달키비르 강 유역의 하엔을 잃었지만, 산악 지대인 그라나다를 중심으로 영토를 재편하면서 방어에는 더 유리해졌다.[18] 페르난도 3세에게 복속함으로써 평화가 찾아왔고, 안달루시아 각지에서 지식인과 수공업자들이 유입되어 나스르 왕조는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20]
이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쳤던 조선의 친명 정책과 유사하다.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 외교를 펼치면서도, 여진족 등 다른 세력과의 관계를 조절하며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다.
3. 1. 아시킬룰라 가문의 반란과 무데하르 반란
1264년, 카스티야 왕국의 안달루시아 지방(헤레스, 아르코스 및 무르시아 등[2])에서는 재식민 운동으로 이주한 민중과, 무데하르(신앙과 자치권을 인정받고 농촌이나 일부 도시에 잔류가 허용된 무슬림[4]) 농민, 수공업자 간의 마찰이 고조되고 있었다.[4] 이러한 상황에서 무데하르는 알폰소 10세(카스티야 왕)의 재정복 운동 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무함마드 1세의 지원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2][4] 이로 인해 무함마드 1세는 알폰소 10세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마린 왕조[5]에 원군을 요청하며 카스티야 왕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2]
1266년, 아시킬룰라 가문은 말라가와 과디크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이 반란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이 반란에서 아시킬룰라 가문은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무함마드 1세와 대립했다.[2] 이에 대해 무함마드 1세는 마린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마린 왕조의 지원은 미흡했고, 무함마드 1세는 아시킬룰라 가문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과 1266년에 화약을 맺게 되었다.[6] 이 반란은 후계자 무함마드 2세에 의해 진압되었고, 아시킬룰라 가문은 모로코로 도망쳤다.[2]
이 기간 동안 무함마드 1세는 무데하르의 반란을 이용하여 한때 카스티야 왕국령인 헤레스와 무르시아를 손에 넣었다.[2] 그러나 무함마드 1세는 아시킬룰라 가문의 반란에 대응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과 1266년에 맺은 화약에 따라 헤레스와 무르시아를 포기하게 되었다.[6] 이로 인해 카스티야 왕국은 나스르 왕조의 개입을 배제하고, 아라곤 왕국의 지원[7]을 받아 무데하르 반란을 진압했다.[4]
3. 2. 카스티야 왕국과 마린 왕조 사이의 외교
무함마드 1세는 하프스 왕조에 복속하는 척하면서, 압바스 왕조, 무와히드 왕조 등 주변 세력에게 상황에 따라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상을 바꾸는 외교 전략을 펼쳤다.[14] 이는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생존을 도모한 나스르 왕조의 현실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13세기 후반,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기 위한 알헤시라스, 지브롤터, 론다 등의 도시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되었다.[24] 마린 왕조는 카스티야 왕국의 내분을 틈타 안달루시아 개입을 시도했다.[24] 1275년 마린 왕조의 아부 유수프가 침공했고, 1291년 그의 아들 아부 야쿠브도 침공했으나, 나스르 왕조의 이탈로 실패하고 1292년에는 타리파를 카스티야 왕국에 빼앗겼다.[24]
14세기 초, 무함마드 3세는 마린 왕조의 약화를 틈타 세우타 공략을 시도했으나,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마린 왕조의 연합 공격으로 실패했다.[26]
이러한 나스르 왕조의 외교 전략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외교 상황과도 유사점을 보인다. 대한민국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나스르 왕조의 외교 전략은 대한민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최전성기
14세기 중반,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카스티야 왕국도 큰 타격을 입었다. 기독교 세력인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대립, 그리고 카스티야 왕국의 내분까지 겹치면서 레콩키스타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28] 마린 왕조 역시 아부 알하산 알리 왕 이후 내전이 계속되며 쇠퇴하여, 나스르 왕조에 대한 개입이 없어졌다.[28][2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스르 왕조는 독립을 유지하며 국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30] 제노바 상인들과의 무역 활동도 경제적 번영에 기여했다.[31]
이후 무함마드 5세(محمد الخامس)의 통치 아래 나스르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했다.[30] 그는 마린 왕조로부터 안달루시아의 거점이었던 론다와 지브롤터를 되찾고,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알헤시라스를 탈환했다.[30] 또한 엔리케 2세와 조약을 맺어 공납금 지불을 중단시켰다.[30] 이를 통해 마린 왕조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오히려 내분이 계속되던 마린 왕조에 개입하기까지 했다.[30]
무함마드 5세는 무함마드 1세 때부터 건설되던 알함브라 궁전을 유수프 1세에 이어 대규모로 증축하여, 이슬람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궁전 군을 완성했다.[32]
번호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재위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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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아부 알-왈리드 이스마일 1세 (Abu'l-Walid Ismail I) | 1279년 3월 3일 | 1325년 7월 8일 | 1314년 2월 – 1325년 7월 8일 | |
6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4세 (Abu Abdallah Muhammad IV) | 1315년 4월 14일 | 1333년 8월 25일 | 1325년 7월 8일 – 1333년 8월 25일 | |
7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1세 알-무아이야드 비 알라 (Abu-Hajjaj Yusuf I al-Muayyad bilah) | 1318년 6월 29일 | 1354년 10월 19일 | 1333년 8월 – 1354년 10월 19일 | |
8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5세 알-가니 비 알라 (Abu Abdallah Muhammad V 'al-Ghani billah'') | 1339년 1월 4일 | 1391년 1월 16일 | 1354년 10월 – 1359년 8월 | |
9 | 아부 알-왈리드 이스마일 2세 (Abu'l-Walid Ismail II) | 1339년 10월 4일 | 1360년 6월 24일 또는 7월 13일 | 1359년 8월 23일 – 1360년 6월 24일/7월 13일 | |
10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6세 알-갈리브 비 알라 (Abu Abdallah Muhammad VI 'al-Ghalib billah'') | 1333년 | 1362년 4월 25일 | 1360년 6월/7월 – 1362년 4월 | "붉은 왕"(el rey Bermejo)으로 알려짐 |
1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5세 알-가니 비 알라 (2차 재위) | 1339년 1월 4일 | 1391년 1월 16일 | 1362년 4월 – 1391년 1월 16일 | |
12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2세 알-무스타그니 비 알라 (Abu-Hajjaj Yusuf II al-Mustaghni bilah) | 약 1356년 | 1392년 10월 5일 | 1391년 1월 15일 – 1392년 10월 5일 | |
1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7세 (Abu Abdallah Muhammad VII) | 약 1377년 | 1408년 5월 13일 | 1392년 10월 3일 – 1408년 5월 13일 | |
14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3세 알-나시르 리-딘 알라 (Abu-Hajjaj Yusuf III al-Nasir li-Din Allah'') | 1376년 | 1417년 11월 9일 | 1408년 5월 – 1417년 11월 9일 | |
15 | 무함마드 8세 알-무타마식 (Muhammad VIII al-Mutamassik) | 1411년 | 1431년 | 1417년 11월–1419년 | "작은 이"(al-Saghir/el Pequeño)로 알려짐 |
16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Abu Abdallah Muhammad IX 'al-Ghalib billah'') | 1396년 | 1454년 | 1419년–1427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17 | 무함마드 8세 알-무타마식 (2차 재위) | 1411년 | 1431년 | 1427년–1429년 | "작은 이"(al-Saghir/el Pequeño)로 알려짐 |
18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2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30년–1431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19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4세 (Abu'l-Hajjaj Yusuf IV) | 알 수 없음 | 1432년 | 1431년–1432년 | 이븐 알-마울 또는 아베날마오로 알려짐 |
20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3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32년–1445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2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0세 (Abu Abdallah Muhammad X) | 1415년 | 1454년 | 1445년 | "절름발이"(al-Ahnaf/el Cojo)로 알려짐 |
22 | 유수프 5세 (Yusuf V) | 알 수 없음 | 1463년 | 1445년–1446년, 1462년 | 이븐 이스마일 또는 아벤 이스마엘로 알려짐 |
2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0세 (2차 재위) | 1415년 | 1454년 | 1446년–1447년 | "절름발이"(al-Ahnaf/el Cojo)로 알려짐 |
24 | 이스마일 3세 (Ismail III) | 알 수 없음 | 1448년 | 1447년–1448년 | |
25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4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48년–1453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26 | 무함마드 11세 (Muhammad XI) | 알 수 없음 | 1454년 | 1453년–1454년 | "작은 녀석"(el Chiquito)으로 알려짐 |
27 | 아부 나스르 사드 알-무스타인 비 알라 (Abu Nasr Sa al-Mustain bilah) | 알 수 없음 | 1465년 | 1454년–1462년 | 시리자와 뮬레이 자드로 알려짐 |
28 | 이스마일 4세 (Ismail IV) | 알 수 없음 | 1463년 | 1462년–1463년 | |
29 | 아부 나스르 사드 알-무스타인 비 알라 (2차 재위) | 알 수 없음 | 1465년 | 1463년–1464년 | 시리자와 뮬레이 자드로 알려짐 |
30 | 아부 알-하산 알리 (Abu'l-Hasan Ali) | 알 수 없음 | 1485년 | 1464년–1482년 | 뮬레이 하센으로 알려짐 |
3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2세 (Abu Abdallah Muhammad XII) | 약 1460년 | 1533년 | 1482년 | 보압딜로 알려짐 |
32 | 아부 알-하산 알리 (2차 재위) | 알 수 없음 | 1485년 | 1482년–1485년 | 뮬레이 하센으로 알려짐 |
3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3세 (Abu Abdallah Muhammad XIII) | 약 1444년 | 약 1494년 | 1485년–1486년 | "용감한 자"(al-Zaghal/el Zagal)로 알려짐 |
34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2세 (2차 재위) | 약 1460년 | 1533년 | 1486년–1492년 | 보압딜로 알려짐 |
5. 쇠퇴와 멸망
15세기에 들어서면서 나스르 왕조는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1410년에는 주요 도시 안테케라가 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에게 함락되었고,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조공도 다시 시작되었다.[33]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연합하면서, 나스르 왕조는 두 왕국 사이의 대립을 이용한 외교적 전략을 사용하기 어려워졌다. 또한, 지중해 연안에는 우호적인 이슬람 세력이 없어 외부 지원을 받기도 힘들었다.[34]
포르투갈이 세우타를 점령(1415년)하고, 카스티야가 지브롤터를 점령(1462년)하면서 지브롤터 해협이 기독교 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나스르 왕조는 무역과 병력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34]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제노바 상인들도 나스르 왕조를 떠나면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33]
나스르 왕조 내부에서도 왕위 다툼과 왕족 간의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33] 유력 가문들 역시 왕족을 끌어들여 정치 투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카스티야 왕국도 이러한 내분에 개입했다.[34][35] 가톨릭 군주의 등장과 함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연합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36]
이러한 상황에서 아부르하산 알리는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는 오히려 카스티야의 보복 공격을 불러일으켰다.[37] 설상가상으로 아들 무함마드 11세(보압딜)의 반란으로 1482년 그라나다를 빼앗기면서 나라는 분열되었다.[37][40] 1483년 무함마드 11세는 로체나 공격에 실패하고 가톨릭 군주의 포로가 되었다.[37]
이후 아부르하산 알리가 잠시 복위했다가 동생 무함마드 12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풀려난 무함마드 11세는 삼촌과 권력 다툼을 계속했다.[37][40] 1486년 무함마드 11세는 그라나다 일부를 점령했지만, 그 사이 말라가, 알메리아 등 무함마드 12세 세력권의 주요 도시들이 기독교도에게 함락되었다. 무함마드 12세는 결국 트레메센으로 도망쳤고, 무함마드 11세는 대항 세력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42][43]
5. 1. 멸망 이후
1491년 봄, 페르난도 2세의 1만 기병 군대에 의해 그라나다는 포위되었고, 연말에는 수성측의 궁핍이 한계에 달했다.[45] 1491년 말 무함마드 11세와 가톨릭 양왕 사이에 항복 협정이 체결되었고,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는 무혈 개성하였고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다.[43] 마지막 나스르 왕조 군주였던 무함마드 11세는 시에라네바다 산중의 소령에 물러났지만, 후에 페즈로 망명하였고, 나스르 왕조는 멸망했다.[47]1492년 3월 말, 스페인 왕국은 유대인에 대해 개종 또는 국외 추방을 명하는 유대인 추방령을 발포했다.[48] 1499년 10월 그라나다에 부임한 추기경 시스네로스는 무데하르(기독교도 지배하의 이슬람교도)에 대해 강제적인 수법(코란 소각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반란을 초래하게 되었다.[49] 가톨릭 양왕은 이 반란을 개성 당시 협정 위반으로 보고, 1502년 카스티야 왕국(당시 스페인 제국은 연합 왕국이었으며, 그중 카스티야를 가리킨다)에서 무데하르에게 개종을 강요하는 법령을 내렸고, 후에 스페인 전역으로 확대되었다.[50]
6. 사회, 문화, 경제
나스르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로, 무함마드 1세에 의해 건국되었다.[14] 레콩키스타로 인해 대부분의 이슬람 소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정복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17] 초기에는 하프스 왕조에 복속하기도 했지만,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능숙하게 조절하며 국가를 발전시켰다.[14] 페르난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납금을 지불하기도 했으나,[14] 이는 오히려 평화를 가져와 내정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20]
나스르 왕조 사회는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였으며, 기독교 지배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많았다.[53] 이들 중에는 지식인과 수공업자도 포함되어 있어[54] 인적 자원이 풍부해졌고, 이는 경제 발전과 군사력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19]
경제적으로는 제노바 상인과의 무역이 중요했다.[31] 나스르 왕조는 왕족이 직접 비단 무역과 상품 작물 재배에 관여했고,[80] 제노바 상인에게 특권을 주어 말라가, 그라나다에 상주하며 유럽 각지에 상품을 수출하도록 했다.[31] 주요 수입품은 모직물, 향신료, 금, 흑인 노예 등이었다.[33] 특히 마그리브산 곡물 수입이 중요했는데, 이는 늘어난 도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였다.[33] 15세기에 들어 제노바 상인들이 철수하면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33]
14세기 중반, 마린 왕조와의 연합이 살라도 강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27] 흑사병과 카스티야 왕국의 내분 등 외부 요인 덕분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28] 무함마드 5세 통치 시기에는 알함브라 궁전을 대규모로 개수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32]
나스르 왕조는 히스파노-무어풍 도자기로 유명하며,[3] 이는 마욜리카로 알려진 이탈리아 도자기 스타일에도 영향을 주었다.[3]
6. 1. 신앙과 학문
나스르 왕조는 말리크파 법학을 지지했으며, 건국 초기에는 수피즘을 신봉하는 세력과 대립하기도 했다.[19] 무함마드 2세는 '파키흐'(이슬람 법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말리크파 법학을 장려했다.[56] 시간이 지나면서 수피즘은 특히 비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다.[57] 수피 교단의 활동은 법학자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수피즘은 법학과 함께 이슬람 신앙의 중요한 기둥으로 여겨졌고, 법학자이면서 동시에 수피인 사람들도 많았다.[57] 이슬람 군주에게 수피 보호는 중요한 일이었다.[57]나스르 왕조는 주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고, 이베리아 반도 내 이슬람 신앙의 중심지였다.[53] 기독교도 지배하의 무데하르와 교류했으며, 무데하르가 그라나다의 이슬람 법학자에게 파트와 발급을 요청하기도 했다.[53]
유수프 1세는 마드라사(대학[59][60])를 설립하여 신학, 법학, 의학, 화학, 철학, 천문학과를 개설했다.[61] 해외에서도 학생들이 이 마드라사에 유학을 왔다.[62] 나스르 왕조 시대에는 학문적으로 큰 발전은 없었다고 평가되지만,[63] 주목할 만한 학자들이 있었다.
역사가이자 시인인 이븐 알하티브는 와지르로서 유수프 1세와 무함마드 5세를 섬겼고, 그라나다의 역사를 비롯한 6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64] 이븐 알하티브의 저서에는 의학 관련 내용도 있으며, 1348년 흑사병 유행에 대한 감염 확산에 대해 저술했다.[63] 역사가 이븐 칼둔은 1362년부터 무함마드 5세를 섬겼고, 카스티야 왕국에 사절로 파견되기도 했다.[64] 그는 이후 이븐 알하티브와 사이가 나빠져 마그리브로 돌아갔다.[64]
6. 2. 예술
나스르 왕조는 공예품, 특히 히스파노-무어풍 도자기로 유명하다. 이 도자기는 9세기 바그다드 기술을 사용하여 유약 위에 장식하는 기법을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말라가, 무르시아, 알메리아에서, 나중에는 마니세스에서 광택 도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3] 이러한 스타일의 도자기는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후원을 받으며 생산되었고, 이후 마욜리카로 알려진 화려하고 유약을 입힌 이탈리아 도자기 스타일에 영향을 주었다.[3]14세기에는 이스마일 1세와 무함마드 5세의 노력으로 지어진 알함브라 궁전 건축으로 유명하다.[3]
7. 역대 군주 목록
번호 |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세 알-갈리브 비 알라 | 약 1194년 | 1273년 1월 22일 | 1232년 – 1273년 1월 22일 | |
2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2세 알-파키흐 | 약 1235년 | 1302년 4월 8일 | 1273년 1월 22일 – 1302년 4월 8일 | |
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3세 알-막흘루 | 1257년 8월 15일 | 1314년 1월 21일 | 1302년 4월 8일 – 1309년 3월 14일 | |
4 | 아부 알-주유슈 나스르 | 1287년 11월 1일 | 1322년 11월 16일 | 1309년 3월 14일 – 1314년 2월 8일 | |
5 | 아부 알-왈리드 이스마일 1세 | 1279년 3월 3일 | 1325년 7월 8일 | 1314년 2월 – 1325년 7월 8일 | |
6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4세 | 1315년 4월 14일 | 1333년 8월 25일 | 1325년 7월 8일 – 1333년 8월 25일 | |
7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1세 알-무아이야드 비 알라 | 1318년 6월 29일 | 1354년 10월 19일 | 1333년 8월 – 1354년 10월 19일 | |
8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5세 알-가니 비 알라 | 1339년 1월 4일 | 1391년 1월 16일 | 1354년 10월 – 1359년 8월 | |
9 | 아부 알-왈리드 이스마일 2세 | 1339년 10월 4일 | 1360년 6월 24일 또는 7월 13일 | 1359년 8월 23일 – 1360년 6월 24일/7월 13일 | |
10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6세 알-갈리브 비 알라 | 1333년 | 1362년 4월 25일 | 1360년 6월/7월 – 1362년 4월 | "붉은 왕"(el rey Bermejo)으로 알려짐 |
1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5세 알-가니 비 알라 (2차 재위) | 1339년 1월 4일 | 1391년 1월 16일 | 1362년 4월 – 1391년 1월 16일 | |
12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2세 알-무스타그니 비 알라 | 약 1356년 | 1392년 10월 5일 | 1391년 1월 15일 – 1392년 10월 5일 | |
1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7세 | 약 1377년 | 1408년 5월 13일 | 1392년 10월 3일 – 1408년 5월 13일 | |
14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3세 알-나시르 리-딘 알라 | 1376년 | 1417년 11월 9일 | 1408년 5월 – 1417년 11월 9일 | |
15 | 무함마드 8세 알-무타마식 | 1411년 | 1431년 | 1417년 11월 – 1419년 | "작은 이"(al-Saghir/el Pequeño)로 알려짐 |
16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 1396년 | 1454년 | 1419년 – 1427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17 | 무함마드 8세 알-무타마식 (2차 재위) | 1411년 | 1431년 | 1427년 – 1429년 | "작은 이"(al-Saghir/el Pequeño)로 알려짐 |
18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2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30년 – 1431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19 | 아부 알-하자즈 유수프 4세 | 알 수 없음 | 1432년 | 1431년 – 1432년 | 이븐 알-마울 또는 아베날마오로 알려짐 |
20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3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32년 – 1445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2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0세 | 1415년 | 1454년 | 1445년 | "절름발이"(al-Ahnaf/el Cojo)로 알려짐 |
22 | 유수프 5세 | 알 수 없음 | 1463년 | 1445년 – 1446년, 1462년 | 이븐 이스마일 또는 아벤 이스마엘로 알려짐 |
2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0세 (2차 재위) | 1415년 | 1454년 | 1446년 – 1447년 | "절름발이"(al-Ahnaf/el Cojo)로 알려짐 |
24 | 이스마일 3세 | 알 수 없음 | 1448년 | 1447년 – 1448년 | |
25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9세 알-갈리브 비 알라 (4차 재위) | 1396년 | 1454년 | 1448년 – 1453년 | "왼손잡이"(al-Aysar/el Zurdo)로 알려짐 |
26 | 무함마드 11세 | 알 수 없음 | 1454년 | 1453년 – 1454년 | "작은 녀석"(el Chiquito)으로 알려짐 |
27 | 아부 나스르 사드 알-무스타인 비 알라 | 알 수 없음 | 1465년 | 1454년 – 1462년 | 시리자와 뮬레이 자드로 알려짐 |
28 | 이스마일 4세 | 알 수 없음 | 1463년 | 1462년 – 1463년 | |
29 | 아부 나스르 사드 알-무스타인 비 알라 (2차 재위) | 알 수 없음 | 1465년 | 1463년 – 1464년 | 시리자와 뮬레이 자드로 알려짐 |
30 | 아부 알-하산 알리 | 알 수 없음 | 1485년 | 1464년 – 1482년 | 뮬레이 하센으로 알려짐 |
31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2세 | 약 1460년 | 1533년 | 1482년 | 보압딜로 알려짐 |
32 | 아부 알-하산 알리 (2차 재위) | 알 수 없음 | 1485년 | 1482년 – 1485년 | 뮬레이 하센으로 알려짐 |
33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3세 | 약 1444년 | 약 1494년 | 1485년 – 1486년 | "용감한 자"(al-Zaghal/el Zagal)로 알려짐 |
34 | 아부 압달라 무함마드 12세 (2차 재위) | 약 1460년 | 1533년 | 1486년 – 1492년 | 보압딜로 알려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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