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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차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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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눌차왜성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가덕도에 축조한 왜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초기에는 임시적인 성곽으로 시작하여 약 5개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명나라의 철수 요구와 가토 기요마사의 성곽 강화 시도가 있었으나, 실제 철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눌차왜성은 가덕도와 연결된 눌차도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안골왜성, 웅천왜성 등 다른 왜성들이 자리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의 구조는 본성을 중심으로 여러 성곽이 연결된 연곽식이며, 할미당이 본환 입구로 추정된다.

2. 역사

1593년 3월부터 재개된 임진왜란 강화 교섭은 1594년1595년에도 계속 진행되었는데, 교섭 단계에서 명나라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 주둔에 불만을 표하며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1595년 4월에 철수 허가를 받아 6월,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철수는 3단계로 계획되었으나, 2단계 철수 과정에서 가토 기요마사기장 죽성리왜성을 강화하면서 명나라의 항의를 받았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에게 귀환을 명령했고, 1596년 5월 가토 기요마사는 기장 죽성리왜성을 불태우고 귀환했다.

1597년 2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정유재란 재침략에 즈음하여 시마즈 가문을 가덕도에서 전라도·충청도 공격 부대에 편성하고, 다카하시 무네마스와 쓰쿠시 히로카도를 가덕도왜성 수비대로 배치했다. 시마즈 가문은 내륙으로 이동한 후 무네마스와 히로카도로부터 가덕도왜성을 인수받아 1597년 6월 3일에 파괴했으며, 병력은 인근의 웅천왜성으로 이동했다.[8]

2. 1. 축성 배경

1593년 4월 2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모리 데루모토에게 조선 수군의 함선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요 항구에 성곽을 축성할 것을 명령했다.[6]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시마즈 이에히사일본군 병력 500명 등이 축성을 담당하였다.[6]

2. 2. 축성 과정

1593년 4월 22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모리 데루모토에게 조선 수군의 함선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항구에 성곽을 쌓을 것을 명령했다. 가덕도에 축성이 시작된 시기는 이 무렵으로 추정되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시마즈 이에히사일본군 병력 500명이 축성을 담당했다.[6] 이때는 본격적인 성곽보다는 전략적 요지에 간단한 임시성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7월경 5천 명의 왜군에게 가덕도왜성의 본성과 지성에 주둔할 것을 명령했다.[7] 윤년 9월 25일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덕도 축성을 마치고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따라서 가덕도에 본격적인 왜성이 완성된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덕도왜성의 축성 기간은 임시성에서 견고한 성으로 완성되기까지 약 5개월 정도 소요된 것으로 보인다.

2. 3. 명의 철수 요구와 가토 기요마사의 성곽 강화

1593년 3월부터 재개된 임진왜란 강화 교섭은 1594년1595년에도 계속 진행되었다. 교섭 단계에서 명나라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 주둔에 불만을 표하며, 철수하지 않으면 강화에 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는 명나라가 히데요시의 군에 대해 성곽을 파괴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하자, 고니시 유키나가1595년 4월에 허가를 받아 6월에 조선에 주둔 중이던 히데요시의 군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6]

철수는 3단계로 계획되었다.

단계대상 지역주요 성곽
제1차부산포 서쪽거제도의 여러 성, 구포왜성 등 약 10개 성
제2차부산포 동쪽기장 죽성리왜성, 임랑포왜성, 서생포왜성 등 3개 성
제3차부산포 일대김해 죽도왜성, 안골왜성, 가덕도왜성 등 4개 성



3차 철수 계획은 같은 해 말까지 철수를 완료한다는 계획이었으며, 먼저 단성에서 본성으로 철수한 뒤 부산포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한다는 계획이었다. 제2차 철수 단계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병력 일부를 이끌고 기장 죽성리왜성에 들어가 성곽을 강화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서 항의가 발생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귀환을 명령하였으며, 1596년 5월에 가토 기요마사는 기장 죽성리왜성을 불태우고 귀환하였다.[7] 그러나 실제 제3차 철수는 실시되지 않았다. 3단계 파괴 계획 중에서 마지막 단계로 설정된 가덕도왜성은 다른 3개의 성과 마찬가지로 파괴는 물론 철수도 하지 않았으며, 1595년경에는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1596년부터 시마즈 이에히사일본군 500명이 각각 주둔했다.[8]

2. 4. 철수 계획과 실제 철수

1595년 고니시 유키나가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3단계 철수 계획을 허가받고 6월에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1단계는 거제도, 구포왜성 등 부산포 서쪽의 약 10개 성, 2단계는 부산포 동쪽의 기장 죽성리왜성, 임랑포왜성, 서생포왜성 등 3개 성, 마지막 3단계는 부산포, 김해 죽도왜성, 안골왜성, 가덕도왜성 등 4개 성을 대상으로 했다.[8]

3단계 철수는 같은 해 말까지 완료될 예정이었으며, 단성에서 본성으로 철수한 뒤 부산포에서 최종 철수하는 순서였다. 그러나 2단계 철수 중 가토 기요마사기장 죽성리왜성을 개수하고 병력을 강화한 사실이 알려져 명나라의 항의를 받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에게 귀환을 명령했다. 결국 1596년 5월 가토 기요마사기장 죽성리왜성을 불태우고 귀환했으며, 실제 3단계 철수는 실시되지 않았다.[8]

1595년다치바나 무네시게가, 1596년부터는 시마즈 이에히사일본군 500명이 가덕도 왜성에 주둔했다.[8] 1597년 정유재란 발발 이후, 시마즈 가문은 가덕도에서 전라도·충청도 공격 부대에 편성되었고, 다카하시 무네마스와 쓰쿠시 히로카도가 수비대로 배치되었다. 시마즈 가문은 내륙으로 이동한 후 다카하시 무네마스와 쓰쿠시 히로카도로부터 가덕도왜성을 인수받아 1597년 6월 3일에 파괴했으며, 병력은 인근의 웅천왜성으로 이동했다.[8]

3. 위치

눌차왜성이 있는 가덕도부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가덕수로를 지나면 김해와 부산으로 연결된다. 일본군 수군은 안골왜성과 웅천왜성에 주둔하면서 눌차왜성을 보조 기지로 활용했다. 가덕도에서 다대포까지 약 13km 구간에는 일본군 방어 시설이 없어, 조선 수군에게는 가덕수로가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반드시 지나야 할 이 길목에 눌차왜성을 쌓아 수로를 통제하고, 부산왜성과 거제 사이의 중간 거점으로서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다.

3. 1. 지리적 위치

가덕도는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김해부산으로 연결되는 가덕수로를 지난다. 일본군 수군은 안골왜성과 웅천왜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눌차왜성은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가덕도를 지나면 부산 다대포로 바로 연결되는데, 이 구간(13~14km)에는 일본군 방어 시설이 없었다.

조선 수군은 현재 가덕도 등대가 있는 외양포와 새바지를 돌아 부산으로 가는 위험한 경로 대신, 웅천왜성, 안골왜성, 눌차왜성이 있는 가덕수로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일본군은 이 점을 이용하여 조선 수군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눌차왜성을 쌓아 길목을 막고 수군의 진출을 꾀했다. 눌차왜성에서는 가덕수로를 따라 이동하는 조선 수군을 관측할 수 있었다.

눌차왜성은 부산왜성과 거제의 중간 지점으로, 일본군 수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눌차왜성에서 직선거리 5km 이내에 안골왜성과 가덕진성, 천성진성이 있고, 10km 안에는 웅천읍성, 웅천왜성, 제포진성, 자마왜성이 있다. 반경 15km를 넘으면 김해 죽도왜성영등포왜성, 웅천에 명동왜성이 있으며, 20km 거리에는 거제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이 있다.

3. 2. 주변 성곽과의 관계

가덕도는 부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며 가덕수로를 지나면 김해부산으로 연결된다. 특히 일본군 수군은 안골왜성과 웅천왜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눌차왜성은 이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1] 가덕도를 지나면 바로 부산의 다대포로 연결되는데, 13~14km 거리 동안 일본군이 방어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1] 조선 수군은 현재 가덕도 등대가 있는 외양포와 새바지를 돌아 부산으로 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웅천왜성과 안골왜성, 그리고 눌차왜성이 있는 가덕수로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1]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눌차왜성을 쌓아 길목을 차단하고 수군의 진출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1]

눌차왜성에서 직선거리로 5km 안에 안골왜성과 가덕진성, 천성진성이 있다.[2] 10km 안에는 웅천에 있는 웅천읍성, 웅천왜성, 제포진성, 자마왜성이 있다.[2] 반경 15km를 넘어서면 김해 죽도왜성영등포왜성이 있고, 웅천에는 명동왜성이 있다.[2] 20km로 넓히면 거제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이 있다.[2] 조선 수군이 장목진에서 눌차왜성까지 가려면 직선거리로 20km 정도 되며, 눌차왜성에서 부산왜성까지 또한 20~25km로 거제에서 부산까지 중간 지점임을 알 수 있다.[2] 김해까지도 20km로 일본군 수군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 볼 수 있다.[2]

4. 구조

가덕도 왜성은 본성을 중심으로 여러 성곽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연곽식(連郭式)이다.[1][2] 70m의 산 정상부를 깎아 석축으로 본환(本丸)을 구축하였는데, 석축 둘레는 86m이며 중심부에 높이 2~3m의 석축이 남아있다.[2][3] 남쪽의 할미당을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성벽이 축조되었고, 할미당이 있는 부분이 본환의 입구로 추정되며, 본환의 서쪽 벽은 굴곡을 주어 치성(雉城)의 역할을 한다.[2][4] 본환 남쪽으로는 가늘고 긴 지형이 이어지면서, 남쪽으로 갈수록 3~4단을 이루며 단의 동쪽과 남쪽 사면에는 1m 내외의 석축이 확인된다. 대지상으로 돌출되어 요곡륜(腰曲輪) 주 공간의 측면을 따라 길게 조성된 구역을 이루고, 북쪽으로 연속된 66.5m의 산정부도 독립된 부곽으로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서쪽에는 수굴로 추정되는 골짜기가 있다.[2]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항월 마을에서 서쪽으로 50m 지점의 산 정상부도 왜성의 일부로 추정되나, 석축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2]

한국문물연구원의 조사 결과, 계곡부에서는 수굴로 판단되는 유구가 1기 확인되었고 구릉 사면부에서는 곡륜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단이 확인되었다. 竪掘일본어는 길이 39m, 너비 1m~3m, 깊이 63cm로 풍화암반토를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유구는 성체의 주축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조성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일본 대도에 부착되는 청동 부속구(䪬)가 1점 출토되었다.[2] 조선시대 문화층에서는 현대 경작에 의한 단과는 별도로 조선시대 단이 확인되었다. 이 단은 현대의 절토로 인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로 적갈색 사질점토를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한편 B구간 11트렌치 남벽에서 곡륜의 성토부로 추정되는 토층이 확인되었다. 이 성토부는 바닥의 적갈색 사질점토를 절토하여 그 아래쪽 경사면을 평탄화하였다.[2]

4. 1. 현지 안내문 내용

가덕도 왜성은 본성을 중심으로 여러 성곽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연곽식(連郭式)이다.[1][2]

산 정상부(70m)를 깎아 석축으로 쌓은 본환(本丸)[3]은 둘레가 86m이며, 중심부에는 높이 2~3m의 석축이 남아있다.[2]

남쪽의 할미당을 중심으로 남북 방향으로 성벽이 축조되었고, 할미당이 있는 곳이 본환의 입구로 추정된다. 본환의 서쪽 벽은 굴곡을 주어 치성(雉城)[4]의 역할을 한다.[2]

본환 남쪽으로는 가늘고 긴 지형이 이어지며, 남쪽으로 갈수록 3~4단을 이루고 단의 동쪽과 남쪽 사면에는 1m 내외의 석축이 확인된다.

대지상으로 돌출되어 요곡륜(腰曲輪) 주 공간의 측면을 따라 길게 조성된 구역을 이루고, 북쪽으로 연속된 66.5m의 산정부도 독립된 부곽으로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서쪽에는 수굴로 추정되는 골짜기가 있다.[2]

부산광역시 강서구 눌차동 항월 마을에서 서쪽으로 50m 지점의 산 정상부도 왜성의 일부로 추정되나, 석축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2]

4. 2. 한국문물연구원 해설

한국문물연구원에서 부산-거제 간 연결접속도로 구간 가운데 천성-눌차 구간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5] 조사지역은 눌차도의 서북쪽 구릉 사면으로 부산·진해 방향으로 전망이 좋은 곳이며, 구릉 정상부에는 가덕왜성의 본환이 있고 지성이 남북 방향으로 주변에 축조되는 연곽식 왜성이 축조되어 있는 곳이다.[2]

조사 결과, 계곡부에서는 수굴로 판단되는 유구가 1기 확인되었고 구릉 사면부에서는 곡륜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단이 확인되었다. 수굴은 길이 39m, 너비 1m~3m, 깊이 63cm로 풍화암반토를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유구는 성체의 주축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조성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일본 대도에 부착되는 청동 부속구(䪬)가 1점 출토되었다.[2]

조선시대 문화층에서는 현대 경작에 의한 단과는 별도로 조선시대 단이 확인되었다.[2] 이 단은 현대의 절토로 인해 대부분 파괴된 상태로 적갈색 사질점토를 굴착하고 조성되었다. 한편 B구간 11트렌치 남벽에서 곡륜의 성토부로 추정되는 토층이 확인되었다. 이 성토부는 바닥의 적갈색 사질점토를 절토하여 그 아래쪽 경사면을 평탄화하였다.[2]

5. 눌차도

가덕도와 눌차도는 서로 이웃하고 있으며, 눌차도에는 눌차왜성이, 가덕도에는 눌차왜성의 지성이 있다. 가덕도왜성 천수대에서는 가덕수도와 가덕만을 지나는 선박을 모두 관측할 수 있다. 가덕도왜성의 선소 위치는 현재 확인되지 않지만, 외눌마을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항월마을은 가덕만보다 수심이 깊어 조선 수군이 가덕수로로 진출할 때 쉽게 노출되는 반면, 외눌마을은 왜군이 선박을 숨기기에 유리하고 눌차왜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하다.[9]

6. 할미당

눌차왜성의 본환에는 할미당이 있는 곳으로 나무와 계단이 놓여져 있다. 할미당 옆에는 왜성에서 사용된 성돌로 만든 담장이 있다.[10]

참조

[1] 뉴스 부산 가덕도에서 새 성벽 찾았다 http://www.hani.co.k[...] 한겨레 2015-11-02
[2] 안내문 현지 안내문 인용
[3] 문서 왜성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공간
[4] 문서 성벽을 돌출시켜 성벽에 붙은 적을 측면에서 제어하는 시설
[5] 안내문 현지 안내문 인용
[6] 서적 日本戰史 朝鮮の役(本編) 德間書店
[7] 문서 1593년 7월 2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보낸 朱印狀
[8] 저널 韓半島 南海沿岸의 倭城과 그 築城 意味 가덕도 倭城趾를 중심으로 한국일본어문학회
[9] 웹사이트 조선수군 부산 진출시 거쳐가야하는 눌차왜성_01 http://panzercho.egl[...] 2017-01-10
[10] 웹사이트 가덕도 눌차왜성과 그리고 할배 제당 http://egloos.zum.co[...] 2016
[11] 문서 원래는 갈마봉성이였으나 임진왜란에 석축을 헐어낸 후 일본식으로 재구축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성북왜성 영토로 변했다.
[12] 웹사이트 당감동 성지 2차 발굴조사 https://museum.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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