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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오가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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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는 1917년 태어나 1994년 사망한 소련의 군인이자 군사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공병으로 활약했으며, 전후에는 소련군 총참모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동독 주둔 소련군 제20 근위 자동차화 소총 사단을 지휘했다. 1977년 소련 방위군 원수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소련군 참모총장/국방 제1차관에 취임했다. 참모총장 재임 기간 중 군사 혁신을 추진했으나, 정치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84년 해임되었다. 이후 소련 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총감 등을 역임했으며,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 소련군 입장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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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오가르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니콜라이 오가르코프
칭호소비에트 연방 원수
본명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오가르코프
로마자 표기Nikolai Vasilievich Ogarkov
별칭"무서운 군인" «그로즈니 솔다트»
출생1917년 10월 30일
출생지러시아 공화국 트베리 현 베제츠키 군 몰로코보
사망1994년 1월 23일
사망지러시아, 모스크바
국적

군사 경력
소속
복무 기간1937년–1994년
최종 계급[[File:Rank insignia of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svg|20px]] 소비에트 연방 원수 (1977-1991)
지휘서부 전구 사령부
소비에트 연방군 총참모부
볼가 군관구
제20 근위 자동차화 소총 사단
주요 훈장소비에트 연방 영웅
정치 경력
소속 정당[[File:КПСС.svg|25px]]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주요 직책
직책
총참모장・국방 제1차관
임기 시작1977년 1월 7일
임기 종료1984년 9월 6일
서기장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기타 정보
참고 자료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오가르코프는 1917년 10월 30일 러시아 트베르 현 몰로코보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1년, 가족과 함께 소련 극동으로 이주하여 14세부터 판매원 견습생으로 일했다.[2] 1933년 고향으로 돌아와 약 1년 반 동안 회계사, 노동조합 구역 의회 서기 등으로 일했다. 1934년에는 모스크바주로 가서 에너지 산업 노동자 학부와 V.V. 쿠이비셰프 모스크바 토목 공학 연구소에서 공부했다.[2]

193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아스트라한 소총 및 기관총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1941년에는 쿠이비셰프 군사 공병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사 기술자 3급 계급을 받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공병 장교로서 전쟁에 참여하여 여러 전선에서 복무했다. 1945년에는 소련 공산당원이 되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붉은 군대 시절의 오가르코프 (1940년대)


오가르코프는 1938년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아스트라한 소총 및 기관총 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에는 쿠이비셰프 군사 공병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사 기술자 3급 계급을 받았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오가르코프는 서부 전선의 제17 보병 사단 제1 보병 연대 소속 연대 공병으로 배치되어 Łomża 지역 인근의 요새 건설 작업에 참여했다.[3] 이후 공병 장교로서 여러 전선과 부대를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941년 10월부터 1942년 2월까지는 카렐리야 전선 공병 부서에서 선임 요새 공병으로 근무했고, 1942년 2월부터는 제289 소총 사단 소속 연대 공병으로 활동했다. 1942년 6월에는 제61 해군 소총 여단의 여단 공병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제32군 공병 참모장 보좌관이 되었다. 1943년 8월에는 카렐리야 전선 공병 본부 작전 부서 부참모로, 1944년 5월에는 제122 소총 사단의 사단 공병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1월부터는 제2 우크라이나 전선과 제3 우크라이나 전선에도 배치되어 전투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그는 카렐리야 방어전, 비보르크-페트로자보르스크 공세,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 부다페스트 공세, 빈 공세 등 여러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 10월에는 조국 전쟁 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4]

1945년 4월 11일, 전투 중 공병 부대를 지휘하다가 부상을 입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전쟁이 끝났다. 같은 해 7월 부상에서 회복하여 원래 사단으로 복귀했으나, 3개월 뒤 사단이 해산되면서 중령 계급으로 카르파티아 군관구 제27군 공병 참모장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945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5]

2. 2. 전후 군 경력

오가르코프(오른쪽)와 독일 주둔 소련군의 다른 소련 장교들 (196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오가르코프는 카르파티아 군관구 공병 참모장의 보좌관 및 선임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1947년 쿠이비셰프 군 공병 군사학교를 다시 졸업한 후, 1947년부터 1948년까지 프리모르스키 군관구 사령관 참모 공병국의 부국장으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여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당시 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로디온 말리노프스키의 주목을 받았고, 이는 그의 경력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

1948년 9월 부서의 선임 장교로, 1949년 1월에는 극동 군관구 사령관 참모국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작전 관리 부서 책임자를 맡았으며, 1950년 9월 4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1953년부터는 부참모장, 1955년부터는 이 지도부의 책임자이자 극동 군관구 참모 부국장을 역임했다. 1957년 7월 11일 소장 계급을 받았고, 같은 해 소련군 총참모 군사학교에 입교하여 1959년에 졸업했다.

오가르코프(오른쪽)와 빅토르 쿨리코프 (왼쪽), 원수 계급장 수여 후 (1977)


졸업 후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동독그리마에 주둔한 제20 근위 자동차 소총 사단의 사단장을 지냈다. 1961년 12월에는 벨라루스 군관구 참모장 겸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63년 7월에는 제1부사령관이 되었다.[7] 1965년 12월에는 볼가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4월, 오가르코프는 소련군 총참모부 제1 부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군 경력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도 활동했는데,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 위원을, 1971년부터 1991년까지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또한 1966년부터 1989년까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표하여 제7차부터 제11차 소집까지 소련 최고 소비에트 민족 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1974년 3월에는 소련 국방부 차관, 소련 국가 기술 위원회 의장, 소련 국방부 간부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8]

1977년 1월 8일, 대장 계급이었던 오가르코프는 소련군 총참모장 및 소련 국방부 제1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며칠 뒤인 1월 14일 소련 원수 칭호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준비 과정에서 양측이 수용 가능한 합의안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

오가르코프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문제로 당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자 소련 국방부 장관이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총참모장으로서 그는 군사 및 무기 개발 등 다른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우스티노프와 의견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9]

1983년 9월 1일, 뉴욕을 출발하여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보잉 747-230B)이 앵커리지에서 경유한 후 예정 항로를 이탈하여 소련 영공을 비행하다 사할린 서쪽 모네론 섬 상공에서 소련 공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오가르코프는 텔레비전 기자회견에 소련군 대변인으로 나서, 해당 항공기가 간첩 활동을 하는 정찰기로 의심되어 현지 사령관이 격추 결정을 내린 것이며 이는 "사고나 실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격추를 정당화했다.[10][11]

그러나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의 계속된 갈등으로 인해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에 의해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3. 소련군 총참모장 재임

1977년 1월, 오가르코프는 소련군 총참모장 겸 국방 제1차관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소련 원수 계급으로 승진했다.

3. 1. 군사 혁신 추진

오가르코프(왼쪽)와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국방부 장관(가운데), 1981년 자파드-81 훈련 중


오가르코프는 거대하고 비효율적인 소련군을 작고 기동성 있는 첨단 기술 기반의 타격 부대로 재편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군사 혁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정밀 유도 무기와 자동화된 지휘 통제 시스템 도입을 강조했다. 1982년 미국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는 소련의 기술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기도 했다.

"소련 기술은 미국보다 한두 세대 뒤떨어져 있습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어린아이들조차 컴퓨터로 놀고 있습니다. 우리 군부대 사무실에도 컴퓨터가 다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경제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마도 정치 개혁도 수반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KAL-007 격추 사건 이후 보였던 강경한 반미 수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오가르코프는 소련 사회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 필요성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 대전 방식의 전통적인 전쟁관을 가진 군 장교들과도 갈등을 겪었다. 1984년 육군 신문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기사를 통해 소련군 현대화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소련군 총참모장 재임 기간 동안 오가르코프는 소련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작전-전략 훈련 및 기동 훈련을 여러 차례 준비하고 지휘했다. 이 훈련들은 모든 주요 전략 방향에서 소련군의 모든 부대, 군사 과학 및 군사 산업 기관을 동원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1981년 9월에 실시된 자파드-81 훈련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작전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이 훈련은 산업 제어 시스템과 일부 정밀 유도 탄약을 시험하는 최초의 시도였다. 또한 오가르코프는 전략 로켓군미사일 방어의 통제 이론 개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실상 총참모부 내에 작전-전략 연구 센터를 설립했다.[12]

전 러시아 연방 안보 회의 서기 안드레이 코코신은 오가르코프를 현대 군사 혁명 문제를 고려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3. 2.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9월 1일,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소련영공을 침범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공군의 공격을 받아 격추되었고,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10][11]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오가르코프는 이 사건에 대한 소련군 공식 대변인으로 텔레비전 기자회견에 나섰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격추 결정을 옹호하며, 해당 항공기가 정찰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격추는 "사고나 오류가 아니었으며", 현지 사령관의 판단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10][11]

이 사건과 오가르코프의 발표는 일본과 서방 국가 등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오가르코프는 이 기자회견을 통해 서방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3. 정치 지도부와의 갈등 및 해임

오가르코프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이 문제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자 소련 국방부 장관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소련군 총참모장으로서 오가르코프는 군사 및 무기 개발과 같은 다른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우스티노프와 의견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9]

1983년 9월 1일, 뉴욕을 출발해 대한민국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007편이 알래스카 앵커리지 경유 후 경로를 이탈하여 소련의 영공 침범 금지 구역을 비행하다 사할린 서쪽 모네론 섬 상공에서 소련 공군에 의해 격추되어 탑승자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오가르코프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기자회견을 통해 소련 군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해당 항공기가 간첩 임무를 수행하는 정찰기로 추정되었기에 현지 사령관이 격추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사고나 오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며 소련의 조치를 옹호했다.[10][11]

오가르코프, 시리아에 주둔한 소련군 방문


1984년 9월 6일, 오가르코프는 정치국에 의해 총참모장 겸 국방 제1차관 직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가 임명되었다.[1]

오가르코프의 갑작스러운 해임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정치 분석가 일리야 젬초프는 당시 콘스탄틴 체르넨코의 뒤를 이어 서기장 자리를 노리던 그리고리 로마노프의 권력 투쟁 실패와 연관 짓는다. 젬초프에 따르면, 로마노프는 오가르코프와의 관계를 통해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정치국은 군에 대한 당의 통제를 담당하는 주 정치 지도국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국방위원회에 접근하는 등 빠르게 영향력을 키우던 오가르코프를 경계하여 "당과 다른 경향"을 보인다는 이유로 해임했다는 것이다.[13][14] 반면, 미국의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인 레이먼드 L. 가르토프는 오가르코프가 파벌 정치 싸움에 연루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며, 해임의 주된 원인은 국방 예산 및 자원 배분 문제와 관련된 갈등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1]

해임 이후 오가르코프는 새로 창설된 서부 전구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좌천되었다.[15]

4. 해임 이후

1988년 8월부터 1992년 1월까지 소련 국방부 감찰총감단의 감찰총감을 역임했다. 이 기간 중 1990년부터 1991년 8월까지는 전연방 전쟁, 노동, 군대 및 법 집행 기관 참전용사 평의회를 동시에 이끌기도 했다.

소련 해체 이후, 1992년 1월에는 새로 창설된 러시아 연방 국방부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독립 국가 연합 합동군 참모총장의 고문 역할도 수행했다. 국방부 고문으로서 오가르코프는 주로 러시아 연방 국방부 제1차관인 안드레이 코코신, 그리고 러시아 연방군 총참모부의 군 참모총장인 육군 대장 빅토르 두비닌과 미하일 콜레스니코프와 소통했다. 코코신은 오가르코프와의 협의가 러시아 연방의 첫 번째 국가 무기 프로그램을 위한 최적의 결정을 도출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고 언급했다.[16]

5. 사망

오가르코프는 지병으로 1994년 1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에 성대한 군사적 예우를 갖춰 안장되었다.

6. 평가 및 유산

오가르코프는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이 문제로 당시 소련 국방부 장관이었던 드미트리 우스티노프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는 총참모장으로서 군사 및 무기 개발 등 다른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우스티노프와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9]

1983년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당시, 오가르코프는 텔레비전 브리핑을 통해 소련군 대변인으로 나서 격추 결정을 옹호했다. 그는 해당 항공기가 간첩 임무를 수행하는 정찰기로 추정되어 현지 사령관이 격추를 결정했으며, 이는 "사고나 오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10][11]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한 사업들이 진행되었다. 2003년, 몰로코보에 오가르코프의 이름을 딴 지역 박물관이 개관하여 그의 삶과 업적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그가 1976년부터 1994년까지 거주했던 모스크바 시브체프 브라제크 골목길의 건물 벽에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었다. 2018년 2월에는 러시아 연방 국방 관리 센터의 통제실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8]

7. 수상 내역

노보데비치 묘지에 있는 오가르코프의 묘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는 소련과 여러 국가로부터 다수의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

'''소련'''

훈장훈장명수여 정보
소련 영웅1977년 10월 28일
레닌 훈장2회 (1977년 10월 28일, 1980년 4월 28일)
10월 혁명 훈장1987년 10월 29일
적기 훈장1969년 2월 21일
수보로프 훈장, 1등급1981년 11월 4일
무공 훈장
조국전쟁 훈장, 1등급2회 (1945년 6월 23일, 1985년 4월 6일)
조국전쟁 훈장, 2등급1944년 10월 22일
적성 훈장2회 (1954년 11월 5일, 1967년 10월 28일)
소련군 복무 훈장, 3등급1975년 4월 30일
소련 북극 방어 훈장1944년
부다페스트 점령 훈장1945년
독일 전승 기념 훈장 1941–19451945년
대조국전쟁 승전 20주년 기념 훈장 1941-19451965년
대조국전쟁 승전 30주년 기념 훈장 1941–19451975년
대조국전쟁 승전 40주년 기념 훈장 1941–19451985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탄생 100주년 기념 훈장1969년
소련군 해군 창설 30주년 기념 훈장1948년
소련군 창설 40주년 기념 훈장1958년
소련군 창설 50주년 기념 훈장1968년
소련군 창설 60주년 기념 훈장1978년
소련군 창설 70주년 기념 훈장1988년
소련군 참전용사 훈장1976년
개척 훈장1956년
무장 형제애 강화 훈장
공로 훈장, 1등급



'''외국'''

훈장훈장명수여 국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훈장, 1등급불가리아
군사 훈장불가리아
중소 우호 훈장중국
적기 훈장체코슬로바키아
군사 공로 훈장체코슬로바키아
무장 형제애 강화 훈장, 금색 훈장체코슬로바키아
샤른호르스트 훈장동독
헝가리 공화국 국기 훈장, 1, 3등급헝가리
수흐바타르 훈장몽골
적기 훈장몽골
할힌골 승전 30주년 기념 훈장몽골
조국 해방 훈장북한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3등급폴란드
무장 형제애 훈장폴란드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훈장, 1등급루마니아
군사 공로 훈장, 1등급베트남


8. 대중문화

리처드 A. 클라크는 자신의 소설 ''브레이크포인트''에서 냉전 종식의 배경을 설명하며 군사 혁명에서의 기술적 우위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오가르코프를 "기술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소련 군 지도자로 묘사하며, 이러한 인식이 소련의 포기로 이어졌다고 서술했다.[19]

참조

[1] 서적 The Great Transition: American-Soviet Relations and the End of the Cold War https://archive.org/[...] Brookings Institution 1994
[2] 웹사이트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Огарков http://www.warheroes[...] 2021-03-24
[3] 웹사이트 Огарков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http://okp.mil.ru/se[...] 2020-03-24
[4] 웹사이트 Маршал Огарков https://stuki-druki.[...] 2020-03-24
[5] 웹사이트 Огарков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https://marshal-sssr[...] 2020-03-24
[6] 웹사이트 Сегодня исполняется 100 лет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Маршала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Николая Огаркова http://pda.mil.ru/pd[...] 2020-03-24
[7] 웹사이트 ОГАРКОВ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в http://history.tver.[...] 2020-03-24
[8] 웹사이트 Большое видится на расстоянии https://rg.ru/2019/0[...] 2019-01-22
[9] 웹사이트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Огарков http://xn--d1abichgl[...]
[10] 웹사이트 THE LAST HOURS OF FLIGHT 007: RETRACING THE FATEFUL NIGHT OVER SAKHALIN https://www.nytimes.[...] 1983-09-23
[11] 웹사이트 N. V. Ogarkov, 76; Marshal Defended '83 Downing of Jet https://www.nytimes.[...] 1994-01-26
[12] 웹사이트 The Ogarkov Reforms: The Soviet Inheritance Behind Russia's Military Transformation https://russianmilit[...]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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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웹사이트 Obituary: Marshal Nikolai Ogarkov https://www.independ[...] 199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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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Breakpoint https://archive.org/[...] G. P. Putnam's Son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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