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키와키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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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키와키 마쓰다이라가는 마쓰다이라 씨의 분가 중 하나로,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를 시조로 한다. 계보에 대한 불분명한 점이 존재하며, 여러 문헌에서 다르게 묘사되기도 한다.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고쇼인반 조두를 맡거나 다이묘가 되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다키와키 마쓰다이라가는 고지마 번주 가문, 아소 마쓰다이라 가문 등 여러 분파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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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키와키 마쓰다이라씨 - 조자이번
조자이번은 에도 시대 후기 가즈사 국(지금의 지바현)에 존재했던 번으로, 하야시 씨가 다이묘로서 통치했으며, 보신 전쟁 이후 번주 하야시 타다타카가 구 막부 측에 가담하여 영지를 몰수당했으나, 그의 공적을 기려 남작 작위를 받았다. - 다키와키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나리
마쓰다이라 노부나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오지마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나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시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로서 사료에서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며, 가문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자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닦았다. - 마쓰다이라씨 - 고이 마쓰다이라가
고이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국 고이 지역을 발상지로 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지류로, 마쓰다이라 타다카게를 시조로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시대에 요리아이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분가에서는 막신과 봉행 등을 배출했다.
다키와키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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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다키와키 마쓰다이라가 → 다키와키가 |
가문 문양 | Kawari Mitsu-ogi.jpg |
가문 문양 명칭 | 변형 세 겹 부채 |
본성 | 칭 - 청화 겐지 |
시조 | 마쓰다이라 노리키요 |
가문 종류 | 무가 화족(자작) |
출신지 | 미카와국가모군 다키와키 |
근거지 | 스루가국고지마번 가즈사국사쿠라이번 도쿄시아카사카구 아오야마 미나미초 |
2. 연혁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를 시조로 하는 마쓰다이라씨의 분가이지만, 그 계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간세이 중수 제씨보(이하 『간세이보』)에서는 "마쓰다이라 다키와키"(권 19)라는 표제 아래 하타모토 2가(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자손)만을 게재하고 있으며, 고지마 번주가(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가)를 포함한 계통(아소 마쓰다이라가)에 대해서는 다키와키가의 관련 계보로서 "마쓰다이라"(권 20)라는 표제 아래에 게재하고 고증을 붙이고 있다.
『간에이 제씨 계도전(이하 『간에이 계도』)·『간세이보』에 따르면, 가조인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는 종가인 마쓰다이라 지카타다의 아들이며, 오규 마쓰다이라 노리모토의 동생이다. 그러나 『간세이보』에서는 마쓰다이라 겐모쓰가의 가전으로서 노리키요를 노리모토의 아들로 하는 "일설"이 있음을 기록하는 등, 오규 마쓰다이라가의 서류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는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섬겼으나, 고지 2년(1556년) 3월 25일에 노리키요·노리토오 부자는 전사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1월 5일에는 노리토오의 적남인 마사노리도 오규 마쓰다이라 지카노리와 싸워 전사했다(미카와 소극·히지카타 전투 참조). 그 후 마사노리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복수로서 오규 성을 공격하여 지카노리를 패주 시켰다. 다키와키 마을의 조쇼인(長松院)은 노리키요·노리토오·마사노리의 추선 공양을 위해 개기되었다고 한다.
2. 1. 기원 및 초기 역사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를 시조로 하는 마쓰다이라씨의 분가이다. 그러나 다키와키 마쓰다이라씨의 계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간세이 중수 제씨보(이하 『간세이보』)에서는 "마쓰다이라 다키와키"(권 19)라는 표제 아래 하타모토 2가(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자손)만을 게재하고 있다. 고지마 번주가(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가)를 포함한 계통(아소 마쓰다이라가)에 대해서는 다키와키가의 관련 계보로서, "마쓰다이라"(권 20)라는 표제 아래에 게재하고 고증을 붙이고 있다.
『간에이 제씨 계도전(이하 『간에이 계도』)·『간세이보』에 따르면, 가조인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는 종가인 마쓰다이라 지카타다의 아들이며, 오규 마쓰다이라 노리모토의 동생이다. 그러나 『간세이보』에서는 마쓰다이라 겐모쓰가의 가전으로서, 노리키요를 노리모토의 아들로 하는 "일설"이 있음을 기록하는 등, 오규 마쓰다이라가의 서류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마쓰다이라 노리키요는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섬겼으나, 고지 2년(1556년) 3월 25일에 노리키요·노리토오 부자는 전사했다. 또한 이에 앞서, 노리토오의 적남인 마사노리도 오규 마쓰다이라 지카노리와 싸워 같은 해 1월 5일에 전사했다.(미카와 소극·히지카타 전투 참조). 그 후 마사노리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복수로서 오규 성을 공격하여, 지카노리를 패주 시켰다. 다키와키 마을의 조쇼인(長松院)은 노리키요·노리토오·마사노리의 추선 공양을 위해 개기되었다고 한다.
2. 2. 마쓰다이라 노리타카 계통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미카와 잇코잇키와 후타마타 성 공격에서 군공을 세웠다. 오다와라 정벌 때 사요노나카야마에서 히데요시의 환대에 응했으며, 사후 이에야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오루스이반을 맡아 조원 120명을 관리했다. 덴쇼 20년/분로쿠 원년(1592년) 사망했다.[1]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쓰구는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고, 미카와국에 600석의 영지를 받았다(선조의 땅인 타키와키 촌 포함). 이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이 되어 고쇼인반 조두를 맡았으며, 상경 수행 중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겐모쓰를 칭했다. 『간세이보』에서 타키와키 가문으로 취급되는 것은, 노리쓰구의 사위이자 조카인 마사사다(조카|일본어 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딸이 아오누마 마사쓰구에게 시집가 그 사이에 태어난 인물)의 계통(마쓰다이라 겐모쓰 노리미치)과 노리쓰구의 친아들 노리히사 계통(마쓰다이라 이치로에몬 노리타케) 두 가문이다.
2. 3. 아소 마쓰다이라 가문 (麻生松平家)
덴쇼 12년(1584년) 6월 20일에 오와리국 가니에(가니에 성 전투)에서 전사한 마쓰다이라 시로에몬 마사타다는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일족으로 여겨진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의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는 마쓰다이라 노리키요의 장남인 지카마사(노리토를 차남으로 한다)의 아들인 기요후사가 아소(현재의 오카자키시사쿠라가타 정)를 영유했고, 기요후사의 아들이 마사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선조는 아소(麻生) 출신이라고만 언급하고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는 긴 안문이 첨부되어 있는데, 노리키요의 사망 연도와 묘소가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와 일치하지 않고, 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에는 지카마사·기요후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계통을 다키와키 가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아들로 '마사쓰구'를 싣고 있지만,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마사타다에게는 마사히데·마사카쓰·가쓰히데 3명의 아들이 있었고, 마사히데의 뒤를 가쓰히데(『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서는 이 인물을 '마사쓰구'로 기록)가 이었다고 한다. 마사쓰구(족보에 따르면 가쓰히데 또는 마사요시)의 아들 마사시게(족보에 따르면 마사토오)는 오쇼인반을 맡아 1200석을 영유했고, 그 계통이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마사토시 가문이다.
또한, 마사쓰구의 차남 산로베는 어머니 쪽 조부인 무라쿠시 산자에몬의 유지를 이었지만, 그 동생 마사요시가 가문을 잇고 성씨를 마쓰다이라로 복귀했다. (다만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의 족보에서는 산자에몬의 기재를 누락하고, 마사요시가 별가를 세운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마사요시의 양자가 된 마사하루는 양자를 들였다가 친가로 돌려보내는 것을 3번 반복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양자 연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태가 내려져 가문이 끊어졌다.
2. 4. 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 가문 (松平丹後守家, 코지마 번주 가문)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오야마 타다토시의 휘하에서 전사한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도움 십랑)가 후에 고지마 번주가 되는 가문(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 가문)의 조상이다. 마사카쓰는 노리카쓰를 초대 가문주로 했을 때 5대째 인물이다.『간세이보』에 따르면, 노리키요부터 마사카쓰까지의 계보는 아소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과 같으며, 마사카쓰는 마쓰다이라 마사타다의 차남으로 되어 있다. 마사카쓰의 유산을 이은 시게노부(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가 당주였던 시기에 편찬된 『간에이 계도』에서는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지계로 기재되어 있으며, 별 문양으로 「둥근 붓꽃」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간세이보』의 안문에서는 "이 무렵 가문을 일으킨 것과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지마 번주 가문에 대해서는 각종 『무감』에서 "세라다 친타다 공 차남 3주 타키와키 성주 마쓰다이라 겐시로 노리키요 5대손" 마사카쓰부터 시작하는 계도를 싣고 있지만,[2][3][4][5][6]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내에서 취급하는 것과[2][4]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과는 다른 계통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독립된 계통으로 할 경우 계통명(「후지이」, 「가타하라」, 「마쓰이」, 「사쿠라이」 등)의 언급이 없는 것[3]과, 「마쓰다이라 세라다」로 제목이 붙여지는(「세라다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취급되는) 것이 있다.[5][6]
마사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가까이 섬겼고,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지만, 여름 전투의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이에노부의 차남 시게노부가 사위 양자로 가문을 계승했다. 시게노부는 쇼호 2년(1645년)에 종5위하 단고노카미에 서임되었고, 고쇼구미 반토, 쇼인 반토, 오반토와 직책을 거쳐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슨푸성대를 맡았으며, 지행도 1,200석에서 스루가 국내 5,000석까지 증가했다.
다음 대도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단바 사사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서장자 노리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 노리타카는 누진을 거듭하여 겐로쿠 2년(1689년) 5월에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그전까지의 스루가 6,000석에 무사시·고즈케 양국의 소령 4,000석을 가증받아 총 1만 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유능하다고 알려졌지만 병약했던 노리타카는 다음 겐로쿠 3년(1690년) 10월 18일에 36세로 사망했다.
다음 대의 마쓰다이라 노부하루는 기하타의 도다 시게쓰네의 차남이었지만 노리타카의 조카에 해당하며, 양자로 입적하여 계승했다. 노부하루 때 무사시·고즈케의 소령을 스루가국으로 옮겨 동국 고지마의 땅에 진야를 세웠다. 스루가 고지마 번 1만 석은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2. 5.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원년(1868년) 7월 13일,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시즈오카 번 건립에 따라 가즈사 국 사쿠라이 번으로 전봉되었다[1]。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토시는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으로 사쿠라이 번 지사에 임명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 폐번치현까지 역임했다[2]。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다키와키 가문도 다이묘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3][4]。 메이지 4년(1871년) 노부토시는 가명을 '마쓰다이라'에서 '다키와키'로 바꾸었다[5]。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구 소번 지사로서 자작에 임명되었다[6]。
4대 자작 히로미쓰는 철도성 관료를 거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및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며 정계에서 활약하는 한편, 다양한 기업의 중역을 맡아 실업가로서도 활약하여 조선에서도 사업을 전개했다[7]。 그의 대에 다키와키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아카사카구 아오야마 미나미 정에 있었다[8]。
3. 분파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미카와 잇코잇키와 후타마타 성 공격에서 군공을 세웠다. 오다와라 정벌 때는 사요노나카야마에서 히데요시의 환대에 응했으며, 사후 이에야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오루스이반을 맡아 조원 120명을 관리했다. 덴쇼 20년/분로쿠 원년(1592년) 사망했다.[1]
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아들 마쓰다이라 노리쓰구는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종군했고, 미카와국에 600석의 영지를 받았다(선조의 땅인 타키와키 촌 포함). 그 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이 되어 고쇼인반 조두를 맡았으며, 상경에 수행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겐모쓰를 칭했다. 『간세이보』에서 타키와키 가문으로 취급받는 것은, 노리쓰구의 가문을 사위로 맞아 계승한 마사사다正定|마사사다일본어(조카. 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딸이 아오누마 마사쓰구에게 시집가 그 사이에 태어남)의 계통(마쓰다이라 겐모쓰 노리미치), 노리쓰구의 친아들次男|차남일본어 노리히사 계통(마쓰다이라 이치로에몬 노리타케)의 두 가문이다.
덴쇼 12년(1584년) 6월 20일에 오와리국 가니에(가니에 성 전투)에서 전사한 마쓰다이라 시로에몬 마사타다는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일족으로 여겨진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는 마쓰다이라 노리키요의 장남인 친마사(노리토를 차남)의 아들 키요후사가 아소(현재의 오카자키시 사쿠라가타 정)를 영유했고, 키요후사의 아들이 마사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선조는 아소(麻生) 출신이라고만 언급하고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는 긴 안문이 첨부되어 있는데, 노리키요의 사망 연도와 묘소가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와 일치하지 않고, 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에는 친마사·키요후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계통을 다키와키 가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아들로 「마사쓰구」를 싣고 있지만,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마사타다에게는 마사히데·마사카쓰·카쓰히데 3명의 아들이 있었고, 마사히데의 뒤를 카쓰히데(『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서는 이 인물을 「마사쓰구」로 기록)가 이었다고 한다. 마사쓰구(족보에 따르면 카쓰히데 또는 마사요시)의 아들 마사시게(족보에 따르면 마사토오)는 오쇼인반을 맡아 1200석을 영유했고, 그 계통이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마사토시 가문이다.
마사쓰구의 차남 산로베는 어머니 쪽 조부인 무라쿠시 산자에몬의 유지를 이었지만, 그 동생 마사요시가 가문을 잇고 성씨를 마쓰다이라로 복귀했다 (다만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 족보에서는 산자에몬의 기재를 누락하고, 마사요시가 별가를 세운 것처럼 기록). 마사요시의 양자가 된 마사하루는 양자를 맞이했다가 친가로 돌아가는 것을 3번 반복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양자 연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태가 내려져 가문이 끊어졌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오야마 타다토시의 휘하에 속해 전사한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도움 십랑)가 후에 고지마 번주가 되는 가문(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 가문)의 조상이다. 마사카쓰는 노리카쓰를 초대 가문주로 했을 때 5대째가 되는 인물이다.
『간세이보』에 따르면, 노리키요부터 마사카쓰까지의 계보는 아소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과 같으며, 마사카쓰는 마쓰다이라 마사타다의 차남으로 되어 있다. 마사카쓰의 유적을 이은 시게노부(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가 당주였던 시기에 편찬된 『간에이 계도』에서는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지계로 기재되어 있으며, 별 문양으로 「둥근 붓꽃」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간세이보』의 안문에서는 "이 무렵 가문을 일으킨 것과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지마 번주 가문에 대해서는 각종 『무감』에서 "세라다 친타다 공 차남 3주 타키와키 성주 마쓰다이라 겐시로 노리키요 5대손" 마사카쓰부터 시작하는 계도를 싣고 있지만,[2][3][4][5][6]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내에서 취급하는 것과[2][4]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과는 다른 계통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 독립된 계통으로 할 경우 계통명(「후지이」, 「가타하라」, 「마쓰이」, 「사쿠라이」 등)의 언급이 없는 것[3]과, 「마쓰다이라 세라다」로 제목이 붙여지는(「세라다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취급) 것이 있다.[5][6]
마사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하타로 섬겼고,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지만, 여름 전투의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이에노부의 차남 시게노부가 사위 양자로 가문을 계승했다. 시게노부는 쇼호 2년(1645년)에 종5위하 단고노카미에 서임되었고, 고쇼구미 반토, 쇼인 반토, 오반토와 직책을 거쳐 메이레키 2년(1656년)부터 슨푸성대를 맡았으며, 지행도 1,200석에서 스루가 국내 5,000석까지 증가했다.
다음 대도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단바 사사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서장자 노리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 노리타카도 누진을 거듭하여, 겐로쿠 2년(1689년) 5월에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그전까지의 스루가 6,000석에 무사시·고즈케 양국의 소령 4,000석을 가증받아, 총 1만 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유능하다고 알려졌지만 병약했던 노리타카는, 다음 겐로쿠 3년(1690년) 10월 18일에 36세로 사망했다.
다음 대의 마쓰다이라 노부하루는 기하타의 도다 시게쓰네의 차남이었지만 노리타카의 조카에 해당하며, 양자 입적하여 계승했다. 노부하루 때 무사시·고즈케의 소령을 스루가국으로 옮겨, 동국 고지마의 땅에 진야를 세웠다. 스루가 고지마 번 1만 석은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4. 주요 인물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미카와 잇코잇키와 후타마타 성 공격에서 군공을 세웠다. 오다와라 정벌에 즈음하여 사요노나카야마에서 히데요시의 환대에 응했으며, 사후 이에야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오루스이반을 맡아 조원 120명을 맡았다. 덴쇼 20년/분로쿠 원년(1592년) 사망했다.[1]
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리쓰구는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종군했고, 미카와국에 600석의 영지를 받았다(선조의 땅인 타키와키 촌을 포함). 그 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이 되어 고쇼인반 조두를 맡았으며, 상경에 수행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겐모쓰를 칭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오야마 타다토시의 휘하에 속해 전사한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도움 십랑)는 후에 고지마 번주가 되는 가문(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 가문)의 조상이다.
마사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하타로 섬겼고,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지만, 여름 전투의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전사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이에노부의 차남 시게노부가 사위 양자로 가문을 계승했다.
다음 대는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단바 사사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서장자 노리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 겐로쿠 2년(1689년) 5월에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총 1만 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다음 대의 마쓰다이라 노부하루는 기하타의 도다 시게쓰네의 차남이었지만 노리타카의 조카에 해당하며, 양자 입적하여 계승했다. 노부하루 때 무사시・고즈케의 소령을 스루가국으로 옮겨, 고지마에 진야를 세웠다. 스루가 고지마 번 1만 석은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노부토시는 메이지 2년(1869년)에 판적 봉환으로 사쿠라이 번 지사에 임명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5일 폐번치현까지 역임했다.
4대 자작 히로미쓰는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및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며 정계에서 활약하는 한편, 다양한 기업의 중역을 맡아 실업가로서도 활약하여 조선에서도 사업을 전개했다.
5. 계도
마쓰다이라 노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미카와 잇코잇키와 후타마타 성 공격에서 군공을 세웠다。오다와라 정벌에 즈음하여 사요노나카야마에서 히데요시의 환대에 응했으며, 사후 이에야스로부터 포상을 받았다。오루스이반을 맡아 조원 120명을 맡았다。 덴쇼 20년/분로쿠 원년(1592년) 사망[1]。
마쓰다이라 노리타카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리쓰구는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에도 종군했고, 미카와국에 600석의 영지를 받았다(선조의 땅인 타키와키 촌을 포함). 그 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측근이 되어 고쇼인반 조두를 맡았으며, 상경에 수행하여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겐모쓰를 칭했다。
『간세이보』에서 타키와키 가문으로 취급받는 것은, 노리쓰구의 가문을 사위로 맞아 계승한 마사사다의 계통(마쓰다이라 겐모쓰 노리미치), 노리쓰구의 친아들 노리히사 계통(마쓰다이라 이치로에몬 노리타케)의 두 가문이다.
1584년 6월 20일 오와리국 가니에에서 전사한 마쓰다이라 시로에몬 마사타다는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의 일족으로 여겨진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서는, 마쓰다이라 노리키요의 장남인 친마사(노리토를 차남으로 한다)의 아들 키요후사가 아소 (현재의 오카자키시사쿠라가타 정)를 영유했고, 키요후사의 아들이 마사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선조는 아소(麻生) 출신이라고만 언급하고 자세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고 있다.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는 긴 안문이 첨부되어 있는데, 노리키요의 사망 연도와 묘소가 다키와키 마쓰다이라 가문 (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와 일치하지 않고, 마쓰다이라 겐모쓰 가문의 족보에는 친마사·키요후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이 계통을 다키와키 가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간에이 계도』에서는 「마쓰다이라 시로에몬」의 아들로 「마사쓰구」를 싣고 있지만,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마사타다에게는 마사히데·마사카쓰·카쓰히데 3명의 아들이 있었고, 마사히데의 뒤를 카쓰히데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에서는 이 인물을 「마사쓰구」로 기록)가 이었다고 한다。 마사쓰구 (족보에 따르면 카쓰히데 또는 마사요시)의 아들 마사시게 (족보에 따르면 마사토오)는 오쇼인반을 맡아 1200석을 영유했고, 그 계통이 마쓰다이라 이와지로 마사토시 가문이다.
또한, 마사쓰구의 차남 산로베는 어머니 쪽 조부인 무라쿠시 산자에몬의 유지를 이었지만, 그 동생 마사요시가 가문을 잇고 성씨를 마쓰다이라로 복귀했다 (다만 『간세이 시대 편찬 계보』 편찬 당시의 족보에서는 산자에몬의 기재를 누락하고, 마사요시가 별가를 세운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마사요시의 양자가 된 마사하루는 양자를 맞이했다가 친가로 돌아가는 것을 3번 반복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양자 연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태가 내려져 가문이 끊어졌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아오야마 타다토시의 휘하에 속해 전사한 마쓰다이라 마사카쓰(도움 십랑)는, 후에 고지마 번주가 되는 가문(마쓰다이라 단고노카미 가문)의 조상이다。마사카쓰는 노리카쓰를 초대 가문주로 했을 때 5대째가 되는 인물이다。
『간세이보』에 따르면, 노리키요부터 마사카쓰까지의 계보는 아소 마쓰다이라 가문(마쓰다이라 이와지로 가문)과 같으며, 마사카쓰는 마쓰다이라 마사타다의 차남으로 되어 있다。마사카쓰의 유적을 이은 시게노부(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출신)가 당주였던 시기에 편찬된 『간에이 계도』에서는,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지계로 기재되어 있으며, 별 문양으로 「둥근 붓꽃」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간세이보』의 안문에서는 「이 무렵 가문을 일으킨 것과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지마 번주 가문에 대해서는 각종 『무감』에서, 「세라다 친타다 공 차남 3주 타키와키 성주 마쓰다이라 겐시로 노리키요 5대손」마사카쓰부터 시작하는 계도를 싣고 있지만[2][3][4][5][6],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 내에서 취급하는 것과[2][4],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과는 다른 계통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있다。독립된 계통으로 할 경우 계통명(「후지이」, 「가타하라」, 「마쓰이」, 「사쿠라이」 등)의 언급이 없는 것[3]과, 「마쓰다이라 세라다」로 제목이 붙여지는(「세라다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취급되고 있는)것이 있다[5][6]。
마사카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게이초 19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공적을 세웠지만, 여름 전투의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마쓰다이라 이에노부의 차남 시게노부가 사위 양자로 가문을 계승했다。시게노부는 쇼호 2년에 종5위하 단고노카미에 서임되었고, 고쇼구미 반토, 쇼인 반토, 오반토와 직책을 거쳐 메이레키 2년부터 슨푸성대를 맡았으며, 지행도 1,200석에서 스루가 국내 5,000석까지 증가했다。
다음 대도 가타하라 마쓰다이라 가문의 단바 사사야마 번주 마쓰다이라 노리노부의 서장자 노리타카를 양자로 맞이했다。노리타카도 누진을 거듭하여, 겐로쿠 2년 5월에 와카도시요리가 되었고, 그전까지의 스루가 6,000석에 무사시・고즈케 양국의 소령 4,000석을 가증받아, 총 1만 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유능하다고 알려졌지만 병약했던 노리타카는, 겐로쿠 3년 10월 18일에 36세로 사망했다。
다음 대의 마쓰다이라 노부하루는, 기하타의 도다 시게쓰네의 차남이었지만 노리타카의 조카에 해당하며, 양자 입적하여 계승했다。노부하루 때 무사시・고즈케의 소령을 스루가국으로 옮겨, 동국 고지마의 땅에 진야를 세웠다。스루가 고지마 번 1만 석은 막부 말기까지 이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松平乗高
https://kotobank.jp/[...]
2021-08-10
[2]
서적
享保武鑑 2
https://dl.ndl.go.jp[...]
享保11年?、版元不明
[3]
서적
享保武鑑 2
https://dl.ndl.go.jp[...]
刊行年・版元不明
[4]
서적
享保武鑑 4巻[2]
https://dl.ndl.go.jp[...]
享保16年、須原茂兵衛
[5]
서적
安永武鑑 [3]
https://dl.ndl.go.jp[...]
安永9年、出雲寺和泉椽
[6]
서적
安政武鑑 4巻付1巻 [3]
https://dl.ndl.go.jp[...]
安政3年、千鐘房須原屋茂兵衛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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