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이번은 에도 시대에 존재했던 번으로, 가이부치 번에서 시작하여 조자이 번, 사쿠라이 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825년 하야시 타다후사가 1만 석의 다이묘가 되면서 가이부치 번이 성립되었고, 이후 번청을 조자이 마을로 옮기면서 조자이 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1850년 조자이 번은 미국 함대의 일본 개항 요구와 보신 전쟁을 겪었다. 보신 전쟁에서 하야시 다다타카는 구 막부 측에 가담하여 영지를 몰수당했고, 이후 사쿠라이 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쿠라이 번은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고,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조자이번은 가즈사국과 고즈케국에 영지를 소유했으며, 하야시 가문과 마쓰다이라 가문이 번주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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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이번주 - 다키와키 노부토시 다키와키 노부토시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다이묘로, 사쿠라이 번 번주를 지냈으며,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 편에 가담 후 가즈사국으로 전봉되어 치수 공사 등에 힘썼다.
다키와키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나리 마쓰다이라 노부나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여러 요직을 거쳐 오지마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으나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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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사노쿠니 모다 군(望陀郡일본어) 조자이 촌(請西村일본어)에 조자이 진야(ja)를 두었기 때문에 조자이 번으로 불렸다. 당초에는 인근의 모다 군 가이부치무라(貝淵村일본어)에 가이후치 진야(貝淵陣屋일본어)를 두었기 때문에 '''가이부치 번'''(貝淵藩일본어)으로 불렸다. 고쿠다카는 1만 석으로, 한때 최대 1만 8천 석까지 이르렀다.[1]
메이지 유신 이후 설치된 '''사쿠라이 번'''(桜井藩일본어)은 인근의 모다 군 사쿠라이 촌(桜井村일본어)에 있었으며, 실질적으로는 가이부치 번과 동일한 번으로 간주된다.[1] 사쿠라이 진야는 구 가이부치 진야를 전용한 것이었다. 가이부치・사쿠라이・조자이 촌은 인접해 있었고, 가이부치(사쿠라이) 진야는 가이부치・사쿠라이 두 촌의 경계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번사들의 저택은 이들 3개 촌 내에 분포해 있었다.
1868년(메이지 원년) 7월 13일, 마쓰다이라 노부토시(후에 타키와키 노부토시로 개성)가 스루가국코지마 번에서 1만 석으로 가즈사국으로 이관되었다. 처음에는 아마하 군 미나미코야스 촌 가나자키에 코야스 진야를 두고 '''가나자키 번'''이라 칭했으나, 이듬해 3월 번청을 모다 군 사쿠라이 촌으로 옮겨 '''사쿠라이 번'''으로 개칭했다. 이는 미나미코야스 촌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쿠라이 번이 번청으로 삼은 곳은 가이부치 진야였는데, 이는 조적으로 개역된 "가이부치 번"의 명칭을 피하고 이웃 촌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노부토시는 번 내의 치수 공사에 진력했다.[1]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사쿠라이 번은 폐지되고 '''사쿠라이 현'''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1차 부현 통합으로 보소 반도의 여러 현을 통합한 기사라즈 현이 성립되었으며, 현청은 가이부치 진야(사쿠라이 진야)에 설치되었다. 1873년 기사라즈 현은 인바 현과 합병하여 지바현이 되었다.
초대 번주 임충영의 차남. 1850년에 진야를 모다군 우케니시촌으로 옮기고, 조자이 번으로 개칭.
2. 1. 1. 하야시 가문의 기원과 헌토사배(献兎賜杯) 의식
하야시 가문은 마쓰다이라 가문의 시조인 아리치카・치카우지 부자가 시나노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나가노현마쓰모토시 사토야마베 부근인 치쿠마 군 하야시 고에 살고 있던 하야시 미츠마사(하야시 가문의 선조)는 눈 속에서 토끼를 잡아 맑은 국으로 만들어 아리치카·치카우지에게 대접했다. 이 일은 에도 막부 시대에 정월 행사로 이어져, 하야시 가문이 쇼군에게 토끼 맑은 국을 헌상하고 쇼군으로부터 첫 번째 술을 받는 "헌토사배(献兎賜杯)"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
1927년(쇼와 2년)에 세워진 "헌토의 기념"비(가미네기시의 야사카 신사). "헌토사배" 의식에 사용되는 토끼가 가미네기시 촌에서 잡혔던 것에서 유래한다.
2. 2. 조자이 번 (1850년 ~ 1868년)
가즈사노쿠니 모다 군(望陀郡일본어) 조자이 촌(請西村일본어)에 진야(조자이 진야)를 두었기 때문에 조자이 번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인근의 모다 군 가이부치무라(貝淵村일본어)에 가이부치 진야(貝淵陣屋일본어)를 두었기 때문에 '''가이부치 번'''(貝淵藩일본어)으로 불렸다. 고쿠다카는 1만 석이었으며, 한때 최대 1만 8천 석까지 이르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설치된 번으로 인근의 모다 군 사쿠라이 촌(桜井村일본어)에 있었던 '''사쿠라이 번'''(桜井藩일본어)도 가이부치 번과 동일한 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사쿠라이 진야는 구 가이부치 진야를 전용한 것이었다.
가이부치・사쿠라이・조자이 촌은 인접해 있었고, 가이부치(사쿠라이) 진야는 가이부치・사쿠라이 두 촌의 경계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번사들의 저택은 이들 3개 촌 내에 분포해 있었다.
하야시 다다아키라가 영지를 가이부치에서 조자이로 옮긴 후, 1853년 매튜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내항하여 일본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조자이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1853년 6월 4일, 에도 만에 위치한 가이부치의 해안 방어가 강화되었으며, 1854년 3월 23일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다.[1]
하야시 가문은 다시 막부 내의 요직으로 옮겨갔으며, 하야시 다다아키라의 후계자인 하야시 다다카타는 근위대장을 거쳐 후시미 봉행을 역임했다. 하야시 다다카타가 사망하자 그의 형이자 양자인 하야시 다다타카가 영주 자리를 이었다.[1]
가에이 3년(1850년) 11월, 하야시 다다아키라는 번청을 가이부치 진야에서 1.5km 정도 내륙에 위치한 망타군 세이 마을의 고지에 새로 지은 진야(세이 진야)로 옮겼다. 이후 이 번은 '''세이 번'''이라고 불렸다. 가이부치 진야는 번의 지방 관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2대 번주 하야시 다다카타는 후시미 봉행 재임 중이던 게이오 3년(1867년)에 급사하여, 어린 아들 다다히로를 대신하여 조카 하야시 다다타카가 가독을 상속했다.
게이오 4년(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하야시 다다타카는 막부 측에 가담하기로 결심했다.
하야시 다다타카는 후다이 다이묘로서 도쿠가와 씨족에 대한 세습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보신 전쟁에 참여했다.[1]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가신들을 이끌고 조자이를 떠나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즈 국에서부터 북쪽의 아이즈, 센다이까지 오우에쓰 열반 동맹의 일원으로 참전했다.[1]
가에이 3년(1850년) 11월, 조자이번의 번청은 가이부치 진야에서 내륙에 위치한 세이 마을의 고지에 새로 지은 진야(세이 진야)로 옮겨졌고, 이후 '''세이 번'''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게이오 4년(1868년), 유격대의 원조 요청을 받은 하야시 다다타카는 구 막부 측에 가담하여 스스로 번을 탈퇴하고 가신들과 함께 유격대에 참가했다. 출진할 때 세이 진야를 스스로 불태웠다.[4]
하야시 다다타카는 보소나 사가미에서 신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후, 도호쿠 각지로 전전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해 조자이 번은 신정부에 의해 영지가 몰수되었다.[1] 보신 전쟁 중 영지를 모두 몰수당한 것은 세이 번과 아이즈 번 (마쓰다이라 가문)뿐이었다.[5]
센다이로 간 하야시 다다타카는 도쿠가와 종가가 슨푸 70만 석의 제후로 존속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이후 에도의 가라쓰 번 저택에 유폐되었다.[1]메이지 2년(1869년), 하야시 가문은 다다히로를 당주로 하는 300석의 도쿄부사족으로 존속했다. 하야시 다다타카는 메이지 5년(1872년)에 사면되었지만, 이후 곤궁한 생활을 보냈다.
1889년(메이지 22년),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에 따른 대사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가 복권되자, 구 번사들은 하야시 가문의 복권 운동을 일으켰다. 1893년(메이지 26년), 다다히로에게 남작이 수여되었다.
하야시 다다타카는 1941년(쇼와 16년)에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수했다. 그는 막번 체제 하에서 다이묘였던 인물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물로, "마지막 다이묘"[7][8] 중 한 명으로 불린다.
2. 3. 사쿠라이 번 (1868년 ~ 1871년)
1868년(메이지 원년) 7월 13일,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스루가국 코지마 번에서 1만 석으로 가즈사국으로 이관되면서 처음에는 가나자키 번을 칭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번청을 모다 군 사쿠라이 촌으로 옮겨 '''사쿠라이 번'''으로 개칭했다. 이는 미나미코야스 촌의 교통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사쿠라이 번이 번청으로 삼은 곳은 가이부치 진야였다. 가이부치 번(조자이 번)이 조적으로 개역된 경위에서 "가이부치 번"이라는 명칭을 피하고, 이웃 촌의 이름을 따서 "사쿠라이 번"이라고 칭한 것으로 보인다. 노부토시는 번 내의 치수 공사에 진력했다.
1871년 (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사쿠라이 번은 폐지되고 '''사쿠라이 현'''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1차 부현 통합으로 보소 반도의 여러 현을 통합한 기사라즈 현이 성립되었으며, 1873년(메이지 6년)에 인바 현과 합병하여 지바현이 되었다.
2. 3. 1. 메이지 유신 이후의 변화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가즈사국으로 이관되면서 사쿠라이 번으로 개칭되었다.[1]1871년 7월 폐번치현 이후 사쿠라이 번은 사쿠라이 현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 기사라즈 현과 통합되었다. 기사라즈 현청은 구 가이부치 진야(사쿠라이 진야)에 설치되었다.
하야시 다다타카는 보신 전쟁 당시 유격대에 합류하여 신정부군에 대항했으나, 1868년 소령을 몰수당했다.[5] 그는 에도 시대 제후였음에도 메이지 정부에 의해 화족으로 인정받지 못한 유일한 가문 출신이다.[6]1868년부터 1871년까지는 마쓰다이라 노부토시가 조자이 번 지역을 통치했다.
3. 1. 가이부치・조자이 번
1825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osobashu'') 하야시 타다후사는 하타모토에서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했다. 그는 7,000 고쿠의 녹봉에 3,000 고쿠가 추가되어 총 10,000 고쿠의 자격을 갖춰 다이묘가 되었고, 가즈사국에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로써 '''가이부치 번'''이 창설되었다.[1] 그는 1834년 12월에 3,000 고쿠의 수입을 추가로 받았으며, 1839년에도성 재건 노력을 감독하게 되면서 5,000 고쿠를 더 받아 총 수입이 18,000 고쿠로 늘어났다.[1] 그러나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그는 직위와 거처를 박탈당하고 은퇴를 강요받았으며, 수입은 10,000 고쿠로 줄었다.[1]
1850년 11월, 타다후사의 아들 하야시 타다아키라가 영주로 있을 때, 가문은 영지 내의 진야 위치를 가이부치 마을에서 조자이 마을로 옮겼으며, 하야시 가문의 통치 기간 동안 영지는 조자이 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
가즈사국 모다군(望陀郡일본어) 조자이촌(請西村일본어)에 조자이 진야( 請西陣屋일본어)를 두었기 때문에 조자이번으로 불렸다. 당초에는 인근의 모다군 가이부치무라(貝淵村일본어)에 가이후치 진야(貝淵陣屋일본어)를 두었기 때문에 '''가이부치 번'''(貝淵藩일본어)으로 불렸다. 고쿠다카는 으로, 한때 최대 까지 이르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인근의 모다군 사쿠라이촌(桜井村일본어)에 설치되었던 '''사쿠라이 번'''(桜井藩일본어)은 가이부치 번과 동일한 번으로 간주된다. 사쿠라이 진야는 구 가이부치 진야를 전용한 것이었다.
가이부치・사쿠라이・조자이촌은 인접해 있었고, 가이부치(사쿠라이) 진야는 가이부치・사쿠라이 두 촌의 경계 부근의 가이부치촌에 있었기 때문에 번사들의 저택은 이 세 촌에 분포해 있었다.
1871년폐번치현으로 사쿠라이번은 폐지되어 사쿠라이현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사쿠라이현은 기사라즈현과 통합되었고, 이후 지바현의 일부가 되었다.
4. 1. 조자이번 (막부 말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오소바슈'') 하야시 타다후사는 1825년 4월 하타모토에서 와카도시요리로 승진했다. 그는 7000고쿠의 녹봉에 3000고쿠가 추가되어 총 10000고쿠의 자격을 갖춰 다이묘가 되었고, 가즈사국에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로써 貝淵藩|가이부치|가이부치 번일본어이 창설되었다. 그는 1834년 12월에 3000고쿠의 수입을 추가로 받았으며, 1839년 에도성 재건 노력을 감독하게 되면서 5000고쿠를 더 받아 총 수입이 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에나리가 사망하자 그는 직위와 거처를 박탈당하고 은퇴를 강요받았으며, 수입은 로 줄었다.[1]
1850년 11월, 타다후사의 아들 하야시 타다아키라가 영주로 있을 때, 가문은 영지 내의 진야 위치를 가이부치 마을에서 조자이 마을로 옮겼으며, 하야시 가문의 통치 기간 동안 영지는 조자이로 알려지게 되었다.[1] 매튜 C. 페리 제독과 일본 개항을 이끈 미국 함대가 도착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에 놓이게 되었다. 1853년 6월 4일, 에도만에 위치한 카이부치의 해안 방어가 강화되었으며, 1854년 3월 23일까지 그 수준을 유지했다.[1] 그 후 하야시 가문은 다시 막부 내의 요직으로 옮겨갔으며, 타다아키라의 후계자 하야시 타다카타는 먼저 근위대장(''오반가시라'')이 되었고, 이후 후시미 봉행을 역임했다. 타다카타가 사망하자 영주 자리는 그의 형이자 양자인 하야시 타다타카에게 넘어갔다.[1]
보신 전쟁이 시작되자 하야시 타다타카는 조자이에 머물렀으며, 도바-후시미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는 후다이 다이묘들 중에서 도쿠가와 씨족에 대한 세습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었다. 그는 히토미 카츠타로의 게릴라전에 참여하여 자신의 가신 전체를 이끌고 영지를 떠나 이즈 국에서부터 북쪽의 아이즈와 센다이까지 오우에츠 열반 동맹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도쿠가와 본가가 스루가 국의 슨푸 (현재의 시즈오카시)에 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했다. 그러나 타다타카의 행동에 대한 처벌로 조자이는 신정부에 의해 접수되었다. 타다타카 자신은 그의 가문이 분가였던 가라쓰 번의 오가사와라 씨족의 에도 저택에 유폐되었다.[1] 그는 나중에 석방되어 은퇴하기 전까지 여러 정부 요직을 역임했으며, 화족에서 남작(''단샤쿠'')으로 봉해졌다. 하야시 타다타카는 1941년에 사망한 마지막 전 다이묘였다.
하야시 가문(미카와 하야시 씨)는 오가사와라 씨의 지류를 칭하는 미카와 후다이 가문이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 하타모토로서 대대로 반가타를 맡았으며, 겐로쿠 연간에 나가사키 봉행이나 마치 봉행을 맡았던 하야시 타다카즈는 가증을 받아 3000석을 지행했다.
덴메이 7년(1787년) 4월에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1대 쇼군으로 취임하자, 타다히데는 코쇼로 섬기며 이에나리의 총신이 되었다. 간세이 8년(1796년)에 가독을 상속한 타다히데는, 코쇼반구미 가시라・오용 토리츠기 미나라이・오소바 고요 토리츠기 등으로 승진하고, 더 나아가 가증을 거듭하여, 분세이 5년(1822년)에는 7000석을 지행했다.
분세이 8년(1825년) 4월, 와카 도시요리로 승진하여 3000석의 가증을 받아, 총 의 다이묘로 열하여 '''카이부치 번'''이 성립했다. 덴포 5년(1834년) 12월에는 3000석, 덴포 10년(1839년) 3월에는 에도성 수축 등의 공을 치하받아 5000석을 가증받아, 총 을 영했다. 그러나, 이에나리가 덴포 12년(1841년) 1월에 사망하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와 로주 미즈노 타다쿠니에 의한 숙청을 받아, 4월에 8000석을 몰수당한 데다, 와카 도시요리도 파면되었다. 게다가 같은 해 7월에는 강제 은거를 명받았다.
덴포 14년(1843년) 6월에는, 덴포의 개혁의 일환으로 행해진 인바누마 호리할의 테츠다이 부신을 명받았다. 이에나리 사망 후 8000석이나 되는 가증지를 잃은 번 재정은 더욱 압박을 받았다.
가에이 3년(1850년) 11월, 충욱은 번청을 가이부치 진야에서 1.5km 정도 내륙에 위치한 망타군 세이 마을의 고지에 축조한 신부근 진야(세이 진야)로 옮겼다. 이후 이 번은 '''세이 번'''이라고 불린다.
2대 번주 충교는 후시미 봉행 재임 중의 게이오 3년(1867년)에 급사하여, 어린 적남 충홍을 대신하여 조카 충숭이 가독을 상속했다.
게이오 4년(1868년), 가즈사에 전진한 유격대의 원조 요청을 받은 충숭은 구 막부 측에 가담할 것을 결심하고, 스스로 탈번하여 동번사들과 함께 유격대에 참가했다. 출진에 즈음하여 세이의 진야를 스스로 불태웠다.[4]
충숭 등은 보소나 사가미에서 신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후, 이후 구 막부 세력이 갇힌 도호쿠 각지로 전전했다. 이러한 충숭의 행동은 신정부의 분노를 사, 메이지 원년(1868년)에 소령을 몰수당했다. 보신 전쟁 중 성지를 모두 몰수당한 것은 세이 번과 아이즈 번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뿐이지만, 아이즈 마쓰다이라 가문은 용보에게 새롭게 도난 번 30000석이 하사되어, 화족에 열거되었다.[5] 그 때문에 하야시 가는, 에도 시대에는 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정부에 제후로 인정받지 못하고, 화족이 되지 못한 유일한 가문[6]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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