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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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은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 우체국을 독일군이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단치히 자유시에 폴란드 우체국이 세워졌고, 폴란드와 독일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폴란드 우체국 직원들은 방어 준비를 했다. 독일은 우체국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결국 우체국은 함락되고 생존자들은 처형되었다. 1995년 독일 법원은 이들의 사형 판결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명예를 회복했다. 현재 우체국은 그단스크에서 운영 중이며, 전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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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명칭 |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
전투의 부분 |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 |
시기 | 1939년 9월 1일 |
장소 | 자유 도시 단치히 |
좌표 | 54.355 |
결과 | 나치 독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폴란드 제2공화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콘라트 구데르스키 알폰스 플리시코프스키 |
지휘관 2 | 빌리 베트케 요하네스 섀퍼 |
병력 규모 | |
병력 1 | 우체국 직원 및 민간인 55명, 철도청 직원 1명 |
병력 2 | SS, SA, 경찰, 준군사단체, 반란군 200명 이상 ADGZ 장갑차 3대 이상 |
피해 규모 | |
피해 1 | 6명 전사 2명 항복 이후 오인사격으로 사망 14명 부상 38명 포로 4명 탈출 |
피해 2 | 10명 사망 25명 부상 ADGZ 1대 파괴 |
관련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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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폴란드 제2공화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단치히 자유시에서 각종 치외 법권을 보장받았다. 1925년 설립된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도 그 일환이었다.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건물은 치외 법권이 적용되는 폴란드 영토로 간주되었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독일 전함 이 베스테르플라테 반도를 포격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5] 같은 시각, 단치히 자유시 경찰은 ''Polizeioberst'' 빌리 베스케의 지휘 아래 폴란드 우체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에는 지역 친위대(SS) 부대와 돌격대(SA) 부대, 그리고 SS 하임베어 단치히 부대가 지원했으며, 경찰 ADGZ 중장갑차 세 대가 동원되었다.[6]
1939년 9월 1일 오전 4시 45분, 베스테르플라테 반도에 대한 함포 사격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단치히 자유시는 인구의 95%가 독일인이었고, 1933년부터 나치당이 집권했기 때문에 현지 친위대와 돌격대 등이 독일군에 협력했다.
폴란드와 독일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1939년 4월 폴란드 최고 사령부는 전투 공병이자 예비역 소위인 콘라트 구데르스키(1900–1939)를 발트해 해안으로 파견했다. 그는 알폰스 플리시코프스키 등과 함께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에서 공식 및 자원 보안 요원을 조직하고, 잠재적인 적대 행위에 대비하도록 준비시켰다. 직원 훈련 외에도 건물 안팎의 방어를 준비했는데, 근처 나무를 제거하고 입구를 요새화했다. 8월 중순에는 그디니아와 비드고슈치의 폴란드 우체국에서 10명의 직원(대부분 예비역 부사관)이 추가로 파견되었다.
1939년 7월에 고안된 독일 공격 계획은 주 건물과 방어군이 두 방향에서 공격받을 것이라고 결정했다. 정문에서 유인 공격을 하고, 주력군은 인접한 작업실 벽을 뚫고 측면에서 공격할 예정이었다. 자유 도시 단치히 경찰도 우체국 공격 계획을 세웠다.[5]
당시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에는 단치히 자유시 국적의 폴란드인 직원 43명, 폴란드 제2공화국의 그디니아와 비드고슈치 등지에서 온 폴란드인 직원 10명, 건물 관리인과 그의 부인, 10살짜리 딸(에르비나 바르지호프스카)이 건물에 있었다. 폴란드인 지휘관은 바르샤바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도 기술자이자 예비역 소위인 콘라트 구데르스키였다. 당시 우체국은 현금 수송 업무도 담당했기에 우편차를 노리는 강도가 잦아 우체국에도 무기가 있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 우체국에는 Wz. 35 대전차 소총 1정, Wz. 28 경기관총 3정, Vis 권총 40정, 소총 여러 자루와 수류탄 여러 개가 있었다.[4]
3. 전투
폴란드 우체국 방어는 폴란드의 방어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이들은 폴란드군 육군의 포모제 군(Armia Pomorze)이 단치히에 지원군으로 올 때까지 버티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포모제 군은 독일군에게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우체국을 구원할 수 없었다.
폴란드 측 방어 지휘관 콘라트 구데르스키는 두 번째 공격을 막는 과정에서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다.[5] 독일군은 11시에 국방군으로부터 75mm 포 2문과 105mm 곡사포 1문으로 보강되었지만, 폴란드인들의 저항으로 공격은 실패했다. 15시에 독일군은 2시간의 휴전을 선언하고 항복을 요구했지만, 폴란드인들은 이를 거부했다. 17시에는 폭발물을 설치하여 벽을 파괴하고 재공격을 감행하여 지하를 제외한 건물 대부분을 점령했다.
18시에 독일군은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여 지하에 불을 질렀고, 5명의 폴란드인이 화상을 입고 사망했다. 결국 19시에 지하에 있던 생존자 전원이 항복했다. 항복 과정에서 백기를 든 우체국장 얀 미혼 박사를 포함한 일부 직원들이 독일군에게 사살되었다.
3. 1. 독일 측 공격 계획
나치 독일은 양면 공격을 계획했다. 소규모 부대가 정문으로 공격하고, 본대는 건물 오른쪽 측면에 있는 벽을 통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공격은 우체국 정문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독일 공격대 2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당하면서 실패했다. 두 번째 공격은 건물 오른쪽에 있는 사무실 벽을 부수려고 시도했으나, 지휘관 콘라트 구데르스키가 수류탄을 던져 격퇴했다. 하지만 구데르스키는 이 과정에서 전사했다.[5]
이후 9월 1일 오전 11시에 독일 무장친위대와 돌격대, 단치히 자유시 경찰 등은 75mm 보병포 2문을 동원하여 벽을 부수고 우체국 진입을 시도했지만, 폴란드인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독일 측은 오후 3시에 공격을 멈추고 폴란드인들에게 2시간 동안 항복할 시간을 주었지만, 폴란드인들은 항복을 거절했다.
그 사이 독일군은 105mm 곡사포 1문을 준비하고, 공병들은 무너진 우체국 벽 밑에 600kg 짜리 폭발물을 설치했다.
최후 통첩 시간이 지난 오후 5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부서진 벽으로 독일 공격대가 포 세 문의 지원을 받으며 재진입했고, 생존한 폴란드인들은 지하로 밀려났다.
오후 6시, 독일 공격대는 지하에 휘발유를 붓고 화염방사기로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폴란드 직원 5명이 산 채로 불에 타 죽었다.
결국 오후 7시에 지하에 있던 생존자 전원이 항복했다.
4. 전투 이후
생존한 우체국 직원들은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불법 전투원(파르티잔)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다.
이름 | 출생 | 비고 |
---|---|---|
콘라트 구데르스키 | 1900년 2월 19일 | 수비대 지휘관 |
브루논 마르샤우코프스키 | 1904년 1월 1일 | 전사 |
얀 미혼 | 1888년 6월 1일 | 우체국장, 항복 중 사망 |
스타니스와프 레코프스키 | 1900년 9월 17일 | 전사 |
브로니스와프 슐츠 | 1910년 10월 3일 | 전사 |
유제프 봉식 | 1904년 7월 8일 | 항복 중 사망 |
(이름 미상) 바지호프스키 | 건물 관리인 | |
(이름 미상) 바지호프스카 | 건물 관리인 부인 |
부상자 16명 중 6명은 부상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죽었다. 그 중에는 건물 관리인의 열 살 된 딸 에르비나 바지호프스카도 있었는데, 전신 화상으로 사망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에르비나 바지호프스카 | 1929년 10월 16일 | 1939년 10월 20일 | 화상 후유증 |
베르나르트 빈네베셀 | 1893년 5월 20일 | 1939년 9월 4일 | 두개골 총상 |
스테판 치빈스키 | 1907년 5월 29일 | 1939년 9월 2일 | 화상 후유증 |
알로이지 프란스 | 1905년 2월 17일 | 1939년 9월 5일 | 화상 후유증 |
유제프 니트코프스키 | 1885년 6월 15일 | 1939년 10월 31일 | 화상 후유증 |
얀 핍카 | 1872년 7월 20일 | 1939년 9월 2일 | 화상 후유증 |
죽거나 다치지 않고 포로로 잡힌 28명과 부상에서 회복된 10명은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939년 10월 5일에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된 사람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비고 |
---|---|---|
얀 바나슈코프스키 | 1904년 10월 17일 | |
브와디스와프 바즈기에르 | 1911년 4월 22일 | |
스테판 봉츠코프스키 | 1906년 1월 4일 | |
헬리오도르 베츠케르 | 1904년 7월 3일 | |
알로이지 벨라 | 1899년 6월 9일 | |
안드제이 빈코프스키 | 1902년 11월 11일 | |
플로리안 부지악 | 1911년 10월 1일 | |
막시밀리안 치갈스키 | 1900년 9월 17일 | |
얀 엘바르트 | 1905년 11월 3일 | |
알폰스 플리시코프스키 | 1902년 9월 22일 | 수비대 부지휘관 |
카지미에슈 그다니에츠 | 1907년 1월 17일 | |
콘라트 그로트하 | 1906년 7월 26일 | |
얀 클리멕 | 1889년 9월 20일 | |
프란치셱 클린코슈 | 1899년 12월 22일 | |
브와디스와프 코프로비악 | 1897년 5월 21일 | |
프란치셱 크라우세 | 1900년 8월 13일 | |
프란치셱 쿤트츠 | 1907년 6월 24일 | |
보이치에흐 쿠르코프스키 | 1893년 4월 24일 | |
아우구스틴 리스 | 1900년 11월 27일 | |
프란치셱 마굴스키 | 1904년 9월 2일 | |
베르나르트 마예프스키 | 1900년 12월 7일 | |
프란치셱 미온스코프스키 | 1897년 9월 13일 | |
얀 노박 | 1890년 2월 4일 | |
스테판 노바코프스키 | 1901년 7월 21일 | |
카지미에슈 오제호프스키 | 1915년 11월 23일 | |
브루논 피에오프스키 | 1902년 8월 29일 | |
실베스테르 프워신스키 | 1906년 12월 7일 | |
이그나치 포웜 | 1898년 7월 6일 | |
알렉산데르 라츠키 | 1903년 10월 14일 | |
프란치셰크 롱브차 | 1904년 1월 4일 | |
카지미에슈 로가체프스키 | 1903년 3월 25일 | |
유제프 젭카 | 1899년 11월 25일 | |
레온 스흐레이베르 | 1912년 9월 5일 | |
이그나치 시코르스키 | 1895년 10월 23일 | |
유제프 스트셸레츠키 | 1887년 3월 15일 | |
레오나르트 비시니에프스키 | 1904년 1월 2일 | |
피오트르 테스메르 | 1894년 11월 16일 |
한편, 4명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고 무사히 도망쳐서 살아남았다.
이름 | 출생 |
---|---|
안드제이 구르스키 | 1910년 7월 21일 |
프란치셱 미엘레프칙 | 1910년 12월 2일 |
브와디스와프 밀레프칙 | 1901년 5월 2일 |
아우구스틴 므윈스키 | 1905년 11월 25일 |
1991년 8월 28일, 공사 도중 히틀러에 의해 처형당한 우체국 직원 38명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1995년, 독일 뤼베크 지방 법원은 나치 독일 시절의 판결을 무효화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폴란드에서는 이 이야기가 제2차 세계 대전의 1939년 9월 전투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다. 1979년에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그단스크에서 폴란드 우체국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4. 1. 재판과 처형 과정
프리드리히 에버하르트 장군의 독일 60 보병사단이 군사 재판을 담당했다.[7] 재판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1939년 9월 8일에는 부상을 입지 않고 포로로 잡힌 28명에 대한 단심 군사 재판이 열렸고,[7] 9월 30일에는 부상에서 회복된 10명에 대한 단심 군사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현역 군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국제법에 따르면 무장한 민간인, 즉 파르티잔은 포로로 잡은 후에도 처형할 수 있었다.
사형 판결을 받은 38명은 1939년 10월 5일 오전 4시에 친위대에 의해 단치히 경찰 훈련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5] 처형은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장 막스 파울리 소령이 지휘했다. 막스 파울리는 이후 1946년에 영국군에게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
4. 2. 재심
1995년 독일 뤼베크 지방 법원은 나치 독일에 의해 처형당한 38명에 대한 재심을 실시했다.[17] 뤼베크 지방 법원은 당시 독일 군사 법정이 단치히 자유시에 살던 38명을 재판할 권한이 없었다고 판결하며 무죄를 선고했다.[17]5. 기념물
1979년 9월 1일, 그단스크에 Pomnik Obrońców Poczty Polskiej w Gdańsku|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기념비pl가 세워졌다.[18] 1998년 폴란드 공화국 그단스크 시의회는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에 참가한 56명을 그단스크 명예 시민으로 선정했다.
전투 현장에는 독일군에게 체포당한 폴란드인들을 형상화한 기념물 등이 설치되어 있다. 1939년 10월 5일 처형당한 38명의 우체국 직원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6. 대중문화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1959) 18장에는 '폴란드 우체국 방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이 묘사되었다.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는 전투를 피하려 집으로 가던 중 아버지로 추정되는 얀 브론스키를 만나 우체국으로 돌아가고, 오스카는 SS에게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처형에 일조한다. 전쟁 후 오스카는 포위 공격 생존자 빅토르 벨훈을 만나는데, 빅토르는 그 당시 행동으로 처형될 위기에 처한다.[15][16][17]
1979년에는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기념비가 그단스크에 세워졌다.[18] 2012년 폴란드 록/메탈 밴드 Horytnica는 "Obrońca Poczty w Gdańsku"("단치히 우체국 방어자")라는 제목의 곡을 발표했다.[19] 이 방어전은 2019년 영국 전쟁 드라마 시리즈 ''월드 온 파이어''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극화되었다.[20]
7. 현재
현재 이 건물은 폴란드 우체국 방어자 광장 1/2, 80-800 그단스크에 위치해 있으며,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단스크 제1우체국이라고 불리며,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참조
[1]
웹사이트
1 września 1939 roku miała miejsce obrona Poczty Polskiej w Gdańsku » Historykon.pl
https://historykon.p[...]
2018-08-31
[2]
서적
The Polish Campaign, 1939
Hippocrene Books
1985
[3]
간행물
Poland 1939
Osprey Publishing Ltd.
2002
[4]
웹사이트
OBROŃCY POCZTY GDAŃSKIEJ: CHWAŁA I ZBRODNIA
http://www.mowiawiek[...]
[5]
웹사이트
Danzig: Der Kampf um die polnische Post
http://www.deutscheu[...]
[6]
서적
Blitzkrieg Unleashed: The German Invasion of Poland, 1939
https://books.google[...]
Stackpole Books
2010
[7]
문서
Die Post von Danzig, page 80
[8]
문서
Die Post von Danzig, page 96
[9]
서적
Die Post von Danzig, Geschichte eines deutschen Justizmordes
Rowohlt
[10]
문서
Die Post von Danzig, page 103
[11]
문서
Die Post von Danzig, page 106
[12]
웹사이트
Okupacja (1939 – 1945)
https://www.dawnytcz[...]
2019-06-08
[13]
문서
Kriegsverbrechen in Europa und im Nahen Osten im 20. Jahrhundert, Franz W. Seidler/ Alfred M. de Zayas (Hrsg.), Hamburg: Mittler 2002, Seite 138
[14]
문서
Andrzej Gasiorowski in Chrzanowski, et al. Polska Podziemna na Pomorzu w Latach 1939-1945 (Polish Underground State in Pomerania in the years 1939-1945), Oskar, Gdansk, 2005, pg. 50
[15]
논문
The Polish-German Conflict in Guenther Grass' Danzig: Pan Kishot in "the Tin Drum"
https://www.jstor.or[...]
1996
[16]
논문
The Tin Drum in Poland
http://journals.sage[...]
1989-03
[17]
논문
Inconstant Harmony in "the Tin Drum"
https://www.jstor.or[...]
1982
[18]
웹사이트
Pomnik Obrońców Poczty Polskiej
https://gzdiz.gda.pl[...]
2023-05-22
[19]
Youtube
Horytnica - Obrońca Poczty w Gdańsku
https://www.youtube.[...]
2023-05-02
[20]
웹사이트
World On Fire location: Where is Danzig? Why is it called Gdansk now?
https://www.express.[...]
2023-05-22
[21]
웹사이트
Znajdź naszą placówkę lub punkt - Poczta Polska
https://www.poczta-p[...]
2022-11-07
[22]
간행물
Poland 1939
Osprey Publishing Ltd.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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