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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순양함 SMS 마그데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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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MS 마그데부르크는 독일 해군이 건조한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으로, 영국 인빈시블급 전함순양함에 대응하여 설계되었다. 12문의 10.5cm 함포, 2문의 어뢰 발사관 등을 장착했으며, 27.6노트의 속력과 5,820해리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핀란드만에서 좌초되어 러시아 해군에 나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획된 암호책은 영국 해군의 암호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은 정보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독일 해군은 이후 암호 체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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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순양함 SMS 마그데부르크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1911년의 마그데부르크
1911년의 마그데부르크
함명마그데부르크
함명 유래마그데부르크
건조국독일 제국
기공1910년
진수1911년 5월 13일
취역1912년 8월 20일
최후1914년 8월 26일 핀란드 만에서 좌초
건조 조선소AG 베저, 브레멘
조선소 야드 번호171
함급마그데부르크급 순양함
동형함SMS 브레슬라우
SMS 슈트라스부르크
SMS 슈트랄준트
제원
배수량정상:
만재:
동력16 × 수관식 보일러
추진3 × 증기 터빈
3 × 스크류 프로펠러
항속 거리(에서)
승조원장교 18명
사병 336명
무장12 × SK L/45 포
120 기뢰
2 × 어뢰 발사관
장갑현측:
갑판: 60 mm
사령탑:
건조 비용8,058,000 마르크

2. 함선 설계 및 제원

영국의 인빈시블급 전함순양함 개발에 대응하여 설계된 마그데부르크급 순양함은 이전 독일 경순양함보다 빠른 속도를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 선체를 늘려 유체역학적 효율을 높였으며, 종방향 프레임을 채택하여 중량을 줄였다. 또한, 벨트 아머를 탑재한 최초의 독일 순양함이었다.

마그데부르크급 순양함은 3세트의 Bergmann 증기 터빈과 16개의 석탄 사용 Marine형 보일러로 구동되는 3개의 스크류 프로펠러를 가졌다. 초기 설계는 25000shp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29904shp에 도달했다. 이후 석탄 연소율을 높이기 위해 연료유 분사 방식이 추가되었다. 보일러에서 발생한 연기는 선체 중앙의 4개 연통으로 배출되었다. 마그데부르크de는 1200ton의 석탄과 106ton의 유류를 탑재하여, 약 12kn의 속도로 582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

2. 1. 함선 크기 및 외형

마그데부르크de는 전체 길이 138.7m, 선폭 13.5m, 흘수선 4.4m(전방)의 선체를 가졌다. 일반적인 배수량은 4535ton였고, 만재 배수량에서는 최대 4570ton에 달했다. 이 함선은 짧은 포캐슬 갑판과 주로 포캐슬에 위치한 함교, 탐조등 플랫폼이 있는 두 개의 돛대를 가진 최소한의 상부 구조물로 구성되었다.

단홀름의 에 있는 급 순양함의 모형


''마그데부르크''급의 평면도와 측면도

2. 2. 추진 시스템

SMS 마그데부르크de의 추진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원본 소스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원본 소스에서 속도 및 항속거리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최고 속도: 27.6 노트
  • 항속 거리: 5,000 해리

2. 3. 무장

마그데부르크de는 단일 받침대에 장착된 12문의 10.5cm SK L/45 함포를 주무장으로 탑재했다. 함포 두 문은 선수 앞쪽에 나란히 배치되었고, 8문은 현측에, 나머지 2문은 함선 뒤쪽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이 함포는 최대 30도의 고각을 가지고 있어 12700m 거리의 표적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함포당 150발씩, 총 1,800발의 탄약이 공급되었다. 또한 5발의 어뢰를 장착한 50cm 어뢰 발사관 한 쌍이 있었으며, 발사관은 현측 선체 아래쪽에 잠겨 있었다. 이 외에도 120개의 기뢰를 탑재할 수 있었다.

2. 4. 방호

SMS 마그데부르크는 수선 방호대와 곡면 장갑 갑판으로 보호되었다. 갑판은 선체의 대부분에서 평평했지만, 측면에서 아래로 기울어져 방호대의 하단 가장자리에 연결되었다. 방호대와 갑판은 모두 60mm 두께였다. 함교는 100mm 두께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2. 5. 승무원

마그데부르크의 승무원은 18명의 장교와 355명의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승무원 구성
구분인원
장교18명
사병355명
총계373명


3. 이력

스비네뮌데에서 , 1912년


Magdeburgde는 계약명 "Ersatzde Bussard"로 발주되었으며, 1909년 12월 브레멘의 AG 베젤 조선소에 건조가 수여되었다. 1910년 4월에 기공되었고 1911년 5월 13일에 진수되었으며, 진수식에서는 함명(艦名)의 유래가 된 도시의 시장이 명명했다. 장비 작업을 마친 후, 1912년 8월 12일에 짧은 기간의 제작사 시험을 시작했으며, 8일 후 해군 임명을 받아 Fregattenkapitände (프리깃 함장) Heinrich Rohardt의 지휘하에 공해 함대에 배치되었다. 초기 해상 시험을 마친 후, Magdeburgde는 1912년 12월 1일에 경순양함 를 대신하여 어뢰 시험선으로 사용되었다. 그해 말, 훈련 전대 편성에 참여하여 다른 함선들과 함께 발트해에서 순항을 시작했다.

1913년 4월 초에 다시 한번 순항을 하였고, 6월에는 함대에 합류하여 노르웨이 해역으로 연례 순항을 수행했다. 8월에 Magdeburgde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까지 남쪽으로 항해하며 중앙 대서양으로 함대 순항을 떠났다. 순항 동안 무선 전신 실험에 참여했다. 함대가 본국으로 돌아온 후, 북해에서 연례 대규모 함대 기동이 열렸다. 그 후 Magdeburgde는 9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지속된 개수를 위해 단치히로 향했다. 10월 26일에 어뢰 시험 임무를 재개했지만, 그해 말 카테가트 해협에서 훈련을 위해 다시 함대에 합류했으며, 12월에 발트해에서 다시 훈련 순항을 수행했다. 1914년은 훈련 전대와 함께 훈련으로 시작되었다. 유럽이 7월 위기 동안 전쟁으로 치닫자, Magdeburgde는 항구 방어를 돕기 위해 킬 만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 27일 순찰 중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러시아 제국 방문으로 데려온 프랑스 전함 와 를 만났다.

4. 제1차 세계 대전 참전과 좌초

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SMS 마그데부르크는 발트해 연안 방어 사단에 배속되어 로베르트 미슈케 제독의 지휘를 받았다. 마그데부르크, Augsburgde, 그리고 어뢰정 V25, V26, V186으로 구성된 Offensiv Streitkraftde(공격 부대)가 편성되어 이 지역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다. 이 함선들은 7월 30일에 노이파르바서로 이동했다. 마그데부르크는 8월 2일 러시아의 리바우 항구를 포격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첫 포탄을 발사했으며, Augsburgde는 러시아의 전진 해군 기지 외부에 기뢰밭을 설치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이미 리바우를 떠난 뒤였고, Augsburgde가 설치한 기뢰밭은 표시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독일군의 작전을 방해했다.

8월 6일부터 8일까지 마그데부르크는 리바우 북쪽, 리가만 남쪽 입구를 순찰했다. 그 후 8월 9일부터 15일까지 핀란드 대공국에서 러시아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된 연안 방어 사단의 나머지 부대에 합류했다. 이 공격 중에 마그데부르크는 다거로르트에 있는 리스트나 등대를 포격했다. 또한 벵츠케르 등대와 피스트나에 있는 신호소도 공격했다.

8월 17일, 마그데부르크, Augsburgde, 그리고 세 척의 어뢰정은 기뢰 부설함 을 호위하기 위해 출항했고, 다음 날 강력한 러시아 장갑순양함 두 척인 와 와 마주쳤다. 그러나 독일 장갑순양함 과 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러시아 사령관은 공격하지 않았고, 양측 모두 철수했다.

4. 1. 핀란드만 좌초 사건

1914년 8월 25일, 독일 해군의 베링 소장은 순양함 아우크스부르크 호와 마그데부르크 호, 그리고 어뢰정 2척을 이끌고 핀란드만 입구에 정박하여 러시아 장갑순양함대를 격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인해 서로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8월 26일 0시 27분, 마그데부르크 호는 오덴스홀름 섬에 좌초되었다. 하베니히트 함장은 배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러시아군이 접근하자 기밀문서 파기를 지시했다. 그러나 암호책 3권 중 2권은 분실되었다.

새벽에 오덴스홀름 섬의 러시아군 수비대가 마그데부르크 호의 좌초를 발견하고 보고했다. 곧이어 러시아 해군 병사들이 마그데부르크 호에 승선하여 독일 수병들은 항복했고, 함장도 체포되었다.

7월 말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마그데부르크 호는 발트해 연안 방어 사단에 배속되어 로베르트 미슈케 제독의 지휘 아래 있었다. 8월 2일, 마그데부르크 호는 러시아 리바우 항구를 포격하며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첫 포탄을 발사했다. 8월 9일부터 15일까지는 핀란드 대공국에서 러시아 진지를 공격했다.

8월 17일, 마그데부르크 호는 기뢰 부설함을 호위하다 러시아 장갑순양함 2척과 마주쳤으나, 오인으로 인해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8월 20일, 부대는 재편성되었고, 에를러 베링 소장이 지휘를 맡아 8월 26일 핀란드만 입구에서 러시아 정찰 부대를 수색하는 작전을 명령했다.

오덴스홀름 밖에서 좌초된 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호는 8월 26일 이른 시간에 짙은 안개 속에서 오덴스홀름 등대 근처에 좌초되었다. 어뢰정 V26이 구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승무원들은 탈출했다.

탈출 중, 러시아 순양함 Богатырь|보가티르ru와 Паллада|팔라다ru가 나타나 포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배의 전방을 파괴했지만,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완료하지 못했다. 이 공격으로 마그데부르크 호의 승무원 15명이 사망했고, 함장과 부관은 포로로 잡혔다.

독일 암호책은 파괴되지 않았고, 러시아군은 3권 모두를 회수하여 10월 13일 영국 해군에 한 부를 전달했다. 러시아 해군은 배를 부분적으로 해체하고 결국 난파시켰다.

암호책 탈취는 영국 해군에게 큰 이점을 제공했다. 해군성의 40호실은 암호책을 통해 독일 함대의 움직임을 추적할 수 있었고, 이는 도거 뱅크 해전과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5. 암호책 노획과 40호실

러시아 제국군은 마그데부르크 호를 조사하여 함장이 소각하려다 실패한 암호책 원본 2권을 바닷속에서 발견했다. 러시아는 이 사실을 영국에 통보했고, 런던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해군 무관이 윈스턴 처칠에게 암호책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암호책은 런던으로 이송되었고, 처칠은 이를 40호실로 넘겼다.

40호실은 오스트레일리아 앞바다에서 독일 무역선을 나포하여 <독일 무역통신서>를 압수하고, 영국 원양어선으로부터 독일 구축함의 암호책을 입수하는 등 이미 다양한 경로로 독일 암호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 자료들을 이용하여 독일의 암호 해독에 성공했다.

독일은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암호책이 탈취되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전후 처칠의 회고록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5. 1. 러시아군의 암호책 노획

1914년 8월 26일, 독일 제국 해군의 순양함 마그데부르크 호는 오덴스홀름 섬 인근에서 좌초되었다. 러시아 제국 해군은 좌초된 마그데부르크 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독일 해군 암호책 3권을 노획했다. 이 중 2권은 함장 하베니히트가 바다에 가라앉혔으나 러시아군이 회수했다.

러시아는 9월 초 이 사실을 영국에 알렸고, 10월에 암호책을 런던으로 이송했다. 당시 영국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이 암호책을 해군 암호해독반인 40호실로 넘겼다. 40호실은 이미 다른 경로로 독일 암호책을 입수한 상태였으며,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노획한 암호책은 독일 해군 암호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은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암호책이 탈취된 사실을 알지 못했고, 전후 처칠의 회고록이 출간된 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5. 2. 영국 40호실의 활약

러시아군은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미처 파기되지 않은 문서들을 조사하여, 함장이 소각하려다 실패한 암호책 원본 2권을 발견했다. 러시아는 이 사실을 영국에 통보하고, 10월에 암호책을 런던으로 이송했다. 윈스턴 처칠 해군성 장관은 이를 즉시 해군 소속 암호해독반인 40호실로 넘겼다.

40호실은 이미 1914년 8월 초 오스트레일리아 앞바다에서 나포한 독일 무역선에서 '독일 무역통신서'를 압수했고, 11월 30일에는 영국 원양어선으로부터 독일 구축함이 침몰하기 전에 바다에 던진 암호책을 입수했다. 영국은 이 암호책들을 이용하여 독일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암호책이 탈취된 사실을 알지 못했고, 전후에 처칠의 회고록이 출간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았다.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에 관심을 기울이며 암호체계를 일신한 것도 이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다.

5. 3. 독일의 대응

1914년 10월, 러시아는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노획한 독일 제국 해군 암호책을 영국에 제공했다. 영국 해군 암호해독반 40호실은 이 암호책과 오스트레일리아 앞바다에서 나포한 독일 무역선에서 압수한 <독일 무역통신서>, 영국 원양어선이 입수한 독일 구축함의 암호책 등을 이용해 독일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마그데부르크 호에서 암호책이 탈취된 사실을 전쟁이 끝난 후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 해군은 에니그마 암호 체계를 도입하는 등 암호 체계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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