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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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한 평양에 위치한 고분이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발굴 조사를 거쳐 북한 정권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건되었다. 북한은 동명왕릉을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고 김일성이 직접 개장식에 참석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했으며, 10원 지폐 도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덤은 11.5m 높이의 봉분과 내부 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벽화에는 불교적 주제와 일상생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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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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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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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 동명왕릉 (東明王陵) |
로마자 표기 | Dongmyeongwangneung |
위치 |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
일반 정보 | |
종류 | 릉 |
면적 | 233 헥타르 |
보호 구역 | 1701 헥타르 |
역사적 정보 | |
시대 | 고구려 |
관련 인물 | 동명성왕 |
등재 정보 | |
지정 번호 | 국보 36호 |
유네스코 등재 연도 | 2004년 |
유네스코 지정 명칭 | 고구려 고분군 |
기타 정보 | |
좌표 | 38°53′43.18″N 125°55′22.93″E |
2. 역사
장수왕이 427년 환도산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동명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1] 조선 숙종 시대인 1697년에는 왕이 동명왕릉을 매년 보수하자는 제안을 승인하기도 했다.[4]
- 일제강점기 발굴 및 연구
한국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점령된 1905년 이후에야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 1911년부터 1940년대까지 일본 전문가들은 고구려 고분의 과학적 연구와 기록에 기여했다.[1] 1941년, 동명왕릉은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원래 고분들은 도굴꾼들에 의해 약탈된 상태였다.[1]
- 북한 정권의 개건 및 정치적 이용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북한 고고학의 주요 단점, 즉 고고학자들이 동명왕릉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명왕릉 발굴을 지시했다. 1974년 북한 고고학자들은 동명왕릉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1980년대에 북한은 동명왕릉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면서 기존 건물, 구조물, 기념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백색 대리석 묘를 만들었다.[6][7]
1993년 5월 14일, 김일성은 새로 건설된 묘의 개장식에 참석하고, 동명왕릉 비석에 휘호를 새겼다. 북한은 동명왕릉을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고, 재건 및 유지에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후대에 물려줄 역사적 문화 유산으로 만들었다.[8] 2002년, 북한은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원짜리 동전에 동명왕릉을 묘사하여 발행했다.
2. 1. 일제강점기 발굴 및 연구
한국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점령된 1905년 이후에야 동명왕릉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1] 1911년부터 1940년대까지 일본 전문가들은 고구려 고분의 과학적 연구와 기록에 기여했다.[1] 1941년, 동명왕릉은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으나, 원래 고분들은 도굴꾼들에 의해 약탈된 상태였다.[1]2. 2. 북한 정권의 개건 및 정치적 이용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북한 고고학의 주요 단점, 즉 고고학자들이 동명왕릉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동명왕릉 발굴을 지시했다. 1974년 북한 고고학자들은 동명왕릉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1980년대에 북한은 동명왕릉을 대대적으로 '복원'하면서 기존 건물, 구조물, 기념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백색 대리석 묘를 만들었다.[6][7]1993년 5월 14일, 김일성은 새로 건설된 묘의 개장식에 참석하고, 동명왕릉 비석에 휘호를 새겼다. 북한은 동명왕릉을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고, 재건 및 유지에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후대에 물려줄 역사적 문화 유산으로 만들었다.[8] 2002년, 북한은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원짜리 동전에 동명왕릉을 묘사하여 발행했다.
3. 전설
동명왕의 탄생 설화는 3세기 중국 역사서인 '''위략'''에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왕비의 시녀가 벼락을 맞아 임신하게 되었다. 왕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해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아기를 돼지우리로 던지게 했으나, 아기는 돼지들의 숨결로 연명하며 살아남았다. 그 후 아기는 마굿간에 던져졌고, 거기서도 살아남았다. 아이가 신성한 존재임을 깨달은 왕은 어머니에게 아이를 키우도록 명령했다. 그는 그의 탄생을 이끈 사건들을 고려하여 '동명(東明)'(동쪽의 빛)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모든 난관과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떠났으며, 스스로 부여의 왕임을 선포했다.
4. 구조
동명왕릉은 높이가 11.5m인 봉분으로, 기저부는 석재 블록으로 둘러싸여 있다. 봉분의 각 변은 길이가 34m이다.[9] 무덤에는 22 m2의 피라미드 형태의 내부 묘실, 앞 묘실, 그리고 석재로 만들어진 묘실이 있다. 묘실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10] 개조된 왕릉은 가장 눈에 띄는 무덤이며, 진파리에 있는 20개의 무덤 중 하나이다. 현재의 묘역은 매우 현대적이다.
동명왕릉과 강서 세 무덤에는 벽화가 있다. 동명왕릉은 풍부한 색감과 톤으로 유명한 고구려 벽화를 가지고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연꽃을 비롯한 불교적 주제와 천장과 벽에 묘사된 동물을 담고 있다. 벽화는 여성의 춤, 전사의 훈련, 구름 속에 나는 새, 용, 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야생 동물 등 사람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3차원 형태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1] 무덤의 프레스코화는 다른 종교적 장식과 함께 만개한 연꽃을 묘사하며, 이는 중국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네 개의 전통적인 별자리 이미지가 아닌 전통적인 불교적 정신만을 드러낸다. 이것은 불교 종교 용어로 극락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론된다. 무덤에는 축제 의식을 위한 신성한 장소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비문이 있다. 여기에는 대지 숭배와 가축 숭배가 포함되어 있는데, 전자는 남아시아 의식이고 후자는 샤머니즘 형태의 숭배이다.
4. 1. 외부 구조
평양의 동남쪽 제령산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분구에 2단 이상의 돌기단이 둘러 있고 묘역 시설도 갖추어져 있다.[9] 고구려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며, 둘레는 34x34m, 높이는 11.5m이다.[9] 왕릉은 1.5m 높이의 계단식 돌기단 위에 흙으로 쌓은 돌칸흙무덤이다.[9] 봉분 주위에는 기단에서 사방 5m 정도로 강자갈을 깐 묘역이 있다.[9]4. 2. 내부 구조
널길은 바깥길과 안길로 구분되며, 안길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좁아진다. 바깥길에서 안길, 안길에서 널방으로 들어가는 곳에는 문과 잠금 장치가 있다. 널방은 사각 평면 형태로, 동서 4.21m, 남북 4.18m, 높이 3.8m이다.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고, 천장은 꺽음천장으로 짰다.[9][10] 벽화는 연꽃을 비롯한 불교적 주제와 천장과 벽에 묘사된 동물을 담고 있으며, 사람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3차원 형태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1]4. 3. 벽화
널방 벽과 천장에는 바탕색을 칠하고 지름 12cm의 연꽃을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맞추어 그렸다.[1]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떨어져 나갔고, 흔적만 일부 남아 있다.[1] 벽화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동물, 연꽃 등 불교적 주제를 담고 있다.[1] 벽화는 여성의 춤, 전사의 훈련, 구름 속에 나는 새, 용, 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야생 동물 등 사람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3차원 형태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1] 무덤의 프레스코화는 다른 종교적 장식과 함께 만개한 연꽃을 묘사하며, 이는 중국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네 개의 전통적인 별자리 이미지가 아닌 전통적인 불교적 정신만을 드러낸다.[1]5. 왕릉 주변
왕릉 뒤쪽으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묘를 포함해 10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다. 앞쪽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정릉사가 위치해 있다.
부지에는 13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의 장소 중 하나였던 넓은 잔디밭이 있다.
5. 1. 무덤군
왕릉 뒤쪽으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묘를 포함해 10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있다. 앞쪽 1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정릉사가 위치해 있다.부지에는 13차 세계 청년 학생 축전의 장소 중 하나였던 넓은 잔디밭이 있다.
5. 2. 정릉사
정릉사는 동명왕릉 바로 앞에 위치하며, 발굴 당시 '능사'라는 글자를 새긴 그릇과 기와가 출토되어 동명왕릉의 능사로 추정된다. 1993년 동명왕릉 개건 당시 현재의 정릉사가 함께 개건되었다. 1978년에 발견된 불교 사찰은 능묘에서 약 120m 거리에 있으며, 427년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세운 사찰로 추정된다. 장수왕은 능묘와 인근 불교 사찰에서 의식을 거행한 주지승이었다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사찰은 후에 일본에서 지어진 사찰과 유사한 탑을 둘러싼 세 개의 전각을 가지고 있어, 고구려의 불교 문화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북조의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6. 정치적 중요성
백제 온조왕 재위 기간에 동명왕과 관련하여 두 개의 중요한 의례가 제정되었는데, 첫 번째 의례는 동명왕 사당에서 제물을 바침으로써 왕실과 만주의 부여 민족 간의 연관성을 강조했다.[5]
고구려 왕국 시대는 북한 정부에게 특히 중요한 시기이다.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북한 고고학의 주요 단점, 즉 고고학자들이 동명왕릉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4년 북한 고고학자들은 요구된 묘를 발굴했고, 이 묘는 적절히 '복원'되어 관광 명소가 되었다. 비록 처음에는 "진파리 10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고구려 시대의 진정한 묘였지만, 이 묘가 동명왕의 묘라는 추가 증거는 없다.
고구려 건국 군주의 묘지라고 주장되는 곳의 발견 이후 1980년대에 광범위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재건 과정에는 새로운 백색 대리석 묘를 만들기 위해 모든 기존 건물, 구조물 및 기념물을 완전히 철거하는 작업이 포함되었다.[6][7] 1993년 5월 14일, 새로 건설된 묘의 개장식에는 김일성이 참석했다. 김일성은 또한 묘에 세워진 비석에 휘호를 써서 새겼으며, 이 비석에는 부여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동명왕릉은 국가 유산이며, 그 재건과 유지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김일성은 이 묘를 "후대에 물려줄 역사적 문화 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에서 제공된 자금으로 묘의 재건을 직접 감독했다.[8]
2002년에는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원짜리 동전에 왕의 묘가 묘사되어 발행되었다.
6. 1. 북한의 주체사상과 동명왕릉
북한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무덤인 동명왕릉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 역사와 연결시키고, 주체사상을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5] 1970년대 초 김정일은 북한 고고학의 주요 단점으로 고고학자들이 동명왕릉을 찾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4년 북한 고고학자들은 '진파리 10호분'을 발굴하여 동명왕릉으로 비정하고 '복원'하여 관광 명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묘가 동명왕의 묘라는 추가 증거는 없다.1980년대에 동명왕릉은 광범위하게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건물, 구조물, 기념물은 모두 철거되고 새로운 백색 대리석 묘가 만들어졌다.[6][7] 1993년 5월 14일, 새로 건설된 묘의 개장식에는 김일성이 참석했으며, 김일성은 직접 쓴 휘호를 묘에 세워진 비석에 새겼다. 동명왕릉은 국가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그 재건과 유지는 국가의 책임이었다. 김일성은 이 묘를 "후대에 물려줄 역사적 문화 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에서 제공된 자금으로 묘의 재건을 직접 감독했다.[8]
김일성과 김정일은 동명왕릉을 자신들의 권력 정당화와 우상화에 이용했다. 북한은 동명왕릉을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장소로 선전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002년에는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원짜리 동전에 왕의 묘가 묘사되어 발행되었다.
6. 2. 남북 관계와 동명왕릉
7. 참고 사항
현존하는 고구려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능사를 거느리고 있다. 천장과 벽화 등을 미루어 볼 때 4세기 초 ~ 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동명왕릉이 문자명왕릉이라는 주장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Complex of Koguryo Tombs
https://whc.unesco.o[...]
UNESCO Organization
2013-05-16
[2]
웹사이트
Koguryo Tombs (D. P. R. of Korea)No 1091
https://whc.unesco.o[...]
UNESCO Organization
2013-05-16
[3]
뉴스
Lair of King Tongmyong's Unicorn Reconfirmed by DPRK in North Korea
http://www.heritaged[...]
Heritagedaily.com
2013-05-16
[4]
서적
Tangun: founder-king of Korea : collection of treatises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5]
논문
Diplomatic and Cultural Contacts Between Paekche and China
Harvard-Yenching Institute
1982-12
[6]
뉴스
Kim Jong Il tours newly discovered scenic spots
http://www.kcna.co.j[...]
Korean Central News Agency
2013-05-16
[7]
웹사이트
Tomb of King Tongmyong, founder of Koguryo
http://www.kcna.co.j[...]
Korean Central News Agency
2013-05-16
[8]
서적
Guiding light general Kim Jong II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9]
서적
King Tongmyong's Mausoleum
http://naenara.com.k[...]
Korea Pictorial
2013-06-08
[10]
서적
Pyongyang Review
https://books.google[...]
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201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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