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산양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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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산양개는 당나라 시대의 선승으로, 조동종의 개조이다. 그는 콰이지에서 태어나 선불교를 배우고 여러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운암담성 선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삼종삼루와 보경삼매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동산은 52세에 동산에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오위(五位)와 묵조선(默照禪)을 제시하며 조동종의 핵심 교리를 확립했다. 그는 63세에 입적했으며, 그의 제자 조산 본적과 운거 도응은 조동종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동산의 가르침은 한국 불교와 일본의 소토 종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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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양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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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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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동산양개 (洞山良价) |
이명 | 동산양개 (洞山良价, Tung-shan Liang-chieh, Dòngshān Liángjiè) |
별칭 | 없음 |
법명 | 없음 |
시호 | 오본대사 (悟本大師) |
존칭 | 없음 |
국적 | 중국 |
종교 | 선불교 |
종파 | 조동종 (曹洞宗, J. Sōtō) |
스승 | 운암담성 |
제자 | 운거도응, 조산본적, 용아거돈, 구봉보만, 진산문수, 악주첨봉, 청림사건, 수산광인 |
저서 | '보경삼매 (寶鏡三昧歌) (귀속); 기록된 대화 (洞山語録)' |
생년 | 807년 |
몰년 | 869년 4월 23일 |
출생과 사망 | |
출생지 | 중국, 월주 제기현 |
몰지 | 불명 |
사찰 | |
사찰 | 동산보리원 (강서성의춘시의풍현) |
가르침 |
2. 생애
동산양개는 어린 시절부터 불문에 들어섰다.[14] 마을 원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반야심경』을 외울 때 육근의 석의에 대해 질문하는 등 남다른 모습을 보여 오대산의 고승 오설영묵에게 보내졌고,[13] 21세에 수계를 받았다.
이후 남천보원[13], 위산령우[13]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운암담성(782년-841년)을 스승으로 모셨다. 『인천안목』에 따르면, 이때 "삼종삼루" 등의 가르침을 전수받았다.[13][14][15]
당 무종 때 일어난 회창의 폐불(843년-845년)에도 큰 어려움 없이 지냈다. 만년에 균주 동산 (강서성 의춘시 의풍현)에 선문의 한 원을 창설하고,[17] 『보경삼매 (보경삼매가)』를 지었다.[20] 그의 문도는 500~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20][21]
동산이 제시한 오위는 "정편오위"라고 불린다.[22]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동산어록』이 있다.[12] 남양혜충이 설한 "무정설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강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대오를 얻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동산과수"라는 선화의 주제가 되었다.[23]
2. 1. 출가와 수행
동산은 당나라 시대 항저우만 남쪽의 콰이지(현재의 저장성 사오싱)에서 태어났다.[2] 속성은 유씨(兪氏)였다.[2]어린 나이에 선불교를 배우기 시작했는데,[3] 이는 당시 교육받은 엘리트 가문에서 유행했다. 동산은 마을의 작은 수도원에서 스승이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동안 육근의 근본 교리에 대해 질문하여 두각을 나타냈다.[2] 열 살에 인근 오대산(우타이산)의 수도원에서 링모(霊黙)에게 훈련받기 위해 보내졌다. 머리를 깎고 노란 가사를 입어 승려가 되기 위한 첫 단계인 사미가 되었다. 스물한 살에 숭산 소림사에서 비구가 되기 위한 완전한 계를 받았다.
동산 양개(洞山良价)는 홍주(洪州, 洪州|Hung-chou중국어) 지역에서 선(禪) 스승들과 은둔자들 사이를 떠돌며 초창기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남천 보원[2]과 위산 영우[2]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은 동산의 법사가 된 운암 담성 선사였다. 《인천안목》(《人天眼目》, "인간과 신의 눈", 1188)에 따르면 동산은 운암 담성으로부터 삼종삼루(三種滲漏, ''shenlou'')와 ''보경삼매''(宝鏡三昧 "보배 거울 ''삼매'' 또는 보배 거울 ''삼매''"; 일본어: ''hōkyō zanmai'')에 대한 지식을 물려받았다.[4]
그의 여정과 학업에 관해 기록된 대부분은 그와 여러 스승들 사이의 선문답 형태로 존재한다.
당 무종의 대불교 박해(843–845)가 절정에 달했지만, 동산이나 그의 제자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0여 년 후인 859년, 동산은 신봉산에서 조교 역할을 다했다고 느껴 마지막 스승들의 축복을 받아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 자신의 종파를 세우기 위해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불문에 들어섰다.[14] 마을 원의 스승에게서 배웠지만, 『반야심경』을 외웠을 때 육근의 석의에 대해 따져 물어 오대산의 고승인 오설영묵에게 보내졌고[13], 21세 때 수계했다.
이후 남천보원에게도 가르침을 받았고[13], 위산령우에게도 사사했다.[13] 운암 담성(782년-841년)을 스승으로 받들었지만, 『인천안목』에 따르면 이때 "삼종삼루" 등의 진수를 전수받았다.[13][14][15]
당 무종의 회창의 폐불(843년-845년)은 큰 문제 없이 넘겼다.
2. 2. 조동종 창시
52세에 동산은 동산(현재 장시성 가오안 시)이라는 산에 산문을 세웠다.[7] 그가 창건한 사찰은 관부(広福寺), 공덕사(功德寺), 숭선륭보사(崇先隆報寺) 등으로 불렸으나, 초기 송나라 시대에는 보리원(普利院)으로 불렸다.[7]전통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보경삼매가''를 지었다고 한다.[8]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이 텍스트는 12세기 이후의 조동종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1] 그의 제자들은 500명에서 1,000명 사이였다고 한다.[7][8]
조동종은 선종 오가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개성적인 스승들이 각자의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을 가지고 이끌어가는 종파로 여겨졌을 뿐이지만, 실제로는 임제를 제외한 모든 종파가 서로 가까운 지리적 거리에 위치해 있었고, 모두 비슷한 시기에 가르침의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서 다른 스승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만년에 동산은 균주 동산 (강서성 의춘시 의풍현)에 선문의 한 원을 창설하였다.[17] 당초에는 광복사, 공덕사, 숭선융보사 등의 이름이었지만, 송대 초두 이후 보리원이라 칭했다.[18][19][21] 여기서 『보경삼매 (보경삼매가)』를 지었다.[20] 문도는 500~1000명에 달했다고 한다.[20][21]
동산이 제창한 형태의 오위는 "정편 (しょうへん) 오위"라고 칭해진다.[22] 그 사고를 알 수 있는 자료 『동산어록』이 있다.[12]
2. 3. 입적
동산은 함통 10년(869년)에 63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승려 생활은 42년이었다. 불교 전통에 따라 세워진 그의 사당은 지혜각(智慧覺) 스투파라고 명명되었으며, 사후 시호는 선사 무본(禪師 無本)이었다. 그의 종파의 공안 중 하나에 따르면, 동산은 입적 며칠 전에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이를 기회 삼아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에 제자들이 슬퍼하자, 그는 "망상 연회"를 열라고 말했다. 일주일 동안의 준비 후, 그는 식사를 한 입 베어 물고,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말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입적했다.3. 사상
량지에 선사는 린치 선사와 제자를 공유했지만, 독특한 가르침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선의 원리를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게송'(gātha), 즉 작은 시를 활용했다.[9][10]
량지에 선사의 가르침은 ''공안''에 대한 특정한 해석, 묵조선 강조, 학생들을 "세 가지 근본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오위를 창시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3. 1. 오위설(五位說)
동산 스님의 저서 오위현결에서 주장된 오위(:en:Five Ranks)는 조동종의 핵심 교의이다. 정편오위, 편정오위(偏正五位)라고도 한다.동산 선사의 명성은 상당 부분 오위의 저술에서 비롯되었다. 오위는 절대와 상대성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 교리였다.[11] 오위는 다음과 같다.
- 상대성 내의 절대 (정중편, 呈中偏)
- 절대 내의 상대성 (편중정, 偏中正)
- 절대 내에서 옴 (정중래, 呈中來)
- 대비되는 상대성 단독 (편중지, 偏中至)
- 통일 달성 (간중도, 兼中到), 이전의 두 반대 상태가 하나가 됨
동산 선사는 각 위(位)에 대해 이러한 추상적인 이상을 실제 경험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위해 시를 지었다. 그는 제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비유를 사용했다. 그의 제자 조산 본적은 이후 오위를 고전 주역과 연결했다.
3. 2. 동산삼로(洞山三路)
동산 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수단으로 조도(鳥道), 현로(玄路), 전수(展手)의 세 가지 방편수단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동산의 삼로라고 한다. 조도(鳥道)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로(玄路)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한 공적한 경계에 살도록 하는 것이다. 전수(展手)는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방편을 사용하여 전하는 것이다.3. 3. 묵조선(默照禪)
12세기경 송나라 시대 후기에 동산의 일부 후손들은 화두가 특정 목표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무지와 깨달음 사이의 이원론적 구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수행을 깨달음의 단계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동산의 관점에 근거한다. 대신, 홍지와 같은 동산 계통의 후손들은 경쟁적인 길이 아닌 자기 충족적인 깨달음의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 묵조선(''mo-chao chán'')을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이러한 두 가지 차이점은 특히 임제의 후손들의 방식과 대조되었다. "묵조선"은 원래 임제의 후손들이 동산의 후손들에 대해 만든 많은 비하적 용어 중 하나였다.[1]4. 영향
동산 양개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조산 본적과 운거 도응을 통해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산은 동산의 가르침을 발전시켰으며, 조동종의 이름은 이 두 스승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조(曹)'가 육조 혜능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운거 도응의 계보는 17세기까지 중국에서 이어졌고, 13대 후, 일본 승려 도겐은 동산의 조동선 전통을 이어받아 일본에 소토 종을 창시하였다.[1]
세대 | 조산 본적 | 운거 도응 |
---|---|---|
1 | 도겐 |
4. 1. 현대의 조동종
동산 양개의 가장 유명한 제자들은 조산 본적(840–901)과 운거 도응(835–902)이었다.조산은 동산의 불교 교리에 관한 저술을 다듬고 완성했다. 조동종의 이름은 이 두 스승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이론으로는 "조(Cao)"가 선종의 육조 혜능(曹溪慧能)을 가리킨다고 한다. 소토#중국 기원 참조)
조산이 시작한 계보는 그의 직계 제자들을 넘어서 지속되지 못했다. 운거 도응은 중국에서 17세기까지 지속된 동산 계보의 분파를 시작했다. 13대 후, 일본 승려 도겐 기겐 (1200–1253)은 동산의 조동선(曹洞禪) 전통에서 교육을 받았고, 귀국 후 소토 종("소토"는 "조동"의 일본식 발음)을 시작했다.
5. 평가
동산의 생애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정보는 보통 날짜, 이름, 일반적인 지역으로 제한된다.
이와 관련된 유일한 1차 자료는 조당집과 경덕전등록 두 가지인데, 교리와 계보를 모아 놓은 책이다. 이 두 자료는 동산의 이름이 둔산(Tun-shan)의 "조(T'sao)"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 나타낼 뿐, 다른 대부분의 사실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모호하다.[4]
참조
[1]
서적
How Zen Became Zen: The Dispute Over Enlightenment and the Formation of Chan Buddhism in Song-Dynasty China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中国仏教史辞典 (Chūgoku Bukkyō shi jiten)
https://books.google[...]
東京堂出版
[3]
서적
仏教用語の基礎知識
https://books.google[...]
角川学芸出版
[4]
서적
道元禅師七百五十回大遠忌記念出版, 永平寺史料全書: 禅籍編
https://books.google[...]
大本山永平寺
[5]
서적
宋代禅宗史の研究: 中国曹洞宗と道元禅 石井修道
https://books.google[...]
大東出版社
[6]
서적
江西省志
https://books.google[...]
方志出版社
[7]
서적
新・佛教辞典 (Shin Bukkyō jiten)
https://books.google[...]
誠信書房
[8]
서적
仏教宗派辞典 (Bukkyō shūha jiten )
https://books.google[...]
東京堂出版
[9]
서적
Zen’s Chinese Heritage: The Masters and Their Teachings
Wisdom Publications
[10]
서적
Zen’s Chinese Heritage: The Masters and Their Teachings
Wisdom Publications
[11]
서적
Secrets of the Five Ranks of Soto Zen
[12]
서적
曹洞宗
Heibonsha
[13]
서적
中国仏教史辞典 (Chūgoku Bukkyō shi ji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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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堂出版
[14]
서적
仏教用語の基礎知識
https://books.google[...]
角川学芸出版
[15]
서적
道元禅師七百五十回大遠忌記念出版, 永平寺史料全書: 禅籍編
https://books.google[...]
大本山永平寺
[16]
문서
Dongshan Liangjie / 2008年12月11日版
en:Special:Permalink[...]
[17]
서적
日本仏教語辞典
https://books.google[...]
平凡社
[18]
서적
宋代禅宗史の研究: 中国曹洞宗と道元禅 石井修道
https://books.google[...]
大東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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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江西省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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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志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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仏教宗派辞典 (Bukkyō shūha ji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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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堂出版
[21]
서적
新・佛教辞典 (Shin Bukkyō jiten)
https://books.google[...]
誠信書房
[22]
서적
五位
Heibonsha
[23]
서적
禅画を読む
淡交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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