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돌프 처칠 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랜돌프 처칠 경은 1849년에 태어나 1895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제7대 말버러 공작의 아들로, 예우 칭호인 "경"을 받아 하원에서 활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후 정계에 입문하여 보수당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제4당'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솔즈베리 후작 내각에서 인도 담당 장관과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예산 문제로 사임하며 정계에서 멀어졌다.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고생했으며, 1895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스펜서처칠가 - 윈스턴 처칠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수상이었으며 군인, 정치가, 작가, 화가로서 활동하며 냉전 시대 개막을 알린 윈스턴 처칠은 제국주의적 관점과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스펜서처칠가 - 랜돌프 처칠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 군인인 랜돌프 처칠(1911-1968)은 윈스턴 처칠의 외아들로, 언론인 및 작가로 활동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를 수행했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며 아버지의 공식 전기를 집필하는 등 저술 활동도 활발히 했다. - 영국의 재무장관 - 고든 브라운
고든 브라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정치인으로, 영국 의회 하원 의원, 재무장관을 거쳐 총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유엔 교육 담당 특사로 활동한다. - 영국의 재무장관 - 윈스턴 처칠
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을 승리로 이끈 수상이었으며 군인, 정치가, 작가, 화가로서 활동하며 냉전 시대 개막을 알린 윈스턴 처칠은 제국주의적 관점과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 동문 - 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는 14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 개혁가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경의 최고 권위를 주장하여 개신교 탄생에 영향을 미쳤으나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 동문 - 앤드루 와일스
앤드루 와일스는 1953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수학자이며, 1995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여 수학계에 기여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고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랜돌프 처칠 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랜돌프 헨리 스펜서-처칠 |
출생일 | 1849년 2월 13일 |
출생지 | 벨그라비아, 런던, 잉글랜드 |
사망일 | 1895년 1월 24일 |
사망지 | 웨스트민스터, 런던, 잉글랜드 |
안장 장소 | 세인트 마틴 교회, 블래던 |
정당 | 보수당 |
배우자 | 제니 제롬 (1874년 4월 15일 결혼) |
자녀 | 윈스턴 잭 |
부모 | 존 스펜서-처칠 레이디 프랜시스 앤 베인 |
직업 | 정치인 |
교육 | 체암 스쿨 이튼 칼리지 |
모교 | 머턴 칼리지, 옥스포드 |
정치 경력 | |
수상 | 솔즈베리 후작 |
인도 담당 국무장관 | 재임 시작: 1885년 6월 24일 재임 종료: 1886년 1월 28일 이전: 킴벌리 백작 이후: 킴벌리 백작 |
재무장관 | 재임 시작: 1886년 8월 3일 재임 종료: 1886년 12월 22일 이전: 윌리엄 버넌 하코트 이후: 조지 고셴 |
하원 원내대표 | 재임 시작: 1886년 8월 3일 재임 종료: 1887년 1월 14일 이전: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이후: 윌리엄 헨리 스미스 |
보수당 대표 (하원) | 재임 시작: 1886년 8월 3일 재임 종료: 1887년 1월 14일 전체 대표: 솔즈베리 후작 이전: 세인트 올드윈 백작 이후: 윌리엄 헨리 스미스 |
서훈 | |
경칭 | 더 라이트 아너러블 |
작위 | PC, DL |
2. 생애
1849년 제7대 말보로 공작 존 스펜서-처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를 졸업한 후, 1874년 미국인 제니 제롬과 결혼하여 장남 윈스턴을 낳았다.
1874년 총선거에서 가문의 영향력이 강한 우드스톡 선거구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1876년에는 형 조지와 황태자 버티(훗날 에드워드 7세) 사이의 문제에 개입하여 황태자의 미움을 사 잠시 국외로 피신하기도 했다.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중재로 귀국했으나, 1877년부터 1880년까지 아일랜드 총독으로 부임한 아버지 말버러 공작의 비서로 아일랜드에서 근무했다.
1880년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내각이 들어서자, 랜돌프 처칠은 보수당 내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제4당'이라 불리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당시 보수당 하원 지도부였던 스태퍼드 노스코트 경의 온건한 태도에 반발하며, 글래드스턴 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주도하여 정치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881년 당수 디즈레일리가 사망한 후, 랜돌프 처칠은 스스로 "토리 민주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독자적인 정치 활동을 강화했다. 그는 보수당의 대중 조직 강화에 힘썼는데, 특히 디즈레일리의 이념을 내건 대중 운동 조직인 프림로즈 리그의 결성과 성장을 이끌었으며, 기존의 National Union of Conservative and Constitutional Associations|보수당 협회 전국 연맹영어(NUCA)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려 노력했다.
1885년 6월, 제1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에서 인도 담당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중 버마에 대한 군사 침공을 결정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의 병합을 강행하는 등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 내각은 1886년 1월 단명하여 짧은 기간 재임 후 물러났다.
1886년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같은 해 8월 출범한 제2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 겸 영국 하원 원내총무라는 요직에 올랐다. 하지만 군사비 삭감을 포함한 예산안 문제로 총리 솔즈베리 후작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결국 같은 해 12월 내각에서 사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정계의 중심에서 밀려났으며, 만년에는 매독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 시달리다가 1895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

랜돌프 처칠은 1849년 2월 13일 런던 벨그레이비아의 3 윌턴 테라스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당시 블랜포드 후작이었던 존 윈스턴 스펜서-처칠이며, 어머니는 제3대 런던데리 후작 찰스 베인의 딸인 프랜시스 앤이다.[42][43] 랜돌프는 부부의 셋째 아들이었다.[4] 장남은 조지(1844년-1892년)였고, 차남 프레데릭 경(1846년-1850년)은 요절했다.[44][43]
랜돌프가 8세가 되던 1857년에 할아버지인 제6대 말버러 공작 조지가 사망하자, 아버지 존이 제7대 말버러 공작 작위를 계승하였고 어머니 프랜시스 앤 역시 말버러 공작 부인이 되었다.[4][47] 공작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차남의 요절로 실질적인 차남이 된 랜돌프는 예우 칭호인 "경(Lord)"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귀족 작위를 직접 세습한 것이 아니므로 평민 신분으로서 하원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4]
2. 2. 정계 입문까지
랜돌프 처칠은 런던 벨그레이비아의 3 윌턴 테라스에서 존 스펜서-처칠 제7대 말버러 공작과 그의 아내 프랜시스 베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1857년에 제7대 말버러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랜돌프는 공작의 차남이었기에 예우 칭호로 "경(Lord)"을 사용했으며, 귀족이 아닌 평민 신분으로서 하원에서 활동할 자격이 있었다.
처칠은 테이버 예비 학교를 다닌 후, 1863년 이튼 칼리지에 입학하여 1865년까지 재학했다.[4][43] 이튼 시절 그는 학업이나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활기차고 다소 통제하기 어려운 학생으로 여겨졌다. 동료들은 그의 외모를 놀리며 "구즈베리 처칠"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그는 이러한 조롱에 맞서 변론술을 연마하며 훗날 보여줄 특유의 독설 스타일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48] 이 시기부터 평민 출신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냈으며, 그의 비판은 주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향했다.[49] 이튼에서 아서 발푸어와 아치볼드 프림로즈(훗날 로즈베리 경) 등 평생 지속될 우정을 쌓았다.[4]
1867년 10월,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에 입학했다.[43] 옥스퍼드에서도 친구 프림로즈(당시 달메니 경)와 함께 사교 클럽인 불링던 클럽의 회원으로 활동하며[5] 음주, 복장 규정 위반, 랜돌프 호텔 창문 파손 등 대학 당국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주변에도 영향을 미쳐 'enfant terrible|앙팡 테리블fra'(무서운 아이)이라는 평판을 얻었다.[6] 그는 사냥을 매우 즐겼지만[50], 동시에 역사서를 탐독하는 학구적인 면모도 보였다. 1870년 법학 및 현대사 분야에서 2등급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4]
대학 졸업 후 1874년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약 4년간은 주로 가문의 영지인 블레넘 궁전에서 사냥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43] 1871년 2월 9일에는 그의 형 조지(당시 브랜드퍼드 후작)와 함께 프리메이슨 '처칠 로지'(Churchill Lodge)에 가입했다.[51] 이는 훗날 그의 아들 윈스턴 처칠도 따르게 될 행보였다.[8]

1873년 8월 12일, 영국 해군 함선 위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미국인 사업가 레너드 제롬의 딸인 제니 제롬을 만났다. 랜돌프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만난 지 불과 사흘 만에 청혼했다.[53] 그러나 랜돌프의 아버지 말버러 공작은 제니의 아버지 레너드를 "수상쩍은 뉴욕 투기꾼"으로 여기며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다.[54]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의지가 확고했고, 결국 공작은 레너드 제롬으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지참금을 받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다.[55] 랜돌프와 제니는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영국 대사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0][56][57]
같은 해 11월 30일, 부부의 첫째 아들인 윈스턴 레오나드 스펜서 처칠이 태어났다.[53] 이후 1880년에는 둘째 아들 존 스트레인지 스펜서 처칠("잭")이 태어났다.
2. 3. 하원 의원 첫 당선
1874년 1월부터 2월 사이,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1874년 영국 총선거가 치러졌다. 랜돌프 처칠은 이 선거에 우드스톡 선거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구는 말보로 공작 가문의 전통적인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이었고, 아버지 말버러 공작이 후보 지명권을 가지고 있어 출마는 비교적 용이했다.랜돌프는 연설에 자신이 없어 미리 준비한 연설 원고(칸닝 페이퍼)를 실크 해트 속에 숨겨두고 읽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 말버러 공작 또한 아들의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지역 술집을 빌려 아들에게 투표할 것을 약속한 유권자들에게 무료로 술을 제공하는 등 선거 운동에 힘썼다.
이러한 노력 끝에 랜돌프 처칠은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2. 4. 황태자와의 대립

1876년, 랜돌프의 형인 블렌드퍼드 후작 조지가 황태자 앨버트 에드워드(애칭 버티, 후의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애인이었던 에일즈퍼드 백작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황태자 버티와 에일즈퍼드 백작은 영국령 인도를 방문 중이어서 영국에 없었다. 인도에서 돌아온 버티와 에일즈퍼드 백작은 이 사실을 알고 블렌드퍼드 후작을 비난했으며, 만약 에일즈퍼드 백작 부인과의 관계를 계속하려면 아내 앨버사 스펜서-처칠과 이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2]。
황태자 버티가 에일즈퍼드 백작 부인에게 보낸 연애 편지를 손에 넣은 블렌드퍼드 후작은 이를 동생 랜돌프 경에게 보여주었다. 격분한 랜돌프는 "전하께서 에일즈퍼드 백작 부인을 더 잘 아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에일즈퍼드 백작이 이혼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쪽은 이 편지를 공개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전하는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황태자를 협박했다[63][64]。
이에 분노한 황태자는 랜돌프에게 프랑스에서의 결투를 신청했다. 황태자는 사격의 명수였으므로, 실제로 결투가 벌어졌다면 랜돌프에게 승산은 없었다. 랜돌프는 "장래 국왕이 되실 분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습니다"라며 결투를 피했다[65]。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랜돌프는 빅토리아 여왕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고[66], 말버러 공작가는 귀족 사회에서 더욱 고립되었다[67]。 입지가 위태로워진 랜돌프 경은 장인을 의지하여 일시적으로 미국 뉴욕으로 피신했다[63]。
이후, 랜돌프의 무모한 행동을 오히려 흥미롭게 여긴 당시 총리이자 보수당 당수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황태자를 설득하고 중재에 나선 덕분에 랜돌프 경은 영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68]。
2. 5. 아일랜드 근무
황태자 에드워드와의 갈등 이후,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주선으로 귀국했으나 여론을 고려하여 당분간 잉글랜드 외부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는 권유를 받았다. 이에 디즈레일리는 랜돌프의 아버지 말버러 공작에게 아일랜드 총독 직을 제안했고, 랜돌프는 아버지의 비서 자격으로 1877년부터 1880년까지 아일랜드로 파견되었다[69].1877년 1월, 랜돌프 가족은 더블린에 도착하여 총독 관저 인근의 리틀 로지에 거주했으며, 공작 부부는 피닉스 공원의 총독 관저에서 지냈다[70]. 아일랜드에 머무는 동안에도 랜돌프는 때때로 잉글랜드로 돌아가 영국 하원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정부의 아일랜드 정책을 "진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범죄 행위"라고 비판하는 등 독설을 퍼부어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아들 랜돌프의 발언이 아일랜드 총독의 공식 견해인지 묻는 정부의 질의에 대해, 아버지 말버러 공작은 "저 남자는 미쳤거나, 아니면 이 지역의 샴페인이나 적포도주에 정신이 팔렸음에 틀림없다"고 해명해야 했다[71].
1880년,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이끄는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고 보수당이 야당이 되면서, 말버러 공작과 랜돌프의 아일랜드에서의 임무도 종료되었다.
2. 6. '제4당'

1880년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내각이 출범했을 때, 야당이 된 보수당의 하원 원내총무 스태포드 노스콧 경은 온화한 성격 탓에 글래드스턴 정권 비판에 미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때 글래드스턴의 비서였기에 여전히 글래드스턴을 존경하는 면도 있었다.[72][73][74]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은 랜돌프 처칠은 헨리 드럼몬드 울프, 존 엘든 고르스트, 그리고 때때로 아서 발푸어와 함께 독자적인 그룹을 형성했다.[75] 이들은 공식적인 당 지도부에 속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했기에 '제4당'(The Fourth Party)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제4당은 미온적인 노스콧을 사실상 무시하고[76][77] 글래드스턴 행정부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소속 정당인 보수당 지도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때로는 보수주의적 관점보다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자유당 정부의 법안 수정을 시도하기도 했다.[78] 랜돌프 처칠이 본격적으로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부상한 것은 이 제4당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79]
특히, 무신론자임을 공언하며 의원 선서를 거부하려 한 노샘프턴의 의원 찰스 브래들로 사건에서는 제4당이 반대 운동을 주도하며 소극적이던 노스콧 지도부를 압박하여 강경한 대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 논란을 통해 랜돌프 처칠은 대담함과 함께 뛰어난 전술적 감각을 지닌 의회 논객임을 입증했다.
당 지도부의 의사를 거스르는 제4당의 활동은 당내 비판도 받았지만, 당시 보수당 당수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젊은 시절 유사한 활동("영 잉글랜드") 경험이 있어 이들의 활동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디즈레일리의 격려는 랜돌프 처칠이 훗날 '디즈레일리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0]
제4당, 특히 랜돌프 처칠은 1880년부터 1885년까지 의회 회기 동안 글래드스턴 정부뿐만 아니라 보수당 내 기성 정치인들, 예를 들어 R. A. 크로스 경이나 윌리엄 헨리 스미스 등도 계속해서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이집트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라비 파샤의 반란 진압과 케디브의 권력 복원에 반대하며 정부의 거의 모든 조치를 비판했고, 아일랜드 문제에서는 킬마이넘 조약과 글래드스턴파-파넬파의 화해를 비판하는 등 정부 정책 전반에 걸쳐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갔다.
2. 7. 의회 외 대중 조직의 육성
1881년 당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사망하자 랜돌프 처칠은 "토리 민주주의"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독자적인 활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했다. 그는 특히 보수당의 의회 외 조직의 권한을 강화하고, 일반 당원의 여론을 당 지도부에 반영시키는 데 힘썼다.[88]랜돌프는 보수당의 의회 외 조직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보수당과 유권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보수당 협회 전국 연맹'(National Union of Conservative and Constitutional Associations영어, NUCA)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1883년 10월 NUCA의 권한 강화를 제안하며 주목받았고[87], 1884년 2월에는 NUCA 평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이후 랜돌프는 NUCA를 통해 표출되는 일반 당원의 여론이 당 지도부의 결정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 당원이 의회 보수당을 구속하는 것은 솔즈베리 후작 이하 보수당 집행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884년 7월, 랜돌프는 솔즈베리 후작과의 협정을 통해 NUCA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차기 내각 구성 시 적절한 직위를 약속받고 프림로즈 리그에 대한 당 지도부의 공식 인정을 얻어냈다.[97]
또한 랜돌프는 디즈레일리의 정신을 계승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여, 1883년 11월 17일 보수당 사교 클럽인 칼턴 클럽 회합에서 프림로즈 리그 결성을 발표했다.[89] 리그의 목적은 디즈레일리가 추구했던 "종교, 국체, 대영 제국의 옹호"로 정해졌다.[92] 당시 NUCA는 경쟁 정당인 자유당의 유사 조직인 '자유당 전국 연맹'(National Liberal Federation영어)에 비해 대중 동원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겨졌기에, 랜돌프는 프림로즈 리그를 NUCA보다 더 넓은 계층의 대중 의견을 수렴하는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다.[93] 처음에는 엘리트 중심의 준 비밀 결사 형태로 구상했으나, 동료 의원인 울프의 설득으로 "종교, 국체, 대영 제국의 옹호를 위해 나의 모든 힘을 다할 것을 여왕 폐하에 대한 충성으로 맹세한다"고 선서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94] 프림로즈 리그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며 당대 최대 규모의 대중 조직으로 성장했는데,[95] 이는 "종교, 국체, 대영 제국의 옹호"라는 단순하고 포괄적인 슬로건이 폭넓은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으로 분석된다.[96]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랜돌프 처칠은 보수당 내 의회 외부 조직을 강화하고 대중적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도시 중산층과 노동 계층의 당내 역할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17]
2. 8. 제1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인도 담당 장관
1885년 솔즈베리 후작이 이끄는 '임시 내각'에서 처칠은 인도 담당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1885년 6월 24일 취임했다.[19] 그는 입각 조건으로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스태포드 노스코트 경을 하원에서 물러나게 할 것을 요구했고, 솔즈베리 후작은 이를 수용하여 노스코트 경은 이들레이 백작위를 받고 상원으로 옮겨갔다.인도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을 가졌던 초기의 모습과는 달리, 처칠의 장관 재임 기간은 역사가 R.F. 포스터가 지적했듯 "전통적으로 반동적"이었다.[20] 그의 정책은 인도의 발전보다는 착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였다. 영국 상품에 유리한 무역 정책을 지지했으며, 철도, 도로, 관개 등 공공 사업 예산을 삭감하면서 인도 육군 예산을 증액했다.[21] 또한, 기근 구호를 위해 마련된 기금을 예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전용하기도 했다.[21] 인도 현지인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비판적인 면이 있었다. 그는 공무원 및 군대 내 인도인 비율을 높이려는 개혁을 반대했으며, 버밍엄 연설에서는 N. G. 찬다바르카르가 이끈 인도 정치인 파견단을 "세 명의 벵골 바부"라고 폄하하기도 했다.[22] 다만, 재임 중 인도 미들랜드 철도(Indian Midland Railway) 창설에 관여하기도 했다.[43]

그러나 처칠이 인도 장관으로 재임 중 가장 주목받는 행보는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을 일으켜 버마를 침공하고 병합한 일이었다.[23] 영국의 상업적, 군사적 이익을 보호하고 다가오는 총선에서 보수당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처칠은 인도 총독 더퍼린 경에게 1885년 11월 꼰바웅 왕조의 상부 버마 침공을 지시했다.[24][43] 처칠은 별다른 논의 없이 버마 왕국의 병합을 결정했고, 1886년 새해 첫날 이를 빅토리아 여왕에게 '새해 선물'이라며 영국령 인도 제국의 새로운 주로 편입시켰다. 이 전쟁은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18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게릴라전으로 인해 인도 납세자들은 처칠이 처음 예상했던 비용의 10배에 달하는 부담을 져야 했다.[25]
1885년 가을 총선에서 보수당이 패배하면서, 1886년 1월 자유당과 아일랜드 의회당의 연합으로 솔즈베리 내각은 총사퇴했고, 처칠 역시 짧은 임기를 마치고 인도 장관직에서 물러났다.[100]
2. 9. 제2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재무부 장관
1886년 영국 총선에서 랜돌프 처칠은 글래드스턴 정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보수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886년 8월 출범한 제2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 겸 하원 원내 총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다. 이는 사실상 차기 총리 자리를 예약한 것으로 여겨졌다[101]。그러나 재무부 장관이 된 랜돌프 처칠은 내각 내에서 점차 고립되었고, 동료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여론에 직접 호소하여 자신의 정책을 관철하려 했다. 그는 솔즈베리 후작 총리를 다소 경시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102]。 특히 보수당도 글래드스턴의 자유당만큼 재정 건전성에 신경 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대규모 지출 삭감을 포함한 예산안을 제안했다. 이 예산안에는 소득세, 차세, 담배세 감세와 상속세, 고정 자산세 증세가 포함되었으나, 핵심은 군사비 삭감이었다.
육군과 해군 예산의 추가 삭감 요구는 해당 부처 장관들, 특히 육군 대신 윌리엄 헨리 스미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스미스는 솔즈베리 후작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솔즈베리 후작은 스미스를 지지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랜돌프 처칠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타임스』지에 사직 의사를 흘리는 방식으로 총리를 압박하려 했다[103]。 그는 자신의 사임 발표가 내각을 굴복시키고 자신을 더 유리한 조건으로 복귀시킬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는 영국 정치사에서 큰 오판 중 하나로 기록된다.
솔즈베리 후작은 랜돌프 처칠을 자유당의 체임벌린에 대항할 인물로 여겼으나, 체임벌린이 자유당을 탈당하여 보수당과 연립하는 자유 연합당을 창설하자 처칠의 정치적 효용 가치는 크게 떨어졌다. 당내에서도 처칠에 동조하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결국 솔즈베리 후작은 처칠의 사임 제안을 예상외로 시원하게 수락했고, 자유 연합당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조지 고센을 후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다[86][104]。 랜돌프 처칠은 훗날 "고센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고 후회한 것으로 전해진다[105]。
당시 37세의 젊은 나이로 총리직을 눈앞에 두었던 랜돌프 처칠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실각했으며, 다시는 보수당의 핵심 지도부로 복귀하지 못했다[106][104]。 그의 정치 경력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지만, 그가 추진했던 절약 예산의 아이디어 자체는 1886년 9월 발표된 보수당의 정책 강령인 '다트포드 프로그램'에 일부 반영되었다.
2. 10. 만년과 사망

1886년 제2차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재무부 장관직 사임 이후 정계의 중추로 복귀하지 못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독으로 인한 전신 마비 증세가 심각해져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107]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정치 활동을 이어가려 노력했다. 그는 글래드스턴의 제2차 아일랜드 자치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며,[29] 아일랜드에서 강렬한 친연방주의 연설을 했다.[29] 이 시기 그는 아일랜드 자치에 반대하며 "얼스터는 싸울 것이고, 얼스터가 옳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만들었다.[31]
그러나 45세의 나이로 생명을 앗아갈 질병으로 인해 그의 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893년 회기가 진행되면서 그의 연설은 이전의 효과를 잃었으며, 하원에서의 마지막 연설(1894년 6월 동아프리카 계획 토론)은 실패로 끝났다.
1894년 가을, 마지막 추억을 만들기 위해 부인 제니 제롬과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시도했다.[108] 미국, 영국령 캐나다, 일본, 영국령 홍콩, 영국령 싱가포르, 영국령 랑군 등을 방문했으나,[108] 여행 중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카이로에서 급히 귀국해야 했다.[33] 그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영국에 도착했고, 다음 해인 1895년 1월 24일 런던 자택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7][33]
당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21세의 장남 윈스턴 처칠이 들은 랜돌프의 마지막 말은 Have you got the horses?|말은 구했니?eng였다고 전해진다.[110]
장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고, 블레넘 궁전 근처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의 블레이든 세인트 마틴 교회에 묻혔다.[108]
3. 인물
공작의 아들이면서 디즈레일리의 "토리 민주주의" 노선을 계승했다고 자처한 인물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배경에는, 과거 황태자와의 다툼으로 인해 국외로 추방당했던 경험이 "체제 측"에 대한 강한 반감을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114]
그러나 랜돌프에게 뚜렷한 정치적 신념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토리 민주주의"나 "노동자 계급 보수주의"와 같은 추상적인 이념을 자주 언급했지만, 이를 구체화할 실질적인 계획은 제시하지 못했다.[115][116] 실제로 "토리 민주주의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요컨대 기회주의입니다"라고 답한 일화는 그의 정치적 태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117]
디즈레일리를 의식했던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의 기지 넘치는 발언, 신랄한 독설, 유머 감각 등은 디즈레일리와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115] 하지만 디즈레일리에 비해 진지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는 당내에서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조지프 체임벌린이 보수당 정권에 협력하게 되면서 랜돌프의 당내 중요성은 더욱 감소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보수당 의회 외 조직의 발전 역시 그의 영향력을 높이기보다는 지방 유력 인사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118]
랜돌프는 종종 자유당의 조지프 체임벌린과 비교되곤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환경은 달랐다. 체임벌린은 자유당 내 귀족 세력을 비판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지만, 귀족과 지주의 지지에 기반한 보수당에서 랜돌프가 같은 전략을 취하기는 어려웠다.[119]
성격은 급하고 열정적이며 충동적인 면모를 보였다. 술을 즐겨 마셨으며(주벽),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20][121] 또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해, 학창 시절 놀림감이 되었던 두꺼운 윗입술을 가리기 위해 긴 콧수염을 길렀고, 키가 커 보이도록 시크릿 부츠를 착용하기도 했다.[122]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정치적 경쟁자였던 로즈베리는 사후 랜돌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신경계는 항상 긴장하고 예민했다; ...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그들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타협할 줄 몰랐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있을 때 그의 대화는 매우 즐거웠다. 그때 그는 유쾌한 아이러니와 농담의 기량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35]
전기 작가 로이 젠킨스는 랜돌프의 거만하면서도 다소 저속한 카리스마를 지적하며 그의 정치적 역량에 의문을 제기했다.
>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몇 가지 뛰어난 정치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통렬하고, 상처를 주는, 때로는 매우 재미있는 문구를 구사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터무니없는 공격을 생각해 낸 후에는, 그는 취향, 친구를 불쾌하게 하거나 자신의 명성을 훼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감행할 용기가 있었다.... 그는 오만함에 강했다. 그는 또한 그의 말이 울려 퍼지게 하고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다른 속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즉, 기억하기 쉬운 이름, 특이한 외모, 그리고 연설 무대든 영국 하원이든 훌륭한 전달력이었다. 게다가 그는 종종 불쾌하고 무의미한 무례함과 뒤섞인 산발적인 매력도 가지고 있었다.[36]
젠킨스는 랜돌프의 짧은 재임 기간과 미미한 성과를 윌리엄 피트(2세)와 비교하며, "피트는 46년 중 19년 동안 총리를 지냈다. 처칠은 11개월 동안 재임했고, 그토록 많은 관심을 끌고 그토록 적은 것을 성취한 데 있어 견줄 자가 없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37]
일각에서는 랜돌프 처칠 경을 잭 더 리퍼로 보는 설도 제기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123]
참조
[1]
웹사이트
Lord Randolph Churchill {{!}} British politician
https://www.britanni[...]
2018-12-12
[2]
간행물
Lord Randolph Churchill and Tory Democracy, 1880–1885
1979-03
[3]
서적
Lord Randolph Churchill
Macmillan, London
1906
[4]
ODNB
Churchill, Lord Randolph Henry Spencer
[5]
문서
My Life and Loves
1922-27
[6]
문서
Rosebery: Statesman in Turmoil
[7]
문서
Rosebery: Statesman in Turmoil
[8]
웹사이트
Masonic Papers
http://www.freemason[...]
freemasons-freemasonary.com
2012-07-30
[9]
웹사이트
The Rothschild Archive
https://www.rothschi[...]
2017-07-24
[10]
서적
Jennie: The Life of Lady Randolph Churchill
1969
[11]
서적
Churchill: Young Man in a Hurry, 1874–1915
1984
[12]
서적
Lord Randolph Churchill: A Political Life
1988
[13]
뉴스
Lord Randolph Churchill: Maladies et Mort
http://www.winstonch[...]
2015-08-17
[14]
문서
[15]
문서
Life of Lord Randolph Churchill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문서
Dictionary of Indian Biography/Churchill, Lord Randolph Henry Spencer
[20]
서적
Lord Randolph Churchill: A Political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21]
문서
[22]
문서
[23]
서적
Ghosts of Empire: Britain's Legacies in the Modern World
Bloomsbury
2011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British History, 1815–1914
2007
[27]
서적
Chief Whip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8]
웹사이트
Matjiesfontein History - Matjiesfontein
http://www.matjiesfo[...]
2017-07-24
[29]
문서
Holy War In Belfast
Anvil Books Ltd, Tralee
1969
[30]
서적
Churchill and Ireland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4
[31]
서적
Churchill and Ireland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2]
웹사이트
What Killed Lord Randolph Churchill?
https://winstonchurc[...]
2021-12-30
[33]
웹사이트
Index entry
http://www.freebmd.o[...]
ONS
2018-04-24
[34]
뉴스
Randolph Churchill's Will; Details of the Estate Bequeathed to His Wife and Children
https://query.nytime[...]
1895-03-05
[35]
문서
Review: Lord Randolph Churchill
[36]
서적
The Chancellors
1998
[37]
서적
The Chancellors
1998
[38]
서적
秦(2001)
[39]
서적
秦(2001)
[40]
웹사이트
HANSARD 1803–2005
https://api.parliame[...]
[41]
서적
神川(2011)
[42]
웹사이트
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
http://thepeerage.co[...]
2014-08-03
[43]
간행물
Churchill, Randolph Henry Spencer
[44]
서적
ペイン(1975)
[45]
서적
森(1987)
[46]
서적
森(1987)
[47]
서적
ペイン(1975)
[48]
서적
ペイン(1975)
[49]
서적
ペイン(1975)
[50]
서적
ペイン(1975)
[51]
웹사이트
Churchill Freemason
http://www.freemason[...]
freemasons-freemasonry/com
2015-09-19
[52]
서적
ペイン(1975)
[53]
서적
ブロード(1965)
[54]
서적
ペイン(1975)
[55]
서적
ペイン(1975)
[56]
서적
ブロード(1965)
[57]
서적
ペイン(1975)
[58]
서적
ペイン(1975)
[59]
서적
ペイン(1975)
[60]
서적
ペイン(1975)
[61]
서적
ペイン(1975)
[62]
서적
ペイン(1975)
[63]
서적
ペイン(1975)
[64]
서적
森(1987)
[65]
서적
ペイン(1975)
[66]
서적
ペイン(1975)
[67]
서적
森(1987)
[68]
서적
ペイン(1975)
[69]
서적
ペイン(1975)
[70]
서적
ペイン(1975)
[71]
서적
ペイン(1975)
[72]
서적
神川(2011)
[73]
서적
小関(2006)
[74]
서적
ブレイク(1979)
[75]
서적
ブレイク(1979)
[76]
서적
ブレイク(1979)
[77]
서적
ペイン(1975)
[78]
서적
ブレイク(1979)
[79]
서적
小関(2006)
[80]
서적
小関(2006)
[81]
서적
ブレイク(1979)
[82]
서적
小関(2006)
[83]
서적
小関(2006)
[84]
서적
小関(2006)
[85]
서적
ブレイク(1979)
[86]
서적
神川(2011)
[87]
서적
小関(2006)
[88]
서적
小関(2006)
[89]
서적
小関(2006)
[90]
서적
小関(2006)
[91]
서적
小関(2006)
[92]
서적
小関(2006)
[93]
서적
小関(2006)
[94]
서적
小関(2006)
[95]
서적
小関(2006)
[96]
서적
小関(2006)
[97]
서적
小関(2006)
[98]
서적
神川(2011)
[99]
서적
小関(2006)
[100]
서적
神川(2011)
[101]
서적
神川(2011)
[102]
서적
神川(2011)
[103]
서적
神川(2011)
[104]
서적
小関(2006)
[105]
서적
『風刺画で読み解くイギリス宰相列伝―ウォルポールからメージャーまで』
ミネルヴァ書房
2018-05-31
[106]
서적
神川(2011)
[107]
서적
ペイン(1975)
[108]
서적
ペイン(1975)
[109]
서적
ペイン(1975)
[110]
서적
ペイン(1975)
[111]
서적
河合(1998)
[112]
서적
ブロード(1965)
[113]
서적
ブロード(1965)
[114]
서적
ブレイク(1979)
[115]
서적
ブレイク(1979)
[116]
서적
ペイン(1975)
[117]
서적
ブレイク(1979)
[118]
서적
ブレイク(1979)
[119]
서적
ブレイク(1979)
[120]
서적
ペイン(1975)
[121]
서적
ブレイク(1979)
[122]
서적
ペイン(1975)
[123]
서적
小林・東山(2001)
[124]
서적
ペイン(1975)
[125]
서적
ブロード(1965)
[126]
서적
ブロード(1965)
[127]
서적
ペイン(1975)
[128]
간행물
歴史群像
2006-12
[129]
서적
Lord Randolph Churchill
Macmillan
1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