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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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 2. 왕의 위상과 권한
- 3. 왕위 계승과 선출
- 4. 로마 왕정의 쇠퇴와 공화정으로의 전환
- 5. 로마의 역대 왕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 5.1. 로물루스 (Romulus, 재위: 기원전 753년 ~ 기원전 716년)
- 5.2. 누마 폼필리우스 (Numa Pompilius, 재위: 기원전 715년 ~ 기원전 672년)
- 5.3.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Tullus Hostilius, 재위: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40년)
- 5.4. 안쿠스 마르키우스 (Ancus Marcius, 재위: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16년)
- 5.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Lucius Tarquinius Priscus, 재위: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
- 5.6.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Servius Tullius, 재위: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34년)
- 5.7.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Lucius Tarquinius Superbus, 재위: 기원전 534년 ~ 기원전 509년)
- 참조
1. 개요
로마 국왕은 로마 왕정 시대에 로마를 통치했던 최고 권력자를 의미한다. 왕은 정부 수반, 군 최고 통수권자, 국가 원수, 최고 제사장, 최고 입법자, 최고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왕은 종신직이었으며, 원로원의 심사를 거쳐 쿠리아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로마의 마지막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로마의 역대 왕으로는 로물루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키우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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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국왕 | |
---|---|
기본 정보 | |
직함 | 로마 국왕 |
원어 명칭 | Rex Roma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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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 로마 |
임명 방식 | 쿠리아 민회 |
시작 | 기원전 753년 |
종료 | 기원전 509년 |
첫 번째 국왕 | 로물루스 |
마지막 국왕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
스타일 | |
호칭 | 렉스 |
역사 | |
폐지 사유 | '로마사 개요' (보관된 웹페이지) |
왕정 폐지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축출 |
왕정 폐지 시기 | 기원전 509년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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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의 위상과 권한
초기 로마는 공화정이 아닌, 왕(rex)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은 국민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원로원은 약한 형태의 과두정으로, 이들의 행정권은 미약하였다. 왕의 상징으로는 권표(fasces)를 든 12명의 릭토르와 상아 왕좌, 자주색 토가(toga picta), 붉은 신발, 머리에 쓴 하얀 왕관이었다. 오직 왕만이 자주색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왕에게 있었는데, 그 위상은 다음과 같다.
- '''정부 수반''' : 법을 시행하는 최고 행정권이 있었다.
- '''군 최고 통수권자''' : 군단을 징모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 있는 최고 사령관이었다.
- '''국가 원수''' : 외교상 로마의 최고 대표자이며, 외국 사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최고 제사장''' : 로마의 신 앞에서 로마와 로마 인민의 공식적인 대표자로써, 로마 종교를 감독할 행정권이 있었다.
- '''최고 입법자''' :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법을 만들어 제안할 수 있었다.
- '''최고 재판관''' : 모든 민사와 형사 사건을 판결하였다.
2. 1. 정부 수반
초기 로마는 공화정이 아닌, 왕(rex)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은 국민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원로원은 약한 형태의 과두정으로, 이들의 행정권은 미약하였다. 왕의 상징으로는 권표(fasces)를 든 12명의 릭토르와 상아 왕좌, 자주색 토가(toga picta), 붉은 신발, 머리에 쓴 하얀 왕관이었다. 오직 왕만이 자주색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국가의 최고 권력은 왕에게 있었는데, 정부 수반으로서 법을 시행하는 최고 행정권이 있었다. 그의 종교적 권위 외에도, 국왕은 ''임페리움''의 사용을 통해 최고 군사, 행정 및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왕의 ''임페리움''은 종신직이었으며, 그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당시 로마에서 유일한 ''임페리움'' 소유자였던 국왕은 궁극적인 행정 권한을 가졌으며, 그의 행정 권한과 유일한 ''임페리움''은 법적 효력을 가진 칙령을 발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임페리움''을 가진 집정관의 남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법률은 왕정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또한 모든 관리를 임명하거나 지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로마의 람네스 부족의 호민관이자 국왕의 개인 경호대인 켈레스의 사령관 역할을 하는 ''트리부누스 켈레룸''을 임명했다. 국왕은 즉위 시 호민관을 임명해야 했으며, 호민관은 국왕이 사망하면 퇴임했다. 호민관은 국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큐리아 회를 소집하고 법안을 제출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 임명한 또 다른 관리는 도시의 감시관 역할을 하는 ''도시 관리자''였다. 국왕이 도시를 비울 경우, 도시 관리자는 도시 내에서 ''임페리움''을 부여받을 정도로 국왕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국왕은 원로원에 귀족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 2. 군 최고 통수권자
로마의 왕은 군단을 징모하고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최고 사령관이었다. 로마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무제한의 군사 권한을 행사했다. 왕의 상징으로는 권표(fasces)를 든 12명의 릭토르와 상아 왕좌, 자주색 토가(toga picta), 붉은 신발, 머리에 쓴 하얀 왕관이었다.왕은 ''임페리움''을 통해 최고 군사, 행정 및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왕의 ''임페리움''은 종신직이었으며, 그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당시 로마에서 유일한 ''임페리움'' 소유자였던 국왕은 궁극적인 행정 권한을 가졌으며, 그의 행정 권한과 유일한 ''임페리움''은 법적 효력을 가진 칙령을 발할 수 있게 했다.
국왕은 또한 모든 관리를 임명하거나 지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로마의 람네스 부족의 호민관이자 국왕의 개인 경호대인 켈레스의 사령관 역할을 하는 ''트리부누스 켈레룸''을 임명했다. 국왕은 즉위 시 호민관을 임명해야 했으며, 호민관은 국왕이 사망하면 퇴임했다. 호민관은 국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큐리아 회를 소집하고 법안을 제출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 임명한 또 다른 관리는 도시의 감시관 역할을 하는 ''도시 관리자''였다. 국왕이 도시를 비울 경우, 도시 관리자는 도시 내에서 ''임페리움''을 부여받을 정도로 국왕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2. 3. 국가 원수
초기 로마는 공화정이 아닌, 왕(rex)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왕은 국민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원로원은 약한 형태의 과두정으로, 이들의 행정권은 미약하였다.왕의 상징으로는 권표(fasces)를 든 12명의 릭토르와 상아 왕좌, 자주색 토가(toga picta), 붉은 신발, 머리에 쓴 하얀 왕관이었다. 오직 왕만이 자주색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왕에게 있었는데, 외교상 로마의 최고 대표자이며, 외국 사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의 종교적 권위 외에도, 국왕은 ''임페리움''의 사용을 통해 최고 군사, 행정 및 사법 권한을 부여받았다. 국왕의 ''임페리움''은 종신직이었으며, 그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지 않도록 보호했다. 당시 로마에서 유일한 ''임페리움'' 소유자였던 국왕은 궁극적인 행정 권한을 가졌으며, 로마 모든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무제한의 군사 권한을 행사했다. 그의 행정 권한과 유일한 ''임페리움''은 법적 효력을 가진 칙령을 발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임페리움''을 가진 집정관의 남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법률은 왕정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또한 모든 관리를 임명하거나 지명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로마의 람네스 부족의 호민관이자 국왕의 개인 경호대인 켈레스의 사령관 역할을 하는 ''트리부누스 켈레룸''을 임명했다. 국왕은 즉위 시 호민관을 임명해야 했으며, 호민관은 국왕이 사망하면 퇴임했다. 호민관은 국왕 다음으로 서열이 높았으며, 큐리아 회를 소집하고 법안을 제출할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이 임명한 또 다른 관리는 도시의 감시관 역할을 하는 ''도시 관리자''였다. 국왕이 도시를 비울 경우, 도시 관리자는 도시 내에서 ''임페리움''을 부여받을 정도로 국왕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국왕은 원로원에 귀족을 임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 4. 최고 제사장
로마는 초기에는 왕정이었으며 왕(rex)은 국민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원로원은 약한 과두정 형태였고 행정권은 미약하였다. 왕은 권표(fasces)를 든 12명의 릭토르, 상아 왕좌, 자주색 토가(toga picta), 붉은 신발, 하얀 왕관을 상징으로 사용하였고, 오직 왕만이 자주색 토가를 입을 수 있었다.왕은 국가 최고 권력자로, 로마의 신 앞에서 로마와 로마 인민을 대표하여 로마 종교를 감독하는 최고 제사장이었다.
2. 5. 최고 입법자
로마의 왕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법을 만들어 제안할 수 있는 최고 입법자였다. 왕정 시대에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는 권한과 권위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독립적인 기관이 아니었으며, 오직 국왕에 의해 소집될 수 있었고, 국왕이 제시한 문제만 논의할 수 있었다. 쿠리아 민회는 국왕이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킬 권한이 있었지만, 원로원은 명예 자문 기구였다. 원로원은 국왕에게 조언할 수 있었지만, 국왕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국왕이 원로원과 쿠리아 민회의 승인 없이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은 외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2. 6. 최고 재판관
왕의 ''임페리움''(imperium)은 그에게 군사적 권한을 부여하고, 로마의 최고 재판관으로서 모든 사건에 대한 법적 판결을 내릴 자격을 부여했다. 그는 일부 사건에서 폰티펙스(pontiffs)를 소규모 판사로 임명할 수 있었지만, 민사 및 형사를 막론하고 자신 앞에 제기된 모든 사건에 대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왕을 전쟁과 평화 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만들었다. 일부 저술가들은 왕의 결정에 대한 상소가 없다고 믿었지만, 다른 이들은 귀족(patrician)이 쿠리아 회의에서 왕에게 상소 제안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왕을 보좌하기 위해 한 협의회가 모든 재판에서 왕에게 조언했지만, 이 협의회는 왕의 결정을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또한, 그에 의해 두 명의 형사 수사관('퀘스토레스 파리키디이', ''Quaestores Parricidii'')이 임명되었으며, 반역 사건을 감독하는 2인 형사 법원(''두움비리 페르두엘리오니스'', ''Duumviri Perduellionis'')도 있었다.
3. 왕위 계승과 선출
로마 국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 새 국왕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 원로원은 소집되어 자체적으로 한 명을 과도기 집정관(interrex)으로 임명하여 5일 동안 로마의 다음 국왕을 지명하게 했다. 5일이 지나면 과도기 집정관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원로원 의원을 5일 임기로 임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은 새 국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도기 집정관은 국왕에 적합한 후보자를 찾으면 그를 원로원 앞으로 데려가 원로원은 그를 심사했다. 만약 원로원이 지명을 확정하면 과도기 집정관은 쿠리아 회의를 소집하고 국왕 선거에서 의장으로 주재했다.
후보자가 쿠리아 회의에 제안되면 로마 시민은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수락된 경우,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즉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에게 완전한 왕권과 권한을 부여하기 전에 두 가지 추가적인 행위가 필요했다. 첫째, 국왕이 로마의 최고 사제 역할을 할 것이므로, 그의 임명에 관해 신들의 신성한 뜻을 점을 통해 얻는 것이 필요했다. 점술가는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시민들이 아래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를 성채로 데려가 돌 의자에 앉히는 의식을 수행했다. 만약 왕으로 선출된 사람이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면, 점술가는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었다고 발표하여 왕으로 선출된 사람의 사제적 성격을 확인했다. 둘째, ''임페리움''이 왕에게 부여되어야 했다. 쿠리아 회의의 투표는 단지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했지만, 그 행위가 그에게 왕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은 쿠리아 회의에 스스로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쿠리아 회의는 법에 찬성하는 투표를 통해 이를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은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이 과정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3. 1. 선출 과정
로마 국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 새 국왕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 원로원은 자체적으로 한 명을 과도기 집정관(interrex)으로 임명하여 5일 동안 로마의 다음 국왕을 지명하게 했다. 5일이 지나면 과도기 집정관은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다른 원로원 의원을 5일 임기로 임명할 수 있었고, 이 과정은 새 국왕이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과도기 집정관은 국왕에 적합한 후보자를 찾으면 그를 원로원 앞으로 데려가 원로원은 그를 심사했다. 만약 원로원이 지명을 확정하면 과도기 집정관은 쿠리아 회의를 소집하고 국왕 선거에서 의장으로 주재했다.후보자가 쿠리아 회의에 제안되면 로마 시민은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었다. 수락된 경우,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즉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에게 완전한 왕권과 권한을 부여하기 전에 두 가지 추가적인 행위가 필요했다. 첫째, 국왕이 로마의 최고 사제 역할을 할 것이므로, 그의 임명에 관해 신들의 신성한 뜻을 점을 통해 얻는 것이 필요했다. 점술가는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성채로 데려가 돌 의자에 앉히는 의식을 수행했다. 만약 왕으로 선출된 사람이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면, 점술가는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었다고 발표하여 왕으로 선출된 사람의 사제적 성격을 확인했다. 둘째, ''임페리움''이 왕에게 부여되어야 했다. 쿠리아 회의의 투표는 단지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결정했지만, 그 행위가 그에게 왕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왕은 쿠리아 회의에 스스로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제안했고, 쿠리아 회의는 법에 찬성하는 투표를 통해 이를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은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이 과정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3. 2. 왕위 계승의 특징
로마 국왕이 사망하면 로마는 과도기에 접어들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원로원으로 넘어가 새 국왕을 찾는 임무를 맡았다. 원로원은 과도기 집정관(interrex)을 임명하여 5일 동안 로마의 다음 국왕을 지명하게 했다. 과도기 집정관은 국왕 후보자를 원로원에 추천하고, 원로원이 승인하면 쿠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국왕 선거를 주재했다.쿠리아 회의에서 후보자가 수락되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즉시 취임하지 않았다. 우선, 점을 통해 신들의 뜻을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점술가가 왕으로 선출된 사람을 성채로 데려가 신들의 징표를 확인하는 의식을 수행했다. 신들이 호의적인 징표를 주었다고 판단되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의 사제적 성격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쿠리아 회의에서 *임페리움*을 부여하는 법안을 가결하여 왕에게 권한을 부여했다.
이론적으로 로마 시민은 지도자를 선출했지만, 원로원이 이 과정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4. 로마 왕정의 쇠퇴와 공화정으로의 전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로마 왕정 전복은 왕의 권력을 제한적으로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8][9]
왕의 칭호는 형식적으로 로마의 첫 번째 제사장인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에게 주어졌다.[8][9] 그는 원로원 의석을 제외하고 정치적, 군사적 경력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로마인들은 왕권 강화를 막고자 하였고,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에게 렉스 사크로룸을 종속시켰다. 심지어 ''레기아''(Regia) 또는 왕궁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게 양도되었다.[8][9] 렉스 사크로룸의 주요 공적은 ''레기푸기움''(Regifugium) 축제에서 왕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집정관들은 종교적 역할을 유지했으며, ''인테르렉스''(interrex) 직무가 유지되었고, 때로는 독재가 유발되기도 했다. 렉스 사크로룸은 공개적으로 선출되지 않고 교황 대학에 의해 선택되었다.
렉스 사크로룸은 야누스에 대한 준플라멘으로 활동했다. 이 지위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채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귀족 혈통이 필요했지만, 평민인 ''마르키 씨족''의 일원이 수행하여 ''렉스''(Rex)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
종교의 행정 기능은 최고 교황에게 양도되었다.
공화국 말기에 원로원을 선택하는 이전 왕의 역할이 감찰관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집정관 직책이 만료된 후 모든 행정관이 원로원에 입학하면서 원로원을 선택하는 역할은 제한되었다.
공화국 시대의 국가 원수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로마의 개념으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다른 대부분의 권력—''임페리움''—은 집정관과 법무관에게 양도되었으며,[10] 이에 따라 적어도 사법부와 행정부를 분리했다. 전통에 따르면 집정관직은 항상 두 사람에게 맡겨져 독재를 막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었다. 나중에 프로콘술과 프로프라에토르에게 원로원의 임명에 의해 ''임페리움''이 부여될 수 있었다. ''임페리움''을 사용하여 승리한 군대를 이끈 사람은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얻었다.
법안은 쿠리아 회의에서 켄투리아 회의 (및 부족 회의)로 넘어갔으며, 이전 켄투리아 회의의 선거를 비준하는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lex curiata de imperio)의 형식만 남았다. 그러나 집정관들은 조례에 따라 통치할 권한을 유지했다.
4. 1. 공화정 시대 왕의 권한 분할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로마 왕정 전복은 왕의 권한을 제한적으로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8][9]실제 왕의 칭호는 형식적으로 로마의 첫 번째 제사장으로 남아 있는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에게 주어졌다. 그는 원로원 의석을 제외하고 정치적 또는 군사적 경력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로마인들은 왕권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을 막으려는 열망이 강하여, 제사의 왕은 형식적으로 모든 프로토콜에서 벗어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에게 종속되었으며, 심지어 로마 포룸의 ''레기아''(Regia)가 폰티펙스 막시무스에게 양도되었다.[8][9] 렉스 사크로룸은 공개적으로 선출되지 않고 교황 대학에 의해 선택되었다. 그는 그만이 수행할 수 있는 몇 가지 종교 의식을 유지했으며 야누스에 대한 준플라멘으로 활동했다. 이 지위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채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직무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귀족 혈통이 필요했지만, 평민 가문인 ''마르키 씨족''의 일원이 한 번 수행하여 자신과 그의 후손에게 코그노멘 ''렉스''(Rex)를 얻기도 했다. 종교의 행정 기능은 최고 교황에게 양도되었다.
공화국 말기에는 원로원을 선택하고 원로원에서 사람들을 해고하는 이전 왕의 역할이 감찰관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집정관 직책이 만료된 후 모든 행정관이 결국 원로원에 입학하면서 원로원을 선택하는 역할은 다소 제한되었다.
왕의 다른 대부분의 권력—''임페리움''—은 집정관과 법무관에게 양도되었으며,[10] 이에 따라 적어도 사법부와 행정부를 대략적으로 분리했다. 전통에 따르면 집정관직은 항상 두 사람에게 맡겨져 독재를 막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었다. 나중에 프로콘술과 프로프라에토르에게 원로원의 임명에 의해 ''임페리움''이 부여될 수 있었다. ''임페리움''을 사용하여 승리적으로 군대를 이끈 사람은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동시에 법안은 실질적으로 쿠리아 회의에서 켄투리아 회의 (및 부족 회의)로 넘어갔으며, 이전 켄투리아 회의의 선거를 비준하는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lex curiata de imperio)의 형식만 남았다. 그러나 집정관들은 조례에 따라 통치할 권한을 유지했다.
4. 2. 공화정의 의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로마 왕정 전복은 왕의 권력을 제한적으로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8][9]왕의 칭호는 형식적으로 로마의 첫 번째 제사장인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에게 주어졌다.[8][9] 그는 원로원 의석을 제외하고 정치적, 군사적 경력을 갖는 것이 금지되었다. 로마인들은 왕권 강화를 막고자 하였고,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에게 렉스 사크로룸을 종속시켰다. 심지어 ''레기아''(Regia) 또는 왕궁이 폰티펙스 막시무스에게 양도되었다.[8][9] 렉스 사크로룸의 주요 공적은 ''레기푸기움''(Regifugium) 축제에서 왕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집정관들은 종교적 역할을 유지했으며, ''인테르렉스''(interrex) 직무가 유지되었고, 때로는 독재가 유발되기도 했다. 렉스 사크로룸은 공개적으로 선출되지 않고 교황 대학에 의해 선택되었다.
렉스 사크로룸은 야누스에 대한 준플라멘으로 활동했다. 이 지위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채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귀족 혈통이 필요했지만, 평민인 ''마르키 씨족''의 일원이 수행하여 ''렉스''(Rex)라는 코그노멘을 얻었다.
종교의 행정 기능은 최고 교황에게 양도되었다.
공화국 말기에 원로원을 선택하는 이전 왕의 역할이 감찰관에게 양도되었다. 그러나 집정관 직책이 만료된 후 모든 행정관이 원로원에 입학하면서 원로원을 선택하는 역할은 제한되었다.
공화국 시대의 국가 원수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로마의 개념으로 번역하기 어렵지만, 다른 대부분의 권력—''임페리움''—은 집정관과 법무관("지도자")에게 양도되었으며,[10] 이에 따라 적어도 사법부와 행정부를 분리했다. 전통에 따르면 집정관직은 항상 두 사람에게 맡겨져 독재를 막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6개월 임기의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도입되었다. 나중에 프로콘술과 프로프라에토르에게 원로원의 임명에 의해 ''임페리움''이 부여될 수 있었다. ''임페리움''을 사용하여 승리한 군대를 이끈 사람은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얻었다.
법안은 쿠리아 회의에서 켄투리아 회의 (및 부족 회의)로 넘어갔으며, 이전 켄투리아 회의의 선거를 비준하는 ''렉스 쿠리아타 데 임페리오''(lex curiata de imperio)의 형식만 남았다. 그러나 집정관들은 조례에 따라 통치할 권한을 유지했다.
5. 로마의 역대 왕 (기원전 753년 ~ 기원전 509년)
로마의 기록은 기원전 390년 도시가 약탈당했을 때 파괴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몇 명의 왕이 도시를 통치했는지, 또는 후대 작가들이 개별 왕에게 귀속시킨 행위가 정확한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티투스 타티우스는 사비니 왕이었으며, 로물루스와 함께 5년 동안 로마의 공동 왕이었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로마의 일곱 왕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이름 | 출생 | 재위 기간 | 계승 |
---|---|---|---|
로물루스 | 기원전 770년[2] | 기원전 753년 – 기원전 716년 (37년)[3][2] | 형제 레무스를 살해한 후 스스로 왕을 칭했다. |
누마 폼필리우스 | 기원전 753년[4] | 기원전 715년 – 기원전 672년 (43년)[3][4] | 로물루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 ??? |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40년 (32년)[3] | 누마 폼필리우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
안쿠스 마르키우스 | ??? |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16년 (24년)[3] |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사위[5]이자 누마 폼필리우스의 손자였으며, 할아버지 사망 당시 5살[6]이었고,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 ??? |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 (38년)[3] | 안쿠스 마르키우스 사후,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섭정이 되었지만, 곧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최초의 에트루리아 왕이었으며, 원래 루쿠모로 알려졌다.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 |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34년 (44년)[3]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사위.[7] 안쿠스의 아들들이 왕이 회복되는 동안 그가 대신 자리를 채우고 있다고 위장하여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암살한 후 왕위를 찬탈했다.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 ??? | 기원전 534년 – 기원전 509년 (25년)[3]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나 손자.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와 그의 아내(툴리우스의 딸)가 함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한 후 왕위를 찬탈했다. |
5. 1. 로물루스 (Romulus, 재위: 기원전 753년 ~ 기원전 716년)
'''로물루스'''는 기원전 770년에 태어났으며,[2] 기원전 753년부터 기원전 716년까지 37년간 로마를 통치했다.[3][2] 그는 형제 레무스를 살해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390년 도시가 약탈당했을 때 로마의 기록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로물루스의 업적이 정확한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5. 2. 누마 폼필리우스 (Numa Pompilius, 재위: 기원전 715년 ~ 기원전 672년)
'''누마 폼필리우스'''(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la)는 로마 왕국의 2대 왕으로,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3][4] 기원전 753년에 태어나 기원전 715년부터 기원전 672년까지 43년간 로마를 다스렸다.[3][4] 로물루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4]
5. 3.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Tullus Hostilius, 재위: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40년)
누마 폼필리우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3] 재위 기간은 기원전 672년부터 기원전 640년까지 32년이다.[3]5. 4. 안쿠스 마르키우스 (Ancus Marcius, 재위: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16년)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사후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3]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사위[5]이자 누마 폼필리우스의 손자였으며, 할아버지 사망 당시 5살[6]이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16년으로 24년간 통치하였다.[3]5. 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Lucius Tarquinius Priscus, 재위: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
안쿠스 마르키우스 사후,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섭정이 되었지만, 곧 쿠리아 회의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3] 그는 최초의 에트루리아 왕이었으며, 원래 루쿠모로 알려졌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616년 ~ 기원전 578년이다.[3]5. 6.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Servius Tullius, 재위: 기원전 578년 ~ 기원전 534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사위인[7]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기원전 578년부터 기원전 534년까지 44년간 로마를 통치했다.[3] 그는 안쿠스의 아들들이 왕이 회복되는 동안 그가 대신 자리를 채우고 있다고 위장하여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를 암살한 후 왕위를 찬탈했다.5. 7.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Lucius Tarquinius Superbus, 재위: 기원전 534년 ~ 기원전 509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나 손자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와 그의 아내(툴리우스의 딸)가 함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한 후 왕위를 찬탈했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 534년에서 기원전 509년까지 25년간이다.[3]참조
[1]
웹사이트
Outline of Roman History
https://web.archive.[...]
American Book Company
1901
[2]
서적
Parallel Lives
https://penelope.uch[...]
[3]
서적
ab urbe condita libri
https://wikisource.o[...]
[4]
서적
Parallel Lives
https://penelope.uch[...]
[5]
문서
Married his daughter, Hostilia
[6]
서적
Plutach's Parallel Lives
https://penelope.uch[...]
[7]
서적
Ab urbe condita
[8]
서적
A Critical History of Early Rome: From Prehistory to the First Punic Wa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9]
문서
It is well known that Julius Caesar inhabited it.
[10]
문서
Before the formal establishment of the office of praetor below the consulate, this was at least another generic name, and quite possibly another title, of the consuls, cf. the names "praetorium" for the military leader's tent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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