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타리우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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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타리우스 1세는 프랑크 왕국의 황제이자 중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795년 경건왕 루트비히와 에르망가르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성장했고, 817년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로타리우스는 제국 분할을 둘러싸고 아버지 및 형제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855년 병세로 인해 왕위를 포기하고 세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한 후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중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어 서유럽 국가들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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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리우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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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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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타르 1세 |
다른 이름 | 중프랑크 왕 |
출생 | 795년 |
사망 | 855년 9월 29일 |
사망 장소 | 프륌 |
매장지 | 프륌 수도원 |
종교 | 가톨릭 교회 |
정치 | |
작위 | 프랑크 왕 로마 황제 |
통치 기간 | 로마 황제: 817년 - 855년 프랑크 왕: 840년 - 855년 |
대관일 | 817년 아헨 823년 4월 5일 로마 |
선임자 | 루트비히 1세 (로마 황제) 루트비히 1세 (프랑크 왕) |
후임자 | 루트비히 2세 (로마 황제)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 왕국) 로타르 2세 (로타링기아) 샤를 (프로방스) |
왕가 | 카롤링거 왕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루트비히 1세 |
어머니 | 에르망가르드 드 에스베 |
배우자 | 에르망가르드 드 투르 |
자녀 | 루트비히 2세 로타르 2세 샤를 |
기타 정보 | |
관련 항목 | 베르됭 조약 |
2. 생애
로타리우스 1세는 795년 경건왕 루트비히와 헤스바이에의 에르망가르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위 중인 황제 샤를마뉴의 아들이었다. 로타리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보냈을 것이다. 814년, 노령의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적출자인 경건왕 루트비히가 그의 광대한 제국을 계승했다. 다음 해인 815년, 로타리우스는 아버지이자 새 황제인 루트비히를 위해 바이에른을 통치하도록 파견되었다.[1] 817년, 경건왕 루트비히[1]는 그의 ''제국 질서(Ordinatio Imperii)''를 작성했다.[2] 이 문서에서 루트비히는 로타리우스를 그의 주요 상속자로 지명하고, 로타리우스가 루트비히의 젊은 아들들인 아키텐의 피핀 1세(20세)과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13세), 그리고 그의 조카(로타리우스의 사촌)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의 봉건적 지배자가 될 것을 명령했다. 로타리우스는 그들이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그들의 영토 또한 상속받을 것이었다. 당시 22세였던 로타리우스는 아버지에 의해 아헨에서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 동시에 아키텐과 바이에른은 각각 그의 형제인 피핀과 루트비히에게 부속 왕국으로 할양되었다.[2] 베른하르트의 죽음 이후, 로타리우스는 이탈리아 왕국도 받았다. 821년, 로타리우스는 에르망가르드 (851년 사망)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투르 백작인 투르의 위그의 딸이었다.[1]
822년, 그는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고, 823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교황 파스칼 1세에 의해 로마에서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 824년 11월, 로타리우스는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법령인 ''로마 칙령(Constitutio Romana)''을 공포했는데, 이는 최고 권력을 세속적인 통치자에게 유보했으며, 그 후 그는 이탈리아의 선정을 위해 여러 조례를 발표했다.[1]
로타리우스가 아버지의 궁정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계모인 유디트는 아들인 대머리왕 샤를을 위한 왕국을 확보하기 위한 그녀의 계획에 그의 동의를 얻었다. 이 계획은 829년에 실행되었는데,[1] 젊은 왕자에게 알레만니아가 왕국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로타리우스는 곧 태도를 바꾸었고, 그 후 10년 동안 아버지와 제국의 분할을 놓고 끊임없이 다투었다. 그는 번갈아 가며 제국의 주인이 되기도 하고, 이탈리아로 추방되어 감금되기도 했으며, 한때 그의 형제들과 동맹을 맺고 무기를 들기도 하고, 또 다른 때에는 그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그의 지정된 왕국의 경계는 차례로 확장되고 축소되었다.[1][3]
2. 1. 젊은 시절
로타르 1세는 795년 혹은 794년에 아키텐의 왕이었던 경건왕 루트비히와 히스파니아의 이르멘가르트의 장자로 바이에른의 아르토르프에서 태어났다.[26] 프랑크족식 이름은 클로타리우스, 클로타르였는데, 후일 발음이 변형되면서 로타르, 로타리우스로 변형되었다. 친동생으로 피핀 1세 아키텐인과 독일인 루트비히가 태어났고, 이복 형제인 대머리 카를가 있었다.



로타르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 샤를마뉴의 궁정에서 보냈을 것이다. 800년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와 에르망가르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는 800년에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였던 그는 805년 투르의 백작에 임명되었다.
프랑크족의 전통에 따라 카롤루스 대제는 그의 영토를 분할 상속할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아들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로타르의 아버지 루트비히가 단독 상속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1세가 샤를마뉴의 뒤를 이어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814년, 로타르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12][1] 일설에는 바이에른의 왕이 아닌 바이에른 총독으로 파견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버지 루트비히 1세는 경건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로, 817년 성목요일에 아헨의 왕궁 일부가 붕괴되어 부상을 입자, 같은 해 7월에 「제국 계승 칙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하여 세 아들에 대한 제국의 분할을 결정했다.[13] 루트비히는 아헨의 제국 의회에서 피핀을 아키텐 왕으로, 바이에른을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주도록 정하고 로타르 1세를 후계자로 발표했다.[2] 동시에 피핀, 독일인 루트비히 및 이탈리아의 베른하르트를 봉신으로 지정했으며, 이들이 자녀 없이 사망하면 그들의 영토 역시 로타르가 물려받도록 지정하였다. 그 해 로타르 1세는 아헨으로 소환되어, 아버지 루트비히 1세에 의해 공동황제 겸 후계자로 선포되었다.[26] 이때 제국 칙령에서 그는 경건왕 루트비히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포되었다.[26]
821년, 로타리우스는 투르 백작인 투르의 위그의 딸 에르망가르드와 결혼했다.[1] 822년, 그는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고, 823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교황 파스칼 1세에 의해 로마에서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 824년 11월, 로타리우스는 ''로마 칙령(Constitutio Romana)''을 공포했는데, 이는 최고 권력을 세속적인 통치자에게 유보했으며, 그 후 그는 이탈리아의 선정을 위해 여러 조례를 발표했다.[1]
2. 2. 이탈리아 통치와 공동 황제 시절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의 아들 루트비히(훗날 루트비히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에르망가르드 드 에스페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다.[12]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는 5년 후인 800년에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카롤루스 대제의 즉위).[12]프랑크족의 전통에 따라 카롤루스 대제는 그의 영토를 분할 상속할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아들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로타르의 아버지 루트비히가 단독 상속하게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814년, 로타르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에른의 통치권을 위임받았다.[12]
817년, 경건왕 루트비히[1]는 그의 ''제국 질서(Ordinatio Imperii)''를 작성했다.[2] 이 문서에서 루트비히는 로타리우스를 그의 주요 상속자로 지명하고, 로타리우스가 루트비히의 젊은 아들들인 아키텐의 피핀 1세(20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13세), 그리고 그의 조카(로타리우스의 사촌)인 이탈리아의 베르나르의 봉건적 지배자가 될 것을 명령했다. 로타리우스는 그들이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그들의 영토 또한 상속받을 것이었다. 당시 22세였던 로타리우스는 아버지에 의해 아헨에서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1] 동시에 아키텐과 바이에른은 각각 그의 형제인 피핀과 루트비히에게 부속 왕국으로 할양되었다.[2] 베른하르트의 죽음 이후, 로타리우스는 이탈리아 왕국도 받았다. 821년, 로타리우스는 에르망가르드 (851년 사망)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투르 백작인 투르의 위그의 딸이었다.[1]
818년 베른하르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장님이 된 뒤 로타르는 이탈리아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곧 롬바르드의 왕(regnum Longobardorum)으로 내정되었다. 820년 롬바르디아 공작에 임명되어 820년 또는 822년 파비아로 파견되었다.
822년, 그는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고,[1] 롬바르드의 왕(regnum Longobardorum)으로 내정되었다. 그의 자문관으로는 트루페의 수도원장 아달하르트, 친척이자 카를 마르텔의 아들 베른하르트의 아들인 왈라, 군인 게룬고(Gerungo) 등이 있었다. 823년 4월 5일 부활절에는 교황 파스칼 1세에 의해 로마에서 다시 황제로 즉위했다.[1]
824년 공동황제가 된 로타르는 법을 만들어 교황의 관할권과 이탈리아 정계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정치 개입권한을 제한하였다. 11월, 로타리우스는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법령인 ''로마 칙령(Constitutio Romana)''을 공포했는데, 이는 최고 권력을 세속적인 통치자에게 유보했으며, 그 후 그는 이탈리아의 선정을 위해 여러 조례를 발표했다.[1] 그러나 이 일로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의 지지를 잃게 된다.
818년 어머니 히스파니아의 에르망가르트가 사망하고,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바이에른의 유디트와 재혼하였다. 823년 또는 822년 6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유디트에게서 아들 대머리왕 카를을 얻자 829년 그에게 알레만니아와 게르만인 루트비히의 영지, 로타르의 영지를 일부 떼어 주었다. 아키텐의 피핀 1세는 반발했고 그에게도 함께 거병할 것을 주장, 로타르는 이에 동조하게 된다.

829년 루트비히 경건왕은 상속령을 개정, 카를에게 알레만을 주고, 알레만니아 공작, 슈바벤 공작, 알사스 공작, 리티아(Raetia, 이탈리아 북부), 부르고뉴의 공작에 임명했다.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829년 그의 둘째 부인 유디트의 영향을 받아, 전에 로타르에게 허용한 제국 영토 일부와 다른 형제들에게 분배된 영토의 일부를 분할, 자신과 유디트 사이에서 난 아들 대머리왕 카를에게 차지하도록 제국 칙령의 내용을 고쳤다. 8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는 보름스에서 의회를 소집, 이를 발표하였다. 화가 난 로타르 1세는 제국 정부와 관계를 끊고, 아버지 루트비히에게 저항하였다. 그런데 궁정에서 일어난 군사 혁명 덕분에 그는 830년 다시 공동 황제로 재임명되었으나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로타르 1세는 다시 폐위당했다.[1] 이후 10년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를 상대로 지속적인 투쟁을 벌였다.[3]
830년 여름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경건왕 루트비히 1세의 폐위를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탈리아로 쫓겨갔다. 831년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는 복직했다. 경건왕 루트비히는 그의 공동 황제직을 박탈하고, 이탈리아는 대머리 카를에게 부여했으나 이탈리아인들의 반발로 취소했다.
2. 3. 반란과 베르됭 조약
로타르 1세는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 1세에게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17] 831년과 833년에는 로타르, 피핀, 루트비히 등이 반란을 일으켜 루트비히 1세는 양위했고, 유디트는 수도원에 감금되었다.[3] 그러나 834년 루트비히 1세는 교황의 지지로 복위했다.[3]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부자 형제간의 분쟁을 야기하여 프랑크 왕국의 국력을 쇠하게 했다.830년 10월 네이메헨 의회에서 루트비히 1세가 복위되자, 로타르는 반발했다. 831년 2월 아헨 제국 의회는 상속령을 통해 로타르에게 이탈리아를 배당했다. 833년 로타르는 밀라노 대주교 안길베르트 2세의 도움을 받아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동생 피핀과 루트비히도 가담했다.[3] 제국 상속령 개정에 불만을 품은 에르망가르트 소생 세 아들은 로타르의 지도와 안길베르트 2세의 후원 아래 반란을 일으켜 루트비히 1세를 폐위시켰고, 로타르 1세가 제위에 올랐다. 로타르는 계모 바이에른의 유디트를 수녀원에 감금하고, 셉티마니아의 베른하르트를 죽였다.
로타르와 형제들은 대머리 카를의 몫으로 지정된 알레만을 침공했다. 833년 6월 로타르와 형제들은 콜마르에서 루트비히 1세의 장군 뤼겐펠트를 격파하고 루트비히 1세를 사로잡아 수아송의 생메다드 수도원에 감금했다.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은 프륌 수도원에 보내졌다. 834년 초, 루트비히 1세의 면직이 선언되었으나, 독일인 루트비히와 아키텐인 피핀이 로타르 1세의 분할에 반발했다. 834년 3월 1일, 루트비히 1세는 로마 교황의 지지로 생 드니에서 복위했고, 로타르 1세의 영토는 이탈리아로 제한되었다. 834년 6월, 로타르 1세는 블루아에서 아버지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이탈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하위 왕국으로 유지되었고, 로타르는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여행이 제한되었다. 834년 말, 로타르 1세는 혼자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롬바르드로 패주했다. 이후 로타르 1세와 루트비히 경건왕은 화해했고, 로타르 1세는 롬바르드에서의 모든 권리를 복권받았다.
838년 12월, 아키텐의 피핀이 죽자 루트비히 1세는 새로운 분할 계획을 세웠다. 바이에른과 그 부근 지역은 독일인 루트비히에게, 나머지 부분은 로타르와 대머리왕 카를에게 분할되었다. 839년 5월 3일, 로타르는 이탈리아 지역과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통치자로 내정되었다. 839년 5월 30일 보름스 의회에서 제4차 배분이 이루어져 제국은 로타르와 카를 사이에 양분되었고, 독일인 루트비히는 바이에른만을 차지했다. 로타르는 롬바르드, 로트링겐, 프로방스, 부르군트와 아우스트라시아(바이에른 제외)를 차지했다. 수개월 후 로타르는 베네치아의 피에트로 트라도니코와 협정을 체결하고 로타르의 협약(Pactum Lotharii)이라 명명했다.
840년 8월 루트비히 1세가 죽자, 로타르는 제국 전체의 상징과 휘장을 넘겨받았다.[5] 그러나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는 로타르 1세를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로타르는 단독 통치자가 되려 했으나, 840년 8월 27일 루트비히 1세가 죽은 뒤 대머리왕 카를과 독일인 루트비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민 전쟁)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지원을 받은 로타르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841년 6월 25일 퐁트누아 전투에서 패배했다.[1] 7월 25일, 로타르는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에게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아헨으로 피신했다.
842년 2월 14일, 카를 2세와 루트비히 2세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동맹을 맺었다. (스트라스부르크의 서약)[20] 로타르 1세는 아헨을 버리고 달아났고, 사라센 군대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 시를 포위하기도 했다. 결국 교황청의 주도로 사라센 군대를 몰아냈다.
842년 6월, 형제들은 쏘느 강의 섬에서 만나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22] 843년 8월, 베르됭 조약을 통해 로타르 1세는 황제 칭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와 북해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긴 영토를 받았다. 이 영토에는 로렌, 알자스, 부르고뉴, 프로방스 지역이 포함되었다.[1]
2. 4. 중프랑크 왕국 통치와 말년
843년 8월 10일 베르됭 조약 체결에 따라 로타르 1세는 이탈리아와 로트링겐(로렌), 부르군트, 프로방스, 라인 마스 등 북해에서 네덜란드, 제네바, 이탈리아에 이르는 프랑크 중부 왕국을 차지했다.[1][4] 이탈리아의 왕과 황제의 직위는 유지했지만, 이탈리아의 실권은 곧 장남 루트비히 2세에게 넘겼다.[1](로타르는 연두색 영토, 중앙의 로마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로방스, 부르고뉴, 로렌, 스위스 일대의 영토를 차지했다.)

로타르는 844년 아들 루트비히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임명하였고, 850년에는 루트비히 2세를 공동 황제로 선포하였다.[1] 한편 로타르 2세가 지체가 낮은 귀족의 딸 발트라다와 결혼하려 하자, 로타르 1세는 이를 반대하였다.
844년 1월 교황 세르기오 2세 즉위 후, 로타르 1세는 824년의 로마 규약을 파기했다며 아들 루트비히 2세를 파견했다. 그러나 주교들은 로타르를 상대로 시위했고, 교황은 황제를 임명하는 신의 대리이지 황제의 신하는 아니라고 응수했다. 그해에 교황 세르기오 2세는 아들 루트비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축성해주었다.
845년 아를 백작 풀카르트(Fulcrad)가 프로방스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6][7] 846년 사라센 제국 이슬람 군대가 롬바르디아로 쳐들어와 로마를 위협하고 성 피에트로 성당을 약탈했지만, 로타르는 손을 쓰지 못했다. 로타르는 아들 루트비히 2세를 시켜 로마를 방어하게 했고, 847년 남부 이탈리아까지 사라센 군을 몰아냈으나 다시 점령당했다. 848년 루트비히는 베네벤토에서 사라센인들을 최종 격파하였다.[28]
848년 아랍계 유목민들이 아헨까지 침략하여 약탈했고, 북부에는 바이킹이 침입하여 방화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850년 로타르는 아들 루트비히 2세를 롬바르드와 살레르노, 베네벤토의 공작에 임명하고, 교황 레오 4세에게 기름부음 의식을 받게 한 뒤 공동황제로 임명했다. 851년 5월 20일 왕비 투르의 이르멘가르트가 사망한 후, 로타르 1세는 재혼하지 않았다.
855년 로타르 1세는 병세가 위중해지자 왕좌를 포기하고, 9월 19일 중부 제국을 로타르 2세와 프로방스의 샤를에게 분할하여 넘겼다. 로타르 2세에게는 프리슬란트와 로트링겐을, 프로방스의 샤를에게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와 리옹을 넘겼다.[1] 9월 23일 프륌 대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며, 9월 28일 사망하였다.[1]

(구리 판화, 1698년작)
사후 프륌 대수도원의 석관묘에 안치되었다.
3. 유산과 평가
그는 한때 천주교회의 시복자 후보로 추대되어 가경자가 되었지만, 끝내 시복되지 못했다.[29]
840년부터 843년 베르됭 조약 전까지의 그를 프랑스의 왕으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그를 프랑스의 군주로 간주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를 프랑스의 군주로 인정할 경우, 서프랑크의 국왕 로테르를 로테르 2세나 로테르 3세로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의 재위기간 840년~843년에 대해 프랑크 왕국의 총괄 군주로 인정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나뉜다.
그의 가계는 895년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다. 로타르 1세는 또한 모계를 통해 서프랑크의 국왕 루이 5세 무위왕의 6대 외조부가 된다. 루이 5세 무위왕은 그의 배다른 동생 대머리 카를 2세의 5대손이 된다.[29] 그의 차남 로타르 2세의 외손자 위그의 아들 이탈리아의 로타르 3세의 딸 엠므가 서프랑크의 로테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년을 보낸 프륌 수도원은 훗날 895년 그의 손자 위그가 로타링기아 영지를 회복하려고 비만왕 카를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감금당한 뒤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프륌 수도원 내 그의 묘소는 1721년 수도원을 재정비하면서 그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제기됐고, 1860년에 제단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로타르 1세의 유골이 발견되어, 로타르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그의 묘소는 1871년부터 1874년 1월 4일까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재정 지원으로 재정비되었다. 로타르의 유골은 프륌 수도원의 높은 제단에 재안치되었다.
로렌의 원 지명인 로트링겐 또는 로타링기아는 그의 이름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30]
보통의 작품에서 로타르 1세는 야심이 없는 인물,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이런 평판은 로타르의 형제들인 루트비히 독일인 측이나 대머리 카를 2세 측에서 나왔다는 견해가 있다.
1817년 7월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오페라 작사가 히풀리테 비스(Hippolyte Bis), 프랑수아 헤이 등이 공동으로 작성한 한 작품의 3막의 및 구절에 비극적인 일이며, 색마인 로타르가 자신의 그의 아버지 경건왕 루트비히의 돈으로 권력을 잡은 것처럼 묘사되었다.
855년 그는 중병에 걸려 회복을 포기하고 즉위를 포기했으며, 그의 세 아들에게 그의 땅을 나누어 준 후 9월 23일 프륀 수도원에 들어가 6일 후 사망했다. 그는 프륀에 묻혔고, 그의 유해는 1860년에 발견되었다.[1] 로타르는 프륀에서 가장 기념되었다.[8]
같은 해, 로타르의 왕국은 그의 세 아들 사이에 프륀 조약이라는 협상을 통해 분할되었다.[1] 장남인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 칭호를 받았고, 차남인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인 샤를은 프로방스를 받았다.
3. 1. 중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서유럽 국가들의 기원
로타리우스 1세는 한때 천주교회의 가경자로 추대되었으나, 끝내 시복되지는 못했다.[29] 840년부터 843년 베르됭 조약 체결 전까지 프랑스의 왕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견해도 있다. 그의 재위기간(840년~843년)을 프랑크 왕국의 총괄 군주로 인정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나뉜다.855년, 로타르 1세는 중병으로 즉위를 포기하고, 프륀 조약을 통해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했다.[1] 장남 루트비히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 칭호를, 차남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를, 막내 샤를은 프로방스를 받았다. 이로써 중프랑크 왕국은 3분 되었고, 베르됭 조약에서 확인된 세 형제의 프랑크 왕 지위와 함께 프랑크 왕국은 공식적으로 서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로타르 1세는 영토 분할 6일 후인 9월 29일 프륌 수도원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안치되었다.[1] 그의 유해는 1860년에 발견되었으며,[1] 프륌 수도원에서 가장 기념되는 인물이었다.[8] 그의 묘소는 1871년부터 1874년 1월 4일까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재정 지원으로 재정비되었고, 유골은 프륌 수도원의 높은 제단에 재안치되었다.
그의 가계는 895년 로타르 2세의 아들 위그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다. 프륌 수도원은 훗날 895년 그의 손자 위그가 비만왕 카를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감금되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3. 2. 로타링기아(로렌) 문제
로트링겐 또는 로타링기아는 그의 이름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30]3. 3. 종교와 세속 권력의 갈등
로타리우스 1세는 한때 천주교회의 시복자 후보로 추대되어 가경자가 되었지만, 끝내 시복되지는 못했다.[29] 만년을 보낸 프륌 수도원은 훗날 895년 그의 손자 위그가 로타링기아 영지를 회복하려고 비만왕 카를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감금당한 뒤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프륌 수도원 내 그의 묘소는 1721년 수도원을 재정비하면서 그의 무덤이라는 견해가 제기됐고, 1860년에 제단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로타르 1세의 유골이 발견되어, 로타르의 묘소로 확인되었다. 그의 묘소는 1871년부터 1874년 1월 4일까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1세의 재정 지원으로 재정비되었다. 로타르의 유골은 프륌 수도원의 높은 제단에 재안치되었다.[29]4. 가계
카롤루스 대제의 손자이자 경건왕 루트비히와 히스베니아의 에멩가르데(이르멘가르트)의 아들이다. 어머니 에멩가르데는 히스베니아의 공작 잉게르만의 딸이었다. 남동생으로는 페펭과 루트비히 2세, 여동생으로는 아델라이드, 로트루드, 힐데가르트가 있었다. 서모 바이에른의 유디트에게서는 이복동생 대머리 카를과 이복여동생 기젤라가 태어났다.
821년 로타리우스 1세는 투르의 이르멘가르트와 결혼했다. 위그의 딸인 이르멘가르트는 카를로만 1세의 진외증손녀였다.
루이 2세는 844년에 교황 세르지우스 2세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850년에 황제가 되었다. 힐트루드는 스폴레토의 베렌가리오와 결혼했다. 베르타는 아베네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기젤라는 브레시아의 산 살바토레 수녀원장이었다. 로타리우스 2세는 아버지를 계승했다. 로트루드는 낭트의 람베르 2세와 결혼했다. 샤를은 프로방스, 리옹, 트랑스쥐라 부르고뉴를 할양받았다.
자녀로는 이탈리아의 루트비히 2세, 힐데트루드, 이르멘가르트, 베르타, 기셀라, 로타르 2세, 로트루데, 프로방스의 샤를 등이 있었다. 딸 이르멘가르트는 마사가우의 백작 기셀베르트와 결혼했다. 사생아로는 카를로만이 있었다.
(19세기 작, 레이몽 오규스트 몬보이신, 루이 필리프가 의뢰하여 그린 작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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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uaire-Bulle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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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카를 2세부터 루이 5세 무위왕까지의 계보
[30]
문서
로트링겐 또는 로타링기아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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