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다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다키는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활동한 페르시아 시인으로, 신 페르시아어로 글을 쓴 최초의 주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사만 왕조 궁정에서 활동하며 국왕 나스르 2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18만 구절이 넘는 시를 썼으나 대부분 유실되었다. 현재는 그의 시 일부와 인도 설화집인 '칼릴라와 딤나'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작품이 남아있다. 루다키는 타지키스탄에서는 타지크 문학의 아버지로, 이란에서는 신 페르시아 시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그의 삶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제작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58년 출생 - 고계흥
    고계흥은 오대 십국 시대에 형남 절도사로 활동하며 후량, 후당, 오나라에 복종하며 세력을 유지했고, 형남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말년에 후당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928년에 사망했다.
  • 이란의 장애인 - 알리 하메네이
    알리 하메네이는 이란의 최고 지도자로서, 이란 혁명에 참여하고 대통령을 역임한 후 1989년부터 이란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보수적인 정책 기조와 강경한 반미, 반이스라엘 성향을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의 최고 지도자 자격과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은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이란의 장애인 - 마리암 헤이다르자데
    마리암 헤이다르자데는 이란의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다양한 이란 음악가들과 협업하여 가사, 작곡, 편곡 작업에 참여했다.
  • 941년 사망 - 전원관
    전원관은 오대십국 시대 오월의 제2대 국왕으로, 내정 안정과 외세 방어에 힘썼으며 조세 감면 정책과 남당의 침입을 막아낸 업적이 있으나 화재로 정신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 941년 사망 - 유금필
    유금필은 고려 초 평주 출신의 무신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우고, 북방 민족 회유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삼중대광, 통합 삼한 익찬공신에 봉해지고 태조 묘정에 배향, 조대 6공신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딸은 태조의 비가 되었다.
루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두샨베에 있는 루다키 동상
두샨베에 있는 루다키 동상
본명아부 압둘라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루다키
출생지바노즈, 사만 왕조
사망940/41 (82세 또는 83세)
사망지바노즈, 사만 왕조
직업시인
가수
음악가
사용 언어신 페르시아어
생애

2. 생애

루다키의 전체 이름은 아부 압드 알라 자파르 이븐 무하마드 이븐 하킴 이븐 압드 알-라흐만 이븐 아담 알-루다키 알-샤이르 알-사마르칸디(ابوعبدالله جعفر بن محمد بن حکیم بن عبدالرحمن بن آدم الرودکی الشاعر سمرقندی|아부 압달라 자파르 에브네 모함마드 에브네 하킴 에브네 압도르라흐만 에브네 아담 루다키 사마르칸디fa)이며, 이름 '루다키'는 그의 출신지인 루다크 지역에서 유래했다. 그의 이름은 페르시아어 발음에 따라 '로다키'(Rōdhakī)로 음역하는 것이 정확하며, '알-루다키'(al-Rūdhakī)는 아랍어화된 형태이다.

루다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어 주로 그의 시를 통해 재구성된다.[7] 그는 사만 왕조(819년~999년) 시대에 활동했으며, 이 시기는 페르시아 문학이 새롭게 부흥하던 때였다. 페르시아계였던 루다키는 858년경 사마르칸트부하라 사이, 오늘날 타지키스탄의 루다크 지역에 속하는 바노지(판즈루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맹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리며 논란이 있다. 초기 시인들과 후대 역사가들은 그가 맹인이었다고 기록했으나, 그의 시에 나타난 생생한 자연 묘사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1956년에 이루어진 유골 조사 결과는 그가 만년에 시력을 잃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9]

루다키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가수이자 창 연주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코란 암송과 시,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이러한 명성으로 사만 왕조 궁정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아미르 나스르 2세(재위 914년~943년)와 그의 재상 아불-파들 알-발라미의 후원을 받으며 궁정 시인으로서 높은 지위와 부를 누렸다. 당시 궁정 시인은 단순히 오락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통치를 보조하고 도덕적 지침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루다키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937년 후원자 발라미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루다키의 경력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아미르의 신임을 잃고 궁정에서 추방당했으며,[11]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 속에서 지내다가 940년 또는 941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묘는 현재 타지키스탄 펜지켄트의 펜지 루다크 마을에 있으며, 1940년 사드리딘 아이니에 의해 발견되어 1956년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이끄는 조사단에 의해 유골 조사가 이루어졌다.[15] 조사 결과를 토대로 그가 말년에 강제로 실명당하고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었다.[3]

2. 1. 출생 및 초기 생애

루다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으며, 그의 시를 통해 일부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다.[7] 그는 사만 왕조(819년~999년) 시대에 활동했으며, 이 시기는 페르시아 문학이 발전하고 번성하기 시작한 때였다. 페르시아계였던 루다키는 858년경 사마르칸트부하라 사이에 위치한 루다크 지역의 바노지(판즈루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루다키'는 출신 지역 '루다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루다키가 맹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다키키(977년 사망), 페르도우시(1020년 또는 1025년 사망) 등 초기 시인들은 그가 맹인이었음을 암시했다. 13세기 역사가 아우피는 루다키가 선천적 맹인이었다고 기록했지만[8], 루다키의 시에 나타난 자연에 대한 생생한 묘사 때문에 현대 학자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1956년 루다키의 유골 조사 결과, 그가 만년에 시력을 잃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9]

루다키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가수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다. 사산 제국 시대부터 시는 음악에 맞춰 노래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8세가 되기 전에 코란을 암송했고 시에도 능숙했다고 전해진다.[7] 또한 저명한 음악가 아불-아바크 바크티아르로부터 창 연주를 배웠다. 루다키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목소리와 시적 재능, 창 연주 실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러한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사만 왕조의 궁정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사마르칸트 근교 루다크 마을 출신인 그는 30대 후반에 사만 왕조의 재상 아불-파들 알-발라미에 의해 궁정에 초청받았다는 기록이 있다.[7]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아미르(통치자) 나스르 2세(재위 914년~943년) 또는 재상 알-발라미와 관련이 있었으며, 일각에서는 나스르 2세의 아버지이자 전임자인 아흐마드 사마니(재위 907년~914년) 치세 때 이미 궁정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루다키가 907년 이스마일 사마니 사망 후 아흐마드 사마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를 근거로 한다.

2. 2. 사만 왕조 궁정 시인

현존하는 전기에 따르면 루다키는 사만 왕조의 아미르(통치자) 나스르 2세(재위 914-943) 또는 그의 재상 아불-파들 알-발라미(940년 사망)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문학 학자 사산 타바타바이에 따르면, 루다키는 이미 나스르 2세의 아버지이자 전임자인 아흐마드 사마니(재위 907-914) 치하에서 사만 왕조 궁정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타바타바이는 루다키가 907년 아버지 이스마일 사마니가 사망한 후 아흐마드 사마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시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루다키는 사마르칸트 근교의 루다크 마을 출신으로, 30대 후반에 사만 왕조의 재상 발아미에 의해 궁정에 초청받았다는 기록도 있다.[7]

사만 왕조 궁정에서의 루다키의 경력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궁정 시인의 역할은 단순한 오락 제공자를 넘어 페르시아 궁정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최초의 사산 왕조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242)는 시인을 "정부의 일부이자 통치를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인은 주군과 그의 영토를 찬양하는 것 외에도 조언과 도덕적 지침을 제공해야 했으며, 루다키 역시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루다키의 성공에는 그의 주요 후원자인 발라미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발라미는 10세기 페르시아 문학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루다키를 페르시아와 아랍 시인들 중 최고로 여겼다. 나스르 2세의 총애를 받은 루다키는 막대한 재산과 200명의 노예를 거느렸으며, 여행 시에는 400마리의 낙타에 짐을 싣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

루다키에 얽힌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나스르 2세에게 부하라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이야기이다. 헤라트에 머물던 나스르 2세가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하여 4년 이상 부하라로 돌아가지 않자, 군 지휘관들과 귀족들은 루다키에게 왕이 고향을 그리워하게 만들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루다키가 부하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를 읊자, 깊이 감동한 나스르 2세는 즉시 부하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고 한다.[13][14]

루다키는 사만 왕조의 저명한 시인이자 학자인 샤히드 발키와 가까운 친구이자 제자 사이였다. 936년 샤히드 발키가 사망하자, 루다키는 그를 기리는 애가를 썼다.

그러나 루다키의 경력은 937년 그의 후원자였던 발라미가 몰락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아미르의 신임을 잃고 궁정에서 해고되었다. 발라미의 실각 배경에는 궁정 내 이스마일파 개종자 증가 문제가 있었으며, 이 때문에 추방된 루다키를 이스마일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12]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의 학자 베르텔스는 후원자인 발라미와의 관계 때문에 루다키가 잠시 이스마일파에 기울었을 뿐, 그를 이스마일파 시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12] 결국 루다키는 후원자를 잃고 정치적 격변 속에서 궁정에서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11]

2. 3. 몰락과 죽음

루다키의 경력은 937년 그의 주요 후원자였던 재상 발라미가 실각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사만 왕조의 아미르 나스르 2세의 총애를 잃고 궁정에서 추방된 것으로 여겨진다.[11] 이후 루다키는 가난 속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940년 또는 941년에 고향인 루다크 마을에서 맹인이 되어 외롭게 사망했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펜지켄트에 있는 펜지 루다크 마을에 묻혔다.

과거 무함마드 아우피가 쓴 전기에 따라 루다키가 선천적으로 맹인이었다는 설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으나,[8] 현재는 부정되고 있다. 그의 시 내용과 1956년에 이루어진 유골 조사 결과는 그가 만년에 시력을 잃었음을 시사한다.[9]

1940년 타지크의 문학자 사드리딘 아이니는 중세 사료를 따라 루다키의 묘를 발견했으며,[15] 1956년 미하일 게라시모프가 이끄는 소비에트 연방 조사단이 유골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15]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루다키 연구자 미르조에프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정적들에 의해 강제로 눈이 멀게 되고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3]

3. 작품 활동 및 특징

루다키는 신 페르시아어로 작품을 쓴 최초의 주요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아사디 투시에 따르면 그의 ''디반''(시집)은 180,000 구절이 넘었지만 대부분 유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약 2,000 구절에 불과하다.[16] 현존하는 작품들은 주로 아사디 투시의 ''루가트-이 푸르스''(لغت فرس|루가트-이 푸르스fa)와 같은 페르시아어 사전이나 익명의 ''타리흐-이 시스탄''(تاریخ سیستان|타리크-에 시스탄fa) 같은 역사서에 인용된 형태로 전해진다.[17]

현존하는 루다키의 작품은 카시데 (송시), 가잘 (서정시), 마스나비 (서사시), 루바이야트 (4행시), 키타 (단편시) 등 페르시아 시의 주요 형식을 망라한다.[17] 이는 루다키가 활동하던 10세기까지 이미 페르시아 시의 다양한 형식이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16] 그의 시는 교훈, 슬픔, 향락, 사랑, 술 예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간결하고 정열적인 작풍으로 인해 시보다는 민요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10]

특히 루다키는 궁정 시인으로서 카시데에 능했으며, 포도가 술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술의 어머니"라는 제목의 시가 유명하다.[20] 또한, 923년부터 963년까지 시스탄 지역을 통치했던 사만 왕조의 총독 아부 자파르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에게 바친 카시데도 남아있다. 이 시에서 루다키는 아부 자파르를 사산 왕조의 후손이자 "이란의 자부심"으로 칭송하며 사산 왕조 시대부터 이어지는 이란 정체성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아부 자파르는 이 시에 대한 보답으로 루다키에게 10,000 디나르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사랑 노래에 즐겨 사용했던[21] 가잘 형식에서는 다채로운 비유를 통해 감정을 능숙하게 표현했다.[4] 11세기 시인 운수리는 루다키 가잘의 뛰어남을 칭송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가잘 작품은 대부분 유실되었다.[22]

루다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인도 우화 모음집인 ''칼릴라 와 딤나''의 운문화이다.[16] (자세한 내용은 #칼릴라와 딤나 참조)

루다키는 후대의 궁정 시인들과 달리 난해하고 화려한 아랍어 어휘 대신 소박한 페르시아어 어휘와 방언을 주로 사용하여 작품을 썼다.[19] 그의 시는 종교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으며, 이슬람적 요소보다는 고대 이란 및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을 환기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일부 작품은 이슬람 이전의 ''안다르'' 스타일, 즉 개인과 공공 생활에서의 올바른 행동에 대한 윤리적 가르침이나 조언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유실된 이유에 대해 이란의 언어학자 나와비는 시에 중앙아시아호라산 지역 방언이 많이 사용되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18]

루다키는 시를 짓는 능력 외에도 리라와 유사한 악기인 창을 연주하며 자신의 시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7] 하지만 만년에는 목소리가 쇠퇴하여 다른 사람의 시를 낭송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라비를 고용해야 했다고 전해진다.[23] 프랑스의 이란학자 길베르 라자르는 많은 마스나비를 남긴 아부-샤쿠르 발키를 루다키의 첫 번째 후계자로 간주했다.

3. 1. 칼릴라와 딤나

루다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인도의 설화 모음집인 『칼릴라 와 딤나』(کلیله و دمنه|칼릴라 와 디므나fa)를 페르시아어 운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 작품은 본래 『판차탄트라』에 기반을 두고 있다.[16] 사만 왕조의 아미르 나스르 2세는 재상 발아미에게 이 책을 아랍어에서 페르시아어 산문으로 번역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당시 시력을 잃었던 루다키는 "통역자"가 소리 내어 읽어주는 것을 듣고 이를 다시 운문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았다.

루다키가 운문으로 옮긴 『칼릴라 와 딤나』는 현재 대부분 유실되어 일부 구절만이 전해지고 있다.[16] 남아있는 구절 중 일부는 아사디 투시가 편찬한 페르시아어 사전인 『루가트-이 푸르스』(لغت فرس|루가트-이 푸르스fa)와 같은 후대의 문헌들을 통해 확인된다.

4. 평가 및 유산

루다키는 신 페르시아어로 작품을 쓴 최초의 주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비록 아부 하프스 수그디(902년 사망)처럼 그보다 먼저 신 페르시아어로 시를 쓴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작품 대부분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란에서는 루다키를 "신 페르시아 시의 창시자"로, 타지키스탄에서는 "타지크 문학의 아버지"로 여긴다. 이란학(Iranology) 학자 리처드 폴츠(Richard Foltz)는 이 두 평가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나일 그린(Nile Green)에 따르면 루다키는 "페르시아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이란학자 프랑수아 드 블로이스는 루다키가 "페르도우시 이전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 시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루다키는 사망 후 약 2세기 동안, 특히 몽골 제국(1219–1370) 시대 이전까지 큰 인기를 누렸으나, 당시 높은 수준의 시인들 사이에서는 그 인기가 다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잊히지 않았으며, 그의 이름으로 된 가짜 ''루다키 디반''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는 드 블로이스가 "악명 높은 문학 사기 중 하나"라고 지적한 사례이다. 17세기 학자 하산 이븐 루프트 알-라지나 19세기 레자-고리 칸 헤다야트 같은 학자들은 이 가짜 디반이 대부분 카트란 타브리지(1088년 이후 사망)의 시이며, 나머지는 타드키라(전기 사전)에 이미 알려진 루다키의 시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19세기 들어 루다키는 다른 고대 호라산 시인들과 함께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루다키의 삶은 사팀 울루그자데(1997년 사망)가 각본을 쓴 1957년 영화 ''시인의 운명''을 통해 그려졌다. 이듬해 울루그자데는 루다키를 주제로 한 희곡 ''루다키''를 발표했는데, 이는 타지크 최초의 전기 드라마로 평가받는다.

1958년, 루다키 탄생 1100주년을 맞아 이란과 당시 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는 양국의 저명한 학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 시기에 타지키스탄 판즈루드에 있는 루다키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소련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1970년 사망)는 루다키의 유해를 발굴하여 분석했고, 법의학적 안면 복원 기법을 통해 그의 얼굴을 복원하여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소련 붕괴 이후, 루다키는 타지크 국가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더욱 부각되었으며, 다른 페르시아어권 국가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5. 루다키의 묘

루다키는 현재의 펜지켄트에 있는 펜지 루다크 마을에 묻혔다. 1940년 타지크의 문학자 사드리딘 아이니는 중세 사료를 바탕으로 이곳에서 루다키의 묘를 발견했다. 이후 1956년 소비에트 연방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가 이끄는 조사단이 유골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15]

유골 조사 결과, 루다키는 만년에 시력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9] 루다키 연구자 미르조에프는 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루다키가 정적의 손에 의해 강제로 맹인이 된 후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3] 게라시모프는 발굴된 유해를 분석하여 법의학적 안면 복원 기법을 통해 루다키의 얼굴을 조각상으로 재현했다.

타지키스탄의 펜지켄트에 세워진 루다키 묘

참조

[1]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2]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3]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4] 간행물 岩波イスラーム辞典
[5]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6]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7]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8] 서적 ペルシアの詩人たち
[9] 서적 ペルシアの詩人たち
[10] 간행물 アジア歴史事典
[11] 서적 및 간행물 中央アジア歴史群像, アジア歴史事典
[12]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13]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14]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15]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16]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17]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18] 서적 ペルシアの詩人たち
[19] 서적 ペルシアの詩人たち
[20] 서적 ペルシア文芸思潮
[21]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22] 서적 ペルシアの詩人たち
[23] 서적 中央アジア歴史群像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