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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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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은 프로이센의 군인으로, 1759년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이센 육군에서 복무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 중 타우로겐 협약을 통해 프로이센 군단을 중립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프로이센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이후 원수 계급을 받았고 백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요르크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과 유산을 남겼으며, 19세기 말 철학자 파울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와 독일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던 페터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의 선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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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른스트 게바우어의 초상화, 1835년
에른스트 게바우어가 그린 초상화, 1835년
존칭그라프(Graf)
본명요한 다비트 루트비히 폰 요르크
출생일1759년 9월 26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포츠담
사망일1830년 10월 4일
사망지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실레지아 지방 올레시니차 마와 (현재의 폴란드 실레지아 주 올레시니차 마와)
소속
복무 기간1772년–1779년
1782년–1785년
1785년/1786년–1821년
최종 계급야전원수(프로이센)
대위(네덜란드)
서명
주요 참전 전투/전쟁
훈장

2. 가문 및 초기 생애

요르크 가문은 포메라니아 지방의 카슈브인 출신이다.[1] 요르크의 조상 얀 야르카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그로스 구스트코프의 작은 영지 출신이었다.[1] 그의 아버지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는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지방의 로베(현재 로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1]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는 프러시아군에서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에서 대위로 복무했다.[1] 요르크의 어머니 마리아 소피아 플루크는 포츠담 장인의 딸이었다.

요르크의 아버지는 이름을 "야르크(a)"에서 "요르크"로 변경하여 더 영국식(요크)으로 만들었고, "폰 고스트코프스키"를 삭제했다. 이는 귀족 출신임을 나타내는 "스키" 부분을 없애고, 좀 더 영국식으로 보이기 위함이었다.

루트비히 요르크는 1759년 포츠담에서 프러시아군의 대위였던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와 포츠담 직인의 딸인 마리아 조피아 플루크의 비적자로 태어났다. 1763년, 부모는 요르크가 4세 때 결혼했다.

2. 1. 가문의 기원

요르크 가문은 포메라니아 지방의 카슈브인 출신이다.[1] 요르크의 조상 얀 야르카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그로스 구스트코프의 작은 영지 출신이었다.[1] 그의 아버지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는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지방의 로베(현재 로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1]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는 프러시아군에서 프리드리히 대왕 아래에서 대위로 복무했다.[1] 요르크의 어머니 마리아 소피아 플루크는 포츠담 장인의 딸이었다.[1]

요르크의 아버지는 이름을 "야르크(a)"에서 "요르크"로 변경하여 더 영국식(요크)으로 만들었고, "폰 고스트코프스키"를 삭제했다.[1]

2. 2. 출생 및 유년 시절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은 1759년 포츠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다비트 요나탄 폰 요르크는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지방의 로베(현재 로비, 폴란드) 출신으로, 프러시아군에서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의 대위로 복무했다. 요르크의 어머니 마리아 소피아 플루크는 포츠담 장인의 딸이었다. 요르크의 부모는 1763년에 결혼했다. 요르크의 아버지는 원래 "야르크(a)"였던 이름을 "요르크"로 바꾸고 "폰 고스트코프스키"를 삭제했는데, 이는 이름을 더 영국식(요크)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버지인 얀 야르카는 루터교 목사였으며, 그의 가문은 포메라니아 카슈브인의 후손으로 그로스 구스트코프의 작은 영지 출신이었다.

3. 프로이센 군 복무

요르크는 1772년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1777년에 소위 계급에 올랐다.[2] 그러나 7년 복무 후, 1779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중 상관을 약탈 혐의로 비난하며 복종 거부로 면직되었다.[2]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프리드리히스부르크 요새에 1년 동안 갇혔으며, 이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재고용을 거부했다.[2]

요르크는 프로이센을 떠나 1781년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스위스 용병에 합류하여 레기멘 드 메론의 대위로 동인도에서 1783~84년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영국군과의 전투에 프랑스군과 함께 참전했다.[2] 1786년 포츠담으로 돌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 의해 육군에 복귀하여 1792년부터 소령 계급을 받았다.[2] 1794/95년에 그는 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작전에 참여하여 특히 슈체코치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99년부터 요르크는 경기병 (예거) 연대 지휘관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최초로 산병 훈련을 강조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1805년 그는 ''대령'' 계급으로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작센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선봉 부대로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비참했던 예나 작전에서 그는 눈에 띄고 성공적인 후위 지휘관이었으며, 특히 알텐자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엘베 강과 하르츠 산맥을 건넌 후 그는 뤼베크에서 블뤼허 군단의 마지막 저항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프로이센 군의 재편에서 요르크는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서프로이센 여단을 지휘하는 소장으로, 이후 경기병 감찰관으로, 마지막으로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이센이 파견해야 했던 보조 군단의 지휘관인 그라베르트 장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두 장군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는데, 그라베르트는 프랑스 동맹의 공개적인 지지자였고, 요르크는 열렬한 프로이센 애국자였지만, 그라베르트는 곧 은퇴했고 요르크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리가로 진격하는 동안 러시아의 슈테인겔 장군에 의해 저지당한 요르크는 적이 리가로 후퇴하는 일련의 전투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작전 기간 내내 그는 적의 장군들로부터 많은 제안을 받았고, 지금까지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곧 프랑스 대군이 멸망할 운명임을 깨달았다. 그의 직접적인 프랑스 상급자인 맥도날 원수는 디비츠 군단 앞에서 후퇴했고, 요르크는 고립되었다. 군인으로서 그의 의무는 돌파하는 것이었지만, 프로이센 애국자로서 그의 입장은 더 어려웠다. 그는 프로이센 해방 전쟁을 위한 시기가 유리한지 판단해야 했고, 그의 부하 참모 장교들의 열정이 어떠하든, 요르크는 자신의 안전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2월 20일, 이 장군은 결정을 내렸다.

디비츠와 요르크가 그들의 국왕의 동의 없이 서명한 타우로겐 협약 휴전은 프로이센 군단을 "중립"으로 선언했다. 이 소식은 격렬한 열광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프로이센 궁정은 아직 가면을 벗지 못했고, 요르크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지휘권을 정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디비츠는 전령이 자신의 선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고, 칼리쉬 조약이 프로이센을 동맹국 편으로 배치했을 때 이 장군은 마침내 면죄되었다. 요르크의 행동은 프로이센 역사의 전환점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베테랑들은 동프로이센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고, 요르크 자신은 그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마지막 조치를 취했다.

1813년 3월 17일, 요르크는 애국심에 넘치는 격렬함 속에서 베를린에 입성했다. 같은 날, 국왕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1813-14년 동안 요르크는 그의 베테랑들을 이끌고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바우첸 전투 후 블뤼허의 후퇴를 엄호했고 카츠바흐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이프치히로 진격하면서 그의 군단은 바르텐부르크 (10월 3일)에서 승리했고 10월 18일 국가들의 전투의 대관 승리에 참여했다. 프랑스 원정에서 요르크는 오스텐-자켄 군단의 산산이 부서진 잔재를 몽미라이유에서 철수시켰고 라옹에서 승리를 결정지었다.

파리 점령은 요르크의 마지막 전투였다. 1815년 작전에서는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가 구 왕자의 사망 시 지휘권을 맡을 수 있도록, 블뤼허 군대에는 더 이상 노장들이 고용되지 않았다. 요르크는 프로이센의 예비 군단에 임명되었고, 그의 봉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 육군에서 은퇴했다. 그의 주군은 상당 기간 동안 그의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1821년 그를 원수로 임명했다. 그는 1814년에 ''백작''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가 되었다. 그의 여생은 왕의 선물인 실레시아의 올레시니차 마와 (현재 폴란드)에 있는 그의 영지에서 보냈다.

3. 1. 초기 군 복무

요르크는 1772년 프로이센 육군에 사관후보생병장 (Gefreitenkorporal)으로 입대하여, 1777년에 소위가 되었다.[2] 1779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중 상관을 약탈 혐의로 비난하며 복종 거부로 면직되었다.[2]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프리드리히스부르크 요새에 1년 동안 갇혔으며, 이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재고용을 거부했다.[2]

요르크는 프로이센을 떠나 1781년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스위스 용병에 합류하여 레기멘 드 메론의 대위로 동인도에서 1783~84년 작전에 참여했고, 케이프타운에서 영국군과의 전투에 프랑스군과 함께 참전했다.[2] 1786년 포츠담으로 돌아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죽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 의해 육군에 복귀하여 1792년부터 소령 계급을 받았다.[2] 1794/95년에 그는 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작전에 참여하여 슈체코치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99년부터 요르크는 경기병 (예거) 연대 지휘관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최초로 산병 훈련을 강조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1805년 그는 ''대령'' 계급으로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중 작센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의 선봉 부대로 보병 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예나 작전에서 그는 알텐자운에서 성공적인 후위 지휘관으로 활약 했으며, 뤼베크에서 블뤼허 군단의 마지막 저항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3. 2. 네덜란드 군 복무 및 프로이센 복귀

요르크는 1772년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여 1777년에 소위 계급에 올랐다.[2] 1779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중 상관을 약탈 혐의로 비난하고 복종을 거부하여 면직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 프리드리히스부르크 요새에 1년 동안 갇혔다.[2]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재고용을 거부했다.[2]

1781년 요르크는 프로이센을 떠나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스위스 용병에 합류, 레기멘 드 메론의 대위로 동인도에서 복무했다.[2]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영국군과의 전투에 프랑스군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2] 1786년 포츠담으로 돌아온 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망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 의해 육군에 복귀하여 1792년부터 소령 계급을 받았다.[2] 1794/95년에 그는 코시치우슈코 봉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작전에 참여하여 슈체코치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3. 3. 나폴레옹 전쟁에서의 활약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요르크는 프로이센 군 보조 군단의 지휘관이었다. 그의 프랑스군 상관 맥도날 원수가 디비츠 군단 앞에서 후퇴하면서 요르크는 고립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의무는 돌파하는 것이었지만, 프로이센 애국자로서 그는 프로이센 해방 전쟁을 위한 시기가 유리한지 판단해야 했다. 12월 20일, 요르크는 결정을 내렸다.[2]

디비츠와 요르크는 그들의 국왕의 동의 없이 타우로겐 협약 휴전을 체결, 프로이센 군단을 "중립"으로 선언했다.[2] 이 소식은 프로이센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프로이센 궁정은 요르크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지휘권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디비츠는 전령의 통과를 거부했고, 칼리쉬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동맹국 편에 서면서 요르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2] 요르크의 행동은 프로이센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베테랑들은 동프로이센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고, 요르크 자신은 그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마지막 조치를 취했다.[2]

1812년이 되자 요르크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율리우스 폰 그라베르트의 후임으로, 자크 마크도날 장군의 제10군에 참전하여 러시아 원정에 참전해야 했던 프로이센 군 지원 부대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대륙군의 철수에 따라 후위를 맡아, 동군과의 접촉을 잃는다. 지휘 하의 장교들의 재촉에, 그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러시아의 디비치 장군과 타우로겐 협약을 체결하여 부대를 중립화했다.

이로 인해, 요르크는 직을 걸었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도 러시아 측과 마찬가지로 이 판단을 지지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휴전이 전해지자, 그것은 동프로이센에서 시작하여, 북독일 제국 내 프랑스 지배에 대한 공공연한 봉기로 이어졌다. 요르크 자신은 동프로이센 금융 총관리부 건물에서, 자신의 책임 하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프로이센 각 계층 출신에 의한 란트베어 설립을 포고하고, 그 의지를 관철했다. 이미 2월에는, 국왕도 이 움직임에서 거리를 둘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한 위원회가 타우로겐 협정을 확인하고, 독단과 비난을 받는 요르크의 행위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 해방 전쟁 ===

1813년 3월 17일, 요르크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뒤로 하고 베를린에 입성했다. 같은 날, 국왕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1813-14년 동안 요르크는 자신의 베테랑들을 이끌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3] 바우첸 전투 후 블뤼허의 후퇴를 엄호했고 카츠바흐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라이프치히로 진격하면서 그의 군단은 바르텐부르크 (10월 3일)에서 승리했고 10월 18일 국가들의 전투에 참여했다.[3] 프랑스 원정에서 요르크는 몽미라이유에서 오스텐-자켄 군단의 잔재를 구출했고 라옹에서 승리했다.[3]

해방 전쟁에서 요르크는 비트겐슈타인 중장의 지휘 하에 그로스게르센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블뤼허 지휘 하의 슐레지엔 군에 배속되어 카츠바흐 전투를 결의하고, 1813년 10월 3일 베르트랑 장군과 대치하며, 블뤼허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엘베강 도하 작전이었던 바르텐부르크 전투에 참여했다.

이어진 라이프치히에서의 제국민족전투에서도, 요르크는 뫼케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0월 20일, 그는 프랑스 군을 운슈트루트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814년 1월 1일, 요르크는 보병대장으로서 카우프에서 라인강을 건너, 2월 11일 러시아군을 몽미라이유 전투에서 구했다. 3월 9일 라옹 전투에서는 공세를 맡아, 승리에 기여했다. 3월 30일부터 31일에 걸쳐, 그가 마지막으로 참가한 것은 파리 전투였다. 그리고 3월 31일, 대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3. 3. 1. 타우로겐 협약

요르크는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프로이센 군 보조 군단의 지휘관이었다. 그의 프랑스군 상관 맥도날 원수이 디비츠 군단 앞에서 후퇴하면서 요르크는 고립되었다. 군인으로서의 의무는 돌파하는 것이었지만, 프로이센 애국자로서 그는 프로이센 해방 전쟁을 위한 시기가 유리한지 판단해야 했다. 12월 20일, 요르크는 결정을 내렸다.[2]

디비츠와 요르크는 그들의 국왕의 동의 없이 타우로겐 협약 휴전을 체결, 프로이센 군단을 "중립"으로 선언했다.[2] 이 소식은 프로이센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프로이센 궁정은 요르크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해 지휘권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디비츠는 전령의 통과를 거부했고, 칼리쉬 조약으로 프로이센이 동맹국 편에 서면서 요르크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2] 요르크의 행동은 프로이센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베테랑들은 동프로이센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고, 요르크 자신은 그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마지막 조치를 취했다.[2]

1812년이 되자 요르크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율리우스 폰 그라베르트 대장의 후임으로, 자크 마크도날 장군의 제10군에 참전하여 러시아 원정에 참전해야 했던 프로이센 군 지원 부대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대륙군의 철수에 따라 후위를 맡아, 동군과의 접촉을 잃는다. 지휘 하의 장교들의 재촉에, 그는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러시아의 디비치 장군과 타우로겐 협정을 체결하여 부대를 중립화했다.

이로 인해, 요르크는 직을 걸었다. 그러나 주변 인물들도 러시아 측과 마찬가지로 이 판단을 지지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휴전이 전해지자, 그것은 동프로이센에서 시작하여, 북독일 제국 내 프랑스 지배에 대한 공공연한 봉기로 이어졌다. 요르크 자신은 동프로이센 금융 총관리부 건물에서, 자신의 책임 하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동프로이센 각 계층 출신에 의한 란트베어 설립을 포고하고, 그 의지를 관철했다. 이미 2월에는, 국왕도 이 움직임에서 거리를 둘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한 위원회가 타우로겐 협정을 확인하고, 독단과 비난을 받는 요르크의 행위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화가 오토 브라우제베터는 이 포고를 유명한 회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요르크 백작의, 동프로이센 각 계층에 대한 1813년 2월 5일 호소』(Ansprache des Grafen Yorck vor den ostpreußischen Ständen in Königsberg am 5. Februar 1813)에 담았다.

3. 3. 2. 해방 전쟁

1813년 3월 17일, 요르크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뒤로 하고 베를린에 입성했다. 같은 날, 국왕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1813-14년 동안 요르크는 자신의 베테랑들을 이끌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3] 바우첸 전투 후 블뤼허의 후퇴를 엄호했고 카츠바흐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라이프치히로 진격하면서 그의 군단은 바르텐부르크 (10월 3일)에서 승리했고 10월 18일 국가들의 전투에 참여했다.[3] 프랑스 원정에서 요르크는 몽미라이유에서 오스텐-자켄 군단의 잔재를 구출했고 라옹에서 승리했다.[3]

해방 전쟁에서 요르크는 비트겐슈타인 중장의 지휘 하에 그로스게르센 전투와 바우첸 전투에 참가했다. 또한 블뤼허 지휘 하의 슐레지엔 군에 배속되어 카츠바흐 전투를 결의하고, 1813년 10월 3일 베르트랑 장군과 대치하며, 블뤼허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엘베강 도하 작전이었던 바르텐부르크 전투에 참여했다.

이어진 라이프치히에서의 제국민족전투에서도, 요르크는 뫼케른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0월 20일, 그는 프랑스 군을 운슈트루트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814년 1월 1일, 요르크는 보병대장으로서 카우프에서 라인강을 건너, 2월 11일 러시아군을 몽미라이유 전투에서 구했다. 3월 9일 라옹 전투에서는 공세를 맡아, 승리에 기여했다. 3월 30일부터 31일에 걸쳐, 그가 마지막으로 참가한 것은 파리 전투였다. 그리고 3월 31일, 대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4. 말년 및 유산

요르크는 여러 번의 퇴역 신청 끝에 1815년에 군에서 물러났다. 1821년 5월 5일 원수로 진급하였으며, 1830년 10월 4일 실레시아의 올레시니차 마와(클라인-욀스)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사망했다. 이 농장은 과거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 수도회 관구였으며, 1814년 3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그에게 "폰 바르텐부르크" 백작 작위와 함께 하사한 것이었다.

요르크는 끈기 있게 목표를 추구하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새겨진 로 만들어진 남자" 또는 "늙은 이제그림[3]"이라고 불렀다. 그는 부대 복지에 헌신하여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블뤼허 및 그나이제나우의 가차없는 전략에는 반대했다. 그는 독단적인 지휘관이자 다루기 어려운 부하로 알려져 있었다.

요르크는 19세기 말 철학자 파울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의 증조부였으며, 나치 독일 시대에 독일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던 페터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의 고손증조부였다.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을 기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명명되었다.


  •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의 론급 장갑순양함인 요르크.
  • 요르크 행진곡
  • 베를린의 "요르크 거리" - 이외에도 생가가 있는 포츠담을 비롯한 다수의 도시에 동명의 거리가 존재한다.
  • 플랑겐도르프의 "요르크 백작 병영"(Graf-Yorck-Kaserne) - 제21 대공 미사일 군이 주둔한다.
  • 베저베르크란트의 슈타트올덴도르프에 있는 "요르크 병영"(Yorck-Kaserne)에는 제15 장갑 포병 대대 등 기타 부대가 주둔한다.
  • 각지의 요르크 기념비


UFA(1931년): 영화 『요르크』, 구스타프 우치츠키 감독 작품. 베르너 크라우스가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를, 루돌프 포르스터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구스타프 그뤼트겐스가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공작을 연기했다.

4. 1. 은퇴 및 사망

요르크는 여러 번의 퇴역 신청 끝에 1815년에 군에서 물러났다. 1821년 5월 5일 원수로 진급하였으며, 1830년 10월 4일 실레시아의 올레시니차 마와(클라인-욀스)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사망했다. 이 농장은 과거 성 요한 기사단의 기사 수도회 관구였으며, 1814년 3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그에게 "폰 바르텐부르크" 백작 작위와 함께 하사한 것이었다.

요르크는 끈기 있게 목표를 추구하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새겨진 로 만들어진 남자" 또는 "늙은 이제그림[3]"이라고 불렀다. 그는 부대 복지에 헌신하여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블뤼허 및 그나이제나우의 가차없는 전략에는 반대했다. 그는 독단적인 지휘관이자 다루기 어려운 부하로 알려져 있었다.

4. 2. 유산

요르크는 19세기 말 철학자 파울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의 증조부였으며, 나치 독일 시대에 독일 저항 운동의 일원이었던 페터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의 고손증조부였다.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을 기려 다음과 같은 것들이 명명되었다.

  • 독일 제국 해군(Kaiserliche Marine)의 론급 장갑순양함인 요르크.
  • 요르크 행진곡
  • 베를린의 "요르크 거리" - 이외에도 생가가 있는 포츠담을 비롯한 다수의 도시에 동명의 거리가 존재한다.
  • 플랑겐도르프의 "요르크 백작 병영"(Graf-Yorck-Kaserne) - 제21 대공 미사일 군이 주둔한다.
  • 베저베르크란트의 슈타트올덴도르프에 있는 "요르크 병영"(Yorck-Kaserne)에는 제15 장갑 포병 대대 등 기타 부대가 주둔한다.
  • 각지의 요르크 기념비


UFA(1931년): 영화 『요르크』, 구스타프 우치츠키 감독 작품. 베르너 크라우스가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를, 루돌프 포르스터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구스타프 그뤼트겐스가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공작을 연기했다.

5. 평가

5.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5. 2.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참조

[1] 서적 Vaterländisches Archiv für Wissenschaft, Kunst, Industrie und Agrikultur https://books.google[...]
[2] 웹사이트 York von Wartenburg, Hans David Ludwig Graf - Deutsche Biographie https://www.deutsche[...] 2022-01-12
[3] 서적 Isegrim
[4] 웹사이트 映画に関する情報 http://www.imdb.d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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