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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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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시대의 그리스는 로마 공화정 시대에 로마에 정복되어 마케도니아는 속주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는 부분적인 자율성을 유지했다. 기원전 88년 아테네 등 도시 국가들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로마 내전 이후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아카이아 속주로 재편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는 코린토스가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고, 아테네는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팍스 로마나 시대에 그리스는 번영을 누렸다. 3세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과 이민족의 침입을 겪었지만,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남아 번영을 이어갔다.

2. 로마 공화정 시대 (기원전 146년 ~ 기원전 27년)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6]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그리스 남부 또한 로마의 영향권에 놓였다. 그러나 일부 주요 그리스 도시 국가(폴리스)는 부분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며 로마로부터 직접적인 세금 징수를 면제받았다.

2. 1. 로마의 그리스 지배

기원전 2세기 로마의 고대 그리스 정복


그리스 반도는 코린토스 전투 (기원전 146년)에서 로마 공화국에 넘어가, 마케도니아는 로마 속주가 되었다. 한편, 남부 그리스 역시 로마의 패권 아래 놓였지만, 일부 핵심적인 그리스 폴레이스는 부분적인 자율성을 유지했으며 로마의 직접적인 조세 징수를 피했다.

1870년경, 토마스 알롬의 코린토스 약탈


기원전 88년, 아테네와 다른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로마 내전 동안, 그리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에 반도를 아카이아 속주로 조직하기 전까지 물리적, 경제적으로 황폐해졌다. 초기에 로마의 그리스 정복은 경제에 타격을 입혔지만, 전후 기간 로마의 통치하에 쉽게 회복되었다. 게다가,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술라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반도 그리스의 도시들보다 로마 정복에서 더 빠르게 회복되었다.

로마 제국으로서, 로마는 자원을 투자하고 로마 그리스의 도시들을 재건했으며, 코린토스를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로 정했고, 아테네는 철학, 교육 및 학문적 지식의 문화 중심지로 번성했다.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제정을 시작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본토에 속주아카이아를 설치했다. 기원전 146년에는 크레타 섬은 속주 키레나이카의 일부가 되었다. 각 폴리스는 속주 내 지방 도시로 존속했다.

3. 로마 제정 초기 (기원전 27년 ~ 서기 3세기)

아테네에 위치한 로마 포룸


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리스의 생활은 이전과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호라티우스의 "그리스 점령자가 무례한 정복자를 잡았습니다."라는 말처럼, 로마 문화는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8]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영감을 주었고, 세네카와 같은 작가들은 그리스 문체를 사용하여 글을 썼다. 일부 로마 귀족들은 그리스인들을 뒤떨어지고 하찮게 여겼지만, 많은 이들은 그리스 문학철학을 받아들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같이, 그리스어는 철학을 공부하고 그리스 문화와 과학을 모범으로 삼았던 로마 엘리트층에게 선호되는 언어가 되었다.

로마 황제 네로는 서기 66년 그리스를 방문하여 비(非)그리스인의 참가를 금지하는 규칙에도 불구하고 고대 올림픽에서 공연했다. 그는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여 영광을 얻었고, 이듬해 코린토스의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선포했는데, 이는 플라미니누스가 200년 전에 했던 것과 같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그의 그리스 애인 안티노스, 바르톨로메오 피넬리 작, 약 181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테네에 로마 아고라 건설을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완공했다. 주 출입구인 아테나 아르케게티스 문은 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에게 헌정되었다. 아그리페이아는 아테네 고대 아고라의 중앙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 의해 건설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필헬레니즘을 추구하여 아테네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을 짓고 아테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건설을 완공했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지었다.

팍스 로마나는 그리스 역사상 가장 긴 평화 시기였으며, 그리스는 로마와 제국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 절반 사이의 해상 무역의 주요 교차로가 되었다. 그리스어는 동부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갈레노스와 같은 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수행했다.

이 시기 그리스와 로마 제국 동부는 초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타르수스에서 빌립보, 코린토스, 아테네에서 설교했으며, 테살로니카는 곧 제국에서 가장 기독교화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제정을 시작한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본토에 속주아카이아를 설치했다.

3. 1. 로마의 통치와 그리스의 회복

기원전 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로마 공화국이 승리하면서 그리스 반도는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남부 그리스 역시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였지만, 일부 핵심적인 그리스 ''폴레이스''는 부분적인 자율성을 유지하며 로마의 직접적인 세금 징수를 피했다.[6]

기원전 88년,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로마 내전 기간 동안 그리스는 물리적,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7년에 그리스 반도를 아카이아 속주로 재편하면서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초기에 로마의 그리스 정복은 경제에 타격을 주었지만,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빠르게 회복되었다.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술라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그리스 반도의 도시들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도시 재건에 자원을 투자했고, 코린토스를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로 삼았다. 아테네는 철학, 교육, 학문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곡물 분배와 각 도시에 화폐 주조 특권을 인정하는 등 그리스 부흥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또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 시민과 주변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했으며, 그리스인 중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네로,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여 아테네의 도시 정비를 지원하고, 건축물과 신전을 정비하고 수리했다. 특히 하드리아누스는 아테네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을 건설하고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건설을 완공했다. 많은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방문하면서 그리스의 여러 도시는 문화 관광 도시로 발전했다.

팍스 로마나 시기에 그리스는 로마와 제국의 동부를 잇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리스어는 동부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갈레노스와 같은 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했다.

라파엘로 작,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성 바울, 약 1515년


이 시기에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은 초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바울은 빌립보, 코린토스, 아테네 등지에서 설교했고, 테살로니카는 곧 기독교화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는 문화적으로도 로마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플루타르코스는 『비교 열전』을, 스트라본은 『지리誌』를 저술했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정복당한 그리스인은 사나운 로마를 정복했다 (Graecia capta ferum victorem cepitla)"라는 말을 남겼다.[8]

3. 2. 로마와 그리스의 문화적 교류

"정복당한 그리스인은 사나운 로마를 정복했다."라는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로마 문화는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8]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영감을 주었고, 세네카 같은 작가들은 그리스 문체를 사용하여 글을 썼다. 일부 로마 귀족들은 그리스인들을 뒤떨어지고 하찮게 여겼지만, 많은 이들은 그리스 문학철학을 받아들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같이, 그리스어는 철학을 공부하고 그리스 문화와 과학을 모범으로 삼았던 로마 엘리트층에게 선호되는 언어가 되었다.

로마 황제 네로는 서기 66년 그리스를 방문하여 고대 올림픽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필헬레니즘을 추구하여 아테네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을 짓고 아테네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 건설을 완공했다. 아테네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지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테네에 로마 아고라 건설을 시작했고,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완공했다. 주 출입구인 아테나 아르케게티스 문은 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에게 헌정되었다. 아그리페이아는 아테네 고대 아고라의 중앙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에 의해 건설되었다.

팍스 로마나 시기에 그리스는 로마와 제국 동부를 잇는 해상 무역의 주요 교차로가 되었고, 그리스어공용어 역할을 했다. 갈레노스와 같은 많은 그리스 지식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했다.

아우구스투스내전으로 피폐해진 그리스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러 정책을 취했다. 그리스인 중에서도 로마 시민권을 얻는 자들이 나타났다. 네로, 하드리아누스 같은 로마 황제들은 아테네 도시 정비를 지원하고 건축물과 신전을 정비했다. 많은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방문했고, 그리스 도시들은 문화 관광 도시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 스트라본 등 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로마에서 활동하며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 3. 그리스의 종교

이 시기 그리스와 로마 제국 동부는 초기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필리피, 코린토스, 아테네에서 설교했고, 테살로니키는 곧 제국에서 가장 기독교화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8]

4. 로마 제정 후기 (3세기 ~ 5세기)

3세기 군인 황제 시대에 로마 제국이 약화되면서, 그리스는 고트족, 헤룰리족 등 이민족의 침략과 약탈을 받았다. 253년 테살로니키가 습격당했으며, 이후 아르고스, 아테네 등이 헤룰리족에게 잇따라 습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치세 동안 그리스는 헤룰리족, 고트족, 반달족의 침략에 직면했다. 4세기 말 서고트족이 침략했을 때 스틸리코는 테살리아를 대피시켰다. 에우트로피우스는 알라릭 1세가 그리스에 진입하도록 허락했고, 그는 아테네, 코린토스,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약탈했다. 스틸리코는 397년경 그를 몰아냈고 알라릭은 일리리쿰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되었다. 결국, 알라릭과 고트족은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410년에 로마를 약탈하고 이베리아 반도에 서고트 왕국을 건설했는데, 이 왕국은 아랍의 출현과 함께 711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스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거의 천 년 동안 로마 제국의 비교적 일관되고 강력한 동부 절반인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일부로 남아 그 중심지가 되었다.

후기 고대에 대한 낡은 시각과는 달리, 그리스 반도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빈곤, 인구 감소, 야만족의 파괴, 내전의 쇠퇴에 대한 오래된 시나리오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비추어 수정되었다.[7] 실제로, 제도적 폴리스는 적어도 6세기까지 번영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에로클레스의 "신덱모스"와 같은 동시대 텍스트는 후기 고대 그리스가 고도로 도시화되었으며 약 80개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한다.[7] 이러한 극심한 번영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원후 4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그리스는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활발한 지역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7]

4. 1. 로마 제국의 분열과 그리스

2세기와 3세기에 그리스는 아카이아 속주, 마케도니아 속주, 에페이로스, 트라키아를 포함한 속주로 나뉘었다.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동안 모이시아는 교구로 조직되었고 갈레리우스가 통치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아래에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프라이펙처의 일부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케도니아 프라이펙처를 크레타, 아카이아, 테살리아, 에페이루스 베투스, 에페이루스 노바, 마케도니아 속주로 나누었다. 에게해 섬들은 아시아 교구의 인술라이 속주를 형성했다.[9]

4. 2. 이민족의 침입과 비잔티움 제국의 등장

4세기 말 서고트족이 그리스를 침략하자 아르카디우스의 섭정 스틸리코는 테살리아를 피난시켰다.[9] 아르카디우스의 신하 에우트로피우스는 알라리쿠스가 그리스에 진입하게 내버려둬서 그는 아테네, 코린토스, 펠로폰네소스를 약탈했다.[9] 397년 결국 스틸리코는 그를 물리쳤고, 알라리쿠스는 일리리쿰의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으로 임명되었다.[9] 그러나 410년 알라리쿠스와 고트족은 이탈리아로 넘어가 로마를 약탈했으며, 이베리아와 프랑스 남부에 서고트 제국을 세워서 711년 아랍인이 진출할 때까지 존속했다.

알라릭이 아테네에 입성하는 모습, 앨런 스튜어트 그림, 약 1915년


그리스는 비교적 통합 상태를 유지한 동부 제국의 일부로 남았으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고대사 후기에 대한 낡은 시각과는 달리 그리스 반도는 로마 제국에서 매우 번영하는 지역이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이 시기 그리스가 빈곤, 인구 감소, 이민족 침입으로 인한 파괴, 사회 부패와 같은 예전의 가설을 바꾸게 되었다.[9] 사실 그리스의 폴리스는 일개 사회 체제로서 최소 6세기까지도 번영하는 지역이었던 것 같다. 히에로클레스의 '신데크모스'(Syndekmos) 등 당대의 기록은 고대 시대 후기의 그리스가 매우 도시화되었으며, 80여개의 도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9] 오늘날 이 시기 그리스가 매우 번영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원후 4세기에서 7세기까지 그리스는 동부 지중해에서 경제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5. 중세 초기 (5세기 이후)

7세기 초, 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제국의 공식 언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변경했다. 지중해 동부 절반은 항상 그리스어가 우세했기 때문에, 라틴 서부 절반의 멸망 이후 로마 제국의 동부 절반은 점차 헬라화되었다. 그 후 수세기 동안, 그리스 본토는 주로 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 사이에서 다투어졌으며, 슬라브족과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고통받았다. 크레타키프로스는 로마인과 아랍인 사이에서 다투어졌고, 나중에는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트라키아와 그리스에 라틴 제국을 세운 십자군에게 넘어갔다.[7] 로마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고 그리스 반도의 대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했지만, 에페이루스는 14세기 초까지 독립적인 분열 국가로 남아 있었다. 제국 내에서 내전이 격화되면서 세르비아 제국은 기회를 틈타 그리스 본토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부활한 불가리아 제국은 북쪽에서 침략해 왔다. 그 후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에서 지배력을 확립하여 세 제국을 모두 합병했으며, 1460년 모레아의 함락으로 그리스 정복을 완료했다.

참조

[1] 서적 The Hellenistic world from Alexander to the Roman conquest : a selection of ancient sources in translation http://worldcat.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2] 서적 Taken at the flood: the Roman conquest of Greece http://worldcat.org/[...]
[3] 간행물 Until the Roman Conquest, 272–146 http://dx.doi.org/10[...] I.B.Tauris 2021-07-11
[4] 서적 A history of Greece, from its conquest by the Romans to the present time B.C. 146 to A.D. 1864 http://worldcat.org/[...] Hansebooks 2017
[5] 웹사이트 Hellenistic Age https://www.britanni[...] 2013-05-27
[6] 웹사이트 Horace – Wikiquote https://en.wikiquote[...] 2018-04-27
[7] 문서
[8] 웹인용 Horace – Wikiquote https://en.wikiquote[...] 2018-04-27
[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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