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윌리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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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처드 윌리엄슨은 1940년 영국에서 태어난 가톨릭 주교로,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주의자로 활동했다. 1976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88년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로 서품되어 파문되었다. 2009년 파문이 철회되었으나, 홀로코스트 부정 및 반유대주의적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고, 2012년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이후에도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 서품을 강행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음모론과 여성관에 대한 논란도 있다.

리처드 윌리엄슨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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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리처드 윌리엄슨은 1940년 3월 8일 영국 버킹엄셔 주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유복한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의 패션 소매기업인 막스 앤 스펜서의 바이어였다. 윈체스터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클레어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아프리카 가나의 대학교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65년 영국으로 돌아와 1970년까지 런던의 사립 고등학교인 성 바울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윌리엄슨은 원래 성공회 신자였으나 1971년 가톨릭으로 회심했다. 성 비오 10세회에 가입하여,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신학교에 입학했다. 1976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받았다. 이후, 미국 코네티컷주 리지필드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와 미네소타주 위노나에서 교편을 잡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1988년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다른 3명의 소속 사제와 함께 주교로 서품되었지만, 교황청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동 파문을 선언받았다. 에클레시아 데이 위원회의 총책임자 다리오 카스티리온 호요스 추기경은, 이것이 비록 정식으로 이단은 아니더라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라고 말했다.

2009년 1월 21일, 교황청은 그를 포함한 4명의 주교의 파문을 철회했다. 하지만, 그 후 이어진 그의 다방면에 걸친 문제 행동에 대해 성 비오 10세회는 징계를 결정, 2012년 10월 24일, 동회 총장 베르나르도 페레는, 그의 동회에서의 추방을 선언했다. 같은 해 11월, 그는 "성 마르셀 이니셔티브"(The St. Marcel Initiative)의 결성을 발표했다.

2.1. 초기 생애

리처드 윌리엄슨은 1940년 3월 8일 영국 버킹엄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의 패션 소매기업인 막스 앤 스펜서의 바이어였고, 어머니는 유복한 미국인이었다. 윌리엄슨은 세 아들 중 둘째였다.

윌리엄슨은 윈체스터 칼리지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에서 영문학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가나의 한 대학에서 잠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65년 9월, 영국으로 돌아와 1970년까지 런던의 성 바울 학교에서 정식 교사이자 다양한 과외 수업 강사로도 활동했다.

2.2. 가톨릭 회심과 사제 서품

리처드 윌리엄슨은 원래 성공회 신자였으나 1971년 가톨릭으로 회심했다. 회심 후 몇 달 동안 런던의 브롬튼 성당을 다니며 성소자로 있다가 떠났다. 이후 성 비오 10세회에 가입하였으며,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산하 신학교인 성 비오 10세 신학교에 입학했다. 1976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가톨릭 사제로 서품받았다. 1983년부터는 미국에 있는 성 비오 10세회 산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에서 학장으로 일했다.

3. 주교성성과 파문

1988년 6월 30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회 소속 사제였던 리처드 윌리엄슨과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레라이, 알폰소 데 갈라레타를 주교로 성성하였다. 이 주교성성은 교황청의 허락 없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1983년 교회법 1382조에 의해 요구되는 사항이었다. 1988년 6월 17일, 주교성성 장관인 베르나르댕 갱탱 추기경은 네 명의 사제에게 교황의 허가 없이 주교로 서임될 경우 자동 파문될 것이라는 공식적인 경고를 보냈다.

주교 성성 이후 1988년 7월 1일, 베르나르댕 갱탱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 안토니우 데 카스트루 마이에르, 윌리엄슨, 그리고 새로 서임된 세 명의 주교들이 자동 파문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다음 날인 7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령 에클레시아 데이를 통해 파문을 재확인하고, 이들의 주교 서임이 교회의 일치에 대한 불복종이자 로마 교황 수위권 거부를 의미하는 분열 행위라고 규정했다.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 추기경은 이것이 공식적인 분열은 아니지만, 분리 상황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성 비오 10세회는 가톨릭교회 내의 도덕적, 신학적 위기 때문에 주교 서임이 필요했으며 교회법에 따라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파문의 유효성을 부인했다.

윌리엄슨과 다른 주교들의 파문은 2009년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해제되었다.

4. 주교 성성 이후 활동

주교로 성성받은 후, 윌리엄슨은 미국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교, 아르헨티나 성모 마리아 신학교 등 성 비오 10세회 산하 신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했다. 성 비오 10세회 및 다른 가톨릭 전통주의 단체 신학생들을 사제로 서품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안토니우 드 카스트루 마이어 주교 사망 후,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도적 개인 관리청의 주교로 리시니우 랑겔의 서임을 도왔다. 2006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성 요사팟 사제회(SSJK) 소속 사제 2명과 부제 7명을 서품했다. 2003년에는 아르헨티나 라 레하에 있는 우리 구세주 성모 신학교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2009년, 유대인 대학살 관련 발언으로 파문이 일자, 성 비오 10세회 총장 베르나르 필레 주교는 윌리엄슨 주교를 성모 마리아 신학교 학장에서 해임했다. 이후 윌리엄슨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 내 어떤 직책도 맡지 못하게 되었다.

5. 논쟁과 제명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1월 성 비오 10세회 소속 주교 4명의 파문을 철회하면서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는 완전한 일치를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이 대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가톨릭의 원칙과 이상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로 대화에 부정적이었다. 2012년 성 비오 10세회 총회 즈음, 교황청과의 대화를 둘러싼 단체 내부의 이견과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같은 해 10월, 윌리엄슨 주교는 베르나르 필레 주교에 의해 불순명을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5.1. 교황청과의 대화 반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2009년 1월 성 비오 10세회 소속 주교 4명의 파문을 철회하면서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는 완전한 일치를 위한 대화를 시작했다.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가톨릭의 원칙과 이상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 대화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과거 로마 교황청 지도부와의 타협에 반대하며, 그들을 기만적이고 "사탄의 권력" 아래 있다고 비난했다. 또한, 성좌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며, 합의가 이루어져도 일부 SSPX 구성원이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5.2. 성 비오 10세회 제명

2009년 1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성 비오 10세회 소속 주교 4명의 파문을 철회한 이후 교황청과 성 비오 10세회 간 완전한 일치를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이 대화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내려온 가톨릭의 원칙과 이상을 훼손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대화에 부정적이었다. 2012년, 성 비오 10세회의 총회 즈음해서 교황청과의 대화를 둘러싸고 단체 내부의 이견과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같은 해 10월, 논쟁 끝에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성 비오 10세회 총장 베르나르 필레 주교에 의해 불순명을 이유로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되었다.

2012년 8월, 윌리엄슨은 브라질 노바 프리부르구의 성 십자가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허가받지 않은 리우데자네이루주 방문 중에 약 100명의 평신도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교단의 남미 지구 책임자인 크리스티앙 부샤쿠르 신부는 SSPX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행동에 대해 "순명의 덕에 반하는 심각한 행위"라고 항의했다. 같은 해 10월 초, SSPX 지도부는 윌리엄슨에게 복종을 선언할 기한을 주었으나, 그는 대신 총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4일, 교단은 "정당한 상사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존경과 순종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들어 "고통스러운 결정"으로 윌리엄슨을 제명했다.

6. 제명 이후 활동

성 비오 10세회에서 제명된 이후, 윌리엄슨은 자신과 같이 회에서 제명됐거나 스스로 탈퇴한 다른 사제들과 함께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를 조직했다. 그는 마르셀 르페브르 사제회 소속으로 활동했다.

2012년 8월, 윌리엄슨은 브라질 노바 프리부르구의 성 십자가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허가받지 않은 리우데자네이루 주 방문 중에 약 100명의 평신도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했다. 교단의 남미 지구 책임자인 크리스티앙 부샤쿠르 신부는 SSPX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행동에 대해 "순명의 덕에 반하는 심각한 행위"라고 항의했다. 2012년 10월 초, SSPX 지도부는 윌리엄슨에게 복종을 선언할 기한을 주었으나, 그는 대신 총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2012년 10월 4일, 교단은 "정당한 상사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존경과 순종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들어 "고통스러운 결정"으로 윌리엄슨을 제명했다.

제명 후, 윌리엄슨은 자신의 블로그에 "모두들 꽉 붙들어 매세요. 우리는 엄청난 '지옥 같은' 여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합시다!"라고 썼다. 또한 "나 자신을 위해, 나는 사제를 서품하거나 주교를 서임하는 데 있어 [신의] 섭리를 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성 비오 10세회가 로마에 대한 반대를 철회하려는 어떠한 제안에도 반대하는, "가톨릭 저항"이라고 부르는 느슨한 네트워크의 설립을 촉구하며, "성 마르셀 이니셔티브"라는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2015년 이후, 윌리엄슨은 교황청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주교 서품을 여러 차례 집전하여 가톨릭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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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국가주교 서품 대상
2015년 3월 19일브라질 노바 프리부르구장-미셸 포레
2016년 3월 19일브라질토마스 데 아키노 페레이라 다 코스타
2017년 5월 11일미국 버지니아주 비엔나헤라르도 젠데하스
2021년아일랜드 코크자코모 발리니
2022년 8월 15일폴란드미하우 스토브니키
2024년 1월불명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윌리엄슨이 서품한 주교들은 모두 자동 파문되었으며, 성 비오 10세회는 이러한 서품이 1988년의 서품과 비교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7. 논란 및 비판

윌리엄슨은 홀로코스트 부인, 반유대주의적 발언, 음모론 주장, 여성관 등으로 인해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아왔다.

7.1. 홀로코스트 부인 및 반유대주의

윌리엄슨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왔다. 그는 사이비 과학으로 평가받는 로이히터 보고서를 인용하며,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는 사실과 나치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했다. 또한 에른스트 췬델과 같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옹호했다.

2008년 스웨덴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역사적 증거는 아돌프 히틀러의 의도적인 정책으로 6백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의도적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한다"라고 주장하며, "20만에서 3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지만, 그들 중 가스실에서 사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말했다.

윌리엄슨은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이 가톨릭 교회의 "변화와 부패"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인이 세계 지배를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으며, 시온 의정서가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는 "오늘날 반유대주의는 많은 것을 의미하며, 예를 들어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행동을 비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교회는 반유대주의의 정의를 유대인의 유대적 뿌리 때문에 유대인을 거부하는 것으로 항상 이해해 왔다. 이것은 교회에 의해 비난받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2018년 로베르 포리송의 사망을 기념하며, 그는 "[오늘날 정치와 미디어에 걸쳐 세계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무신론적인 신세계 질서를 원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기독교를 대체하기 위해 완전히 조작된 종교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역사에 대한 엄청나게 거짓된 버전을 조작했다."라고 요약했다.

그의 발언은 독일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논란이 되었으며, 독일 법원은 홀로코스트 부인 혐의로 그에게 여러 차례 유죄 판결을 내리고 벌금형을 선고했다.

7.2. 음모론

윌리엄슨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세계 무역 센터 통제 해체 음모론을 지지하며, 9.11 테러가 외국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아니라 미국 정부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가 "내부 소행"이라고 말했으며,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핵 공격이 있을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7.3. 여성관

윌리엄슨은 성 역할에 대해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여성이 바지나 반바지를 착용하는 것, 여성의 대학 진학이나 직업 활동을 반대하며, 남성에게는 더 강한 "남성다움"을 촉구했다.

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권위와 규칙 대신 친근함과 재미를 둠으로써 부모와 자녀 간의 무질서를 초래한다"며 "영혼을 썩게 하는 묽은 죽"이라고 비난했다.

8. 한국 관련

Richard Williamson영어 주교는 2012년 5월과 2013년 5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베르나르 필레 주교의 방한과는 달리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의 방한은 한국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