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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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코번은 하리마국 아코군 지역을 다스리던 번으로,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카마츠 씨, 센고쿠 시대에는 우키타 히데이에의 통치를 받았다. 이코마 치카마사가 처음으로 직접 통치했으며, 이후 이케다 마사쓰나가 아코 번을 세웠다. 아사노 나가나오가 입봉하여 아코성을 축성하고 조카마치를 건설했지만, 3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건으로 아사노 가문이 개역되었다. 이후 나가이 가문, 모리 가문이 아코 번을 통치했으며, 모리 가문 시대에 소금 전매제를 실시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아코 현이 되었고,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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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코번 - 아코성
아코성은 일본 효고현 아코시에 위치한 성으로, 1466년에 가리야 성으로 시작하여 여러 번의 변화를 거쳐 1661년에 완성되었고, 1873년에 폐성된 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 아코 사건 - 주신구라
주신구라는 아코 사건을 바탕으로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른 사건과 아코 번 낭인 47명의 복수극을 다룬 이야기로, 충의, 희생, 의리 등 다양한 가치를 담아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아코시의 역사 - 와케군
와케군은 일본 오카야마현에 788년에 설치되어 와케씨의 세력 하에 있었으며, 1878년에 행정 구역으로 발족했으나 2005년과 2006년에 주변 자치체와의 합병으로 소멸되었다. - 아코시의 역사 - 아코군
아코군은 1879년 효고현에 설치되어 여러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아코시, 아이오이시, 가미고리정 등으로 나뉘어 현재에 이른다.
| 아코번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아코 번 |
| 원어 이름 | 赤穂藩 |
| 원어 (일본어) | 赤穂藩 |
| 로마자 표기 | Akō-han |
| 위치 | 효고현 일부 |
| 다이묘 | 다이묘 |
| 정부 형태 | 다이묘 영지 |
| 시대 | 에도 시대 |
| 역사 | |
| 시작 | 1615년 |
| 사건 | 설치 |
| 종료 | 1871년 |
| 사건 | 해체 |
| 이전 | 이전: 하리마국 |
| 이후 | 이후: 효고현 |
| 통치자 | |
| 초대 번주 | 이케다 마사쓰나 (1615년 ~ 1631년) |
| 마지막 번주 | 모리 다다노리 (1868년 ~ 1871년) |
| 성 | |
| 위치 | 아코성 |
| 좌표 | 34 |
2. 역사
하리마 국의 국주(国主|고쿠슈일본어)인 이케다 데루마사의 5남 이케다 마사쓰나는 1615년 3만 5천 석을 분봉받아 아코 번을 세웠다. 1631년 마사쓰나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사요군 히라후쿠번 2만 5천 석의 번주였던 이케다 데루오키가 상속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데루오키는 1645년 갑자기 발광하여 정실과 시녀 수 명을 참살했기 때문에 영지가 몰수되어 본가인 오카야마번주 이케다 미쓰마사에게 맡겨졌다.
그 해 히타치국 가사마번에서 아사노 나가나오가 5만 3천 석으로 들어왔다. 나가나오는 고쿠다카(石高, 쌀 생산량으로 나타낸 토지의 가치)에 비해 규모가 큰 아코성을 옛 성터 남쪽에 축성했는데, 준공까지 13년이 걸렸다. 이어서 조카마치(성읍 도시) 건설도 추진하였다. 전봉과 공사로 인해 재정은 악화되었다. 이케다 가문 때부터 시작된 염전 개발을 장려하고 정비하여 소금을 아코의 특산품으로 삼았다. 이후 소금은 아코의 특산품으로 번 재정을 지탱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아코 소금"(赤穂塩|아코시오일본어)이라고 불렸다). 현재 현지 유적 발굴 결과, 그 기원은 야요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대 번주 아사노 나가토모는 1671년 의형과 의제에게 각각 3천 5백 석과 새로 개간한 농지 3천 석을 분봉하여 고쿠다카는 5만 석이 되었다. 3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1701년 에도성 내에서 하타모토 기라 요시히사(吉良義央|기라 요시히사일본어)에게 칼을 휘둘러 부상을 입히고 할복하여 아사노 가문은 개역(영지 몰수)되었다. 이듬해인 1702년 가신들이 겐로쿠아코 사건(元禄赤穂事件|겐로쿠아코 사건일본어)을 일으켰다.
1701년 아사노 가문을 대신하여 시모쓰케국 가라스야마번에서 나가이 나오히로가 3만 2천 석으로 들어왔으나, 5년 후인 1706년 시나노국 이야마번으로 전봉되었다.
1706년 빗추국 니시에바라번에서 모리 나가나오가 2만 석으로 들어왔다. 이후 모리 가문은 폐번치현까지 12대 165년 동안 아코 번을 다스렸다. 모리 가문 통치 기간 동안 번 재정은 계속 곤궁했으며, 5대 번주 모리 다다히로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대 번주 모리 다다노리는 1809년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1857년 이후, 번정 개혁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혁신파 간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번 내부는 분열되었다. 이때 일부 혁신파 번사들이 탈번하여 조슈번으로 달아났다. 1862년에는 양이파가 보수파 중신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번은 내부 여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게 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아코 현이 되었고, 그 후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번주 가문이었던 모리 가문은 1884년 자작이 되어 화족 반열에 올랐다.
2. 1. 전사(赤穂藩以前)
무로마치 시대 동안 아코군 지역은 하리마국의 슈고인 아카마츠 씨의 통제를 받았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카마츠(하리마 수호), 우라가미(비젠 수호 대리), 우키타 씨 등이 아코 군을 영유했지만, 모두 다른 군으로부터의 간접 통치였다. 아코(카리야)에 입부하여 직접 통치한 것은 이코마 치카마사가 처음이며, 석고는 모모야마·에도 시대를 통틀어 최대인 6만 석이었다.[7]분로쿠 4년(1595년)에 이코마 씨는 사누키국 12만 6천 200석으로 전봉되어[8], 아코는 다시 우키타 히데이에에 의한 간접 통치로 돌아갔다.[9]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히데이에가 서군에 가담하여 패배하자, 그의 영토는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몰수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지역을 자신의 장군이자 사위인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하사했다. 이케다 테루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하여 큰 공을 세워 하리마 일국의 국주가 되었다. 아코 군 대리로서 스이세이 한자에몬 카츠시게가 통치했으며, 게이초 19년(1614년)에는 구마미강 (현・치쿠사 강)을 이용한 상수도 부설이 착공되었다.[10]
2. 2. 이케다 가문(池田家) 시대 (1615년 ~ 1645년)
이케다 데루마사의 5남 마사쓰나는 겐나 원년(1615년) 3만 5천 석을 분봉받아 아코 번을 세웠다.[11] 간에이 8년(1631년) 마사쓰나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사요군 히라후쿠번 2만 5천 석의 번주였던 데루오키가 상속을 인정받았다.[11] 그러나 데루오키는 쇼호 2년(1645년) 갑자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정실과 시녀 수 명을 참살했기 때문에 영지가 몰수되어 본가인 오카야마번주 이케다 미쓰마사에게 맡겨졌다.[11]| 대수 | 이름 |
|---|---|
| 1 | 마사쓰나 |
| 2 | 데루오키 |
2. 3. 아사노 가문(浅野家) 시대 (1645년 ~ 1701년)
히타치국 가사마번에서 아사노 나가나오가 5만 3천 석으로 입부하였다. 나가나오는 고쿠다카에 비해 규모가 큰 아코성을 옛 성터 남쪽에 축성하였는데, 13년이나 걸렸다. 이어서 조카마치 건설도 추진하였다. 전봉과 공사로 인해 재정은 악화되었다. 이케다 가문 시대부터 시작된 염전 개발을 장려하고 정비하여 소금을 아코의 특산품으로 삼았다. 이후 소금은 아코의 특산품으로 번 재정을 지탱하게 되었다(당시에는 "아코 소금"(赤穂塩일본어)이라고 불렸다. 현재 현지 유적 발굴 결과, 그 기원은 야요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2]간분 11년(1671년), 2대 번주 아사노 나가토모는 의형과 의제에게 각각 3천 5백 석과 새로 개간한 농지 3천 석을 분봉하여 고쿠다카는 5만 석이 되었다.
3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겐로쿠 14년(1701년), 에도성 내에서 하타모토 기라 요시히사(吉良義央일본어)에게 칼을 휘둘러 부상을 입히고 할복하여 아사노 가문은 영지가 몰수되었다.[13] 이듬해 겐로쿠 15년(1702년) 가신들이 겐로쿠아코 사건(元禄赤穂事件일본어)을 일으켰다.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는 아코 신전 3천 석 영지도 몰수되었지만, 호에이 7년(1710년) 아와국 아사이군・히라군 500석으로 감봉되어 하타모토로 복귀했다.[28][29]
아사노 가문 개역 후 나가이 나오히로 입부 전까지 다쓰노번 와키사카 씨가 아코 성을 맡았고, 이시하라 마사우지와 오카다 도시츠라가 대관으로서 아코를 통치했다.
|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 1 | 나가나오 | 1645년 ~ ? | 5만 3천 500석[27] |
| 2 | 나가토모 | ? ~ 1671년 | 분치로 5만 석 |
| 3 | 나가노리 | 1671년 ~ 1701년 | 겐로쿠아코 사건(아코 사건)으로 개역 |
2. 4. 나가이 가문(永井家) 시대 (1701년 ~ 1706년)
시모쓰케국 가라스야마번에서 나가이 나오히로가 3만 2천 석으로 입부했다. 그러나 5년 후인 호에이 3년(1706년) 시나노국 이야마번으로 전봉되었다.2. 5. 모리 가문(森家) 시대 (1706년 ~ 1871년)
1706년 모리 나가나오가 2만 석으로 아코 번에 입부한 후, 폐번치현까지 12대, 165년 동안 모리 가문이 통치했다. 모리 가문의 통치 기간 동안 번 재정은 계속 곤궁했으며, 5대 번주 모리 다다히로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3] 10대 번주 모리 다다노리는 1809년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기도 했다.막말 시기인 1857년 이후, 번정 개혁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혁신파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1862년에는 양이파가 보수파 중신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번 내부 여론이 분열된 상태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24][25][26]
1871년 폐번치현으로 아코 번은 아코 현이 되었고, 이후 효고현에 편입되었다. 모리 가문은 1884년 자작 작위를 받았다.[31]
모리 가문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 1 | 나가나오 | 1706년 ~ ? | |
| 2 | 나가타카 | ||
| 3 | 나가오 | ||
| 4 | 마사후사 | ||
| 5 | 다다히로 | ||
| 6 | 다다오키 | ||
| 7 | 다다노리 | ||
| 8 | 다다아키라 | ||
| 9 | 다다타카 | ||
| 10 | 다다쓰라 | 재임 3년 만에 사망, 동생 다다노리가 대리인으로 옹립 | |
| 11 | 다다노리 | ||
| 12 | 다다요시 | 1869년 판적봉환으로 지번사 취임 |
3. 역대 번주
# 이름 재임 기간 가문 비고 1 이케다 마사쓰나 1615년 ~ 1631년 이케다 가문 도자마 2 이케다 데루오키 1631년 ~ 1645년 이케다 가문 도자마 3 아사노 나가나오 1645년 ~ 1671년 아사노 가문 도자마 4 아사노 나가토모 1671년 ~ 1675년 아사노 가문 도자마 5 아사노 나가노리 1675년 ~ 1701년 아사노 가문 도자마, 겐로쿠 아코 사건으로 영지 몰수 6 나가이 나오히로 1701년 ~ 1706년 나가이 가문 후다이 7 모리 나가나오 1706년 ~ 1722년 모리 가문 도자마 8 모리 나가타카 1722년 ~ 1723년 모리 가문 도자마 9 모리 나가나리 1723년 ~ 1731년 모리 가문 도자마 10 모리 마사후사 1731년 ~ 1746년 모리 가문 도자마 11 모리 다다히로 1747년 ~ 1769년 모리 가문 도자마 12 모리 다다오키 1769년 ~ 1780년 모리 가문 도자마 13 모리 다다스케 1780년 ~ 1801년 모리 가문 도자마 14 모리 다다아키라 1801년 ~ 1807년 모리 가문 도자마 15 모리 다다타카 1807년 ~ 1824년 모리 가문 도자마 16 모리 다다쓰라 1824년 ~ 1827년 모리 가문 도자마 17 모리 다다노리 1827년 ~ 1862년 모리 가문 도자마 18 모리 다다쓰네 1862년 ~ 1868년 모리 가문 도자마 19 모리 다다노리 1868년 ~ 1871년 모리 가문 도자마, 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에서 지번사로 변경
3. 1. 이케다 가문 (도자마, 3만 5천 석)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서열 | 석 |
|---|---|---|---|---|---|
| 1 | 이케다 마사쓰나 | 1615년 ~ 1631년 | 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 종4위하(従四位下) | 35,000 |
| 2 | 이케다 데루오키 | 1631년 ~ 1645년 | 우쿄노다이후(右京大夫) | 종4위하(従四位下) | 35,000 |
3. 2. 아사노 가문 (도자마, 5만 3천 석 → 5만 석)
1645년 아사노 나가나오가 히타치국 가사마번에서 5만 3천 석으로 입부하면서 아코번이 시작되었다. 가사마 성을 무단으로 수리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영지가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아사노 가문이 세운 번청을 포함한 광대한 가사마성의 저택은 철거되었다.[12]나가나오는 석고에 걸맞지 않은 웅장한 아코 성을 옛 성의 남쪽에 13년에 걸쳐 축성했고, 성하 마을도 조성했다. 영지 이전과 성 건축으로 인해 재정이 악화되었다. 이케다 가문 시대부터 시작된 염전 개발을 장려하고 정비하여 소금을 아코의 특산품으로 삼았다. 이후 소금은 아코 번 재정을 지탱하게 된다. (당시에는 통칭 "아코 소금"이라고 불렸다. 현재 현지 유적 발굴에 의해 그 기원은 야요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1650년에는 아사노 가문이 맡아 기르던 가신 두 명이 싸움을 벌여 둘 다 사망하는 사건(케안 아코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나오는 에도에 보고하여 검시가 파견되었고, 시체 처리 봉서가 발급되었다.
1671년, 제2대 번주 아사노 나가토모는 의형제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어 석고가 5만 석으로 줄었다.
제3대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1682년에 막부로부터 조선 통신사 접대역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온 통신사 이지칸 등을 시즈오카현 미시마시에서 접대했다. 나가노리 통치 시기에는 두 차례의 혈연 친족 간 칼부림 사건이 있었고, 막부로부터 아코 번주도 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701년, 나가노리는 에도성 안에서 고케 하타모토 키라 요시나카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나가노리는 할복하고, 아사노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나가노리의 할복 소식을 들은 에도의 상인과 낭인들이 아코 번 저택에 몰래 침입하거나 난입하여 난동을 부리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고, 그 수는 4, 50명에 달했다. 오가키번과 아사노 본가인 히로시마번에서 경호원이 파견되었다. 호리베 타케토요도 폭도 격퇴에 협력하여 금품 강탈과 파괴로부터 번 저택을 지켰다.[13]
번 재산 처리 과정에서 번札(번에서 발행한 어음) 잔액이 900관(약 2만 냥, 겐로쿠 개주로 인해 은 시세 상승) 있었고, 가로 오이시 요시오 등이 채권자에 의한 혼란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했다. (철거되는 번의 것으로는 액면의 6할[14]이라는 높은 비율의 은 정화로 회수했다)[15]
히로시마번의 "아사노가 문서"에는 아코번의 번찰 회수에 히로시마 본가와 미요시번으로부터의 막대한 원조가 기록되어 있으며[16], 아코번 단절 후 아사노 본가는 코노이케 가문으로부터의 차입금이 크게 증가했다.[17] 한편, 오카야마번의 기록에는 아코의 번찰이 3000관 정도 있었고, 아코번찰을 가진 비젠 상인이 4할 6푼의 환금률(액면의 4할)을 요구하며 아코 성하에서 소동이 일어나 환전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케다 가문에서 떠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8]
번찰과 채무 처리 후 남은 돈을 번사들에게 분배했지만, 생활 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고, 후에 아코 의사들이 생활고를 겪은 서한과 일기가 현존한다.[19][20]
1702년에는 가신들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는 사건(겐로쿠 아코 사건)이 일어났다. 연좌된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는 아코 신전 3000석의 영지도 몰수되었지만, 1710년에 아와국 아사이군・히라군 500석으로 이관되어 감봉되었지만 하타모토로 복귀했다. 나가히로의 뒤는 적남 나가스미가 가독을 계승했고, 나가나오계 아사노가는 아와국에서 계속 이어지게 된다.
아사노 가문이 영지를 몰수당하고 나가이 가문이 들어오기 전까지 타츠노번의 와키사카 씨가 아코 성을 맡고 이시하라 마사우지와 오카다 토시츠라가 대관으로서 아코를 통치했다.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서열 | 고쿠다카 |
|---|---|---|---|---|---|
| 1 | 浅野長直|아사노 나가나오일본어 | 1645년 ~ 1671년 | 우치노타쿠미노카미 (内匠頭) | 종5위하(従五位下) | 5만 3천 석 |
| 2 | 浅野長友|아사노 나가토모일본어 | 1671년 ~ 1675년 | 우메메노카미 (采女正) | 종5위하(従五位下) | 5만 3천 석 → 5만 석 |
| 3 | 浅野長矩|아사노 나가노리일본어 | 1675년 ~ 1701년 | 우치노타쿠미노카미 (内匠頭) | 종5위하(従五位下) | 5만 석 |
- 아사노(나가나오 계) 가는 나가노리의 친동생인 아사노 나가히로가 아와국 아사이군・헤이군에 500석을 받아 계승했다. 아코 신덴 3000석에서 감봉된 데다, 하리마에서도 이봉되었지만, 하타모토로서 아사노 대학가(나가히로 계)는 계속되었다.[28][29] 그 후, 나가에에서 남계는 끊어졌고, 나가라쿠 대에서 단절되었다.[30]
3. 3. 나가이 가문 (후다이, 3만 2천 석)
나가이 나오히로(나가이 나오히로) 1701년 ~ 1706년[3]|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서열 | 석고 |
|---|---|---|---|---|---|
![]() | |||||
| 1 | 永井直敬|나가이 나오히로일본어 | 1701 - 1706 | 이가노카미 (伊賀守) | 종5위하(従五位下) | 32000곡[3] |
3. 4. 모리 가문 (도자마, 2만 석)
1706년, 빗추 국니시에바라 번에서 모리 나가나오가 2만 석으로 입봉하여 폐번치현까지 12대 165년 동안 아코 번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다.[21] 모리 가문의 아코 번사 계급은 번주에게 알현을 허락받는 사분(급격)과 토사, 알현할 수 없는 하대(졸개, 중간 등)의 크게 3가지로 나뉘었다. 하대의 대부분은 성을 사용할 수 없었다. 모리 가문의 아코 번에는 오이시 씨 ( 히로시마 번・아사노 본가의 다이사부로 계가 절가된 후, 오이시 노부키요 계가 오이시 종가의 취급으로 가케쓰지에서 오이시 씨의 제사를 계승하고 있다[22]) 등 구 아사노 가신도 보였다.[23]나가이・모리 양가는 구 아사노 가신의 거주지 대부분을 사용하지 않고 파괴했다. "안에이 반슈 아코 조카도"(1777년)에서는 1729년에 전소된 산노마루의 오이시 요시오 저택 외, 한때 성하에 있던 아코 의사 저택도 검게 칠해져 있다. 한편, 나가이 가문에서는 마을 집의 각 저택 주인명과 동거인 상세 조사가 이루어졌고, 모리 가문에서는 마을 집을 사무라이 저택으로 만들거나, 니시소몬 주변을 밭으로, 다이렌지 서쪽을 밭으로 만드는 등 토지의 유효 활용을 꾀했다.[24]
아코 번 모리 가문에서는 주자학을 번학으로 삼아, 1777년 하쿠분칸이라는 번교를 세워 아카마쓰 란시 등이 교수를 맡았다. 주자학에 비판적인 고학・국학・난학은 배척되었고, 그 때문에 사쿠・보수파의 대두를 초래했다.
막말의 1857년에 사쿠파의 일문・모리 치카라(가이)가 가로가 되었다. 1862년 8월, 존왕양이론에 경향을 강화하고 있던 니시카와 쇼키치(지사호는 타이호)는 교토에서, 조슈의 구사카 겐즈이・사쓰마의 카이에다 노부요시 등과 교류, 귀번하여 국사 알선에 취임했다.[25] 같은 해 12월 9일에 중하급 무사를 모아 총 13명으로, 모리 치카라를 아코 성의 문 앞에서 참살했다. 번유(주자학 교수)・무라카미 신스케(텐야)도 용인 저택에서 살해당했다. 그 차남으로 쇼헤이코[26] 계의 주자학자・가와하라 스이조는 오사카에서 급히 귀국했지만 습격자가 대기하고 있어, 관념하고 후쿠센지에서 자살했다. 모리 치카라 가문 및 무라카미 가문은 단절되었다. 13명은 니시카와 등 7명이 형사 또는 체포 전에 동료끼리 싸워서 사망, 6명이 고야산에 있는 번조의 묘지기가 되었다.(「분큐 아코 사건」)[27]
1869년 판적봉환으로 번주 모리 타다요시가 지번사에 취임했다.[31]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아코 현이 되었고, 그 후, 히메지 현・시카마 현을 거쳐 효고 현에 편입되었다. 모리 가문은 1869년 판적봉환과 함께 화족에 들었고, 1884년 화족령 시행과 함께 자작을 수여받았다.
|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서열 | 석고 |
|---|---|---|---|---|---|
| 1 | 森長直|모리 나가나오일본어 | 1706년 ~ 1722년 | 이즈미노카미 (和泉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2 | 森長孝|모리 나가타카일본어 | 1722년 ~ 1723년 | 시마노카미 (志摩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3 | 森長生|모리 나가나리일본어 | 1723년 ~ 1731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4 | 森政房|모리 마사후사일본어 | 1731년 ~ 1746년 | 이세노카미 (伊勢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5 | 森忠洪|모리 다다히로일본어 | 1747년 ~ 1769년 | 이즈미노카미 (和泉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6 | 森忠興|모리 다다오키일본어 | 1769년 ~ 1780년 | 야마시로노카미 (山城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7 | 森忠賛|모리 다다스케일본어 | 1780년 ~ 1801년 | 우효에노스케 (右兵衛佐)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8 | 森忠哲|모리 다다아키라일본어 | 1801년 ~ 1807년 | 이즈미노카미 (和泉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9 | 森忠敬|모리 다다타카일본어 | 1807년 ~ 1824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10 | 森忠貫|모리 다다쓰라일본어 | 1824년 ~ 1827년 | - 없음 - | - 없음 - | 20000석 |
| 11 | 森忠徳|모리 다다노리일본어 | 1827년 ~ 1862년 | 엣추노카미 (越中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12 | 森忠典|모리 다다쓰네일본어 | 1862년 ~ 1868년 | 미마사카노카미 (美作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 13 | 森忠儀|모리 다다노리일본어 | 1868년 ~ 1871년 | 미마사카노카미 (美作守) | 종5위하(従五位下) | 20000석 |
4. 재정
아코 번의 재정은 대체로 어려웠다.
아사노 가문 시대에는 쌀 수확량 외에 피, 조 등의 잡곡을 더한 실 수확량이 7만 8천 석이었고, 그중 4만 6천 석이 연공으로 징수되었다. 절반은 가신들에게 지급되었으므로 번의 실제 수입은 2만 3천 석 정도였다. 아사노 나가노리가 기라 요시히사를 칼로 벤 사건으로 영지를 몰수당할 당시 번찰(藩札) 발행 잔액이 900관(약 2만 냥)에 달했다. 이는 겐로쿠 시대의 화폐 개주(改鋳)로 인해 은(銀) 시세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번의 영지가 좁아진 나가이, 모리 가문 시대에도 재정 적자는 해소되지 않았다.
아사노 나가나오는 아코성을 축성하고 조카마치를 건설하는 데 많은 비용을 썼다. 이 때문에 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케다 가문 시대부터 시작된 염전 개발을 장려하여 소금을 아코의 특산품으로 만들었고, 이후 소금은 번 재정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당시 아코 소금은 "아코시오"(赤穂塩)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야요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12]
모리 가문 시대에는 염전 개발이 더욱 발전하여 약 200ha의 염전에서 연간 1만 6천 관(貫)의 소금을 생산했다. 이는 아사노 시대의 약 10배에 달하는 양이었지만, 번 재정을 윤택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51] 5대 번주 모리 다다히로는 재정 개혁을 단행하여 번주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백성들에게 저축을 장려했다. 또한 염전 개발과 양초의 원료가 되는 옻나무를 심는 등 산업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10대 번주 모리 다다노리는 1809년 소금 전매제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5. 막말의 영지
6. 지번 및 분가
7. 번저(藩邸)
각 가문의 번저는 에도에 있었다.
- 이케다 가 아코번의 번저(上屋敷)는 아타고사 (현재의 신바시)에 있었다.
- 아사노 가 아코번의 번저(上屋敷)는 뎃포즈 (현재의 아카시정)에 있었다. 맞은편에는 이시카와지마의 인력소와 쓰쿠다 섬이 있었다[32]。 1701년(겐로쿠 14년) 3월 17일에 막부에 의해 몰수되어 오바마번에 주어졌지만, 사카이 타다카즈는 이를 싫어하여 야라이다이마치에 있던 원래의 번저로 복귀했다. 그 후 화재가 잇따랐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창립된 세인트 루카스 기독교 간호 학교[33]에 재해자의 공양수(소나무 가로수길)가 있다), 다이묘 저택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상인 지역 및 농민 지역이 되었다[34] (소의 목장도 있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근교에서 태어났다[35]).
- 나가이 가 아코번의 번저(上屋敷)는 기타칸다 (현재의 하마초)에 있었다. 전출 후의 이와쓰키번이나 가노번에서도 같은 지역을 사용했다[36]。
- 모리 가 아코번의 번저(上屋敷)는 시바 (현재의 하마마쓰초)에 있었다. 맞은편에는 덴료인 니라야마 동심의 단련장이 있었다[37]。
8. 보리사(菩提寺)
아사노 가와 모리 가는 카가쿠지(소토종)를 보리사로 사용했다. 모리 나가타카 때 린자이종으로 개종했다.[40] 나가이 가는 아코 번주가 단기간이었기에 보리사는 미로쿠지(이와쓰키)였다. 이케다 테루오키는 오카야마, 나가이 나오타카는 이와쓰키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아코에는 이케다 가와 나가이 가의 묘가 없다. 이케다 가문은 아코에 있던 세이간지도 비젠 카타카미로 옮겼다.[41]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6]
문서
赤穂は郡名を起源としており、城地・政庁の存在した当地の歴史的固有地名はカリヤ(加里屋・仮屋・苅屋)であった。
[7]
웹사이트
国史跡赤穂城跡(兵庫県赤穂市) 公式Webサイト
[8]
문서
郡部12万3千石および島嶼部3千2百石(「生駒親正・一正宛豊臣秀吉朱印状」より)
[9]
문서
宇喜多家文書「宇喜多秀家士帳」など
[10]
서적
『赤穂市史』「第4節 赤穂上水道の敷設」(八木哲浩ほか、1983年)
[11]
서적
『徳川實紀 第三篇 第四十巻』
[12]
서적
忠臣蔵の真相
[13]
서적
赤穂浪士の実像
[14]
문서
時代は下るが、維新後の土佐藩の金札1両が33銭3厘、薩摩藩も32銭2厘で額面の僅か三分の一未満である(日本銀行貨幣博物館展示および公式web)。
[15]
서적
「忠臣蔵」の決算書
新潮社
2012
[16]
문서
延宝8年の赤穂藩藩札が広島藩に残っており、浅野本家からの援助があった裏付けとなっている(「写真スライド・延宝赤穂藩札」広島市立中央図書館)
[17]
서적
広島藩『浅野赤穂分家済美録』
[18]
서적
『池田家文書』(岡山大学所蔵)
[19]
문서
「大石瀬左衛門書状」五十二
[20]
문서
1702年11月29日付け落合勝信宛て大石書状に「同志の生活は困窮」「矢頭に至っては飢渇」とまで記される。
[21]
문서
大石無人は赤穂義士の装束等の遺品を預かっていたが、長男である良麿の子・良饒が大石瀬左衛門家を継承した事により、遺品は赤穂に戻されて現在では大石神社に納められている。
[22]
서적
森家文書『東西分限帳 慶応元年』
[23]
서적
「赤穂城下町跡発掘調査報告書」(2005年、赤穂市教育委員会)
[24]
서적
暗殺の幕末維新史
中央公論新社
[25]
문서
翠城の学問の師・塩谷宕陰は昌平坂学問所の出身。
[26]
문서
赤穂市立歴史博物館「特別展示 藩儒村上氏」解説。
[27]
문서
若狭野浅野家の分知は内分(表高を変えない分与)
[28]
참고문헌
[29]
참고문헌
[30]
웹사이트
wikipedia「浅野長広」項目
[31]
뉴스
「法要で赤穂藩主・森家の遺徳偲ぶ」
赤穂民報
2013-05-19
[32]
문서
現在は佃大橋が掛かり、島の住宅地に船でなく陸路で渡れる。
[33]
문서
現在の聖路加大学附属病院(聖書『ルカによる福音書』と異なり、法人登記上の読みは「セイロカ」)
[34]
서적
『嘉永京橋南絵図』
[35]
문서
「芥川龍之介生誕の地」碑(明石町)があったが、平成期に別の場所に移されている。
[36]
서적
北神田浜町絵図
[37]
문서
현재 埋め立て지 竹芝埠頭
[38]
문서
내토우 타다카츠에 의해 살해당한 나가이 나가나가(조죠지 칼부림 사건) 및 기라 요시히로, 고바야시 오우츠우, 시미즈 요시히사 등 기라 가문 가신(겐로쿠 아코 사건)의 무덤
[39]
문서
기코의 개역 유배(쇼호 아코 사건)로 소림사(오카야마)를 보디사로 변경
[40]
문서
다만, 겐분 4년(1739년)에는 카가쿠지 경내에 모리가 가신의 유지에 의해 의사묘가 건립되어 있다.
[41]
서적
播州赤穂 台雲山花岳寺
[42]
서적
元禄十三年『赤穂浅野家侍帳』
[43]
문서
염전의 운상·잡곡(쌀 이외의 오곡)·신전 개발분(그 중 3000석은 아사노 나가히로 가문에 분여)
[44]
서적
土芥寇讎記
도쿄대학 사료편찬실
[45]
서적
仮屋地区毛付
1690-1702
[46]
서적
赤穂城在番日記
[47]
간행물
赤穂浅野家資料
효고현 다츠노시
[48]
서적
大石内蔵助の生涯 真説・忠臣蔵
중앙의사회
[49]
서적
吉川家文書
이와쿠니령
[50]
문서
文化13年(1816)「御在所御家中諸席」
[51]
간행물
赤穂城下町跡発掘調査報告書
아코시 교육위원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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