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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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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는 1597년부터 1651년까지 바이에른 공작이자 선제후로 재위했으며, 3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가톨릭 연맹을 결성하고 30년 전쟁에서 황제 편에 섰으며, 백산 전투에서 승리했다. 30년 전쟁 중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바이에른이 약탈당하기도 했지만,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선제후 지위를 유지했다. 그는 바이에른의 재정을 재건하고 행정, 군대를 개편했으며,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등 문화 활동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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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
기본 정보
요아힘 폰 산드라르트의 초상화 (1643년)
통치 기간 (공작)1597년 10월 15일 – 1623년 2월 25일
통치 기간 (선제후)1623년 2월 25일 – 1651년 9월 27일
이전 통치자빌헬름 5세
배우자엘리자베트 폰 로트링겐 (1595년 결혼, 1635년 사망)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 (1635년 결혼)
자녀페르디난트 마리아
막시밀리안 필리프 히에로니무스
왕가비텔스바흐
아버지빌헬름 5세
어머니레나타 폰 로트링겐
출생일1573년 4월 17일
출생지뮌헨, 바이에른 공국, 신성 로마 제국
사망일1651년 9월 27일
사망지잉골슈타트, 바이에른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매장지성 미카엘 교회, 뮌헨
종교로마 가톨릭교
서명
선제후 직위
선제후 (팔츠 선제후) 임기1623년 2월 23일 – 1648년 10월 24일
이전 선제후프리드리히 5세
다음 선제후카를 1세 루트비히
선제후 (바이에른 선제후) 임기1623년 2월 25일 – 1651년 9월 27일
다음 선제후페르디난트 마리아

2. 생애

막시밀리안 1세는 뮌헨에서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와 로렌의 르네타의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다.[1] 아버지 빌헬름 5세의 국정 운영 어려움이 커지면서 1591년경부터 정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 1595년, 사촌인 엘리자베트 레나타와 결혼하였고, 1597년에는 아버지의 퇴위로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1]

첫 번째 결혼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 1세는 엘리자베트 레나타가 사망한 후, 1635년 에서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자신의 누이 마리아 안나 폰 바이에른의 딸인 마리아 안나와 재혼했다.[1] 이 결혼으로 페르디난트 마리아와 막시밀리안 필리프 두 아들을 얻었다.[1]

그는 당대 최고의 군주중 한명으로서 독일이 유럽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항상 로마 가톨릭 교회에 복종하지는 않았다.[1]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공국에 대한 야망이 컸으며,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끈기 있고 수완이 좋았다.[1] 통치 기간 동안 재정 재건과 상비군 확립에 힘썼으며, 뒤러와 루벤스의 작품을 수집하여 비텔스바흐가의 컬렉션을 확장시켰다.

1608년 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여 가톨릭화를 진행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경계를 불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결성되었고, 1609년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4][5]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진영에 속했으며, 1619년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켜 동족이자 조카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자[4], 막시밀리안은 신성 로마 황제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여 가신인 틸리 백작을 보헤미아로 파견하여 백산 전투에서 승리했다.[6][7]

전후 1623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빼앗은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대신 선제후 지위를 받았지만, 이 일로 30년 전쟁이 격화되었다.[8] 또한, 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면서도 그가 동족인 스페인 군대를 팔츠로 끌어들여 네덜란드 침공을 위한 주둔지로 삼는 것을 경계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이 대(對) 합스부르크 동맹을 체결하자, 북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도 손을 잡고 자신의 선제후 지위가 박탈될 위험이 생겼기 때문에, 이후에도 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기로 결정하고 합스부르크가 쪽에 남았다.[9]

덴마크 전쟁 종결 후, 페르디난트 2세가 절대주의를 꾀하여 1629년에 프로테스탄트 탄압과 제후의 무력 부정 및 동맹 금지를 명시한 복구령()을 발령하자 위기감을 느껴, 독일 제후들과 함께 황제군을 이끄는 발렌슈타인의 파면을 요구, 1630년에 발렌슈타인이 파면되고 틸리가 황제군 사령관이 되었지만[10], 1631년에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고 틸리를 버리면서[11], 이듬해 1632년에 스웨덴 국왕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바이에른으로 남하하자 조약을 파기하고 틸리를 불러들였다.[12] 틸리가 레흐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사하자 뮌헨에서 도망쳤고, 바이에른이 스웨덴 군에게 약탈당하자 황제 측으로 복귀, 1634년뇌르틀링겐 전투를 거쳐 이듬해 1635년프라하 조약에서 페르디난트 2세와 타협하여 가톨릭 연맹을 해산[13], 1636년에 페르디난트 3세를 로마왕으로 선출시켰다.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전하자 휘하 장군 프란츠 폰 메르시와 요한 폰 베르트가 분전했지만, 1645년의 얀카우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배, 같은 해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메르시가 전사, 1646년에 튀렌 · 랑겔이 이끄는 프랑스·스웨덴 연합군에게 다시 바이에른을 침공당하자 이듬해 1647년에 휴전했다. 같은 해에 중립에 반발한 베르트가 황제군에 합류, 자신도 휩쓸려 황제군에 합류했지만, 1648년에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대패하자 다시 휴전, 이 전투로 30년 전쟁은 종전으로 향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유지했고 (바이에른 선제후라고 불림), 구 팔츠 선제후 영지도 일부 계속 영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4] 한편,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1세 루드비히도 영지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새롭게 창설된 것으로서 선제후 지위가 인정되었다.[15] 종전 3년 후인 1651년에 78세로 사망했으며, 아들 페르디난트 마리아가 선제후 지위를 계승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바이에른의 국가 재정을 재건하고, 행정부와 군대를 재편했으며, 중상주의 정책과 새로운 법전인 ''코덱스 막시밀리아네우스''를 도입했다.

1610년 막시밀리안 1세는 뮌헨 레지덴츠를 확장하고 호프가르텐을 개선하도록 명령했다. 슐라이스하임 궁전의 원래 건물은 하인리히 쇤과 한스 크룸퍼에 의해 1617년에서 1623년 사이에 소위 "구 궁전"으로 확장되었다.

막시밀리안의 뮌헨 레지덴츠 일부인 카이저호프


막시밀리안 1세는 알브레히트 뒤러,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그림을 비텔스바흐 컬렉션에 수집했다. 1616년 막시밀리안 1세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 네 개의 사냥 그림을 의뢰했고, 1627년 뉘른베르크 시의 아버지들을 압박하여 뒤러의 ''네 사도''를 얻었다. 그의 궁정 예술가로는 페터 칸디트, 프리드리히 주스트리스, 후베르트 게르하르트, 한스 크룸퍼, 아드리안 드 브리스, 게오르크 페텔 등이 있었다.

1651년 9월 27일 막시밀리안 1세는 잉골슈타트에서 사망하여 뮌헨 성 미카엘 교회에 묻혔다. 1839년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는 뮌헨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

2. 1. 초기 생애

막시밀리안 1세는 뮌헨에서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와 로렌의 르네타의 장남으로 태어나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다.[1] 아버지 빌헬름 5세의 국정 운영 어려움이 커지면서 1591년경부터 정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 1595년, 사촌인 엘리자베트 레나타와 결혼하였고, 1597년에는 아버지의 퇴위로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1]

첫 번째 결혼에서 자녀를 얻지 못한 막시밀리안 1세는 엘리자베트 레나타가 사망한 후, 1635년 에서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자신의 누이 마리아 안나 폰 바이에른의 딸인 마리아 안나와 재혼했다.[1] 이 결혼으로 페르디난트 마리아와 막시밀리안 필리프 두 아들을 얻었다.[1]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항상 로마 가톨릭 교회에 복종하지는 않았다.[1]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공국에 대한 야망이 컸으며,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는 데 끈기 있고 수완이 좋았다.[1] 통치 기간 동안 재정 재건과 상비군 확립에 힘썼으며, 뒤러와 루벤스의 작품을 수집하여 비텔스바흐가의 컬렉션을 확장시켰다.

1608년 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여 가톨릭화를 진행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경계를 불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결성되었고, 1609년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4][5]

2. 2. 30년 전쟁과 정치 활동

막시밀리안 1세는 1607년 도나뵈르트라는 자유 도시이자 개신교 거점을 상대로 황제 금지령을 집행하면서 독일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군대는 그 도시를 점령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위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1] 이에 대응하여 일부 개신교 제후들은 개신교 연합을 결성했고, 1609년 막시밀리안 1세는 가톨릭 동맹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동맹의 군대를 창설했지만, 그의 정책은 방어적이었고 동맹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동료들 간의 불화로 1616년 사임했지만, 2년 후 동맹으로 복귀했다.[1]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선거에서 신성 로마 황제 후보가 되기를 거부한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 반란에 직면했다. 1619년 10월 페르디난트 2세와 조약을 체결하고, 동맹의 군대를 황제에게 지원했다.[4][5] 그는 개신교 연합과 중립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 상부를 점령했다. 1620년 11월 8일, 요한 체르클라스 폰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그의 군대는 하얀 산 전투에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라인 궁정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1][6][7]

막시밀리안 1세의 판화


1623년 2월,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와 대궁재후 직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8] 팔츠 상부를 받고 오스트리아 상부를 페르디난트 2세에게 반환한 후, 막시밀리안 1세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해임을 요구하는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630년)에서 페르디난트 2세는 이 요구에 동의했지만, 그 결과는 바이에른과 막시밀리안 1세에게 재앙이었다.[1] 막시밀리안 1세는 퐁텐블로 조약 (1631년)을 프랑스 왕국과 비밀리에 체결했지만, 이는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632년 초,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선제후령으로 진군하여 뮌헨을 점령하자, 막시밀리안 1세는 발렌슈타인의 복귀를 조건으로 제국군의 지원을 받았다.[12] 스웨덴과 프랑스의 약탈은 막시밀리안 1세가 추기경 리슐리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재건 포고에 대한 수정을 제안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실패했다.[1]

1638년 9월, 프란츠 폰 머시 남작은 바이에른 군대의 포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머시와 요한 폰 베르트는 프랑스와 스웨덴에 맞서 싸웠다. 1647년 3월,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와 스웨덴과 울름 휴전 (1647년)을 체결했지만, 페르디난트 3세의 간청으로 약속을 어겼다. 바이에른은 다시 유린당했고, 1648년 5월 주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선제후의 군대는 패배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곧 투쟁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의되었고, 이는 팔츠 상부와 함께 그의 가문에서 세습되었다.[1]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에게 팔츠 하부를 넘겨주어야 했다.[14]

2. 3. 통치 정책 및 문화 활동

막시밀리안 1세는 바이에른의 국가 재정을 재건하고, 행정부와 군대를 재편했으며, 중상주의 정책과 새로운 법전인 ''코덱스 막시밀리아네우스''를 도입했다.[2]

1610년 막시밀리안 1세는 뮌헨 레지덴츠를 확장하고 호프가르텐을 개선하도록 명령했다. 슐라이스하임 궁전의 원래 건물은 하인리히 쇤과 한스 크룸퍼에 의해 1617년에서 1623년 사이에 소위 "구 궁전"으로 확장되었다.[2] 막시밀리안 1세는 알브레히트 뒤러, 페테르 파울 루벤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그림을 비텔스바흐 컬렉션에 수집했다. 1616년 막시밀리안 1세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에게 네 개의 사냥 그림을 의뢰했고,[2] 1627년 뉘른베르크 시의 아버지들을 압박하여 뒤러의 ''네 사도''를 얻었다. 그의 궁정 예술가로는 페터 칸디트, 프리드리히 주스트리스, 후베르트 게르하르트, 한스 크룸퍼, 아드리안 드 브리스, 게오르크 페텔 등이 있었다.

1651년 9월 27일 막시밀리안 1세는 잉골슈타트에서 사망하여 뮌헨 성 미카엘 교회에 묻혔다. 1839년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1세는 뮌헨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1]

3. 가톨릭 동맹과 30년 전쟁

니콜라우스 프루커의 갑옷을 입은 초상화


막시밀리안은 1607년까지 독일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이때 도나뵈르트라는 개신교의 거점을 상대로 황제 금지령을 집행하는 제국 집행에 관한 의무를 부여받았다.[1] 1607년 12월 그의 군대는 그 도시를 점령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위를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취해졌다.[1] 이 조치에 놀란 일부 개신교 제후들은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개신교 연합을 결성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1609년 막시밀리안이 중요한 역할을 한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다.[1] 1608년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여 가톨릭화를 진행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경계를 불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1609년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4][5] 그의 지도 아래 군대가 창설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엄격히 방어적이었고, 그는 동맹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 그의 동료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공작은 1616년에 사임했지만, 문제의 접근으로 약 2년 후 동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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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년 신성 로마 제국 선거에서 신성 로마 황제 후보가 되기를 거부한 막시밀리안은 보헤미아 반란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잠시 지연된 후, 그는 1619년 10월 페르디난트 2세와 조약을 체결했고, 막대한 양보를 대가로 가톨릭 동맹 군대를 황제의 봉사에 투입했다. 그는 투쟁의 범위를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개신교 연합과 중립 조약을 맺고, 캠페인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상부를 점령했다.[1]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진영에 속했으며, 1619년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켜 동족이자 조카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자,[4] 막시밀리안은 신성 로마 황제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여 가신인 틸리 백작을 보헤미아로 파견하여 백산 전투에서 승리했다.[6][7] 1620년 11월 8일 그의 군대는 요한 체르클라스 폰 틸리 백작의 지휘 아래 프라하 인근 하얀 산 전투에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라인 궁정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1]

연합과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틸리는 이후 라인 팔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1623년 2월 막시밀리안은 1356년부터 라인 궁정 백작들이 누려온 선제후의 지위와 대궁재후의 직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전후 1623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빼앗은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대신 선제후 지위를 받았지만, 이 일로 30년 전쟁이 격화되었다.[8] 팔츠 상부를 받고 오스트리아 상부를 페르디난트에게 반환한 후, 막시밀리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제국 봉사 해임을 추구하는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630년)에서 페르디난트는 이 요구에 동의해야 했지만, 그 결과는 바이에른과 그 통치자 모두에게 재앙이었다.[1]

1631년에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고 틸리를 버리면서[11], 이듬해 1632년에 스웨덴 국왕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바이에른으로 남하하자 조약을 파기하고 틸리를 불러들였다[12] . 틸리가 레흐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사하자 뮌헨에서 도망쳤고, 바이에른이 스웨덴 군에게 약탈당하자 황제 측으로 복귀, 1634년뇌르틀링겐 전투를 거쳐 이듬해 1635년프라하 조약에서 페르디난트 2세와 타협하여 가톨릭 연맹을 해산[13], 1636년에 페르디난트 3세를 로마왕으로 선출시켰다. 1632년 초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선제후령으로 진군하여 뮌헨을 점령했고, 막시밀리안은 황제군 지휘관으로 복귀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명령을 받아야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1] 스웨덴과 그 동맹국인 프랑스의 약탈은 선제후로 하여금 스웨덴 및 프랑스의 추기경 리슐리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또한 1629년의 재건 포고에 대한 수정을 제안하여 개신교도들을 유혹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1]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전하자 휘하 장군 프란츠 폰 메르시와 요한 폰 베르트가 분전했지만, 1645년의 얀카우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배, 같은 해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메르시가 전사, 1646년에 튀렌 · 랑겔이 이끄는 프랑스·스웨덴 연합군에게 다시 바이에른을 침공당하자 이듬해 1647년에 휴전했다. 같은 해에 중립에 반발한 베르트가 황제군에 합류, 자신도 휩쓸려 황제군에 합류했지만, 1648년에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대패하자 다시 휴전, 이 전투로 30년 전쟁은 종전으로 향했다. 1638년 9월 프란츠 폰 머시 남작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군대였던 바이에른 군대의 포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머시와 요한 폰 베르트는 부장 야전원수로 프랑스와 스웨덴과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겪으며 싸웠다.

1647년 3월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스웨덴과 울름 휴전 (1647년)을 체결했지만, 페르디난트 3세의 간청으로 그는 약속을 어겼다. 바이에른은 다시 유린당했고, 1648년 5월 주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선제후의 군대는 패배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곧 투쟁을 종식시켰다.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의되었고, 이는 팔츠 상부와 함께 그의 가문에서 세습되었다.[1] 막시밀리안은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에게 팔츠 하부를 넘겨주어야 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였다. 이 조약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바이에른 선제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구 팔츠 선제후 영지의 일부를 계속 영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4] 한편, 카를 1세 루드비히도 영지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새롭게 창설된 것으로서 선제후 지위가 인정되었다.[15]

3. 1. 가톨릭 동맹 결성

막시밀리안은 1607년까지 독일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이때 도나뵈르트라는 개신교의 거점을 상대로 황제 금지령을 집행하는 제국 집행에 관한 의무를 부여받았다.[1] 1607년 12월 그의 군대는 그 도시를 점령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우위를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가 취해졌다.[1] 이 조치에 놀란 일부 개신교 제후들은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개신교 연합을 결성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1609년 막시밀리안이 중요한 역할을 한 가톨릭 동맹이 결성되었다.[1] 니콜라우스 프루커의 갑옷을 입은 초상화 그의 지도 아래 군대가 창설되었지만, 그의 정책은 엄격히 방어적이었고, 그는 동맹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 그의 동료들 사이의 불화로 인해 공작은 1616년에 사임했지만, 문제의 접근으로 약 2년 후 동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1]

3. 2. 30년 전쟁에서의 역할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선거에서 신성 로마 황제 후보가 되기를 거부한 막시밀리안은 보헤미아 반란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잠시 지연된 후, 그는 1619년 10월 페르디난트 2세와 조약을 체결했고, 막대한 양보를 대가로 가톨릭 동맹 군대를 황제의 봉사에 투입했다. 그는 투쟁의 범위를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개신교 연합과 중립 조약을 맺고, 캠페인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상부를 점령했다.[1] 1620년 11월 8일 그의 군대는 요한 체르클라스 폰 틸리 백작의 지휘 아래 프라하 인근 하얀 산 전투에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라인 궁정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1] 1608년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여 가톨릭화를 진행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경계를 불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1609년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4][5]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진영에 속했으며, 1619년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켜 동족이자 조카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자,[4] 막시밀리안은 신성 로마 황제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여 가신인 틸리 백작을 보헤미아로 파견하여 백산 전투에서 승리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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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과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틸리는 이후 라인 팔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1623년 2월 막시밀리안은 1356년부터 라인 궁정 백작들이 누려온 선제후의 지위와 대궁재후의 직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팔츠 상부를 받고 오스트리아 상부를 페르디난트에게 반환한 후, 막시밀리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제국 봉사 해임을 추구하는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630년)에서 페르디난트는 이 요구에 동의해야 했지만, 그 결과는 바이에른과 그 통치자 모두에게 재앙이었다.[1] 전후 1623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빼앗은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대신 선제후 지위를 받았지만, 이 일로 30년 전쟁이 격화되었다.[8]

3. 2. 1. 백산 전투와 팔츠 선제후 지위 획득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선거에서 신성 로마 황제 후보가 되기를 거부한 막시밀리안은 보헤미아 반란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잠시 지연된 후, 그는 1619년 10월 페르디난트 2세와 조약을 체결했고, 막대한 양보를 대가로 동맹의 군대를 황제의 봉사에 투입했다. 그는 투쟁의 범위를 줄이려고 노력하면서 개신교 연합과 중립 조약을 맺고, 캠페인 비용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상부를 점령했다.[1] 1620년 11월 8일 그의 군대는 요한 체르클라스 폰 틸리 백작의 지휘 아래 프라하 인근 하얀 산 전투에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라인 궁정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1] 1608년도나우뵈르트를 점령하여 가톨릭화를 진행한 것이 프로테스탄트의 경계를 불러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듬해 1609년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 연맹을 결성했다[4][5] . 30년 전쟁에서 가톨릭 진영에 속했으며, 1619년보헤미아가 반란을 일으켜 동족이자 조카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자[4], 막시밀리안은 신성 로마 황제페르디난트 2세에게 협력하여 가신인 틸리 백작을 보헤미아로 파견하여 백산 전투에서 승리했다[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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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mb|left|막시밀리안 1세의 판화]]

연합과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틸리는 이후 라인 팔츠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1623년 2월 막시밀리안은 1356년부터 라인 궁정 백작들이 누려온 선제후의 지위와 대궁재후의 직무를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팔츠 상부를 받고 오스트리아 상부를 페르디난트에게 반환한 후, 막시밀리안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제국 봉사 해임을 추구하는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 (1630년)에서 페르디난트는 이 요구에 동의해야 했지만, 그 결과는 바이에른과 그 통치자 모두에게 재앙이었다.[1] 전후 1623년, 프리드리히 5세로부터 선제후 지위와 영지를 빼앗은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대신 선제후 지위를 받았지만, 이 일로 30년 전쟁이 격화되었다[8].

3. 2. 2. 스웨덴과의 전쟁과 바이에른 약탈

1632년 초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선제후령으로 진군하여 뮌헨을 점령했고, 막시밀리안은 황제군 지휘관으로 복귀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명령을 받아야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1] 스웨덴과 그 동맹국인 프랑스의 약탈은 선제후로 하여금 스웨덴 및 프랑스의 추기경 리슐리외와 평화 협상을 시작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또한 1629년의 재건 포고에 대한 수정을 제안하여 개신교도들을 유혹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1]

1638년 9월 프란츠 폰 머시 남작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군대였던 바이에른 군대의 포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머시와 요한 폰 베르트는 부장 야전원수로 프랑스와 스웨덴과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겪으며 싸웠다.

1647년 3월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스웨덴과 울름 휴전 (1647년)을 체결했지만, 페르디난트 3세의 간청으로 그는 약속을 어겼다. 바이에른은 다시 유린당했고, 1648년 5월 주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선제후의 군대는 패배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곧 투쟁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에 따라 막시밀리안은 선제후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의되었고, 이는 팔츠 상부와 함께 그의 가문에서 세습되었다.[1] 막시밀리안은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에게 팔츠 하부를 넘겨주어야 했는데, 이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였다.

1631년에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고 틸리를 버리면서[11], 이듬해 1632년에 스웨덴 국왕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바이에른으로 남하하자 조약을 파기하고 틸리를 불러들였다[12] . 틸리가 레흐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사하자 뮌헨에서 도망쳤고, 바이에른이 스웨덴 군에게 약탈당하자 황제 측으로 복귀, 1634년뇌르틀링겐 전투를 거쳐 이듬해 1635년프라하 조약에서 페르디난트 2세와 타협하여 가톨릭 연맹을 해산[13], 1636년에 페르디난트 3세를 로마왕으로 선출시켰다.

프랑스가 30년 전쟁에 참전하자 휘하 장군 프란츠 폰 메르시와 요한 폰 베르트가 분전했지만, 1645년의 얀카우 전투에서 스웨덴 군에게 패배, 같은 해의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메르시가 전사, 1646년에 튀렌 · 랑겔이 이끄는 프랑스·스웨덴 연합군에게 다시 바이에른을 침공당하자 이듬해 1647년에 휴전했다. 같은 해에 중립에 반발한 베르트가 황제군에 합류, 자신도 휩쓸려 황제군에 합류했지만, 1648년에 추스마르스하우젠 전투에서 대패하자 다시 휴전, 이 전투로 30년 전쟁은 종전으로 향했다.

3. 2. 3.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막시밀리안 1세는 선제후 지위를 유지하기로 합의되었고, 이는 팔츠 상부와 함께 그의 가문에서 세습되었다.[1] 막시밀리안은 팔츠 선제후 카를 1세 루이에게 팔츠 하부를 넘겨주어야 했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였다. 이 조약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바이에른 선제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구 팔츠 선제후 영지의 일부를 계속 영유하는 것이 인정되었다.[14] 한편, 카를 1세 루드비히도 영지의 대부분을 되찾았으며, 새롭게 창설된 것으로서 선제후 지위가 인정되었다.[15]

4. 유산과 평가

디터 알브레히트(Dieter Albrecht)가 1998년에 출판한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1573–1651》(Maximilian I. von Bayern 1573–1651)는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호평을 받은 최신 전기이다. 막시밀리안 1세에 대한 평가는 그가 통치했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업적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디터 알브레히트의 전기는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호평을 받은 최신 연구로, 막시밀리안 1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와 한국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4.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막시밀리안 1세에 대한 평가는 그가 통치했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업적을 고려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디터 알브레히트의 전기는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호평을 받은 최신 연구로, 막시밀리안 1세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4. 2. 한국사와의 연관성

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와 한국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디터 알브레히트(Dieter Albrecht)가 1998년에 출판한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1573–1651》(Maximilian I. von Bayern 1573–1651)는 독일 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호평을 받은 최신 전기이다.

5. 가족

바이에른 선제후이자 공작인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1595년 막시밀리안 1세는 사촌인 엘리자베트 공주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는 로렌 공작샤를 3세의 딸이었으며, 프랑스의 앙리 2세의 외손녀였다. 이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635년 엘리자베트와 사별한 후, 막시밀리안 1세는 같은 해에 조카인 마리아 안나 폰 외스터라이히와 재혼했다. 마리아 안나는 신성 로마 황제페르디난트 2세와 마리아 안나의 딸이었다.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을 두었다.

  • 페르디난트 마리아 (1636년 - 1679년) - 바이에른 선제후
  • 막시밀리안 필리프 히에로니무스 (1638년 - 1705년) -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참조

[1] EB1911
[2] 웹사이트 Natural History and History Painting in Rubens' Animals http://www.mpiwg-ber[...] 2016-11-19
[3] 브리태니커백과사전 Maximilian I duke of Bavaria https://www.britanni[...]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인용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인용
[1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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