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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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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선제후는 1596년에 태어나 1632년에 사망한 인물로, 팔츠 선제후국의 선제후이자 보헤미아의 왕이었다. 그는 1613년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하여 유럽 개신교 세력과의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1619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으나, 30년 전쟁의 발발과 함께 백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겨울 왕'이라는 조롱을 받았으며, 봉토와 선제후 지위를 박탈당하고 망명 생활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그의 차남 카를 1세 루드비히가 팔츠 선제후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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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선제후
기본 정보
미힐 얀스 판 미에레펠트의 초상화, 1630년경
미힐 얀스 판 미에레펠트의 초상화, 1630년경
이름프리드리히 5세
독일어 이름Friedrich V.
칭호라인 팔츠 선제후
보헤미아 국왕 (프리드리히 1세)
출생일1596년 8월 26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
오버팔츠
야크트슐로스
사망일1632년 11월 29일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 대주교국
마인츠
왕가팔츠-짐메른 가문
종교칼뱅주의
프리드리히 5세의 서명
프리드리히 5세의 서명
통치
팔츠 선제후 즉위1610년 9월 19일
팔츠 선제후 퇴위1623년 2월 23일
이전 선제후프리드리히 4세
이후 선제후막시밀리안 1세
보헤미아 왕 즉위1619년 8월 26일
보헤미아 왕 퇴위1620년 11월 8일
대관식1619년 11월 4일, 성 비투스 대성당
대관식 유형보헤미아 군주 대관식
이전 국왕페르디난트 2세
이후 국왕페르디난트 2세
가족 관계
아버지프리드리히 4세
어머니루이제 율리아나 판 나사우
배우자엘리자베스 스튜어트 (1613년 결혼)
자녀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팔츠 선제후 세자
카를 1세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헤르포르트 여수도원장
루퍼트, 컴벌랜드 공작
모리츠
루이제 홀란디네, 모뷔송 여수도원장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짐메른 백작
헨리에테 마리
필리프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하노버 선제후비
구스타프 아돌프

2. 생애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와 오라녜 공 빌럼 1세의 딸 나사우의 루이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통치 가문과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

1610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 자리를 계승했다.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프리드리히 5세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후견인과 섭정을 맡아야 했으나,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는 가톨릭 신자였던 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 백작 대신 츠바이브뤼켄의 요한 2세 백작을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제국 내 제후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1613년, 프리드리히 5세는 잉글랜드 제임스 1세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라인강템스강의 합류"라고 칭송받으며 유럽 개신교 진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축제를 주최했고, 프리드리히 5세의 삼촌인 네덜란드의 마우리츠도 축복했다.[13]

프리드리히 5세는 통치를 시작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연합 회의에 참석했다가 열병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이후 그는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 공작에게 많은 책임을 넘겼다.[5] 그는 하이델베르크 성을 확장하고 ''Hortus Palatinus'' 정원을 조성하는 등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지도자로서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에 맞서 독일 귀족들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했다.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1614년1629년익사
카를 루이1617년1680년1648년 팔츠 선제후
엘리자베스1618년1680년
루퍼트1619년1682년잉글랜드 내전에서 활약
모리츠1620년1652년잉글랜드 내전 참전
루이즈 홀란디네1622년1709년
루이1623년1624년유아기에 사망
에두아르트1625년1663년
헨리에테 마리1626년1651년
필리프 프리드리히1627년1650년
샤를로테1628년1631년
조피아1630년1714년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 아들 영국 국왕 조지 1세
구스타부스1632년1641년간질로 사망


2. 1. 유년 시절 (1596–1610)

프리드리히는 1596년 8월 26일 선제후령 팔츠 (오늘날 독일 라우터호펜)의 사냥 별장(Jagdschlossde)인 데인슈방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아버지는 선제후령 팔츠의 통치자 프리드리히 4세였고, 어머니는 오렌지 공 빌럼과 부르봉의 샤를로트의 딸인 나사우의 루이절리아나였다.[3] 프리드리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통치 가문과 관련이 있었으며, 1596년 10월 6일 암베르크에서 열린 그의 세례식에는 여러 외교관과 고위 인사들이 참석했다.

팔츠-짐머른 가문은 칼뱅주의를 따랐는데,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헌신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이 이끄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다른 방계 가문과는 뚜렷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하이델베르크흑사병이 유행하여 프리드리히는 처음 2년을 상팔츠에서 보냈다. 1604년,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삼촌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부용 공작의 궁정이 있는 아르덴의 세당으로 보내졌다. 세당에 있는 동안 프리드리히는 프랑스의 앙리 4세의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 그의 가정교사는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세당 아카데미의 신학 교수인 다니엘 틸레누스였다. 팔십 년 전쟁과 프랑스 종교 전쟁 동안 틸레누스는 개신교 공국의 단결을 촉구했고, 동료들이 괴롭힘을 당할 경우 개입하는 것이 그들의 기독교적 의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견해는 프리드리히의 미래 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2. 2. 후견인 논쟁 (1610–1614)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프리드리히 5세가 성년에 이를 때까지 그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이 법적 후견인이자 팔츠의 섭정으로 활동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족인 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 백작은 가톨릭 신자였기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는 사망 직전 다른 비텔스바흐 가문인 츠바이브뤼켄의 요한 2세 백작을 아들의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요한을 하이델베르크로 환영했지만, 볼프강 빌헬름의 입장은 거부되었다.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제후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13]

161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티아스가 이 분쟁에 개입했고, 그 결과 프리드리히 5세는 여전히 미성년자였음에도 팔츠에서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분쟁은 1614년 프리드리히가 18세가 되면서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 분쟁으로 인해 가문들 사이에 많은 갈등이 발생했다.

2. 3.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의 결혼

프리드리히 5세는 1613년 2월 14일 화이트홀 궁전의 왕실 예배당에서 제임스 1세덴마크의 앤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했다.[4] 이 결혼은 팔츠 선제후국의 위상을 강화하고 유럽 개혁 진영 내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제임스 1세는 처음에 엘리자베스를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팔츠의 프리드리히 조언자들은 가톨릭 공작과의 결혼이 유럽의 종교적 균형을 깨뜨릴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1612년 봄, 한스 마인하르트 폰 쇤베르크가 런던으로 보내져 구애했고, 같은 해 5월 26일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앤 여왕은 이 결혼에 반대했다.[4]

프리드리히 5세는 1612년 10월 16일 런던에 도착하여 엘리자베스와 만났고, 둘은 곧 친해졌다. 1613년 1월 정식으로 약혼했으며, 결혼식 직전 프리드리히 5세는 가터 훈장을 받았다. 결혼식 후 프랜시스 베이컨이 조직한 성대한 축하 행사가 열렸다.[4]

결혼 후, 프리드리히 5세 부부는 헤이그를 거쳐 1613년 6월 12일 하이델베르크에 입성했다. 엘리자베스는 신하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1614년 아들 팔츠 상속공 헨리 프레데릭을 낳으면서 인기는 더욱 커졌다. 결혼 협상의 일환으로 프리드리히 5세는 하이델베르크 성을 확장했고, 1615년 "엘리자베스 입구"가 헌정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 부부는 슬하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1614년1629년익사
카를 루이1617년1680년1648년 팔츠 선제후
엘리자베스1618년1680년
루퍼트1619년1682년잉글랜드 내전에서 활약
모리츠1620년1652년잉글랜드 내전 참전
루이즈 홀란디네1622년1709년
루이1623년1624년유아기에 사망
에두아르트1625년1663년
헨리에테 마리1626년1651년
필리프 프리드리히1627년1650년
샤를로테1628년1631년
조피아1630년1714년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 아들 영국 국왕 조지 1세
구스타부스1632년1641년간질로 사망


3. 팔츠 선제후 통치 (1614–1618)

프리드리히 5세는 1610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하자 팔츠 선제후를 계승했다. 1613년 잉글랜드의 공주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제임스 1세의 딸)와 결혼했는데, 이는 "라인강템스강의 합류"라고 칭송받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축제를 주최했고, 프리드리히 5세의 삼촌인 네덜란드의 오라녜 공 마우리츠도 영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에서 이 결혼을 축복했다.[13] 그러나 훗날 프리드리히 5세는 30년 전쟁 당시 제임스 1세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14]

3. 1. 통치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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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로 즉위한 후 프로테스탄트 연합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열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했다. 이후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변했고, 우울하며, 우울증에 걸린 것으로 묘사했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5세는 많은 책임을 자신의 재상인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 공작에게 넘겼다.[5]

프리드리히 5세는 자신의 정권을 찬양하기 위해 대규모 건설 사업을 시작했다. 하이델베르크 성의 개조 외에도, 그는 영국 정원사 이igo 존스와 프랑스 엔지니어 살로몽 드 코스가 설계한 정원인 ''Hortus Palatinus''를 의뢰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그 안에서 아폴로헤라클레스로 묘사되었다.

정치적으로 프리드리히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지도자이자 가톨릭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에 맞서 독일 귀족들의 자유를 지키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제국은 가톨릭, 루터교, 그리고 칼뱅주의 공국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비록 칼뱅주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인정받지 못했지만). 이 세 종교의 제후들 간의 갈등은 제국의 헌법에 대한 깊은 갈등으로 발전했다. 또한, 12년 휴전, 80년 전쟁의 휴전이 1621년에 만료될 예정이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스페인 제국 사이의 전투 재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독일에 위치한 팔츠는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에서 온 제국군에 침략당하기 쉬웠다.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공국과는 달리, 선제후 팔츠는 견고한 영지가 아니라 외국 땅에 둘러싸인 두 개의 연결되지 않은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니더팔츠는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오버팔츠는 암베르크를 중심으로 했다. 니더팔츠의 경제는 농업이 지배했고, 오버팔츠는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제를 가진 광산 지역이었다.

3. 2. 정치적 상황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로 즉위한 직후 프로테스탄트 연합 회의에 참석했다가 열병으로 거의 사망할 뻔했다. 회복 후에도 우울증을 겪으며 국정 운영을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 공작에게 위임했다.[5]

정치적으로 프리드리히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지도자이자, 가톨릭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에 맞서 독일 귀족들의 자유를 옹호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제국은 가톨릭, 루터교, 칼뱅주의 공국들 사이에서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들 간의 갈등은 제국 헌법에 대한 심각한 분쟁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칼뱅주의는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1621년에는 12년 휴전이 만료될 예정이어서, 네덜란드 공화국스페인 제국 간의 전쟁이 재개될 가능성이 컸다.

팔츠 선제후령은 합스부르크 세습 영토에서 출병하는 제국군의 침략에 취약했다. 다른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들과 달리, 팔츠 선제후령은 견고한 영토가 아니라 외국 영토로 둘러싸인 두 개의 분리된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니더팔츠는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고, 오버팔츠는 암베르크를 중심으로 광업이 발달해 유럽에서 손꼽히는 경제 지역이었다.

4. 보헤미아 왕 (1619–1620)

프리드리히 5세는 1619년 11월 4일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성 바츨라프 왕관을 쓰고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프라하 대주교가 아닌 교구의 우트라키스트 행정관 이르지 디카스투스와 개신교 장로 얀 치릴 슈팔레크 z 트르제비체에 의해 거행되었다.[10] 전례는 카를 4세의 대관식을 본떠 몇 가지 수정되었다. 연도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불렸고, 프리드리히는 성유를 받았다. 대관식 후 신분들은 프리드리히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관식은 호화롭게 진행되었으나, 보헤미아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많은 난민들이 프라하에 있었다.[10]

보헤미아 1620, 라인강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사후 대관 기념 메달. 앞면


이 메달의 뒷면: 팔츠 사자 위에 보헤미아 왕관을 든 5개의 손, 오른발에 홀을 들고 왼발은 구체를 얹고 있음


프리드리히는 취약한 왕권과 내부 분열이 있는 국가를 물려받았다. 재정은 혼란스러웠고, 왕은 귀족들의 호의와 국회의 세금 할당에 의존하여 자금 조달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독일 가톨릭 연맹과의 전쟁 비용을 위해 더 높은 세금을 원했지만, 국가는 이미 장기 전쟁으로 부담이 컸다.

프리드리히는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부부는 체코어를 하지 못해 궁정 관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고, 지방 행정은 지역 귀족들에게 맡겨졌다.

프리드리히의 궁정 설교자 아브라함 스쿨테투스는 칼뱅주의를 확산시키려 했다. 우트라퀴스트 교회는 성유물과 성상을 유지했지만, 스쿨테투스는 성상 파괴를 시작했다. 1619년 12월 21일부터 성상이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제거되었고, 12월 27~28일에는 루카스 크라나흐 (아버지)의 프라하 제단화가 파괴되었다. 성 바츨라프 무덤 훼손 소문도 돌았다. 스쿨테투스의 우상 파괴는 인기가 없었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멀리하려 했다.

thumb를 담고 있으며 프리드리히를 "겨울왕"이라고 칭했다.]]

"겨울왕"이라는 별명은 프리드리히 통치 초기에 나타났고, 1619년 황실 팸플릿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선전가들은 프리드리히가 "겨울 사자"이며 "여름 사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응했다.[11]

한편,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소집했다. 1619년 10월 21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과 가톨릭 연맹 지도자와 조약을 체결, 막시밀리안은 군대 사령관이 되고 점령된 보헤미아 영토를 유지하며 프리드리히의 선제후 칭호를 받기로 약속했다. 황제는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지지도 얻었다. 요한 게오르크의 궁정 설교자 마티아스 회 폰 호에네크는 황제에게 프리드리히와 보헤미아인을 분쇄하도록 격려했다.[12]

프리드리히의 재상 크리스티안 폰 안할트는 1619년 12월 뉘른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 회의를 소집했지만 실패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대표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1620년 3월, 뮐루즈에서 황실 측 회의에서 프리드리히는 법적 변호를 보냈다. 그는 보헤미아가 신성 로마 제국 밖에 위치해 제국 평화를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이 포함된 회의는 프리드리히 주장을 거부하고 보헤미아가 제국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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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4월 1일, 황실 측은 프리드리히에게 6월 1일까지 보헤미아를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발표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와 조약을 체결,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에서 루터교 실행을 보장하고 네덜란드의 세속적인 지역을 인정했다. 페르디난트는 요한 게오르크에게 루사티아를 주기로 했다.

1620년 3월 25일, 보헤미아 연합 의회에서 프리드리히는 증세와 징병을 요구했다. 프리드리히는 개인 자금을 사용하고 보석을 전당 잡았으며, 1620년 5월 팔츠를 파산에 이르게 했다.

제임스 1세는 군사 지원을 거부했다. 네덜란드는 소규모 병력만 파견했다. 1620년 7월 3일 프로테스탄트 연합은 울름 조약 (1620년)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지원을 철회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thumb (1592–1667)의 백산 전투 묘사, 1620년.]]

1620년 11월 8일,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군은 가톨릭 연맹 군에게 패배했고,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통치는 막을 내렸다.

프리드리히는 패전 후 프라하를 떠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4. 1. 배경 및 계획

보헤미아 왕국은 왕을 선거로 뽑는 선거 군주제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526년부터 보헤미아 왕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었고, 1555년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겸했다. 그러나 17세기 초, 보헤미아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보헤미아의 신분 의회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절대 군주제를 도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많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개신교 신자였는데, 가톨릭 신자인 황제가 가톨릭을 강요할 것을 우려했다. 루돌프 2세 황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커졌다. 루돌프 2세는 1593년부터 1606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오랜 전쟁을 벌였다. 전쟁 결과에 불만을 품은 루돌프 2세는 오스만 제국과 다시 전쟁을 하려 했다. 보헤미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루돌프 2세는 1609년 국왕 칙서를 발표하여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은 여전히 그를 믿지 못하고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연락을 취했다.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마티아스를 루돌프 2세의 후계자로 선택했고, 마티아스는 1611년 보헤미아 왕, 161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연합 내에서는 마티아스 대신 프로테스탄트 후보를 보헤미아 왕으로 세우려는 논의가 있었고, 이때 프리드리히 5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팔츠의 전략가들은 프리드리히 5세가 왕이 되면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끊고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는 빗나갔다.

한편, 보헤미아 내 종교 갈등은 계속되었다. 1617년, 마티아스는 보헤미아 신분 의회를 설득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슈티리아 공작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위 후계자로 선출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 귀족들은 그가 루돌프 2세의 국왕 칙서를 철회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황실 관리들이 개신교도들에게 주교 소유 토지에 개신교 교회를 짓는 것을 중단하라고 명령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개신교도들은 이 토지가 국왕 칙서에 따라 보헤미아의 권한에 속한다고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618년 5월 23일, 친드리히 마티아스 투른 백작이 이끄는 개신교 귀족들은 프라하 성을 습격하여 두 명의 황실 총독인 클룸의 빌렘 슬라바타와 마르티니체의 야로슬라프 보르지타를 체포했다. 반군은 그들에게 국왕 칙서 위반 혐의를 씌워 유죄를 선고하고, 그들과 서기 필립 파브리시우스를 창밖으로 던졌다. 프라하의 두 번째 창밖 투척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보헤미아 반란의 시작을 알렸고, 30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가 보헤미아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는 프리드리히 5세가 정치 경험이 부족하고 보헤미아에 칼뱅주의자가 거의 없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을 제안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5세는 처음에는 황제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었고, 황제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공개적으로 황제와 결별하지는 않았지만, 장인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헤미아 투표에 대한 책임을 예수회와 합스부르크 궁정의 스페인 측에 돌렸다.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 왕의 유력한 후보로 언급된 것은 1618년 11월 프라하에서였다. 프리드리히 5세의 대리인이 그의 후보 지명을 띄우는 데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팔라틴 외교관 크리스토프 폰 도나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프리드리히 5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제임스 1세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프로테스탄트 연합의 제후들도 종교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작센 선제후의 반대로 이 제안을 거부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비밀리에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백작의 군대를 보내 보헤미아 반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1618년 8월, 만스펠트 백작의 군대는 보헤미아에 진입하여 필젠 포위전을 이끌었고, 11월 21일 필젠이 함락되면서 보헤미아 왕국 전체가 개신교도들의 손에 들어갔다.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는 1619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2세가 이전에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지만,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실 군대의 침략을 우려한 신분 의회는 보헤미아 왕관령 (슐레지엔, 루사티아, 모라비아)의 다른 구성원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노력했고, 1619년 7월 31일 프라하에서 이들 국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기 위해 보헤미아 연맹을 결성했다. 이 협정에 따라 개신교는 보헤미아 영토의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1619년 8월, 모든 보헤미아 영토의 일반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상실했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모든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었고,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쾰른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는 이 결정이 20년, 40년, 또는 60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6]

보헤미아인들이 새 왕으로 선호한 후보는 작센 선제후였지만, 그는 왕위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프리드리히 5세는 황제와의 분쟁을 감수할 의향이 있는 유일한 고위 프로테스탄트 제후로 남게 되었다. 1619년 8월, 가브리엘 베틀렌이 헝가리 왕국에서 반 합스부르크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위 계승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이는 페르디난트 2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위해 이동하던 시기였다.

4. 2. 프라하 입성

보헤미아 왕국은 선거 군주제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526년부터 보헤미아 왕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었고, 1555년부터는 황제도 겸했다. 그러나 17세기 초 보헤미아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절대 군주제를 추구하고, 가톨릭 황제가 개신교도들에게 가톨릭을 강요할 것을 우려했다. 루돌프 2세 황제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고, 루돌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보헤미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1609년 국왕 칙서를 발표하여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루돌프를 의심했고,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연락했다.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마티아스를 루돌프의 후계자로 선출했고, 마티아스는 1611년 보헤미아 왕, 1612년 황제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 내에서는 마티아스를 대체할 프로테스탄트 후보로 프리드리히가 거론되었다. 팔츠 전략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왕이 되면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깰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근거 없는 가정이였다.

1617년, 마티아스는 슈티리아 공작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위 후계자로 선출했다. 페르디난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많은 개신교 귀족들은 그가 국왕 칙서를 철회하려 한다고 믿었다. 황실 관리들이 개신교도들에게 주교 소유 토지에 개신교 교회 건설을 중단하라고 명령하면서 의심은 커졌다. 개신교도들은 이 토지가 국왕 칙서에 의해 보헤미아 권한에 속한다고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618년 5월 23일, 친드리히 마티아스 투른 백작이 이끄는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을 습격하여 두 명의 황실 총독을 창밖으로 던졌다. (프라하의 두 번째 창밖 투척 사건) 이는 보헤미아 반란의 시작이자 30년 전쟁의 발발이었다.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보헤미아에 개입했지만, 처음에는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지명하는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처음에는 황제에게 반항할 의지가 없었지만,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헤미아 투표 책임을 예수회와 합스부르크 궁정의 스페인 측에 돌렸다.

1618년 11월 프라하에서 프리드리히가 보헤미아 왕 후보로 언급되었다. 팔라틴 외교관 크리스토프 폰 도나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프리드리히의 왕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제임스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 제후들도 종교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과 작센 선제후의 반대로 이 아이디어를 거부했다.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백작 휘하 군대를 보내 보헤미아 반군을 지원했다. 1618년 8월, 만스펠트 군대가 보헤미아에 진입하여 필젠 포위전을 이끌었고, 11월 21일 필젠 함락으로 왕국 전체가 개신교도 손에 들어갔다.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는 1619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지만,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분 의회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다른 구성원들과 동맹을 모색했고, 1619년 7월 31일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연맹을 결성했다. 개신교는 보헤미아 영토의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1619년 8월, 모든 보헤미아 영토의 일반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위 상실을 선언했다. 쾰른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는 이 결정이 20년, 40년, 60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6]

보헤미아인들은 작센 선제후를 새 왕으로 선호했지만, 그는 왕위를 거부했다. 프리드리히는 황제와의 분쟁을 감수할 의향이 있는 유일한 선임 프로테스탄트 제후였다. 1619년 8월, 가브리엘 베틀렌이 헝가리 왕국에서 반 합스부르크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왕위 가능성이 커졌다.

1619년 8월 26일, 보헤미아 연합 국가들은 프리드리히를 새로운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고, 프리드리히는 8월 29일 암베르크에서 선출 소식을 받았다.[7]

이틀 뒤,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페르디난트에 반대 투표를 한 유일한 선제후였다. 선거 회의는 보헤미아 연합의 페르디난트 제거 시도를 비난하고, 1617년 투표가 구속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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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왕위 수락 결정은 역사적 추측의 대상이었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여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주된 이유라고 묘사했다.[8] 최근 역사학자들은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주로 동료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의무감에 근거한 것으로 결론 내렸지만, 프리드리히는 황제에 대한 의무와 종교적 형제들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망설였다. 경제적 고려 사항도 있었는데,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두 지역 연합이 상업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619년 9월 12일, 프로테스탄트 연합은 프리드리히에게 보헤미아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 공작 카를 에마누엘 1세,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는 서한을 보냈다. 가브리엘 베틀렌만이 격려의 말을 전했다.

9월 24일부터 28일 사이, 프리드리히는 "전능하신 분의 뜻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했다.[9] 네덜란드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덴마크, 스웨덴은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했다.

1619년 9월 29일, 프리드리히는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프라하로 향했다. 그는 안스바흐, 암베르크, 노이마르크트, 발트자센을 거쳐 보헤미아 신분 의회 대표들을 만났다. 그들은 함께 체브, 소콜로프, 자테츠, 로우니, 스라니를 거쳐 갔다. 1619년 10월 31일, 프리드리히는 568명과 100대의 마차를 이끌고 프라하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4. 3. 대관식

프리드리히 5세는 1619년 11월 4일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성 바츨라프 왕관을 쓰고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프라하 대주교가 아닌 교구의 우트라키스트 행정관 이르지 디카스투스와 개신교 장로 얀 치릴 슈팔레크 z 트르제비체에 의해 거행되었다.[10] 이는 칼뱅주의 신자였던 프리드리히 5세의 종교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었다.

전례는 카를 4세의 대관식에 사용된 것을 본떴으나, 몇 가지 변경 사항이 있었다. 연도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불렸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연도를 말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는 거의 반대 없이 성유를 받았다.[10] 대관식이 끝나자 신분들은 프리드리히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관식은 호화로운 파티로 축하되었지만, 당시 보헤미아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많은 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다.[10] 이러한 상황은 프리드리히 5세의 통치가 시작부터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보여준다.

4. 4. 통치

보헤미아 왕국은 선거 군주제였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526년부터 보헤미아 왕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였고, 1555년부터는 황제도 겸했다. 그러나 17세기 초 보헤미아는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절대 군주제를 추진한다고 우려했고, 많은 보헤미아 귀족들은 개신교도였기에 가톨릭 황제가 가톨릭을 강요할 것을 두려워했다. 루돌프 2세 황제에 대한 반대가 커졌고, 루돌프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후 보헤미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1609년 국왕 칙서를 발표하여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럼에도 보헤미아 귀족들은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연락을 취했다.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마티아스를 루돌프의 후계자로 선출했고, 마티아스는 1611년 보헤미아 왕, 1612년 황제가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 내에서는 마티아스를 대체할 프로테스탄트 후보 논의가 있었고, 프리드리히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팔츠 전략가들은 프리드리히가 왕이 되면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동맹을 깰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는 근거 없는 가정이였다.

한편, 보헤미아의 종파 갈등은 계속되었다. 1617년, 마티아스는 슈티리아 공작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위 후계자로 선출했다. 페르디난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많은 개신교 귀족들은 그가 국왕 칙서를 철회하려 한다고 믿었다. 황실 관리들이 개신교도들에게 주교 소유 토지에 개신교 교회 건설 중단을 명령하자 의심은 커졌다. 개신교도들은 이 토지가 국왕 칙서에 의해 보헤미아 권한에 속한다고 주장했지만, 합스부르크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618년 5월 23일, 친드리히 마티아스 투른 백작이 이끄는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을 습격하여 프라하의 두 번째 창밖 투척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보헤미아 반란과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처음에는 프리드리히를 왕으로 지명하는 것을 제안하지 않았지만, 프리드리히는 황제에게 반항할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헤미아 투표 책임을 예수회와 합스부르크 궁정의 스페인 측에 돌렸다.

1618년 11월 프라하에서 프리드리히가 유력한 보헤미아 왕 후보로 언급되었다. 크리스토프 폰 도나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에게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제임스는 부정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연합 제후들도 종교 전쟁 가능성과 작센 선제후의 반대로 거부했다.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백작 휘하 군대를 보내 보헤미아 반군을 지원했다. 1618년 8월, 만스펠트 군대가 보헤미아에 진입하여 필젠 포위전을 이끌었고, 11월 21일 필젠 함락으로 왕국 전체가 개신교도 손에 들어갔다.

마티아스, 신성 로마 황제는 1619년 3월 20일에 사망했다.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지만, 보헤미아 신분 의회는 인정을 거부했다. 신분 의회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다른 구성원들과 동맹을 모색했고, 1619년 7월 31일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연맹을 결성했다. 개신교는 보헤미아 영토의 사실상 국교가 되었다. 1619년 8월, 모든 보헤미아 영토의 일반 의회는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위 상실을 선언했다. 쾰른 대주교인 바이에른의 페르디난트는 이 결정이 20년, 40년, 60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6]

보헤미아인들이 선호하는 새 왕 후보는 작센 선제후였지만, 그는 거부했다. 프리드리히는 가장 선임 프로테스탄트 제후로 남았다. 1619년 8월, 가브리엘 베틀렌이 헝가리 왕국에서 반 합스부르크 반란을 일으키면서 프리드리히의 가능성이 커졌다.

1619년 8월 26일, 보헤미아 연합 국가들은 프리드리히를 새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고, 프리드리히는 8월 29일 암베르크에서 소식을 받았다.[7]

이틀 뒤,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페르디난트에 반대 투표한 유일한 선제후였다. 선거 회의는 보헤미아 연합의 페르디난트 제거 시도를 비난하고,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왕으로 만든 1617년 투표가 구속력이 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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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왕위 수락 결정은 많은 역사적 추측의 대상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실러가 받아들인 견해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여왕이 되고자 하는 열망에 근거한 것이라고 묘사했다.[8] 최근 역사학자들은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동료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의무감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지만, 프리드리히는 황제에 대한 의무와 종교적 형제들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망설였다. 안할트-베른부르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두 지역 연합이 상업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1619년 9월 12일, 프로테스탄트 연합은 프리드리히에게 보헤미아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 공작 카를 에마누엘 1세, 베네치아 공화국은 지원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가브리엘 베틀렌만이 격려했다.

9월 24일부터 28일 사이,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 왕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9] 네덜란드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덴마크, 스웨덴은 프리드리히를 보헤미아 왕으로 인정했다.

1619년 9월 29일, 프리드리히는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프라하로 향했다. 1619년 10월 31일, 프리드리히는 프라하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프리드리히는 1619년 11월 4일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성 바츨라프 왕관을 착용했다. 대관식은 프라하 대주교가 아닌 교구의 우트라키스트 행정관 이르지 디카스투스와 개신교 장로 얀 치릴 슈팔레크 z 트르제비체에 의해 거행되었다. 전례는 카를 4세의 대관식을 본떠 변경되었다. 연도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불렸다. 프리드리히는 거의 반대 없이 성유를 받았다. 대관식이 끝나자 신분들은 프리드리히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관식은 호화로운 파티로 축하되었지만, 국토는 전쟁으로 황폐화되었고 많은 난민들이 있었다.[10]

프리드리히는 취약한 왕관과 내부 분열로 찢어진 국가를 떠맡았다. 국가는 재정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보헤미아 왕들은 귀족들의 호의와 국회의 세금 할당에 의존했기에 자금 조달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독일 가톨릭 연맹과의 전쟁 비용을 위해 더 높은 세금이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국가는 이미 장기 전쟁 이후 과중한 부담을 느꼈다.

프라하에서 프리드리히는 곧 귀족과 성직자들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부부는 체코어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궁정 관료들은 주로 외국인이었고, 지방 행정은 지역 귀족들에게 맡겨졌다.

프리드리히 5세의 궁정 설교자 아브라함 스쿨테투스는 보헤미아에서 칼뱅주의를 진전시키려 했다. 우트라퀴스트 교회는 성유물과 성상을 유지했지만, 스쿨테투스는 성상 파괴를 시작했다. 1619년 12월 21일부터 성상이 성 비투스 대성당에서 제거되었고, 12월 27~28일에는 루카스 크라나흐 (아버지)의 프라하 제단화가 파괴되었다. 성 바츨라프 무덤 훼손 소문도 돌았다. 스쿨테투스의 우상 파괴는 인기가 없었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을 멀리하려 했다.

thumb를 담고 있으며 프리드리히를 "겨울왕"이라고 칭했다.]]

"겨울왕"이라는 별명은 프리드리히 통치 시작 직후 나타났고, 1619년 황실 팸플릿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선전가들은 프리드리히가 "겨울 사자"이며 "여름 사자"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응했다.[11]

한편,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소집했다. 1619년 10월 21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과 가톨릭 연맹 지도자와 조약을 체결했다. 막시밀리안은 프리드리히에 대항하는 군대 사령관이 되고, 점령된 보헤미아 영토를 유지하며, 프리드리히의 선제후 칭호를 받기로 약속했다. 황제는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의 지지도 얻었다. 요한 게오르크의 궁정 설교자 마티아스 회 폰 호에네크는 황제에게 프리드리히와 보헤미아인을 분쇄하도록 격려했다.[12]

프리드리히의 재상 크리스티안 폰 안할트는 1619년 12월 뉘른베르크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 회의를 소집했지만 실패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대표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1620년 3월, 뮐루즈에서 황실 측 회의에서 프리드리히는 법적 변호를 보냈다. 그는 보헤미아가 신성 로마 제국 밖에 위치해 제국 평화를 어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이 포함된 회의는 프리드리히 주장을 거부하고 보헤미아가 제국의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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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4월 1일, 황실 측은 프리드리히에게 6월 1일까지 보헤미아를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발표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와 조약을 체결하여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에서 루터교 실행을 보장하고 네덜란드의 세속적인 지역을 인정했다. 페르디난트는 요한 게오르크에게 루사티아를 주기로 했다.

1620년 3월 25일, 보헤미아 연합 의회에서 프리드리히는 증세와 징병을 요구했다. 프리드리히는 개인 자금을 사용하고 보석을 전당 잡았으며, 1620년 5월 팔츠를 파산에 이르게 했다.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의 제임스 6세 및 1세는 군사 지원을 거부했다. 네덜란드는 소규모 병력만 파견했다. 1620년 7월 3일 프로테스탄트 연합은 울름 조약 (1620년)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지원을 철회하고 중립을 선언했다.

4. 4. 1. 백산 전투 (1620년 11월 8일)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은 린츠, 오스트리아 상부를 점령한 후, 1620년 9월 26일에 보헤미아 국경을 넘었다. 로키차니에서 막시밀리안의 군대는 프리드리히가 징집에 성공한 15,000명의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고, 보수도 형편없으며, 장비도 열악한 군대와 처음으로 마주쳤다.[11] 프리드리히는 1620년 9월 28일에 자신의 군대를 방문했지만, 군사적 배경이 부족했기에 전쟁 지휘는 장군들에게 맡겼다. 프리드리히는 보급품을 조직하고 요새를 준비하는 데 집중했다.[11]

일련의 소규모 전투 후, 1620년 11월 5일,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프라하 쪽으로 물러나게 했고, 황제군이 그들을 따라갔다. 11월 7일, 보헤미아군은 프라하 외곽의 백산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전날, 프리드리히 왕은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고 격려했다. 그런 다음 그는 프라하로 달려가 보헤미아 의회에 그의 군대를 위한 자금을 마련해 달라고 간청하고 영국 왕의 사절을 맞이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1620년 11월 8일, 프리드리히가 군대로 돌아가려 했을 때, 그는 프라하 성문에서 도망치는 자신의 군대 병사들과 그의 재상 안할트를 만나 재앙을 통보받았다. 보헤미아군은 그날 아침 백산 전투에서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이었다.[11]

1619년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들은 가톨릭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 즉위를 제안했다. 그 이유는 프리드리히 5세가 개신교 동맹의 유력한 멤버였기 때문이며, 이 동맹은 프리드리히 5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4세가 제국 내 개신교를 옹호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었다.[14]

프리드리히 5세는 즉위를 수락했지만, 동맹자여야 할 개신교 동맹은 프리드리히 5세에게 군사적 지원에 실패했다. 반대로 페르디난트 2세는 프리드리히의 종형인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 1세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연맹을 비롯한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얻었다. 스페인 군이 프리드리히 5세의 본거지인 팔츠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보헤미아의 황제파 귀족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후 준비를 갖춰 보헤미아로 출병했다. 이듬해 1620년 11월 8일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 귀족 연합군은 가톨릭 군에게 패배했고, 프리드리히 5세의 보헤미아 왕으로서의 통치는 끝났다.[14]

4. 5. 도피

보헤미아 왕국에서 백산 전투 패배 후, 프리드리히 5세는 1620년 11월 9일 아내와 자녀, 몇몇 고문관들과 함께 실레시아의 수도인 브레슬라우로 도망쳤다. 이때 보헤미아 왕관 보석 외에는 많은 짐을 챙기지 못했다.[11] 막시밀리안은 프리드리히가 떠난 직후 프라하를 점령했다. 실레시아에서 프리드리히는 복수를 계획했지만, 실레시아 의회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1621년 초 그는 실레시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11]

당시 팜플렛 제작자들은 프리드리히가 프라하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가차 없이 묘사했다. 특히 프리드리히의 가터 훈장이 프라하에서 발견된 후, 팜플렛 제작자들은 그가 양말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을 일상화했다.[11]

1621년 1월,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와 안할트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하여 그를 평화 위반, 반군 지원, 반역 혐의로 비난하고 그의 토지와 작위를 몰수했다.[11] 1621년 4월, 프리드리히는 헤이그에서 아내와 합류했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영토 재정복 지원 계약을 체결했다.[11]

보헤미아에서는 반란 진압의 결과로 1621년 6월 21일 구시가 광장 처형에서 27명의 보헤미아 귀족들이 처형되었다.[11] 이후 12명의 귀족의 머리와 요아힘 안드레아스 폰 슐리크의 손은 카를교의 구시가 타워에 못 박혔고, 10년 동안 그곳에 남아 있었다.[11] 선출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의회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으며, 칙령은 페르디난트 자신이 찢어버렸다.[11] 루터교만이 보헤미아에서 용인되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나머지 인구는 적극적으로 재가톨릭화될 것이었다.[11] 보헤미아는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11]

프리드리히는 여생의 대부분을 아내와 가족과 함께 망명지인 헤이그에서 보냈고, 1632년 마인츠에서 페스트로 사망했다.[16]

5. 팔츠 영토 상실 (1621–1622)

1621년 여름, 프리드리히가 프라하로 떠났을 때 츠바이브뤼켄의 요한 2세 백작이 선제후 팔츠를 섭정했으나 사임했다. 이 시기에 프리드리히는 제국 추방령에 처해져 영토 몰수가 허용되었고, 사실상 무법자가 되었다.[15]

5. 1. 세습 영지 함락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상부 팔츠를 점령하고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의 축출 시도에 성공적으로 저항했다.[15] 1622년 초, 만스펠트는 라인 팔츠로 이동했고, 4월 21일 프리드리히는 그와 합류했다. 프리드리히는 다른 개신교 제후들을 설득하여 개신교 연합을 재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622년 4월 27일 비즐로흐 전투에서 틸리의 군대에 승리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프리드리히 군은 1622년 5월 6일 빔프펜 전투에서 패배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4세 휘하의 군대는 1622년 6월 20일 회흐스트 전투에서 완패했다.

프리드리히는 만스펠트의 영향력을 점점 더 많이 받았고 개신교 대의에 환멸을 느꼈다. 프리드리히의 묵인 하에 만스펠트는 다름슈타트를 습격,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 5세 방백과 그의 아들 요한을 인질로 잡았다. 이는 명백한 제국법 위반이었고, 프리드리히가 유럽에서 가진 동정심을 잃게 했다. 만스펠트는 알자스로 후퇴하며 도시 하나와 마을 서른 곳을 불태웠다.

프리드리히는 세습 영토 재정복이 불가능함을 확신하고 만스펠트를 해임했다. 이후 틸리와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휘하의 군대가 팔츠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을 완료했다. 11주간의 포위 끝에 하이델베르크는 1622년 9월 19일에 함락되었고, 만하임도 1622년 11월 5일에 함락되었다. 프랑켄탈의 영국 수비대만이 저항했다. 하이델베르크 정복 후 개신교 교회는 폐쇄되었고, 대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막시밀리안의 요청에 따라 유명한 ''팔라티나 도서관''(3500개 필사본)이 가톨릭 연맹 지원금 에 대한 감사 선물로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게 증정되었다.

6. 망명 (1622–1632)

1622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헤이그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프리드리히는 망명 생활 동안 자신의 영지와 선제후 지위를 되찾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29년 1월 17일,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포획한 스페인 보물 함대를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던 중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프리드리히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장남인 15세의 팔츠의 프리드리히 헨리는 익사했다. 프리드리히 자신도 이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 15개월 동안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6. 1. 망명 정부

1622년 말과 1623년 초, 프리드리히는 헤이그에 팔츠 망명 정부를 조직했다. 이 팔츠 의회는 루드비히 카메라리우스가 이끌었다.[15]

프리드리히는 망명 정부의 일상적인 업무 대부분을 고문들에게 맡겼지만, 재정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행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매우 인색했지만, 왕실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건축과 오락에 막대한 돈을 썼고,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의 기부금을 빠르게 탕진했다. 예를 들어, 1629년에 프리드리히는 바르톨로메우스 반 바센에게 르넨에 '코닝스후이스'라는 대규모 여름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다. 1631년에 완공된 이 궁전은 넓은 중앙 저택, 안뜰, 남쪽으로 뻗어 있는 두 개의 날개가 있는 2층짜리 본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넓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그곳에서 사냥과 긴 산책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624년~1625년1627년에 프리드리히와 황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황제와 타협할 의향이 있었지만, 자신의 영토와 선제후 지위의 회복을 원했고, 황제는 이를 프리드리히에게 돌려줄 의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군사적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1626년 8월 27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의 군대가 루터 전투에서 틸리에게 격파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좌절되었다.

레겐스부르크 제국 회의 (1630년)에서 프리드리히는 보헤미아 왕위를 수락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1631년 3월, 그는 외교관 로버트 앤스트러더 경을 파견하여 제국 추밀원 의장 퓌르스텐베르크 백작 에른스트 에곤 8세와 프리드리히의 영토 회복에 대한 논의를 갖도록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사망했다.

6. 2. 외교적 노력과 좌절

1622년 말과 1623년 초, 프리드리히는 헤이그에 팔츠 망명 정부를 조직했다. 이 팔츠 의회는 루드비히 카메라리우스가 이끌었다.

스페인 결혼 협상 과정에서 프리드리히는 장인인 제임스 1세에게 결혼을 진행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13] 하지만 이후 30년 전쟁 당시 제임스 1세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14]

1624~25년과 1627년에 프리드리히와 황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황제와 타협할 의향이 있었지만, 자신의 영토와 선제후 지위 회복을 원했고, 황제는 이를 프리드리히에게 돌려줄 의향이 없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토를 군사적으로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1626년 8월 27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의 군대가 루터 전투에서 틸리에게 격파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좌절되었다.

1631년 3월, 프리드리히는 외교관 로버트 앤스트러더 경을 파견하여 제국 추밀원 의장 퓌르스텐베르크 백작 에른스트 에곤 8세와 프리드리히의 영토 회복에 대한 논의를 갖도록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사망했다.

6. 3. 개인적 불행

1629년 1월 17일, 프리드리히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포획한 스페인 보물 함대를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가던 중, 하를레메르메르 근처 하를렘의 호수를 건너던 배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16] 프리드리히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장남인 15세의 팔츠의 프리드리히 헨리는 익사했다.[16] 프리드리히 자신도 이 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어 15개월 동안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16]

프리드리히는 망명 정부의 일상 업무 대부분을 고문들에게 맡겼지만, 재정에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행정부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지만, 왕실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건축과 오락에는 막대한 돈을 썼고,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의 기부금을 빠르게 탕진했다.[16] 1629년, 그는 바르톨로메우스 반 바센에게 르넨에 '코닝스후이스'라는 대규모 여름 궁전을 짓도록 의뢰했다. 1631년에 완공된 이 궁전은 넓은 중앙 저택, 안뜰, 남쪽으로 뻗어 있는 두 개의 날개가 있는 2층짜리 본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넓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그곳에서 사냥과 긴 산책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16]

7. 죽음

1630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30년 전쟁에 개신교 측으로 참전하면서,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령 회복을 기대했으나, 구스타브 2세는 팔츠 선제후령을 스웨덴의 봉토로 삼고 루터교 신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라는 조건을 제시했고, 프리드리히는 이를 거부했다.

잉글랜드가 독일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지만, 1632년 11월 16일 뤼첸 전투 (1632년)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고, 프리드리히 또한 10월에 감염되어 1632년 11월 29일 마인츠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했다.[16]

7. 1.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의 만남

1630년,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30년 전쟁에 개신교 진영으로 참전하여 황제군을 상대로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에서 승리하고 남부 독일로 진격했다. 1631년 12월, 스웨덴군이 오펜하임을 점령하자, 프리드리히는 팔츠 선제후령을 회복할 기회라고 판단하고 하이델베르크로 향했다.

1632년 2월, 프리드리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만났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그에게 왕실 예우를 갖추었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의 팔츠 선제후령 회복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후 프리드리히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바이에른 공국 원정에 합류하여, 1632년 5월 17일 뮌헨 진격에도 동행했다. 그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프리드리히가 팔츠 선제후령을 스웨덴 국왕의 봉토로 유지하는 조건에 동의해야만 회복을 돕겠다고 밝혔다. 팔츠 선제후령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프리드리히에게 영토 내 루터교 신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다.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조건들을 거부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헤어졌다.[15]

7. 2. 사망

1632년 11월 29일 아침, 마인츠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했다.[16] 구스타브 2세 아돌프뤼첸 전투에서 전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프리드리히는 10월에 감염되어 몇 주 동안 병세가 악화되었고, 유명한 의사 페터 슈피나가 다름슈타트에서 마인츠로 호출되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 카를 1세 루드비히는 당시 15세였기 때문에, 그의 삼촌인 루드비히 필리프가 섭정을 맡았다. 프리드리히의 내장은 오펜하임의 성 카테리나 교회에 묻혔고, 방부 처리된 시신은 프랑켄탈로 옮겨졌다. 1635년 6월 9일, 스페인 군대가 접근하자 루드비히 필리프는 프리드리히의 시신과 함께 카이저슬라우테른으로 피신했다. 1637년 9월, 루드비히 필리프는 프리드리히의 시신을 스당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되지만, 프리드리히의 최종 안식처는 알려져 있지 않다.

8. 가계

1613년 2월 14일, 프리드리히 5세는 제임스 1세덴마크의 앤의 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두었다.[13]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자녀
이름출생 - 사망비고
프리드리히 하인리히1614년 ~ 1629년익사
카를 루트비히1617년 ~ 1680년팔츠 선제후
엘리자베트1618년 ~ 1680년헤르포르트 여원장, 데카르트와의 서신 교환으로 알려짐
루프레히트1619년 ~ 1682년컴벌랜드 공작, 잉글랜드 내전에서 활약
모리츠1620년 ~ 1652년잉글랜드 내전에 참전
루이제 마리아1622년 ~ 1709년모비송 여원장
루트비히1624년 ~ 1625년
에두아르트1625년 ~ 1663년
헨리에테 마리1626년 ~ 1651년라코치 지그몬드 백작과 결혼
요하네스 필리프 프리드리히1627년 ~ 1650년
샤를로테1628년 ~ 1631년
조피1630년 ~ 1714년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 하노버 왕가 초대 영국 국왕 조지 1세의 어머니
구스타프 아돌프1632년 ~ 1641년



장남 하인리히 프리드리히는 요절했고, 카를 루트비히를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자손은 가톨릭교도와 결혼하거나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혹은 서자였기에 상속권이 없었다. 딸들 또한 비교적 장수한 엘리자베트는 시집가지 않고 수도원에 갔으며, 헨리에테 마리처럼 시집간 경우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단절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이 아닌 자손은 막내딸 조피의 자손만이 남게 되었고, 이는 조피가 현 영국 왕위 계승권자 전원의 공통 선조가 되는 근거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와 네덜란드 총독이자 오라녜 공인 빌럼 1세의 딸 루이제 율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참조

[1] 백과사전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of the Rhine) https://www.britanni[...] 2014-08-16
[2] 웹사이트 Friedrich V. http://www.gwleibniz[...] The Houston Circle for the Study of Early Modern Philosophy 2014-08-16
[3] 서적 The Thirty Years' War Routledge & Kegan Paul Ltd
[4] 간행물 Elizabeth, Electress Palatine and Queen of Bohemia Methuen & Company
[5] 논문 Ernst von Mansfeld (1580–1626); Grafensohn, Söldnerführer, Kriegsunternehmer gegen Habsburg im Dreißigjährigen Krieg http://www.walter-kr[...] Duncker & Humblot
[6] 인용 Wallenstein
[7] 인용 Berning
[8] 문서 Geschichte des 30jährigen Kriegs
[9] 인용 Der Winterkönig. Friedrich von der Pfalz. Bayern und Europa im Zeitalter des Dreißigjährigen Krieges
[10] 문서 Krönung Friedrichs von der Pfalz zum böhmischen König
[11] 웹사이트 The Queen of Hearts and the Rosicrucian Dawn https://newtopiamaga[...] 2019-08-17
[12] 인용 Wedgwood
[13] 문서 Friedrich V. (Pfalz)
[14] 문서 Elisabeth Stuart
[15] 서적 デカルト 岩波書店 1966-07-20
[16] 인용 菊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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