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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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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라 제닝스, 말버러 공작부인은 1660년경에 태어나 1744년에 사망한 영국의 귀족 여성으로, 앤 여왕 시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존 처칠과 결혼하여 말버러 공작부인이 되었으며, 앤 여왕의 측근으로서 정치적 조언을 하며 국정에 참여했다. 앤 여왕의 신임을 얻어 왕실 법원의 최고 직책을 역임했지만, 아비게일 매샴의 등장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앤 여왕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몰락했다.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으며, 블레넘 궁전 건설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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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말버러 공작부인 사라 처칠
찰스 저바스가 1714년에 그린 사라의 초상화
존칭여공작 각하
출생명사라 제닝스
출생일1660년 6월 5일
출생지세인트올번스, 하트퍼드셔, 잉글랜드 왕국
사망일1744년 10월 18일
사망지세인트제임스, 런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배우자존 처칠, 초대 말버러 공작(1677/78년 결혼, 1722년 사망)
부모리처드 제닝스, 프랜시스 손허스트
자녀헨리에타 처칠, 제2대 말버러 여공작
앤 처칠, 선덜랜드 백작부인
존 처칠, 블랜드포드 후작
엘리자베스 처칠, 브리지워터 백작부인
메리 처칠, 몬태규 공작부인
안장지블레넘 궁전
직업앤 여왕의 의상 담당관
서명
직위
왕실 재정 관리관재임 기간: 1702년 ~ 1711년
군주: 앤
이전: 캐스퍼 헤닝
이후: 마샴 남작부인

2. 유년기

사라 제닝스는 1660년 6월 5일, 하트퍼드셔주 세인트올번스 홀리웰하우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91] 사라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었던 리처드 제닝스였고, 어머니는 프랜시스 톤허스트였다. 사라의 친할아버지는 존 제닝스였고, 친할머니는 앨리스 스펜서였다. 사라의 삼촌 마틴 리스터는 유명한 박물학자였다. 1663년, 리처드 제닝스는 시어머니 수잔 리스터 소유의 켄트 부동산 회수를 위한 협상 중에 찰스 2세의 남동생이자 후일 제임스 2세가 되는 요크 공작 제임스와 만났다. 제임스의 첫인상은 호의적이었고, 1664년 사라의 언니 프랜시스는 요크 공작부인 앤 하이드의 명예가정부가 되었다.[92]

프랜시스가 가톨릭 신자와 결혼했기 때문에 제임스는 프랜시스에게 직책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제임스는 프랜시스의 가족을 잊지 않았다. 1673년 사라는 제임스의 두 번째 부인인 모데나의 메리의 명예가정부로써 입궁했다.[92]

사라는 1675년경부터 어린 앤 공주와 친해졌고, 둘이 성장할수록 우정은 깊어졌다. 같은 해, 15세였던 사라는 자신보다 10살 더 많은 존 처칠과 만나 사랑에 빠졌다.[93] 찰스 2세의 정부(情婦) 바바라 팔머의 연인이었던 처칠은 사유지에 빚이 많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라는 제임스 2세의 부유한 정부이자 가족의 재산을 회복하는 것을 고민하는 처칠의 아버지 윈스턴 처칠이 선택한 캐서린 세들리와 경쟁 관계였다. 존은 프랑스로 떠난 클리블랜드 공작부인을 대신하여 사라가 정부가 되기를 바랐을 지도 모르지만, 사라가 존에게 보낸 편지들 중 남아있는 것들은 사라가 그런 역할을 맡지 않기를 원했다는 것을 보여준다.[94][95]

3. 결혼

1676년경, 17세의 사라는 장차 남편이 될 존 처칠을 만났다. 존은 당시 요크 공작 휘하의 군인이었다. 사라는 존에게 호감을 느꼈고, 존 또한 사라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당시 그는 요크 공작의 형인 찰스 2세의 애첩 버버라 팔머의 애인이었다. 그의 수입은 적었고, 친가도 부유하지 않았기에, 버버라의 애인으로 지내며 용돈을 받고 있었다. 또한, 존의 아버지 윈스턴은 몰락한 집안을 재흥시키기 위해 요크 공작의 애첩이자 부유한 여성인 캐서린 시드리와 아들을 결혼시키려 했다.[76]

1677년 사라의 오빠인 랄프가 죽었고, 사라와 여동생 프랜시스는 하트포드셔와 켄트에 있는 제닝스가의 부동산을 공동으로 상속받게 되었다. 존은 캐서린 세들리 대신 사라를 선택했지만 사라와 존의 가족 모두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에 사라와 존은 1677년 겨울 비밀리에 결혼했다.[97]

존과 사라는 둘 다 개신교도였지만, 궁정은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라는 요크 공작부인과 자신의 친구들 몇몇에게만 결혼 사실을 알렸고, 이 덕분에 사라는 궁정에서 명예가정부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98]

사라가 임신을 했을 때, 그녀의 결혼은 1678년 10월 1일 공표되었고, 사라 자신은 자신의 첫째 아이인 해리엇을 낳기 위해 궁정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사라는 아이를 사산했다. 가톨릭교도 계획으로 인해 요크 공작이 스코틀랜드로 스스로 망명했을 때, 존과 사라가 그를 따라갔고, 찰스 2세는 존을 스코틀랜드 아이머스 남작 처칠에 봉함으로써 존의 충성에 보답했다. 사라는 이에 따라 처칠 부인이 되었다. 요크 공작은 종교적 긴장이 완화되자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사라는 1683년 앤이 결혼하자 앤의 궁녀가 되었다.[76]

4. 제임스 2세 통치기

제임스 2세의 재위 기간 초기에는 가톨릭 군주가 개신교 국가를 통치하리라는 예상이 적어 비교적 성공적이었다.[99] 게다가 제임스 2세의 딸과 왕위 계승자는 모두 개신교도였다. 그러나 제임스 2세가 국교를 바꾸려 하자, 대중의 불만이 커졌다. 1688년 8월 10일 왕비 메리가 가톨릭교도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를 낳자,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100]

'이모털 세븐'이라 알려진 정치인들은 제임스 2세의 개신교도 딸 메리의 남편 오라녜 공 빌럼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해 제임스 2세를 권좌에서 제거할 것을 요청했고, 이 계획은 빠르게 대중에게 알려졌다. 제임스 2세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고, 사라 처칠과 앤 공주를 앤이 사는 화이트홀 궁전의 콕핏인코트에 가택 연금시켰다. 하지만 사라는 회고록에서 탈출이 어렵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라는 앤 공주의 안전을 위해 도주를 격려한 것처럼 묵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자신과 남편 존을 보호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102] 제임스 2세가 오라녜 공을 전투에서 패배시켰다면, 존 처칠과 사라를 수감하고 처형했을 수도 있었다.[102] 하지만 제임스 2세는 1688년 12월 프랑스 왕국으로 피신했고, 빌럼은 제임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99]

5. 윌리엄 3세 및 메리 2세 통치기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사라 처칠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사라의 남편 존 처칠에게 말버러 백작 작위를 수여했지만, 말버러 백작 부부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총애를 받았다.[13] 말버러 백작은 폐위된 제임스 2세를 지지했고, 사라 처칠은 앤 공주의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정부 고위 인사들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메리 2세는 앤 공주에게 사라를 해고하라고 요구했지만, 앤 공주는 이를 거절했고, 이는 메리 2세와 앤 공주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야기했다.[13]

1689년, 앤 공주의 지지자들(말버러 부부와 서머싯 공작 포함)은 앤 공주에게 의회 연금 5만 파운드를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앤 공주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4] 말버러 백작 부인은 이 법안의 배후로 여겨져 왕실에서 그녀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윌리엄 3세는 앤 공주를 자신의 관대함에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 비밀 자금(Privy Purse)에서 같은 금액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앤 공주는 백작 부인을 통해 비밀 자금에서 나오는 지원보다 의회의 지원이 더 안전하다고 지적하며 거절했다.[12] 결국 앤 공주는 의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14]

사라 처칠이 야당 지도자로서 성공하자 메리 2세의 말버러 부부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 커졌다. 메리 2세는 사라를 앤 공주의 곁에서 해고할 수 없었지만, 화이트홀 궁전에 있는 그녀의 숙소에서 사라를 퇴거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앤 공주는 이에 반발하여 궁을 떠났고, 사라와 함께 친구인 서머싯 공작 부부와 사이언 하우스에 머물렀다. 앤 공주는 망명한 제임스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지지하는 말버러 백작이 서명한 문서가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 부인의 해고 요구에 계속 저항했다. 이 문서는 위조범이자 타이투스 오츠의 제자인 로버트 영에 의해 위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츠는 1679년부터 1680년대 초까지 영국에서 강력한 반가톨릭 분위기를 조장한 것으로 유명했다.[15] 말버러 백작은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16] 이 사건들 동안 사라가 겪은 고독은 그녀와 앤 공주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15]

1694년 메리 2세가 천연두로 사망한 후, 윌리엄 3세는 왕위 계승자가 된 앤 공주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또한 말버러 백작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회복시키고 과거의 혐의를 모두 벗겨 주었다. 그러나 윌리엄 3세는 사라의 강력한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앤 공주를 정치에서 배제하고 그녀를 섭정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6. 앤 여왕 통치기

1702년 윌리엄 3세가 사망하면서 앤이 왕위를 계승했다. 앤은 존 처칠에게 공작 작위를 제안했으나, 사라는 초기에는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이를 망설였다. 그러나 앤이 의회 연금과 비밀 자금 지원을 약속하자 작위를 수락했다. 사라는 여왕의 의상 관리인, 왕실 변기 관리인, 비밀 자금 관리인, 윈저 대공원 관리인 등 요직을 맡았다. 특히 비밀 자금 관리인은 이후 사촌이자 경쟁자인 애비게일 매샴 남작 부인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그녀가 유일한 여성이었다.

앤 여왕 재위 기간 동안 말버러 공작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고, 사라는 영국에 머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앤은 사라에게 정치 상황을 알리고 조언을 구했다. 사라는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프리먼 부인"(사라)과 "몰리 부인"(앤)이라는 애칭을 사용하며 여왕을 관리했다.

하지만 앤 여왕은 사라의 지나친 간섭과 압도적인 태도에 점차 지쳐갔다. 특히 휘그당을 지지하는 사라가 사위인 선더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를 비밀 내각에 임명하라고 강요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토리당을 선호했던 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사라의 압력에 굴복했지만,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사라가 궁정에 소홀한 사이, 아비게일 힐이 앤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사라는 아비게일을 궁정에 소개하고 자리를 마련해 준 인물이었으나, 아비게일은 사라와 달리 온화하고 아첨하는 성격으로 앤의 신임을 얻었다. 1707년 아비게일의 비밀 결혼식에 앤이 참석한 사실을 뒤늦게 안 사라는 배신감을 느꼈다.

1708년 우데나르데 전투 승리 후 감사 예배에서 사라는 앤과 보석 문제로 다투었고, 공개적으로 "조용히 하라"고 말해 앤을 격분시켰다. 이후 둘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사라는 앤과 아비게일의 관계를 질투하며 앤에게 아비게일을 해임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앤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1710년 두 사람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1711년, 사라는 모든 직책을 잃고 엘리자베스 시모어와 아비게일 매샴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말버러 공작 부부는 블레넘 궁전 건설 지원금도 잃고 영국을 떠나 유럽을 여행했다. 앤 여왕은 1714년 사망할 때까지 사라와 화해하지 못했다.

6. 1. 권력의 정점

사라 처칠은 앤 여왕(사진) 재위 기간 동안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사망하자 앤이 여왕이 되었다. 앤은 즉시 존 처칠에게 공작 작위를 제안했지만 사라는 처음에 거절했다. 사라는 공작 작위가 가족 재정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했는데, 당시 공작 가문은 호화로운 연회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17] 앤은 의회로부터 연금 5000GBP를 평생 지급받는 것과 더불어 비밀 자금에서 연간 2000GBP를 추가로 받는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공작 작위를 받아들였다. 말보로 공작 부인은 즉시 여왕의 의상 관리인(여성이 맡을 수 있는 왕실 법원의 최고 직책), 왕실 변기 관리인, 비밀 자금 관리인, 윈저 대공원 관리인이 되었다. 그녀는 비밀 자금 관리인을 역임한 두 명의 여성 중 한 명이었으며, 윈저 대공원 관리인을 역임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비밀 자금 관리인으로서 그녀는 이 직책을 맡은 또 다른 유일한 여성인 사촌이자 라이벌인 애비게일 매샴 남작 부인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공작은 가터 훈장과 군대의 총사령관 직책을 수락했다.[18]

앤 여왕 재위 기간 대부분 동안 말보로 공작은 해외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공작 부인은 영국에 남아 있었다. 여왕 다음으로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궁정에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새로운 영지인 우드스톡 영지(후일 블레넘 궁전이 된 곳) 건설을 감독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공작의 블렌하임 전투 승리 후 앤 여왕의 선물이였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은 편지를 통해 정치적 발전에 대한 소식을 전했고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공작 부인의 조언을 구했다.

공작 부인은 여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아첨하지 않았다. 두 여성은 젊었을 때 서로를 위한 애칭을 만들었는데, 앤이 여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프리먼 부인"(사라)과 "몰리 부인"(앤)이었다. 사실상 사업 관리자인 공작 부인은 재정부터 왕실에 출입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여왕의 지위를 통제했다.[20][21] 그러나 앤 여왕은 절친에게 친절과 동정심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라는 이 점에서 앤의 곁에 있었다고는 할 수 없었고, 앤을 지배하기만 했다. 사라는 사위인 3대 선더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를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해달라고 여왕에게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사라는 전쟁에서 남편을 지지했던 휘그당 편이었고, 휘그당 측도 사라를 여왕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토리당을 지지하고 과격한 휘그당을 싫어했던 앤 여왕은 선더랜드 백작을 임명하지 않았다. 사라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고돌핀 백작 시드니 고돌핀(여왕과 친분이 있었다)을 이용하여 선더랜드 백작의 임명을 추진했지만, 자신도 여왕에게 계속해서 간청했다.

1705년, 선더랜드 백작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으로 특사로 임명되었지만, 같은 해 앤 여왕이 고돌핀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돌핀을 신뢰하지만 사라를 예전의 절친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80] 1706년에 사라는 앤 여왕에게 간청하여 선더랜드 백작을 국무장관으로 임명시켰지만, 앤 여왕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고돌핀과 말버러 공작도 앤 여왕의 신임을 잃어갔다.[80]

6. 2. 영향력 약화

앤 여왕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친절과 연민을 기대했지만, 말버러 공작부인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너그럽지 못했고, 앤 여왕을 자주 압도하고 지배했다.[22] 주요 정치적 불일치는 공작부인이 사위인 선더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를 비밀 내각에 임명하라고 고집했을 때 발생했다. 공작부인은 전쟁에서 말버러 공작을 지지했던 휘그당과 더욱 강하게 연합했고, 휘그당은 공작부인의 왕실 총애자로서의 지위를 이용하기를 바랐다.[22]

앤 여왕은 선더랜드를 임명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던 급진적인 휘그당을 싫어했다.[23] 공작부인은 앤 여왕이 신뢰했던 고돌핀 백작 시드니 고돌핀과의 긴밀한 우정을 이용하여 결국 그러한 임명을 확보했지만, 스스로 앤 여왕에게 계속 로비를 했다. 그녀는 앤 여왕을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휘그당 관련 자료를 앤 여왕에게 보냈다.[24]



친구 관계 초기에 앤 여왕이 칭찬했던 공작부인의 솔직함과 계급에 대한 무관심은 이제 참견으로 여겨졌다. 공작부인은 당시 가장 권력 있는 두 사람인 말버러 공작(그녀의 남편)과 고돌핀 백작과 강력한 친분을 맺고 있었다. 고돌핀은 공작부인과 절친이었지만, 앤 여왕이 즉위한 후 고위직을 거절하는 것을 고려했으며, 조용히 살고 말버러 공작부인의 정치적 편에서 멀어지는 것을 선호했다. 고돌핀 백작은 공작부인이 고압적이고 간섭적이며, 공작이 없을 때 그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26]

공작부인은 항상 충고를 하고, 의견을 표명하고, 노골적인 비난으로 반박하며, 모든 가능한 경우에 자신의 말을 할 것을 고집했다.[27] 그러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는 매력과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재치로 만난 사람들을 쉽게 기쁘게 할 수 있었다.[27]

앤 여왕이 진정한 애정을 거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말버러 공작부인이 궁정에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에 좌절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치적 차이도 있었는데, 여왕은 토리당을, 공작부인은 휘그당을 지지했다. 공작부인은 앤 여왕의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공유하지 않았고, 마지막 긴장된 면담에서 공작부인에 대한 불합리한 잔인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수를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앤 여왕에게 경고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여왕은 이러한 차이가 그들 사이에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항상 남편을 생각했던 공작부인은 앤 여왕이 휘그당에 더 많은 지원을 해주기를 바랐고, 앤 여왕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23]

1703년, 말버러 공작부인은 케임브리지로 불려갔는데, 거기서 그녀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존, 블랜드퍼드 후작이 천연두로 병들었다. 공작은 전쟁에서 소환되었고 1703년 2월 20일에 사망할 때 그의 곁에 있었다. 공작부인은 아들의 죽음으로 비통해하며 한동안 은둔 생활을 했고, 앤 여왕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 편지를 답장하지 않거나 냉담하고 형식적인 태도로 답장함으로써 슬픔을 표현했다.[28]

1708년 앤 여왕의 남편인 덴마크 왕자 조지가 사망한 후, 초대받지 않은 공작부인은 켄싱턴 궁전에 도착하여 앤 여왕이 왕자의 시신과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슬픔에 잠긴 여왕에게 켄싱턴에서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으로 이사할 것을 압박했지만, 앤 여왕은 단호히 거절하고 대신 공작부인에게 애비게일 매샴을 부르라고 명령했다. 매샴이 앤 여왕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공작부인은 여왕에게 불복종했고, 대신 덴마크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에 대해 여왕을 질책했다. 앤 여왕은 결국 항복하여 세인트 제임스 궁전으로 가도록 허락했지만, 공작부인의 무감각은 그녀를 크게 모욕했고 이미 심각한 관계의 긴장을 더했다.[29]



1708년 7월, 말보로 공작과 그의 동맹인 오이겐 공은 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감사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말보로 공작 부인은 앤 여왕과 예배에 착용한 보석에 대해 다투었고, 여왕이 승리를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는 공작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여왕이 공개적으로 휘그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암시는 앤 여왕을 불쾌하게 했고, 예배 중에 공작 부인은 앤 여왕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자 "조용히 하라"고 말하며 여왕을 더욱 불쾌하게 했다.[33]

앤 여왕은 공작 부인에게 보낸 다음 편지에서 공작 부인이 자신에게 침묵하라고 한 "명령"을 비꼬는 어조로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던 공작 부인은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녀의 사과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앤 여왕은 말보로 공작에게 편지를 써서 공작 부인과의 불화를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도록 격려했지만, 그는 아내의 경솔한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고돌핀과 다른 휘그당 장관들의 지지 하에 앤 여왕에게 글과 말로 휘그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대중의 휘그당 지지 소식은 공작 부인과 고돌핀의 편지를 통해 공작에게 전달되었고, 이는 공작이 여왕에게 하는 정치적 조언에 영향을 미쳤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앤 여왕은 이용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기분이었고, 탈출구를 간절히 원했다. 그녀는 온화하고 조용한 위안을 아비가일 마샴에게서 찾았다.

앤 여왕은 이전에 공작 부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설명했는데, 공작 부인이 여왕의 총애를 잃었다는 어떤 징후라도 공작의 육군 총사령관(captain-general)으로서의 권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인은 순전히 남편의 육군 총사령관직을 위해 모든 직책을 유지했고, 두 여성 사이의 긴장은 1711년 초까지 계속되었다.[34]

공작 부인은 아비가일 마샴에 대한 앤 여왕의 애정을 알게 된 후 항상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는 말보로 공작과 휘그당 대부분과 함께 앤 여왕에게 마샴을 해임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앤 여왕이 마샴의 토리당 영향력을 의심한 휘그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의회 요구를 받는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조차도 이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35] 이 모든 상황은 윌리엄과 메리 여왕 시대에 앤 여왕이 사라 처칠을 포기하기를 거부한 것을 연상시켰지만, 의회의 개입 위협은 1690년대에 앤 여왕에게 가해진 어떤 것보다 심했다.

결국 앤 여왕이 승리했다. 그녀는 양당의 고위 정치인들과 면담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그 동의안에 반대해 달라고 간청했다. 일반적인 견해는 말보로 부부가 사소한 일로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앤 여왕이 마샴에게 보인 열정과 여왕이 그녀를 해임하기를 거부한 완고함은 공작 부인을 격분시켜 두 여성 사이에 성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36] 앤 여왕의 남편을 애도하는 기간 동안 공작 부인은 적절한 상복(mourning clothes)을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앤 여왕의 슬픔을 진심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37]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평화를 지지하는 대중적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38] 앤 여왕은 더 이상 말보로 공작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날조된 횡령(embezzlement) 혐의로 그를 해임할 기회를 잡았다.[39]

6. 3. 아비게일 매샴의 등장

공작부인은 이전에 가난한 사촌인 아비게일 힐을 궁정에 소개해 그녀를 위한 자리를 찾아주려 했다. 공작부인의 이모 엘리자베스 힐(제닝스)의 장녀인 아비게일은 켄트의 존 리버스 경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친절과 가족적 연대 의식에서 아비게일에게 세인트 올번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일자리를 주었고, 이후 1704년 앤 여왕의 침전 시녀(Lady of the Bedchamber)가 되었다. 공작부인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힐을 "모든 면에서 자매처럼" 키웠다고 주장했지만, 어려운 환경에 대한 당혹감 때문에 그녀를 도왔다는 암시도 있었다.[30]

힐은 아버지 쪽으로는 토리당 지도자였던 옥스퍼드와 모티머 백작 로버트 할리의 사촌이었다. 아첨하고, 미묘하며, 내성적인 힐은 지배적이고, 무뚝뚝하며, 신랄한 말버러 공작부인과는 정반대였다. 공작부인이 궁정에 자주 결석하는 동안, 힐과 앤은 가까워졌다. 힐은 앤이 공작부인에게서 갈망했던 친절과 연민을 여왕에게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해 여왕에게 압력을 가하지도 않았다. 앤은 힐의 아첨과 매력에 호응했다. 1707년 힐이 조지 왕자의 침전 시종(groom of the bedchamber)인 새뮤얼 매샴과 비밀 결혼식을 올릴 때 앤은 공작부인 몰래 참석했다.[31]

공작부인은 앤과 아비게일 매샴 사이의 어떤 우정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아비게일이 여왕을 자주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놀랐다.[12] 공작부인은 매샴의 결혼이 있은 지 몇 달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앤을 만나 그 사건을 알리려고 했다. 그 면담에서 앤은 매샴에게 결혼 사실을 공작부인에게 알리라고 간청했다고 실수로 말했고, 공작부인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12] 일주일 동안 하인들과 왕실 가족에게 매샴의 결혼에 대해 질문한 후, 공작부인은 여왕이 그 자리에 있었고 아비게일에게 비밀 자금(Privy Purse)에서 2000GBP의 지참금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공작부인에게 앤이 표리부동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밀 자금 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공작부인은 그러한 지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6. 4. 몰락

1708년 7월, 말보로 공작과 그의 동맹인 오이겐 사보이아 공은 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33]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감사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말보로 공작 부인은 앤 여왕과 예배에 착용한 보석에 대해 다투었고, 여왕이 승리를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는 공작의 편지를 보여주었다. 여왕이 공개적으로 휘그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암시는 앤 여왕을 불쾌하게 했고, 예배 중에 공작 부인은 앤 여왕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이자 "조용히 하라"고 말하며 여왕을 더욱 불쾌하게 했다.[33] 앤 여왕은 공작 부인에게 보낸 다음 편지에서 공작 부인이 자신에게 침묵하라고 한 "명령"을 비꼬는 어조로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드물었던 공작 부인은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녀의 사과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앤 여왕은 말보로 공작에게 편지를 써서 공작 부인과의 불화를 공개적으로 알리지 않도록 격려했지만, 그는 아내의 경솔한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 공작 부인은 고돌핀과 다른 휘그당 장관들의 지지 하에 앤 여왕에게 글과 말로 휘그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앤 여왕은 이용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기분이었고, 아비가일 마샴에게서 위안을 찾았다. 앤 여왕은 이전에 공작 부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설명했는데, 공작 부인이 여왕의 총애를 잃었다는 어떤 징후라도 공작의 육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권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작 부인은 순전히 남편의 육군 총사령관직을 위해 모든 직책을 유지했고, 두 여성 사이의 긴장은 1711년 초까지 계속되었다.[34]

공작 부인은 아비가일 마샴에 대한 앤 여왕의 애정을 알게 된 후 항상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는 말보로 공작과 휘그당 대부분과 함께 앤 여왕에게 마샴을 해임하도록 강요하려 했다. 앤 여왕이 마샴의 토리당 영향력을 의심한 휘그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의회 요구를 받는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조차도 이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35] 결국 앤 여왕이 승리했다. 그녀는 양당의 고위 정치인들과 면담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그 동의안에 반대해 달라고 간청했다. 일반적인 견해는 말보로 부부가 사소한 일로 스스로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앤 여왕이 마샴에게 보인 열정과 여왕이 그녀를 해임하기를 거부한 완고함은 공작 부인을 격분시켜 두 여성 사이에 성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36] 앤 여왕의 남편을 애도하는 기간 동안 공작 부인은 적절한 상복을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녀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앤 여왕의 슬픔을 진심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었다.[37]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평화를 지지하는 대중적 여론이 거세짐에 따라,[38] 앤 여왕은 더 이상 말보로 공작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날조된 횡령 혐의로 그를 해임할 기회를 잡았다.[39]

말보로 공작부인과 앤 여왕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켄싱턴 궁전. 앤 여왕 시대의 모습


말보로 공작부인의 앤 여왕과의 우정 회복을 위한 마지막 시도는 1710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루어졌다. 공작부인이 얼마 후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우정이 끝난 이유에 대한 설명을 간청했지만, 앤 여왕은 무심하게 "당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겠소."나 "서면으로 제출할 수도 있겠지요."와 같은 몇 가지 정형적인 말만 반복했다. 이 말을 들은 공작은 앤 여왕이 자신과 아내를 해임할 의도임을 깨닫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9개월 동안 직책에 머물 수 있도록 여왕에게 간청하여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앤 여왕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말보로 공작부인이 즉시 사임하고 왕실 가정 내 권한의 상징인 금색 열쇠를 이틀 안에 반환해야 한다고 공작에게 말했다.[40] 수년간 여왕의 인내심을 시험한 결과 결국 해임으로 이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작부인은 자존심 때문에 즉시 공작에게 여왕에게 열쇠를 돌려주라고 말했다.[40]

1711년 1월, 말보로 공작부인은 의상 관리인과 왕실 변기 관리인직을 잃었고 엘리자베스 시모어로 교체되었다. 아비가일 마샴은 비밀 주머니 관리인이 되었다. 이는 앤 여왕이 말보로 공작부인의 자녀들에게 이러한 궁정 직책을 나눠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긴 것이다.[41] 말보로 부부는 블레넘 궁전에 대한 국가 지원금도 잃었고, 1705년 착공 이후 처음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 그들은 영국을 떠나 유럽을 여행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공작은 독일 궁정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인기가 많았고, 가족은 그곳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영국을 떠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과 공작이 유럽에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지만, 고국에서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고 자주 불평했다. 공작부인은 왕실 궁정을 여행하는 삶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그곳이 지루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42]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독일 아헨에서 온천욕을 즐겼고, 영국에 있는 정치적 소문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가톨릭에 대한 매력에 빠져 있었다.[43]

말보로 공작부인과 앤 여왕은 결코 화해하지 못했지만, 한 목격자는 앤 여왕이 말보로 부부가 해안에 도착했는지 묻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여, 그녀가 직접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앤 여왕은 1714년 8월 1일 켄싱턴 궁전에서 사망했다.

앤은 늘 요구만 하는 사라보다 곁에 머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애비게일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사라는 애비게일을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조지 공이 죽었을 때 애비게일만이 상복을 입지 않았다고 비난하거나, 앤에게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폭로하기도 했지만, 여왕과의 관계는 이미 회복 불가능했다. 1710년 여왕을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는 궁정에서 모습을 감췄다. 같은 해 고돌핀이 해임되고, 총선에서 토리당이 대승을 거두어 벌리 경이 대장경에 취임하고, 헨리 싱존과 함께 전쟁의 강화에 착수했기 때문에 멀버러 공의 입장도 위태로워졌다.

1711년 1월, 사라는 의복 담당 여관의 지위를 엘리자베스 시모어에게 넘겨주었고, 애비게일은 왕실 세비 관리관이 되었다. 멀버러 공도 12월에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듬해 1712년 멀버러 공작 부부는 잉글랜드를 떠나 유럽을 여행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멀버러 공의 활약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부부는 후대를 받았지만, 사라는 이대로 유럽에 체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83]

7. 앤 여왕 사후

1701년 왕위 계승법(Act of Settlement 1701)에 따라 50명이 넘는 강력한 가톨릭 계승권자들을 제치고,[45] 하노버 선제후(Elector of Hanover) 조지 루드비히(제임스 1세의 증손자 하노버의 소피아(Sophia of Hanover)를 통해)가 영국 국왕 조지 1세(George I of Great Britain)로 선포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왕위 계승이 보장되었다. 말버러 공작 부부는 앤 여왕이 서거한 1714년 8월 1일 오후에 귀국했다.[44]

새로운 통치는 대부분 강경한 프로테스탄트였던 휘그당의 지지를 받았다.[46] 토리당은 가톨릭 신자인 왕위 계승권 주장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의심받았다.[47] 조지 1세는 휘그당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휘그당에 보상했고, 그리니치(Greenwich)의 퀸즈 하우스(Queen's House)에서 환영 행사에서 그는 휘그당과는 대화했지만 토리당과는 대화하지 않았다. 말버러 공작 부인은 그의 휘그당 장관 선택을 승인했다.[48]

조지 국왕은 말버러 공작 부부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 공작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와 함께 싸웠고, 존과 사라는 영국에서의 효과적인 망명 기간 동안 하노버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으로서 공작에게 건넨 첫 마디는 "말버러 공작님, 이제 당신의 고난이 끝났기를 바랍니다."였다.[49] 말버러는 육군 총사령관이라는 그의 옛 직책으로 복귀했다.[50]

공작 부인은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안도했다. 공작은 국왕의 측근 고문이 되었고, 공작 부인은 말버러 하우스(Marlborough House)로 다시 이사하여 장녀 손녀인 헨리에타 고돌핀(Lady Henrietta Godolphin)을 내세워 적절한 결혼 상대를 찾으려 했다. 헨리에타는 결국 1717년 4월 뉴캐슬 공작 토머스 펠럼-홀레스(Thomas Pelham-Holles, 1st Duke of Newcastle-upon-Tyne)와 결혼했고, 말버러 공작 부부의 다른 손주들도 성공적인 결혼을 했다.[84]

8. 유산

말버러 공작과 공작 부인의 자녀들은 영국의 주요 가문들과 결혼했다.[70]

사진이름출생일사망일간략한 전기
해리엇 처칠1679년 10월1679년 10월유아 사망
헨리에타 처칠 (후에 고돌핀)1681년 7월 19일1733년 10월 24일프랜시스 고돌핀과 결혼했다.
앤 처칠 (후에 스펜서)1683년 2월 27일1716년 4월 15일찰스 스펜서, 제3대 선더랜드 백작과 결혼했다. 아들 찰스는 제3대 말버러 공작이자 윈스턴 처칠의 조상이다.
존 처칠, 블랜드퍼드 후작1686년 2월 13일1703년 2월 20일말버러 공작 작위 상속인이었으나 미혼으로 사망했다.
엘리자베스 처칠 (후에 에거턴)1687년 3월 15일1714년 3월 22일스크룹 에거턴, 제4대 브리지워터 백작과 결혼했다.
메리 처칠 (후에 몽타규)1689년 7월 15일1751년 5월 14일존 몽타규, 제2대 몽타규 공작과 결혼했다.
찰스 처칠1690년 8월 19일1692년 5월 22일유아 사망



헨리에타 사후, 말버러 공작 작위는 찰스 스펜서가 계승하여 스펜서-처칠 가문으로 이어졌다. 찰스의 조카 존 스펜서는 스펜서 백작에 서임되었고, 후손들은 영국 귀족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말버러 공작가에서는 윈스턴 처칠이, 스펜서 백작가에서는 다이애나, 웨일스 공주가 배출되었다.[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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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Field
[3] 웹사이트 City of St Albans: Introduction http://www.british-h[...] British History Online / Victoria County History 2007-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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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Field
[7] 서적 Churchill
[8] 웹사이트 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 http://www.artunfram[...] Art Unframed 2007-08-06
[9] 학술지 Birth of Sarah, Duchess of Marlborough, June 5th, 1660 https://web.archive.[...] 2010-06
[10] 서적 Field
[11] 서적 Miller; Harris
[12] 서적 Field
[13] 서적 Field
[14] 서적 Field
[15] 서적 Field
[16] 서적 Field
[17] 서적 Field
[18] 서적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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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웹사이트 Duties of the Keeper of the Privy Purse https://web.archive.[...] Official Website of the British Royal Family 201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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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Field
[32] 웹사이트 Portraits of Sarah Churchill http://www.npg.org.u[...] 2007-08-07
[33] 서적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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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Field
[36] 서적 Field
[37] 서적 Field
[38] 백과사전 Treaty of Utrecht
[39] 서적 Field
[40] 서적 Field
[41] 기록보관소 An Account of a Conversation with Her Majesty when it appear'd plainly that she did not intend to keep her promise to the Duchess of Marlborough in letting her resign her employments to her children Add MS 61422
[42] 서적 Field
[43] 서적 Field
[44] 서적 Field
[45] 웹사이트 Historic Figures: George I (1660–1727) http://www.bbc.co.uk[...]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2007-08-04
[46] 웹사이트 United Kingdom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08-13
[47] 웹사이트 Whig and Tory http://www.britannic[...]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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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서적 The New Atalantis Penguin 1992
[72] 웹사이트 Yorgos Lanthimos on the Lesbian Love Triangle of 'The Favourite': 'I Didn't Want This to Become an Issue' https://www.indiewir[...] 2018-09-03
[73] 뉴스 Queen Anne review – Romola Garai is a sensational schemer in gripping history play https://www.theguard[...] 2017-07-11
[74] 웹사이트 Yellowbeard (1983) Full Cast & Crew https://www.imdb.com[...] 2018-11-12
[75] 웹사이트 The First Churchills (TV Mini-Series 1969– ) https://www.imdb.com[...] 2019-01-10
[76] 서적 英国の貴族、イギリス革命史(上)
[77] 서적 英国の貴族、イギリス革命史(下)
[78] 서적 英国の貴族、イギリス革命史(下)
[79] 서적 英国の貴族、スペイン継承戦争
[80] 서적 英国の貴族、スペイン継承戦争
[81] 서적 スペイン継承戦争
[82] 서적 スペイン継承戦争
[83] 서적 英国の貴族、スペイン継承戦争
[84] 서적 スペイン継承戦争
[85] 서적 英国の貴族、スペイン継承戦争
[86] 웹인용 Sarah Jenyns http://www.thepeerag[...] ThePeerage 2007-01-29
[87] 서적 (제목 없음)
[88] 웹인용 Churchill, Sarah, duchess of Marlborough (1660–1744) http://www.oxforddnb[...] Oxford University Press
[89] 서적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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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서적 (제목 없음)
[93] 서적 (제목 없음)
[94] 서적 (제목 없음)
[95] 서적 (제목 없음)
[96] 웹인용 John Churchill, 1st Duke of Marlborough http://www.artunfram[...] Art Unframed 1703
[97] 저널 Birth of Sarah, Duchess of Marlborough, June 5th, 1660 https://www.questia.[...] 2010-06
[98] 서적 (제목 없음)
[99] 웹사이트 James II and VII (1633–1701) http://www.oxforddnb[...]
[100] 서적 (제목 없음)
[101] 서적 (제목 없음)
[102] 서적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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