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 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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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목천 우씨는 고려 인종과 의종 때 상서좌복야를 지낸 우방녕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우씨는 본래 중국 하남에서 기원했으며, 고려 시대에는 우방재, 우학유, 우술유 등이 활동했다. 우학유는 무신정권과 연관되었으며, 우승경은 재상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는 목천현으로 불렸으며, 현대에는 우인회, 우종필 등이 있다. 1985년에는 1,270명, 2000년에는 3,264명이 목천 우씨 성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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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우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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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 우씨 | |
성씨 | 목천 우씨 木川于氏 |
나라 | 한국 |
관향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
시조 | 우방녕(于邦寧) |
년도 | 2000 |
인구 | 3,264명 |
인물 | 우방재, 우학유, 우술유, 우승경, 우필흥 |
2. 역사
목천 우씨는 시조 우방녕(于邦寧) 이후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인물들을 배출하며 가문의 역사를 이어왔다.
우광유(于光儒)는 고려 희종 때 내전숭반(內殿崇班)을 거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로 승진하였으며,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우필흥(于必興)은 1357년(공민왕 6) 사천소감(司天少監)으로 있을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여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水]을 뿌리로,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 흑(黑)으로 부모를 삼고 청(靑)으로 몸을 삼았으니 만약 풍속이 땅에 순응하면 창성하고 땅을 반역하면 재변이 일어날 것이므로, 지금부터 문무백관은 흑의청립(黑衣靑笠), 중은 흑건대관(黑巾大冠), 여자들은 검은 비단을 입게 하고, 모든 산에는 소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하고, 그릇은 모두 유기(鍮器)·동기(銅器)·와기(瓦器)를 사용하여 풍토(風土)에 순응하게 하라"는 소를 올림으로써 시행하게 하여 명망을 떨쳤다.
2. 1. 고려 시대
고려 인종과 의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이 목천 우씨의 시조이다.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우방재(于邦宰)는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153년(고려 의종 7) 형부상서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2] 그의 아들 우학유(于學儒)는 무신정권 집권층인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하여 1179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랐다.[1] 우학유의 부인 전주 이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의 누이이기도 하다.
우술유(于述儒)는 1186년(명종 11)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역임하고, 1197년(신종 즉위) 수사공 좌복야 판형부사(守司空左僕射判刑部事)가 되었으며, 1199년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4]
우승경(于承慶)은 최충헌 집권기에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5]
3. 기원
우(于)씨는 본래 중국 하남(허난 성)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지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목천 지방의 백제 유민들이 순응하지 않고 백제 부흥을 도모하자, 왕건이 이 지역 백성들에게 우(牛; 소), 상(象; 코끼리), 돈(豚; 돼지), 장(獐; 노루) 등의 성을 주었는데, 후손들이 훗날 우(于), 상(尙), 돈(頓), 장(長) 등으로 성을 회복하였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4. 본관
목천(木川)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일대의 지명이다. 백제 시대에는 대목악군(大木岳郡)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치고 금지현(金池縣)과 순치현(馴雉縣)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목주(木州)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청주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여 연기현(燕岐縣) 감무를 겸하였다. 조선 태종 때에 연기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목천현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목천군이 되었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목천군은 폐지되고 목천면으로 축소되어 천안군에 편입되었다. 2002년 1월 1일 목천면에서 목천읍으로 승격했다.
5. 인물
목천 우씨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인물들을 배출했다.
5. 1. 고려 시대 인물
- '''우방재(于邦宰)''' :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 때 장군으로서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153년(고려 의종 7) 형부상서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2] 우방재의 딸은 목천 장씨(木川張氏) 장윤문(張允文)의 아버지 장린(張麟)과 혼인하였다.
- '''우학유(于學儒)'''(? ∼ 1179년) : 우방재의 아들로, 이의방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킬 때 군사 통솔을 제안했으나 아버지의 뜻을 들어 거절하였다. 무신정권 집권 후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하여 1179년 동지추밀원사에 올랐다.[3] 우학유의 부인 전주 이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의 누이이기도 하다.
- '''우술유(于述儒)''' : 1186년(명종 11) 형부시랑을 지내고 금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1197년 수사공 좌복야 판형부사가 되었고, 1199년 중서평장사로 치사했다.[4]
- '''우광유(于光儒)''' : 고려 희종 때 내전숭반, 권지합문지후를 거쳐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 '''우승경(于承慶)''' :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한 직후 대장군, 우승선을 역임하였다. 1202년(신종 5) 지주사가 된 후 승진하여 추밀원사, 참지정사에 이르렀다.[5]
- '''우필흥(于必興)''' : 1357년(공민왕 6) 사천소감으로 있을 때 풍수지리에 따라 흑의청립(黑衣靑笠) 등의 복식을 제안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5. 2. 현대 인물
6. 인구
목천 우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 1,047가구, 3,264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에는 282가구, 1,270명이었다. 尙|상중국어씨는 2000년 자료와 1985년 자료에서 모두 목천 우씨와 관련된 내용이므로 삭제한다.
참조
[1]
문서
『고려사』 권100, 열전13
https://terms.naver.[...]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방재
http://encykorea.aks[...]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학유
http://encykorea.aks[...]
[4]
웹인용
우술유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web.archive.[...]
2014-08-07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승경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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