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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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도황후 양지(楊芷)는 서진 무제 사마염의 황후이다. 양염의 유언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며, 온순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총애를 받았으나, 외척 양준의 권력 남용과 가남풍과의 갈등으로 인해 폐서인되어 굶어 죽었다. 혜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가 되었으나, 가남풍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 307년에 황후로 복권되었으며, 341년에 무제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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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2년 사망 - 서천왕
서천왕은 고구려의 제13대 왕으로, 숙신 침입 격퇴, 영토 확장, 왕족 반란 진압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신성을 순행하며 서쪽 변경을 관리하다 292년 서천에 묻혀 서천왕으로 불린다. - 259년 출생 - 서진 혜제
서진 혜제는 발달 장애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해 외척과 권신들의 권력 다툼, 특히 가남풍의 횡포와 팔왕의 난을 초래하여 서진을 쇠퇴시킨 서진의 제2대 황제이다. - 서진의 황태후 - 양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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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양지 |
자 | 양계란 |
추증 시호 | 무도황후 (武悼皇后) |
생애 | |
출생 | 259년 |
사망 | 292년 3월 6일 (향년 32-33세) |
혼인과 책봉 | |
배우자 | 진 무제 |
황후 책봉 | 276년 12월 13일 |
황태후 책봉 | 290년 5월 16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양준 |
자녀 | 사마회 (발해왕) |
숙부 | 양요, 양제 |
사촌 자매 | 양염 (진 무제의 첫 번째 황후) |
서진 황후로서의 기간 | |
재위 기간 | 276년 12월 13일 - 290년 5월 16일 |
유형 | 재임 |
이전 | 양염 |
이후 | 가남풍 |
서진 황태후로서의 기간 | |
재위 기간 | 290년 5월 16일 – 291년 4월 24일 |
유형 | 재임 |
이전 | 경헌황후 양씨 |
이후 | 혜헌황후 양씨 |
기타 | |
중국어 | 楊芷 |
2. 생애
274년, 무원황후의 유언에 따라 무제의 황후가 되었다. 양지는 온순하고 한정하여 부인의 미덕이 있었고, 아름다운 외모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사마회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이후에는 아들이 없었다. 288년, 황후 신분으로 안팎의 부인들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西郊)에 나아가 친히 양잠을 하고 각각의 사람들에게 비단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태강 4년(283년), 발해상왕 사마회를 낳았으나 요절했다. 그 후,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예장왕 사마치 (훗날 회제)를 양육했다.
태시 10년(274년) 7월, 양염이 병으로 쓰러지자 무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호방(호분의 딸)이 다음 황후가 되는 것을 싫어하여 죽기 직전 무제의 무릎에 매달려 "숙부의 딸(양지)은 덕이 있고 용모도 뛰어나니 후궁으로 들여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무제는 이에 동의하여 양지를 후궁으로 들였다.
태강 10년(289년) 11월, 역병에 걸린 사마염은 태자인 사마충(양염의 아들, 훗날 혜제)의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양준과 여남왕 사마량에게 보좌하게 하려고 조서를 썼다. 그러나 양지는 아버지와 함께 뒤에서 공작하여 사마량을 시중, 대사마, 대도독, 예주 제군사에 임명하고 가황월을 주어 허창에 출진하도록 명했다. 또한, 다른 황족에 대해서도 승진을 명목으로 지방으로 내쫓았다.
태희 원년(290년) 3월, 무제의 병세가 날마다 악화되자 양지는 정치를 모두 양준에게 맡기도록 사마염에게 권했다. 사마염은 이미 의식이 흐릿하여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고, 이유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4월, 양지는 중서감 화이, 중서령 하소에게 명하여 양준을 태위, 태자태부, 도독 중외 제군사, 시중, 녹상서사에 임명한다는 내용의 유조를 쓰게 했다. 조서가 완성되자 양지는 사마염에게 건넸지만, 사마염은 혼수상태에 빠져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했다.
영가 원년(307년), 사마치(회제)가 즉위한 후, 양모였던 양지는 황후의 자리를 회복하고, '''도'''의 시호를 받아 남편의 시호를 더하여 무도황후라고 칭해졌다. 341년, 성제는 조서를 내려 내외의 대신들로 하여금 이를 상세히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위장군 우담(虞潭)이 그의 억울함을 상세히 말하여 신위를 무제와 같이 배치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우담의 의견에 찬성하였고 이로부터 그는 무제와 같이 배향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11]
2. 1. 황후 책봉
274년, 무원황후의 유언에 따라 무제의 황후가 되었다. 양지는 온순하고 조용하며 부인의 미덕이 있었고, 아름다운 외모로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11] 무제와 결혼하기 전 양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양염 황후는 274년 8월에 사망하기 전, 다음 황후가 자신의 발달 장애를 가진 아들 태자 충의 황태자 지위를 위협할까 두려워하여, 무제에게 사후 자신의 사촌 양지(楊芷)와 결혼할 것을 요청했다. 무제는 이에 동의했다.[4]함녕 2년(276년) 10월, 양지는 황후로 책봉되었다.[10] 아버지 양준은 조정의 핵심 관료가 되었고, 두 숙부(양요와 양제)와 함께 권세를 마음껏 휘둘러 '천하 삼양'이라고 칭해졌다.[10]
2. 2. 가남풍과의 갈등
가남풍은 투기가 심하여 남편인 혜제의 다른 후궁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무제는 이를 알고 크게 노하여 가남풍을 냉궁에 유폐하려 했지만, 양지는 태자비의 나이가 어리고 가충이 서진 건국에 기여한 공을 들어 이를 만류했다.[11] 양지는 "태자비는 사직에 큰 공이 있는 가공려(가충의 딸)의 딸입니다. 질투심이 많다고는 하나 선인의 덕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간언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풀게 하였다.[10] 가남풍은 양지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오히려 무제 앞에서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겨 그 원한이 날로 깊어졌다.[11]2. 3. 황태후 시절과 죽음
혜제가 즉위하자 양지는 황태후가 되었고, 가남풍은 황후가 되었다.[11] 가남풍은 양준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싫어하여 양준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하고, 사마위와 사마요에게 거짓 조서를 내려 양준을 죽이도록 했다.[11] 궁궐 안팎의 소식이 끊기자 양지는 비단 위에 글자를 써서 성 밖으로 쏘아 보냈는데, 그 위에 '태부(양준)를 구하는 자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라고 썼다.[11] 가남풍은 이를 빌미로 황태후가 양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포했다.[11]양준이 죽은 후, 가남풍은 조서를 내려 황태후를 영녕궁으로 보내고, 어머니 방씨의 목숨을 보존하여 황태후와 함께 거처하도록 했다.[11] 그러나 곧 가남풍은 군공과 관리들에게 태후를 모함하도록 지시했다.[11] 대부분의 관리들은 가남풍의 말대로 폐위를 주장했으나, 장화 등은 반대했다.[11] 하지만 사마황 등이 태후 폐위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혜제는 이를 승인, 양지는 황태후에서 폐서인이 되었다.[11]
이후 대신들은 가남풍의 뜻에 따라 혜제에게 방씨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고, 혜제는 이를 허락했다.[11] 방씨가 사형당하기 전 양지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머리를 땅에 부딪히면서 가남풍에게 자신을 첩이라 칭하며 어머니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했지만, 가남풍은 이를 무시했다.[11]
양지는 10여 명의 시종이 있었으나 가남풍이 모두 물리쳤고, 결국 292년 음식을 끊고 굶어 죽었다.[11] 당시 34세로, 황후로 재위한 지 15년이었다.[11] 가남풍은 요사한 무당의 말을 믿어 양지가 하늘에서 무제에게 하소연할까 봐 시신을 조정의 반대 방향에 눕혀 묻고, 그 위에 사악한 것을 제거하는 부적과 약물을 뿌렸다.[11]
3. 사후
307년, 양지는 황후로 복권되어 별도의 사묘가 세워졌지만, 신위는 무제와 나란히 배치되지 못했다.[11] 341년, 성제는 조서를 내려 내외의 대신들로 하여금 이를 상세히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위장군 우담(虞潭)이 양지의 억울함을 상세히 말하며 신위를 무제와 같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여러 대신들이 모두 우담의 의견에 찬성하여 양지는 무제와 함께 배향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11]
4. 가계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백부 | 양병 | |
아버지 | 양준 | |
시아버지 | 태조 문황제 사마소 | |
시어머니 | 문명황후 왕씨 왕원희 | |
남편 | 세조 무황제 사마염 | |
황후(정후) | 무원황후 양씨 양염 | 237년~274년 |
아들 | 사마충 | 서진 혜제 |
며느리(황태자비, 정후) | 혜문황후 가씨 가남풍 | |
며느리(황태자비, 계후) | 혜헌황후 양씨 양헌용 | |
아들 |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 |
딸 | 평양공주(平陽公主) | |
딸 | 신풍공주(新豊公主) | |
딸 | 양평공주(陽平公主) | |
황후(추존) | 효회태후 왕씨 왕원희 | |
아들 | 사마치 | 서진 회제 |
며느리(황자 비, 정후) | 회황후 양씨 양난벽 | |
빈 | 귀빈 좌씨 좌분 | |
빈 | 귀빈 호씨 호방 | |
딸 | 무안공주(武安公主) | |
궁인 | 부인 제갈씨 제갈완 | |
아들 |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司馬謨) |
6. 평가
서진 무제의 황후 양지는 온화하고 조용하며 아름다운 외모와 부덕을 갖춘 여인이었다.[10] 아버지 양준은 양지를 미소년으로 알려진 왕연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왕연이 양준을 경멸하여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다.[10]
태시 10년(274년), 황후 양염이 병으로 쓰러지자 양지는 후궁으로 불려졌고, 함녕 2년(276년) 황후가 되었다. 품위 있고 우아하여 무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아버지 양준은 외척으로 권세를 누렸다. 태강 4년(283년) 아들 사마회를 낳았으나 요절했고, 이후 아이를 낳지 못해 예장왕 사마치를 양육했다.
황태자 사마충의 비 가남풍은 질투심이 강했는데, 양지는 가남풍을 감싸며 옹호했다. 그러나 가남풍은 양지의 속마음을 모르고 오히려 양지를 원망했다.
태강 10년(289년) 역병에 걸린 무제는 태자 사마충의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양준과 여남왕 사마량에게 보좌를 맡기려 했으나, 양지는 아버지와 함께 계략을 꾸며 사마량을 허창으로 보내고 다른 황족들도 지방으로 내쫓았다. 태희 원년(290년) 무제가 병세가 악화되자 양지는 양준에게 정치를 맡기도록 권했고, 의식이 흐릿했던 무제는 이를 승낙했다.
무제가 붕어하고 혜제가 즉위하자 양지는 황태후가 되었다. 영평 원년(291년) 가남풍은 양준의 권세를 질투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양지는 가남풍의 명으로 감금되었다가 서인으로 강등되어 유폐되었다. 어머니 팡부인마저 처형당하자 양지는 가남풍에게 목숨을 구걸했으나, 가남풍은 이를 무시했다. 원강 2년(292년) 양지는 굶어 죽었다.
영가 원년(307년), 사마치가 즉위한 후 양지는 황후로 복위되었고, 무도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양지는 온화하고 현명했지만,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된 비운의 황후로 평가된다. 가남풍의 질투와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서진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여성의 취약한 지위를 보여준다. 이는 조선시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갈등,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인현왕후의 모습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참조
[1]
서적
ding'mao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Xian'ning era, per Emperor Wu's biography in Book of Jin
Book of Jin
[2]
서적
ren'chen day of the 3rd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ping/ Yuan'kang era, per vol.82 of Zizhi Tongjian and Emperor Hu's biography in Book of Jin
Zizhi Tongjian, Book of Jin
[3]
서적
According to Sima Zhong's biography in Book of Jin, Yang Zhi died on the jiyou day of the 2nd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Yongping era of his reign. This corresponds to 6 Mar 292 on the Julian calendar.
Jin Shu
0292-03-06
[4]
서적
Vol.64 of Jin Shu recorded that Sima Hui died at the age of two (by East Asian reckoning), and was given the posthumous name Prince Shang of Bohai
Jin Shu
[5]
서적
According to Sima Yan's biography in Book of Jin, Sima Hui died on the wushen day of the 7th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Tai'kang era of his reign. This corresponds to 14 Aug 284 on the Julian calendar.
Jin Shu
0284-08-14
[6]
서적
Jin Shu,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vol 82. Lady Yang's biography in Jin Shu only recorded that she died after a hunger strike (绝膳而崩), without specifying the number of days.
Zizhi Tongjian, Jin Shu
[8]
서적
ding'mao day of the 3rd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Yong'jia era, per Emperor Huai's biography in Book of Jin and vol.86 of Zizhi Tongjian
Book of Jin, Zizhi Tongjian
[9]
서적
3rd month of the 8th year of the Xian'kang era, per Emperor Cheng's biography in Book of Jin and vol.97 of Zizhi Tongjian. The month corresponds to 22 April to 20 May 342 in the Julian calendar.
Book of Jin, Zizhi Tongjian
[10]
서적
晋書
晋書
[11]
서적
《진서》 권31 중 武悼楊皇后 列傳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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