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이 다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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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이 다카코는 1880년 일본에서 태어난 요리 연구가이자, 소설가 무라이 겐사이의 아내이다. 그는 요리 잡지 《월간 식도락》과 《부인세계》에 요리 정보를 제공하고,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를 저술하여 요리 연구가로서 활동했다. 또한, 갓포기(割烹着)를 고안하여 여성의 위생적인 가사 활동을 도왔다. 남편의 소설 《식도락》 집필에 깊이 관여하여 요리 레시피를 제공하고 자료 수집을 돕는 등, 작품 완성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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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이 다카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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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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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자키 다카 |
별칭 | 겐사이 부인 |
직업 | 요리 연구가 |
경력 | 남편의 집필 활동 협조, 초기 요리 레시피 발표, 갓포기 고안 |
활동 기간 | 20세기 전반 |
국적 | 일본 |
출생일 | 1880년 7월경 |
출생지 | 일본 도쿄부 스루가다이 |
사망일 | 1960년 8월 6일 |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
2. 생애
2. 1. 성장 과정
무라이 다카코는 1880년 7월경 전직 나베시마번 지사였던 아버지 오자키 우사쿠와 어머니 오자키 미네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오자키가는 화재를 당해 도쿄 스루가다이에 있던 친척 고토 쇼지로의 집에 피난해 있었다. 고토는 미네코의 여동생 유키코의 남편으로, 미네코가 우사쿠와 결혼하게 된 것도 고토의 인연이었다. "다카코"는 통칭이며, 호적명은 "다카"(多嘉)이다.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8세부터 오사카에서 살았고, 16세 때 도쿄로 돌아와 다카나와로 이사한 고토 집 별채에서 지냈다. 고토의 집에는 저명인사들이 많이 방문했으며, 이치카와 단쥬로, 오노에 기쿠고로 등의 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
고토의 집에는 서양 요리사가 있었는데, 주방을 찾아가 요리 이야기를 들었다. 고모 유키코에게서 도사 요리를 배우고, 오쿠마 시게노부의 저택 주방에도 드나들면서 뛰어난 미각을 길렀다. 1897년 고토 쇼지로가 사망한 후에는 가족과 함께 미타에서 살았다.
2. 2. 무라이 겐사이와의 결혼
1900년 7월 5일, 소설가이자 호치신문사 사원인 무라이 겐사이(본명 히로시)와 결혼했다. 정식 혼인신고일은 다음 해인 1901년 1월 23일이다. 1901년에는 장녀 무라이 요네코가 태어났으며, 이후 5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결혼 후, 가나가와현 오이소정, 오다와라시 등에서 거주하며 남편의 집필 활동을 도왔다. 겐사이의 소설 《식도락》의 인세로 1904년 히라쓰카시에 저택 '다이가쿠로(対岳楼)'를 짓고 정착했다. 다이가쿠로는 후지산이 잘 보이는 곳에 위치했으며, 1만 6천 평이 넘는 광대한 부지에 과수원, 채소밭, 축사, 화단 등이 있었다. 과수원에서는 복숭아, 감, 비파, 무화과, 매실, 석류를, 채소밭에서는 무, 오이, 가지, 파슬리, 셀러리, 상추,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아티초크 등을 재배했고, 축사에서는 닭, 토끼, 염소 등을 길렀다.

겐사이는 《식도락》으로 미식가로 알려져, 다이가쿠로에는 요리사, 문인들이 모여 일종의 음식 살롱을 형성했다. 무라이 다카코는 아지노모도나 칼피스 등 전국의 식품 관련 신제품 자문을 거의 대부분 무라이가에서 구했다고 주장했다. 다이가쿠로를 방문하는 다양한 손님을 손수 만든 요리로 대접한 것은 다카코였다.
2. 3. 요리 연구가로서
무라이 다카코는 1906년 남편 무라이 겐사이가 관여한 요리 잡지 《월간 식도락》[1]과, 일본 여성의 독립과 자립을 목표로 창간된 잡지 《부인세계》의 창간호에서[2] 자신이 고안한 조리복인 갓포기를 발표했다. 《부인세계》에서 겐사이를 대신해 요리 정보를 제공했으며, 같은 해 여름경부터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弦齋夫人の料理談)를 연재했다. 이 연재는 잡지의 대표 기사가 되었으며,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전 4편의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는 《겐사이 부인의 가정 상담》이라는 제목으로 위생과 가정 경제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소개했다.다이쇼 시대에 겐사이는 단식 등 건강법을 시도했고, 다카코는 남편을 지지했다. 1915년부터 자녀들의 진학으로 도쿄로 이주하여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때는 현미 조리법을 전수하는 등 구호 활동을 했다.
1927년 겐사이 사후, 다카코는 요리 강습과 집필 활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1929년 고이시카와에서 무라이 식도락회를 결성했다.[6] 아이센 여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요리를 가르쳤고, 소마 구로코의 요청으로 나카무라야의 요리 자문을 맡기도 했다. 1928년부터 《부인공론》에서 요리 기사를 연재했고, 《월간 식도락》에 일본과 서양 가정 요리에 관한 기사를 집필했다. 1930년에는 《일 년간의 반찬》, 1937년에는 《영양과 경제를 중심으로 한 간편한 도시락 만들기》를 간행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히라쓰카에서 장남 부부와 함께 살다가 1960년 80세로 사망했다.
3. 인물
무라이 다카코는 느긋하고 우아한 규수로 자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한다. 잡지 《월간 식도락》의 편집자는 "부인은 아름답고 젊으며 부드럽고 아직 처녀 같은 귀여운 안주인이시다."라고 평했다. 딸 무라이 요네코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무슨 무슨 고마치"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달리아와 나팔꽃을 좋아하여 히라쓰카의 자택 다이가쿠로의 화단에서 즐겨 길렀다.
구로이와 히사코는 무라이 다카코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는 않았지만 교양과 문재가 넘치는 인물이었다고 분석했다. 요네코와 함께 레오니 길모어에게서 영어 교육을 받았다.
남편 겐사이가 단식을 통한 건강법을 시도한 후에는 자원해서 스스로도 단식에 도전했다. 4일간의 반단식을 한 후 7일간의 본격적인 단식을 결행했으며, 이 단식으로 인해 배변 개선이나 신경과민의 회복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1918년에는 스스로 원해서 겐사이와 후에 등산가가 된 딸 요네코 등과 함께 온타케 산 정상 등정을 이루어냈다. 요네코는 이때를 회상하며 "연약한 상류층 부인 출신인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생활 속에서 어느새 강한 정신력뿐만 아니라 체력도 갖추게 되셨나 보다."라며 어머니를 칭송했다.
요네코의 기록에 따르면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건강을 중시하여, 요네코 등에게 검도나 승마를 배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정원에는 유동 원목과 기계체조용 철봉, 활터 등을 설치했다. 또한 낡은 관습에는 얽매이지 않았지만, 젓가락 사용법이나 말씨는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한다.
3. 1. 외모와 성격
3. 2. 자녀 교육
3. 3. 남편 겐사이와의 관계

남편 무라이 겐사이는 원래 큰오빠의 당구 친구였다. 두 사람은 겐사이가 호치신문에 《히노데지마》(日の出島, 1896년 연재 시작)를 연재하고 있을 때 만나 1900년에 결혼했다. 당시 만 나이로 다카코는 19세, 겐사이는 36세로 두 사람은 17살 차이였다. 신혼여행으로는 하코네에 갔는데, 다카코는 이때 처음으로 전차를 탔다고 한다. 당시 겐사이는 자신이 연재 중이던 《히노데지마》에 고후쿠 선생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자신의 아내에게 백 가지의 취미를 주고 싶다는 바람을 말하게 했다. 구로이와에 따르면 이 캐릭터는 행복의 절정에 있던 겐사이 자신의 분신이며, 겐사이의 다카코에 대한 마음을 대변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
부부 사이는 자녀들이 보기에도 부러울 만큼 좋았다고 한다. 딸 요네코에 따르면 겐사이는 자필 문장 속에서 다카코에 대해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부인은 스스로 말하길 나의 이상에 걸맞은 아내라고 할 만큼이며, 끝까지 일본 부인의 미덕을 지닌 귀부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겐사이는 집필, 취재나 요양 등의 사정으로 다카코와 떨어져 있을 때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으며, 가나가와 근대문학관에는 그러한 서한이 433통, 엽서가 53장 남아있다. 예를 들어 1909년에 겐사이가 요양지인 유가와라에서 다카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꿈에서는 두 번 보았지만, 마음은 거의 매일같이 당신 생각이 납니다."라며 다카코를 향한 마음이 적혀 있다. 한편 겐사이의 편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다카코도 겐사이에게 자주 편지를 썼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2004년 시점에서 발견된 것은 2통뿐이다. 그중 1통은 관동 대지진 십여 일 후의 것으로 "저도 다행히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인간은 이런 일을 겪으면 강해지는 모양입니다."라며 씩씩하게 대처하고 있다. 다카코는 겐사이에 대해 "미국 고학 중에 보고 들어온 것들로 인해 히로시는 가정생활에 새로운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중략] 가정을 소중히 해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4. 업적과 평가
4. 1. 《식도락》에 대한 공헌
무라이 다카코는 남편 무라이 겐사이의 소설 《식도락》 집필에 깊이 관여했다. 겐사이가 《식도락》을 집필하게 된 계기는 다카코의 뛰어난 요리 솜씨를 바탕으로 음식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가정생활을 설명하는 실용서를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다카코는 레시피를 고안하고, 요리에 관한 실천적 지식의 대부분을 제공했으며, 다양한 집필 활동에 필요한 서적과 신문 기사의 수집, 자료 탐색 등을 맡았다. 또한, 소설과 에세이의 내용에 오류가 없는지 검토하는 등 비서와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식도락》은 소설 형식을 띠면서 일본, 서양, 중국의 630종의 요리와 음식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요리책으로, 당시 10만 부, 시리즈 누계 50만 부 가까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소설 속 요리는 다카코의 가정 요리와 오쿠마 시게노부 저택 요리사들의 서양 요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겐사이는 《식도락》 속편 서문에서 다카코를 소설 속 히로인 오토와(お登和)에 비유하며, "소설 식도락이 이루어진 것도 절반은 그대의 공"이라고 칭송했다. 겐사이를 추종했던 소설가 히사카 마사시는 오토와가 다카코를 모델로 한 것이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겐사이 연구가 구로이와 히사코는 겐사이가 다카코에게 보낸 편지를 분석하여 "비서와도 같았다"고 평가했다. 향토사 연구가 마루시마 다카오는 다카코를 "'겐사이 사무소'의 뛰어난 비서"이자, 겐사이와 함께 식육 연구, 가정생활 연구를 진행한 "수레의 양 바퀴 같은 관계"였다고 분석했다.
4. 2.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弦齋夫人の料理談)는 무라이 다카코가 《부인세계》(婦人世界)에 연재한 내용을 묶어 출판한 요리책 시리즈(전 4편)이다.[8] 기자와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송이버섯 고르는 법", "무의 효과" 등 다양한 질문에 다카코가 답하는 방식이다. 일부 기사는 겐사이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책은 당시 생소했던 우유를 활용한 블랑망제와 같은 서양 요리를 변형한 우유 구즈모치, 우유갱 등의 요리법을 소개했다. 또한, "아침 식사는 이렇게 해야 한다"와 같은 식사 수칙과 쇼쿠이쿠(食育; 식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09년에 간행된 제2편에서는 도시락에 알맞은 요리와 함께 부패 방지를 위해 매실장아찌를 넣는 등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1912년 간행된 제4편에서는 현미의 각기병 예방 효과를 연구하여 당시로서는 새로운 견해를 소개하고, 일본인의 일상 조리법을 변화시키기 위한 현미식을 제창했다. 이 연구는 비타민 부족이 각기병의 원인으로 밝혀지기 전의 선진적인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는 "복숭아 튀김" 등 현재에도 참신한 메뉴를 다수 수록하고 있으며, "요리책의 효시"로도 불린다.[9] 2020년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타모리 클럽》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지기도 했고, 113년 만에 재간되기도 했다.[9] 책의 구성은 현재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 구성의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8]
4. 3. 갓포기 고안
무라이 다카코는 갓포기(割烹着, 앞치마)의 고안자로 알려져 있다. 다만, 1902년 아카호리 조리교장의 아카호리 미네오, 일본여자대학교의 사사키 사치코가 고안했다는 설 등 다른 설도 존재하며, 여러 인물이 독립적으로 비슷한 고안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카코는 의사 가토 도키지로가 착용하던 외과 의복에서 착상을 얻어, 기존에 여성이 기모노를 입고 가사를 할 때 방해가 되었던 소매를 쓰쓰소데(筒袖, 통소매)를 사용하여 해결하였다.
이렇게 고안된 갓포기는 1906년에 잡지 《월간 식도락》과 《부인세계》 지면에 발표되었다. 《월간 식도락》에서는 "오토와 아가씨식 부엌 상의", 《부인세계》에서는 "겐사이식 요리복"이라는 명칭으로 갓포기 제작법이 소개되었다. 무라이 다카코는 직접 갓포기를 입고 《식도락》 속편 삽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갓포기는 기모노를 완전히 덮을 수 있어 위생적인 요리를 돕고 국민 건강 유지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5. 저서
- 지쓰교노니혼샤(実業之日本社)에서 간행한 이시즈카 게테이(石塚源亭) 편집의 《겐사이 부인의 요리 이야기(弦齋夫人の料理談)》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전 4편이 간행되었다. 1907년에 출판된 제1편은 2020년에 원서에 충실하게 복간되어 출판되었다.
- 슈진샤(主婦之社)에서 1930년에 《일 년간의 반찬(一年間のお惣菜)》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사후에 딸 무라이 요네코(村井米子)의 편집으로 《부엌 세시기(台所歳時記)》로 개제되어 신진부쓰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에서 출판되었다.
- 호쿠토 쇼보(北斗書房)에서 1937년에 《영양과 경제를 중심으로 한 간편한 도시락 만들기(栄養と経済を主としたる手軽なお弁当の作り方)》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사후에 딸 요네코의 편집으로 《도시락 요리(お弁当料理)》로 개제되어 신진부쓰오라이샤에서 출판되었다.
6. 가족 및 친척
무라이 다카코의 고모의 양부는 미쓰비시 재벌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이다. 사촌 백부는 정치가이자 와세다 대학 창립자인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삼촌은 가부키자 경영자인 이노우에 다케지로와 무사이자 정치가인 고토 쇼지로이다. 남편은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무라이 겐사이이며, 딸은 등산가이자 수필가인 무라이 요네코이다.
참조
[1]
저널
月刊食道楽
有楽社
1906-01
[2]
저널
婦人世界
実業之日本社
1906-01
[3]
저널
婦人世界
実業之日本社
1906-06
[4]
저널
婦人世界
実業之日本社
1906-07
[5]
저널
婦人世界
実業之日本社
1906-09
[6]
뉴스
食道樂會
1929-12-25
[7]
서적
食道楽続編
玉井清文堂
[8]
웹인용
弦齋夫人の料理談 内容紹介
https://www.j-n.co.j[...]
実業之日本社
2021-05-05
[9]
웹인용
ずん飯尾と壇蜜が明治時代のハイカラレシピ再現、タモリとオズワルドの対面も
https://natalie.mu/o[...]
2021-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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