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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을 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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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을 풍물은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에서 유래된 풍물로, 시작점, 연대, 창안자가 뚜렷하게 알려져 있다. 영조 시대 수다사의 승려 정재진이 꿈과 구전을 바탕으로 풍물 가락을 만들었고, 이후 이군선 상쇠가 가락을 집대성하여 현재의 12마당으로 구성된 독창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무을 풍물은 전투 농악적 성격을 가지며, 북수놀음이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1960~70년대에는 상면농악단과 하면농악단으로 나뉘어 경쟁하며 발전했고, 1990년대 이후 단절 위기를 겪었으나 주민들의 노력으로 재건되었다. 현재 무을풍물보존회를 중심으로 보존 및 전승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2. 유래

구미시 무을면은 주민 대부분이 벼농사를 짓는 농촌 지역으로, 예로부터 풍물이 발달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1] 무을 풍물은 다른 지역의 풍물과 달리 시작 시점과 창안자가 비교적 명확하게 알려져 있으며, 그 유래는 수다사 및 영조 시대의 승려 정재진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전해진다.[1]

2. 1. 기원

무을 풍물은 다른 지역의 풍물과 달리 시작 시점, 연대, 창안자가 비교적 명확하게 알려져 있다. 그 발원지는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上松里) 연악산(淵岳山)에 있는 수다사이다.[1] 수다사는 신라 문성왕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연악산 봉우리에 흰 연꽃 한 송이가 핀 것을 보고 절을 세운 뒤 '연화사'라고 이름 붙였으나, 후에 수다사(水多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1]

무을 지역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풍물(메구[1])은 조선 영조 시대에 수다사의 승려였던 정재진(법명은 알려지지 않음)이 꿈에서 본 것과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풍물 가락을 만들어 인근 마을에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1] 특히 "정재진 나고 메구 나고, 엄복동이 나고 자동차 났으며, 안창남을 위해 비행기 나왔다."는 말은 무을면과 인근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서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무을 풍물의 기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

2. 2. 창안자

무을 풍물은 다른 지역의 풍물과 달리 그 시작점과 연대, 그리고 창안자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을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한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을 풍물은 영조 시대에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연악산에 위치한 수다사의 승려 정재진(법명 미상)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전해진다. 정재진은 꿈에서 본 내용과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풍물가락을 만들어 인근 마을에 전파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특히 무을면과 김천시 개령면 일대에서는 "정재진 나고 메구 나고, 엄복동이 나고 자동차 났으며, 안창남을 위해 비행기 나왔다"라는 말이 아직도 전해 내려오는데, 이는 정재진이 무을 풍물의 창안자로서 지역 사회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1]

3. 전승

정재진 이후 한동안 전승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가, 약 100년 뒤 무을면 오가리의 이군선(李君先, 호적명 이경춘, 1867년 8월 10일생) 상쇠가 기존 가락을 바탕으로 열두 마당으로 구성된 독창적인 무을 풍물을 집대성하였다.[2] 이군선은 최일영, 이남문, 윤필선, 박희순 등 여러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 시기 많은 전국의 쇠꾼들이 무을을 찾아와 가락을 배워가면서 무을 풍물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남문은 한국 전쟁 이후 김천시 개령면으로 이주하여 빗내 농악(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의 토대를 마련했고, 최상택은 부산으로 건너가 아미 농악 창단에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1970년대에는 상면농악단(김신배 상쇠 주도)과 하면농악단(김칠봉 상쇠, 지창식 종쇠 주도)으로 나뉘어 경쟁하며 기량을 발전시켰다. 상면농악단은 북수(소고잽이) 놀이가, 하면농악단은 정형화되고 절도 있는 놀이가 발달했으며, 특히 하면농악단은 여러 전국 규모 농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명성을 떨쳤다.[3] 김칠봉 상쇠는 이후 학교에서 농악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상면농악단 역시 지역 내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고 인근 지역과 부산, 조치원 등지로 초청 공연 및 걸립[2] 공연을 다니며 활발히 활동했다.

무을 풍물의 주요 전승 계보는 정재진에서 이군선으로, 다시 최일영을 거쳐 김팔금, 김칠봉, 지창식, 최병화(최무웅), 박원용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이남문을 통해 빗내 농악으로 분화된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김신배 상쇠가 1994년 사망하면서 풍물이 단절될 위기를 맞았으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과 최병화 상쇠의 주선으로 지창식 상쇠가 귀향하여 풍물 재건에 나섰다.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 부문 최우수상(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보존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후 오상고등학교, 무을중학교, 장천초등학교 등에 무을 풍물이 전수되어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오상고등학교는 여러 전국 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명맥을 이었다. 2003년 12월에는 무을풍물보존회가 창립되어 체계적인 보존과 전승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2004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 부문 장원 등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3. 1. 이군선 상쇠의 집대성

정재진 이후의 전승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로부터 약 100년 뒤 무을면 오가리의 이군선(호적명 이경춘, 1867년 8월 10일생) 상쇠가 가락을 집대성하여 열두 마당으로 이루어진 현재와 같은 독창적인 무을 풍물을 재창안했다. 이군선 상쇠는 당시 선산에서 열린 큰 걸립[2]에서 그의 쇠가락과 놀이가 다른 풍물과 달리 12마당으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큰 호응을 얻으며 명성을 날렸다. 이때부터 무을 풍물에는 '열두 마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군선은 무이리의 최일영(원 상쇠, 1950년 3월 별세)과 오가리의 이남문, 윤필선, 박희순 등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이 시기 전국의 많은 쇠꾼들이 무을을 찾아와 쇠가락을 배워갔고, 이는 다른 이름으로 전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자 중 이남문은 한국 전쟁 이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개령 빗내)로 이주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한 빗내 농악(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을 남겼으며, 최상택 단원은 부산으로 이주하여 서구의 아미 농악 창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상면농악단과 하면농악단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며 무을 풍물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맞았다. 주로 북수(소고잽이)의 놀이가 발달한 상면농악단은 김신배 상쇠가 이끌었고, 정형화되고 절도 있는 놀이가 발달한 하면농악단은 김칠봉 상쇠와 지창식 종쇠가 이끌었다. 특히 김칠봉 상쇠가 이끈 '하면농악단(단장 김태문)'은 여러 전국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연도대회명주최성과
1963년 10월 30일전국농악경연대회조선일보 대구지사우승
1964년전국농악경연대회우승[3]
1965년전국농악경연대회중앙일보 대구지사, 경북농악협회우승
1966년영남민속경연대회경북농악협회기성회특등 (국회의장 상)
1966년 10월전국민속경연대회 (덕수궁)3등



이후 김칠봉 상쇠는 상주농잠고등학교와 김천농림고등학교에서 농악을 가르치며 많은 공적을 남기고 후진을 양성했다. 김신배 상쇠가 이끈 '상면농악단' 역시 선산군 풍년제와 선산군민의 날 농악 부문에서 11회 연속 우승하였고, 뛰어난 소고잽이 기량으로 김천, 상주 등지에 초청되어 시연과 전수를 하기도 했으며, 부산, 조치원 등지로 걸립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90년대 초, 상쇠였던 김신배가 병을 얻고 1994년에 사망하면서 무을 풍물은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김천과 선산 일대 풍물의 뿌리가 무을임을 인식한 주민들이 풍물 재건에 나섰다. 최병화 상쇠의 주선으로 종쇠였던 지창식 상쇠가 고향으로 돌아와 무을 단위농협 준공식 때 풍물을 다시 울리며 제2의 도약을 준비했다.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 부문 최우수상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보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무을 농악을 전수한 오상고등학교, 무을중학교, 장천초등학교 등은 경북농악경연대회 청소년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상고등학교는 2001년 부평전국농악경연대회 장원, 2002년 제20회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2017년 제24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무을 풍물의 명맥을 이었다. 2003년 12월에는 무을풍물보존회가 설립되어 체계적인 보존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2004년 5월에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농악 부문 장원을 차지하고 황토현농악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3. 2. 제자 양성 및 확산

무을 풍물을 집대성한 이군선 상쇠는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주요 제자로는 무이리의 최일영(원 상쇠, 1950년 3월 별세), 오가리의 이남문, 윤필선, 박희순 등이 있다.[2] 이 시기 전국의 많은 쇠꾼들이 무을을 방문하여 쇠가락을 배워 전국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이군선의 제자들을 통해 무을 풍물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남문은 한국 전쟁 이후 김천시 개령면 빗내로 이주하여 빗내 농악(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 형성에 기여했으며, 단원이었던 최상택은 부산으로 이주하여 서구 아미 농악의 창단에 영향을 주었다.

무을 풍물의 주요 전승 계보는 정재진에서 이군선으로 이어지고, 이군선에게서 최일영을 거쳐 김팔금, 김칠봉, 지창식, 최병화(최무웅), 박원용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이남문을 통해 빗내 농악으로 갈라져 나간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 김칠봉 상쇠는 상주농잠고등학교와 김천농림고등학교에서 농악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90년대 풍물 재건 이후에는 오상고등학교, 무을중학교, 장천초등학교 등 여러 학교에 무을 농악이 전수되었다. 이들 학교는 경북농악경연대회 등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오상고등학교부평전국농악경연대회(2001년), 전주대사습놀이(2002년), 전국청소년민속예술축제(2017년 대통령상) 등 전국 대회에서 여러 차례 장원을 차지하며 무을 풍물의 명맥을 잇고 그 우수성을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3. 3. 1960-70년대의 발전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무을 풍물은 상면농악단과 하면농악단으로 나뉘어 경쟁하며 더욱 발전하는 시기를 맞았다. 북수(소고잽이)의 놀이가 두드러졌던 상면농악단은 김신배 상쇠가 이끌었고, 정형화되고 절도 있는 놀이를 특징으로 하는 하면농악단은 김칠봉 상쇠와 지창식 종쇠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하면농악단(단장 김태문)’은 여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63년 10월 30일 조선일보 대구지사가 주최한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시작으로, 1964년의 ‘전국농악경연대회’[3], 그리고 1965년 중앙일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중앙일보 대구지사와 경북농악협회가 공동 주최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1966년에는 경북농악협회기성회가 주최한 ‘영남민속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국회의장 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10월 덕수궁에서 열린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는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활동 이후 김칠봉 상쇠는 상주농잠고등학교와 김천농림고등학교 등에서 농악을 지도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한편, ‘상면농악단’ 역시 지역 내에서 강한 면모를 보였다. 선산군 풍년제와 선산군민의 날 행사 농악 부문에서 11회 연속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뛰어난 소고잽이 기량으로 김천상주 등 인근 지역에 초청되어 공연과 지도를 하였으며, 부산, 조치원 등지로 걸립[2] 공연을 다니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3. 4. 1990년대 이후의 전승 노력

1990년대 초, 상쇠였던 김신배가 병을 얻고 1994년에 사망하면서 무을 풍물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김천선산 일대 풍물의 근원지가 무을임을 인지한 주민들이 풍물 재건에 나섰다. 최병화 상쇠의 주선으로 종쇠였던 지창식 상쇠가 귀향하여 무을 단위농협 준공식 때 풍물을 선보이며 제2의 도약을 준비했다.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부문 최우수상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보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무을 풍물을 전수한 오상고등학교, 무을중학교, 장천초등학교 등은 경북농악경연대회 청소년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오상고등학교는 2001년 부평전국농악경연대회 장원, 2002년 제20회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2017년 제24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2003년 12월에는 무을풍물보존회가 창립되어 보존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2004년 5월에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농악부문 장원을 차지하고 황토현농악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3. 5. 무을풍물보존회

1990년대 초 상쇠였던 김신배가 병을 얻고 1994년에 사망하면서 풍물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김천선산 일대의 풍물 근원지가 무을임을 깨달은 주민들이 풍물 재건에 나섰다. 최병화 상쇠의 주선으로 종쇠였던 지창식 상쇠가 귀향하여 무을 단위농협 준공식 때 풍물을 울리고 제2의 도약을 준비했다. 1996년 제3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부문 최우수상인 문화부장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보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무을 농악을 전수한 오상고등학교, 무을중학교, 장천초등학교 등은 경북농악경연대회 청소년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상고등학교2001년 부평전국농악경연대회 장원, 2002년 제20회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2017년 제24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축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무을 풍물의 우수성을 알렸다.

2003년 12월, 마침내 무을풍물보존회가 창립되어 체계적인 보존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듬해인 2004년 5월에는 제30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농악부문 장원을 차지했으며, 같은 해 황토현농악경연대회에서도 우수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특징

풍물 굿은 지역과 특색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무을 풍물은 김천, 대구, 상주 등지의 풍물과 같은 갈래에 속하며, 북을 많이 사용하여 전투 농악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4] 또한, 열두 마당의 구성이 뚜렷하고 다채로우며, 특히 북수놀음(소고놀음)이 발달되어 있다.

4. 1. 전투 농악적 성격

무을 풍물은 김천, 대구의 비산·다사·가루뱅이 풍물, 상주 등의 풍물과 같은 갈래에 속하며, 이들 지역 농악처럼 북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로 인해 무을 풍물의 북가락은 웅장하고 장쾌하며, 가락이 힘차고 박진감이 넘쳐 전투 농악의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 무을 풍물패를 “좌청룡 우백호 노계홍상(左靑龍右白虎綠蓋紅裳) 군대”[4]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풍물 옷의 색깔과 더불어 전투 농악으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4. 2. 12마당 구성

무을 풍물은 풍물 열두 마당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행위가 다양해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지 않으며, 북수놀음(소고놀음)이 특히 발달되어 있다.

4. 3. 북수 놀음 발달

무을 풍물은 풍물 열두 마당이 뚜렷하게 구분되며 행위가 다양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지 않다. 특히 북수놀음(소고놀음)이 발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5. 복장과 악기

무을 풍물의 복장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고유한 특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상쇠가 등에 다는 '함박시', 대북 주자의 크고 화려한 고깔, 쇠와 소고잽이[5]가 사용하는 독특한 형태의 열 두발 상모 등이 있다. 기본적인 복장은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 조끼이며, 허리에는 삼색 띠를 두른다. 악기 편성은 쇠, , , 장구, 소고잽이[5] 등 기본적인 풍물 악기 외에 잡색과 농기, 단기, 영기를 드는 기수를 포함한다.

5. 1. 복장

상쇠(메구)는 앞이마에 흰 꽃을 달고, 등에는 금빛 또는 은빛의 ‘함박시’라고 하는 원형의 놋쇠를 두 개 단다. ‘함박시’는 빗내 농악과 아미 농악, 무을 풍물 외의 다른 풍물의 상쇠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장식이다. 이는 대장을 의미하여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다는 것이라고 하며, 해와 달을 뜻한다고도 전해진다. 빗내와 아미의 함박시는 납작한 원판으로 상쇠의 띠에 다는 데 비해, 무을 풍물에서는 가운데가 약간 볼록한 구조로 조끼에 단다. 전성기에는 함박시를 은으로 만들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상쇠의 중요성과 위엄을 강조하는 요소이다. 몸에는 초록, 노랑, 빨강의 삼색 띠를 두르며, 상쇠의 채 끝에는 오색띠 또는 삼색 띠를 늘어뜨린다.

대북은 머리에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분되는 크고 화려한 이단의 고깔을 쓴다. 과거에는 삼단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양손에는 북채를 쥐는데, 굵은 채는 오른손에, 가는 채는 왼손에 쥔다.

장구수는 전립에 긴 피지와 짧은 피지를 단다.

북수(소고잽이)[5]는 머리에 전립을 쓰고 긴 피지와 짧은 피지를 달며, 앞이마에는 흰 꽃을 단다. 몸에는 삼색의 띠를 두른다. 과거에는 등에 상쇠보다 작은 형태의 함박시를 달았으나 요즘은 달지 않는다.

사대부는 두루마기를 입고 ‘진신사대부’(眞身士大夫)라고 쓰인 두건을 쓰며, 부채 또는 담뱃대를 든다. 각시는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는 것이 기본이지만, 최근에는 다른 색의 옷을 입기도 한다. 총잽이는 어깨에 배낭을 메고 총을 들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검은 칠을 한다.

풍물의 구성원들은 기본적으로 흰 바지저고리에 남색 조끼를 입는다. 쇠와 소고잽이는 전립에 상모를 쓴다. 이들의 열 두발 상모는 끝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은데, 이 또한 무을 풍물만의 특징이다. 쇠와 소고잽이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모두 흰색의 큰 고깔을 쓰며, 고깔의 꽃송이는 춤사위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다른 풍물이 허리 아래로 두 줄의 띠를 늘어뜨리는 것과 달리, 무을 풍물은 삼색의 띠를 늘어뜨린다.

농기와 단기 끝에는 꿩의 긴 꼬리털을 뽑아 만든 꿩장목을 달고, 영기에는 삼지창이나 창 모양의 장식을 단다.

5. 2. 악기 구성

무을 풍물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무을 풍물패 구성
구분역할 (악기/기)인원수
악기 연주자4명
4명
8명
장구8명
북수(소고잽이)[5]12~16명
잡색양반, 각시, 포수3명
기수농기, 단기, 영기4명 (농기 1, 단기 1, 영기 1 포함)


6. 구성 (열두 마당)

무을 풍물은 총 열두 마당으로 구성된다.

6. 1. 첫째 마당: 질굿 (인사굿)

행진 가락에 맞춰 `(메구)` 소리에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마당으로 들어선다. 상쇠는 입장할 때나 대문 앞에서 "주인 나그네 들어가요"라고 외치기도 한다. 마당에 들어선 후에는 놀이 준비를 위해 둥글게 원을 그리며 늘어서고, 쇠 소리에 맞춰 주위에 인사를 한다.

6. 2. 둘째 마당: 반죽궁 (마당 닦기)

풍물패 전원이 원을 그리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이때 쇠 치배는 원의 중앙으로 들어가 서로 마주보고 두 줄로 서서 전립을 돌리고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동작을 보여준다. 이후 전체 대형을 세로줄(종대)로 바꾸고, 대원들은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지그재그(갈 지(之) 자) 형태로 중앙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묘기를 펼친다.

6. 3. 셋째 마당: 정적궁

원을 돌면서 쇠 가락에 맞춰 각자 놀이에 들어간다. 상쇠와 종쇠는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풍물꾼들을 놀린다. 무을 풍물의 12마당 중에서 가장 신나고 흥겨운 마당이다.

6. 4. 넷째 마당: 엎어 빼기 (도르래기)

원형에서 상쇠와 종쇠가 서로 맞추어 가락을 치면, 풍물꾼은 대형 바깥쪽으로 허리를 굽혔다가 다시 대형 안쪽으로 굽힌다. 이어서 각자 원형으로 돈다.

6. 5. 다섯째 마당: 품앗이

엎어 빼기가 끝나면 모든 풍물꾼이 원을 그리며 돌면서 논다. 이때 원형 중앙에서는 쇠 연주자들이 서로 가락을 주고받는다.

6. 6. 여섯째 마당: 수박치기

쇠의 가락이 바뀌면 수는 가락에 맞춰 여러 번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기세를 자랑한다. 이때 쇠가 멈추면 장구만 신나게 연주한다. 쇠잽이들은 서로 짝을 지어 쇠를 잠시 놓고, 손뼉을 치거나 귀 또는 무릎을 잡기도 하고, 삼색 띠를 잡고 춤을 추는 등 다양한 묘기를 부린다.

6. 7. 일곱째 마당: 허허 꺽꺽

풍물꾼 각자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가락에 맞춰 "허허", "꺽꺽" 하는 간투사를 외친다. 모든 풍물꾼들이 원형으로 돌면서 가락에 맞춰 신명 나게 노는 마당이다.

6. 8. 여덟째 마당: 너도나도 둘이돌기

상쇠가 흥이 나게 기러기 가락을 치면 전 풍물꾼이 원을 그리며 돌며 2명씩 짝을 지어 덩실덩실 춤을 춘다.

6. 9. 아홉째 마당: 이돌기

풍물패가 원을 그리며 돌다가 가락이 바뀌면, 돌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원점을 향해 옆으로 선 채 돈다. 다시 가락이 바뀌면 또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모든 풍물꾼들이 각자 악기를 연주하고 을 춘다.

6. 10. 열째 마당: 영산다드래기 (판굿)

풍물패는 원형이나 두 줄로 대열을 갖추고 대북놀이, 장구놀이, 소고놀이 등을 펼친다.

  • 대북놀이: 두 줄로 선 상태에서 상쇠가 중앙으로 나와 대북꾼들을 안쪽 줄 중앙에 원으로 모은다. 대북꾼들은 시계 방향으로 돌며 엎어빼기를 하고, 원이 풀리면 서너 번씩 서로 마주보며 짝지어 왔다 갔다 한다. 가락이 다드래기로 넘어가면 쇠와 징은 멈추고 대북과 장구 소리만 울려 퍼진다. 상쇠가 제자리로 돌아가면 대북꾼들도 원래 위치로 돌아간다.
  • 장구놀이: 장구잡이들이 나와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원을 그리며 도는 두루 걸이와 자반 뛰기를 선보인 후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동안 다른 악기들은 연주를 계속한다.
  • 소고놀이: 북수들이 나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두루 걸이, 엎어빼기, 자반 뛰기 등을 보여주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 요진북: 북수 또는 장구잡이가 마주 보고 선다. 한쪽 다리를 들고 삼색 띠를 잡은 채 원을 한두 바퀴 돌다가, 몸을 울렁이며 한 발짝씩 나와 서로 마주친다. 이후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서로 어깨를 걸고 앞뒤로 움직이며 흥겹게 논다.
  • 다드래기: 홑 다드래기, 겹 다드래기, 팔만 다드래기로 나뉜다. 상쇠와 북수들이 엇박자로 쇠를 치며 놀다가 징 앞으로 뛰어가 앉아 신나게 쇠를 친다. 이후 가락에 맞춰 서서히 뒤로 물러서며 연주를 이어간다. 때로는 풍물꾼이 상쇠의 가락에 맞춰 한순간에 구경꾼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 진상모: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놀이다. 쇠가락이 진상모 놀이가락으로 바뀌면, 상모꾼이 수줍은 듯이 조심해서 나오며 진 상모놀이를 한다.

6. 11. 열한째 마당: 진풀이 (멍석말이)

상쇠와 종쇠가 원형 대열에 들어선다. 이후 농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진을 말았다가 풀고, 다음으로는 영기를 중심으로 8자 형태로 진을 말았다가 푼다. 다른 방식으로는 양쪽으로 진을 쌓은 뒤, 한쪽에서 "휘이"하고 신호를 보내면 반대쪽 진에서 화답한 후 진을 풀기도 한다. 또한 풍물꾼들을 두 줄로 세워 앉히고 상쇠가 그 사이를 돌며 감아 쌓는 형태도 있는데, 이를 홑진 또는 겹진이라고 부른다.

6. 12. 열두째 마당: 춤메구 (덧베기)

풍물꾼과 구경꾼 전원이 어깨를 들썩이며 함께 을 추며 판을 마무리한다.

참조

[1] 풍물놀이 땅 밑에 있는 나쁜 귀신이 나오지 못하도록 묻고 밟는다는 뜻으로 보통 섣달 그믐날 밤에 하는 풍물놀이로, 매구, 매귀(埋鬼) 혹은 매굿이라고도 한다.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 풍물을 일컫거나 꽹과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 의식 걸립(乞粒)은 교적 의식이나 큰 건립을 하기 위해서 쌀이나 곡식을 거두는 일을 말한다.
[3] 지역 당시 금릉군 개령면 광천리에서 개최되었다.
[4] 풍물 풍물 구성원의 띠를 좌청룡(녹색), 우백호(노란색), 옷 색깔을 노계홍상(푸른 조끼와 붉은 치마-띠)으로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5] 악기 근래에는 소고잽이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북수라고 불렀으며, 북은 대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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