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이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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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야모토 이오리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이자,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인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가신으로, 오가사와라 가문에서 빠르게 출세하여 26세에 최고위 가신이 되었다. 그는 1626년 15세의 나이로 오가사와라 가문에 출사하여 1638년 시마바라의 난에서 공을 세워 4,000석을 받았다. 무사시 사후에는 그의 장덕비를 세우고,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라번 오가사와라 가문의 필두 가로를 세습하며 고쿠라를 중심으로 거주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로 입양되어 에도에서 생활했다.[5][1]
미야모토 이오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섬긴 가신으로,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3][7] 26세에 오가사와라 가문의 최고위직인 필두 가로(筆頭家老)에 올랐다.[8][4] 그의 출신은 하리마국 인난군(印南郡) 요메다무라(米堕邑)의 타하라 히사미츠(田原久光)의 차남으로 여겨진다.
2. 어린 시절
2. 1. 출생 및 입양
미야모토 이오리의 출신은 播磨国|하리마국일본어 印南郡|인난군일본어 米堕邑|요메다무라일본어 출신인 田原久光|타하라 히사미츠일본어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고쿠라 미야모토가 계도(小倉宮本家系図)」, 유서(由緒書), 그리고 이오리가 자신의 출신지에 재건한 泊大明神社|도메이 다이묘진자일본어와 米田天神社|요메다 텐진자일본어의 동찰(棟札)에 기록된 「田原家傳記|타하라케 덴키일본어」 등의 자료를 통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오리는 1623년, 11세의 나이에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무사시는 39세였으며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다.[5][1] 이오리의 손자가 남긴 족보에 따르면, 이오리는 본래 무사시의 형의 아들, 즉 조카였다고 한다.[6][2]
참고로, 미야모토 무사시에게는 이오리 이전에 三木之助|미키노스케일본어라는 다른 양자가 있었다. 미키노스케는 히메지번의 本多家|혼다 가문일본어을 섬겼으나, 1626년 주군인 本多忠刻|혼다 타다토키일본어를 따라 순사(殉死)했다.
3. 경력
양부 미야모토 무사시가 사망한 지 9년 후인 1654년(쇼오 3년), 이오리는 고쿠라번 교외의 테무케야마(手向山) 정상에 무사시의 업적을 기리는 큰 비석(고쿠라 비문)을 세웠다. 한문(漢文) 1,100여 자로 쓰인 이 비문은 이후 무사시에 관한 기록인 『무슈덴라이키(武州傳來記)』, 『니텐키(二天記)』 등의 기초 자료가 되었으며, 비석 자체도 유명해져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등 부젠국의 명소가 되었다. 간류지마에서의 결투나 요시오카 일문과의 싸움 역시 이 비문을 통해 사실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오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라번 오가사와라 가문의 필두 가로직을 세습하였으며, 미야모토 가문의 영지였던 테무케야마 산기슭에는 양부 무사시와 이오리를 비롯한 역대 미야모토 가문 인물들의 묘소가 남아 있다. 미야모토 가문의 후손들은 현재도 고쿠라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3. 1. 오가사와라 가문 출사
미야모토 이오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의 가신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추천으로 간에이(寛永) 3년(1626년) 15세의 나이에 하리마국 아카시번주 오가사와라 다다자네(小笠原忠真, 당시 이름은 다다마사(忠政))의 근습(近習, 주군의 시중을 드는 역할)으로 출사하였다. 곧 정식 가신이 되었으며, 20세에는 집정직(執政職)인 가로(家老)에 올랐다.
오가사와라 가문 내에서 이오리의 출세는 매우 빨랐다. 간에이 9년(1632년) 주군 다다자네가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이봉(移封)될 때 따라갔으며, 이때 2,500석을 받으며 오가사와라 가문의 주요 가신 중 한 명이 되었다.[3]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사무다이쇼(侍大将, 사무라이 대장)와 총군봉행(惣軍奉行, 총 군정 담당관)을 겸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1,500석이 더해져 총 4,000석을 받게 되었다.[7] 불과 26세의 나이에 번 내의 후다이(譜代) 가신이나 일문중(一門衆, 주군 가문의 일족)을 넘어서는 필두 가로(筆頭家老), 즉 오가사와라 가문의 최고위 가신이 되었다.[8][4]
3. 2. 고쿠라 번 이봉과 시마바라의 난
宮本武蔵|미야모토 무사시일본어의 추천으로 간에이 3년(1626년), 15세의 나이에 하리마국 아카시번의 번주 小笠原忠真|오가사와라 다다자네일본어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빠르게 능력을 인정받아 20세에는 번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가로(家老)인 집정(執政)직에 올랐다.
간에이 9년(1632년), 주군 오가사와라 다다자네가 히고국 구마모토번주 加藤忠広|가토 다다히로일본어의 개역(改易)에 따라 기존 細川忠利|호소카와 다다토시일본어가 다스리던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이봉(移封)하게 되자, 이오리도 그를 따라 고쿠라로 갔다. 이때 그는 2,500석의 녹봉을 받으며 오가사와라 가문의 주요 가신 중 한 명이 되었다.[3]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이오리는 사무다이쇼(侍大将일본어)와 총군봉행(惣軍奉行일본어)을 겸임하며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500석이 더해져 총 4,000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다.[7][3] 불과 26세의 나이에 그는 번 내의 후다이(譜代)나 일문중(一門衆)을 넘어 필두 가로(筆頭家老)가 되어 오가사와라 가문의 최고위 가신이 되었다.[4][8]
3. 3. 명신으로서의 활약
미야모토 이오리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를 섬긴 가신이었다. 양부 미야모토 무사시의 추천으로 1626년(간에이 3년), 15세의 나이에 하리마국 아카시번의 번주 오가사와라 다다자네(당시 다다마사)의 시종(近習)으로 출사하여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7][3] 곧 정식 가신이 되었고, 20세에는 번의 정치를 담당하는 집정직(가로)에 올랐다.
1632년(간에이 9년), 주군 오가사와라 다다자네가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이봉되자 이오리도 따라가 2,500석(石)의 봉록을 받으며 주요 가신 중 한 명이 되었다.[7][3] 1638년(간에이 15년)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자, 이오리는 사무다이쇼(侍大将)와 총군봉행(惣軍奉行)을 겸임하여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봉록 1,500석이 더해져 총 4,000석을 받게 되었다.[7][3]
이러한 공적과 능력을 바탕으로 이오리는 불과 26세의 나이에 번 내의 다른 중신들을 제치고 오가사와라 가문의 최고위 가신인 필두 가로(筆頭家老)의 자리에 올랐다.[8][4]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빠른 출세였다.
4. 미야모토 무사시와의 관계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이다.[5][1] 이오리는 1623년, 11세의 나이에 당시 39세였던 무사시에게 입양되었으며, 이때 무사시는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다.[5][1] 이오리의 손자가 남긴 족보에 따르면, 이오리는 본래 무사시의 형의 아들, 즉 조카였다는 기록도 있다.[6][2] 이오리는 양부 무사시의 추천으로 하리마국 아카시번의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자네를 섬기게 되었고, 훗날 무사시를 기리는 고쿠라 비문을 건립했다.
4. 1. 양부 무사시
이오리는 1623년, 11세 때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양부 무사시는 39세였고 에도에 거주하고 있었다.[5][1] 이오리의 손자가 남긴 족보에는 이오리가 원래 무사시의 형의 아들, 즉 조카였다는 기록도 있다.[6][2] 그의 출신에 대해서는, 하리마국 인난군 요메다무라 출신인 타하라 히사미츠(田原久光)의 차남이라는 설이 「고쿠라 미야모토가 계도(小倉宮本家系図)」, 유서(由緒書), 그리고 이오리가 고향에 재건한 신사의 동찰(棟札) 기록 등을 통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양부 무사시의 추천으로, 이오리는 간에이(寛永) 3년(1626년) 15세의 나이에 하리마국 아카시번의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자네의 가신으로 출사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20세에 번의 중책인 집정직(가로(家老))에 올랐다. 간에이 9년(1632년), 주군 오가사와라 타다자네가 히고국 구마모토번 번주 가토 타다히로가 영지를 몰수당한 뒤,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후임으로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자 이오리도 이를 따라갔으며, 2,500석의 녹봉을 받았다.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하자, 이오리는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겸 총군 봉행(惣軍奉行)으로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1,500석이 가증되어 총 4,000석의 녹봉을 받게 되었으며, 번 내의 후다이 다이묘(譜代)나 일문(一門) 출신 가신들을 제치고 필두 가로(筆頭家老)의 지위에 올랐다.
이오리는 양부 무사시가 사망한 지 9년 후인 쇼오(承応) 3년(1654년), 고쿠라 교외 기타큐슈시의 테무케야마(手向山) 정상에 무사시의 업적을 기리는 거대한 비석, 이른바 '고쿠라 비문(小倉碑文)'을 세웠다. 한문으로 쓰인 1,100여 자의 이 비문은 후대에 무사시의 전기를 저술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으며, 특히 간류지마(巌流島)의 결투나 요시오카 일문(吉岡一門)과의 싸움 등이 사실로 여겨지는 근거가 되었다. 이 비석은 후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그림 「쇼코쿠메이쇼햐쿠케이(諸國名所百景)」에도 등장할 정도로 부젠 지역의 명소가 되었다.
이오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라 오가사와라 번의 필두 가로직을 세습했다. 미야모토 가문의 영지였던 테무케야마 산기슭에는 양부 무사시와 이오리를 비롯한 미야모토 가문 역대 인물들의 묘소가 있다. 미야모토 가문의 후손들은 현재도 고쿠라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미야모토 무사시에게는 이오리 외에 미키노스케(三木之助)라는 양자가 먼저 있었다. 미키노스케는 히메지번의 혼다 가문(本多家)을 섬겼으나, 간에이 3년(1626년) 주군 혼다 타다토키가 사망하자 그를 따라 순사(殉死)했다.
5. 이오리의 전승
미야모토 무사시의 추천으로 간에이 3년(1626년) 15세의 나이에 하리마국 아카시번의 번주 오가사와라 타다자네(小笠原忠真)의 근습(近習)으로 출사하여 신임을 얻었다. 20세에는 가로(家老) 직책에 올랐다. 간에이 9년(1632년), 주군 타다자네가 히고국 구마모토번의 가토 타다히로(加藤忠広)가 영지를 몰수당한 뒤,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의 뒤를 이어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이봉(移封)되자 이오리도 이를 따라가 2,500석을 받았다.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에서는 사무라이 대장(侍大将)과 총군 봉행(惣軍奉行)을 겸임하며 전공을 세워 1,500석이 가증되어 총 4,000석의 지행지(知行地)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번 내의 후다이(譜代) 가신이나 일문중(一門衆)을 넘어 필두 가로(筆頭家老)의 지위에 올랐다.
이오리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나, 하리마국 인난군(印南郡) 요메다무라(米堕邑)의 타하라 히사미츠(田原久光)의 차남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이오리가 고향에 재건한 신사의 동찰(棟札) 기록 등으로 뒷받침된다.
미야모토 무사시와는 양부자 관계였다. 무사시 사후 9년째인 쇼오 3년(1654년), 이오리는 고쿠라(小倉) 교외 테무케야마(手向山)에 무사시를 기리는 고쿠라 비문(小倉碑文)으로 알려진 장덕비(彰徳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후대 무사시 관련 기록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오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라번 오가사와라 가문의 필두 가로직을 세습했으며, 현재도 고쿠라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참고로, 미야모토 무사시에게는 이오리 이전에 미키노스케(三木之助, 미야모토 미키노스케)라는 양자가 있었으나, 그는 히메지번의 혼다(本多) 가문을 섬기던 중 간에이 3년(1626년) 주군 혼다 타다토키(本多忠刻)를 따라 순사했다.
5. 1. 도메 신사 동찰(泊神社棟札)
미야모토 무사시 사후 8년째인 쇼오 2년(1653년), 이오리는 자신의 고향인 하리마국에 도메이 다이묘진자(泊大明神社)를 재건하면서 동찰(棟札)을 남겼다. 이 동찰은 흔히 '도메 신사 동찰'이라고 불린다.[1] 동찰 뒷면에는 "원주(願主), 源貞次・사제(舎弟) 현창(玄昌), 다하라케전기(田原家傳記)를 당사(當社)・미다텐진궁(米堕天神宮) 별서(別書)에 수납 완료"라고 명기되어 있어, 정식으로는 『다하라케전기(田原家伝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1]이 동찰에는 이오리가 자신의 선조 내력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오리의 가문인 다하라(田原) 가문은 대대로 미다무라(米堕邑)에서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사다미쓰(貞光), 조부는 이에사다(家貞), 부친은 히사미쓰(久光)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오리가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가 된 경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
: 작슈(作州)에 겐지(顕氏) 신면(神免)이라는 자가 있었다. 덴쇼(天正) 시대에 후계자가 없이 치쿠젠 아키즈키성(秋月城)에서 죽었다. 유언에 따라 집안을 이어받은 자를 무사시 조우 겐신(武蔵掾玄信)이라고 한다. 후에 성을 미야모토(宮本)로 바꾸었다. 또한 자식이 없어 나를 의자(義子, 양자)로 삼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의 성을 사용한다.[1]
즉, 작슈의 명문가였던 신면(神免)씨 가문에 후계자가 없자, 유언에 따라 무사시 겐신(미야모토 무사시)이 가문을 계승했다. 이후 무사시는 성을 미야모토로 바꾸었으나 그에게도 자식이 없었기에, 이오리가 양자가 되어 미야모토 성을 잇게 되었다는 내용이다.[1] 이 동찰의 내용은 이오리의 출신과 무사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5. 2. 하리마鑑(Harimakagami)
하리마(播磨国) 지방의 지리서인 『하리마鑑』에는 미야모토 이오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1]>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 이오리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로, 요네다무라(米田村) 출신이다. 아버지는 진베(甚兵衛)라 불리며, 본래 미키(三木)의 사무라이였으나 별소 성 함락 후 요네다무라로 와서 이오리를 낳았다. (「天狗 전설」요약) 당시 아카이시(赤石)의 성주 오가사와라(小笠原) 가문은 천하무쌍의 병술가인 미야모토 무사시를 불러들여 손님으로 모셨는데, 이오리가 16세 되던 해 그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기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무사시가 양자로 삼았다. 후에 주군이 부젠 고쿠라(豊前小倉)로 옮기자 따라갔는데, 시마바라 일키(島原一揆)가 일어났을 때 전장에 나가 큰 공을 세워 3000석을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무직이었으나 후에 가로(家老) 직책을 맡았다. 자손들은 요네다무라에 있으며, 후에 이오리 씨가 사당을 세웠기 때문에, 도메이 대명신(泊大明神)의 사당, 배전, 무대, 문지기 등을 모두 건립하였다. 즉 석등롱(灯籠)에 공사의 봉행인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즉 도메(泊)의 옛 사당을 요네다무라로 옮겨 세우고 내궁(内宮)이라 불렀다. 도메에는 당상가(堂上家)의 가선(歌仙) 36매(三十六歌仙) 등 귀한 물건을 많이 기증받았다.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 자손들은 고쿠라에서 에도로 왕래할 때 도메 사당에 참배하였다고 한다. 이오리의 어머니는 가토군(加東郡) 타루이 쇼(垂井荘) 미야와키무라(宮脇村) 사람이다. 따라서 이오리도 오랫동안 미야와키무라에 살았다고 한다.
『하리마鑑』은 이오리의 출신, 경력, 사건, 자손의 이야기, 심지어 어린 시절 천구에게 납치되었다는 전설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는 편저자인 平野庸修가 이오리와 같은 인난군(印南郡) 출신이었기에, 고향의 위인으로서 이오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또한, 본문에 요네다(米田)에 여전히 이오리의 자손(대대로 요네다의 庄屋를 지낸 타하라 씨)이 거주한다고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이웃 마을 히라츠(平津)의 의사였던 히라노가 직접 타하라 씨 후손을 찾아가 조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
특히 『하리마鑑』은 『고쿠라 미야모토가 계도(小倉宮本家系図)』와 달리, 무사시와 이오리가 혈연 관계(삼촌-조카)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오히려 무사시가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 이오리의 뛰어난 기량을 보고 양자로 삼았다고 명시하고 있다.[1]
또한 『하리마鑑』은 별도 항목에서 무사시와 이오리를 나란히 소개하며, 의도적으로 같은 하리마 내에서도 서로 다른 출신지로 기록하고 있다.[1]
>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蔵) 揖東郡 시카(鵤) 근처, 미야모토무라(宮本村)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병술을 좋아하여 여러 지방을 수행하며 천하에 숨겨진 곳이 없었다. 즉 무사시류(武蔵流)라고 하여 여러 무사들에게 제자가 많았다. 그러나 봉건 영주를 섬기지 않고 아카시(明石)에 가서 오가사와라 우콘쇼칸(小笠原右近将監)에게 알현하여, 그때 이오리를 양자로 삼았다. 그 후 오가사와라 씨가 부젠 고쿠라로 가게 되자 동행하였고, 양자인 이오리에게 5000석을 하사받아 대로(大老) 직책을 맡았다. 현재 그 자손은 3000석으로 가로(家老) 직책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 미야모토 무사시는 사요군(佐用郡) 평복(平福) 거주 풍수옹(風水翁)의 설과 다르다. 별도로 서술한다.
>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 인난군(印南郡) 요네다무라(米田村) 출신이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양자이다. 구적(舊蹟) 부분에 자세히 적혀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하리마鑑』이 편찬된 宝暦 12년(1762년) 무렵까지 하리마 지방에서는 무사시와 이오리가 같은 타하라(田原) 씨 출신이라는 전승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5. 3. 무슈전래기(武州伝来記)
지쿠젠 구로다번의 이천일류 사범이었던 다치바나 미네히사(橘峯均)가 편찬한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인 『무슈전래기(武州伝来記)』에는 미야모토 이오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 책에는 무사시가 이오리를 오가사와라 우콘쇼겐 다다사다(小笠原右近将監 忠貞)에게 추천하여 섬기게 된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무슈전래기』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평생 처자식을 두지 않았으며, 미야모토 이오리와 미야모토 조주노스케(宮本造酒之助) 두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 이오리의 출신에 대해서는 상인의 자식이었다고 전한다. 무사시는 오가사와라 다다사다(忠貞)에게 이오리를 추천하며 "어떤 아이를 보호하여 바치겠습니다. 격투에 임하게 된다면 임무에 임하기 어렵습니다. 곁에 두고, 가로들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일을 맡긴다면, 결국 임무에 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사시의 안목대로 이오리는 점차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했으며, 오가사와라 가문의 세습 가신들을 뛰어넘어 5천 석의 영지를 받는 고위 가신이 되었다. 그의 명성은 막부의 로주(老中)에게까지 알려졌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명신(名臣)으로 칭송했다. 『무슈전래기』는 이오리가 세습 가신들과 거리를 두고 위엄을 지켰으나(길을 갈 때 2간 정도 앞서 갔다고 함), 결코 거만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이오리는 오가사와라 다다사다(忠貞)와 그의 아들 오가사와라 다다오(忠雄) 두 군주를 성실히 보좌하며 깊은 신뢰를 받았다. 특히 다다오가 행실 문제로 인해 다른 가로들이 에도로 불려가 질책을 받았을 때, 평소 바른 말을 했던 이오리는 문책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무슈전래기』는 이오리가 쇼군과 막부 각료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명재상이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고쿠라번 오가사와라 가문의 가신으로 남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5. 4. 이천기(二天記)
『이천기(二天記)』의 기록에 따르면, 이오리는 데와(出羽)국 정법사(正法寺) 마을 출신의 고아였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무쓰(陸奥)국 모가미(最上) 가문의 낭인이었다고 전해진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정법사원(正法寺原)을 지나가던 중 미꾸라지를 잡고 있던 소년 이오리를 발견하고 양자로 삼았다는 일화는 “미꾸라지 이오리(泥鰌伊織)” 이야기로 유명하다.5. 5. 우노마네(鵜之真似)
에도 후기 고쿠라 번의 번사였던 고지마 레이쥬(小島禮重)는 번의 일화, 풍속, 지리 등을 기록한 『우노마네(鵜之真似)』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에는 미야모토 이오리에 관한 일화가 10여 개나 기록되어 있어, 그의 구체적인 인물상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소개된 두 가지 일화는 다음과 같다.- 시마바라의 난 당시: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나 규슈의 여러 다이묘들이 급히 귀국해야 했을 때, 오가사와라 가문 역시 성으로 돌아갔다. 쇼군가에서 번주 부재 시 누구를 가로로 남겼는지 물었을 때, 미야모토 이오리라고 답하자 쇼군가는 "이오리가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으니 빨리 성으로 돌아가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이는 이오리가 쇼군가로부터도 깊은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며, 당시에는 군신(君臣)이 함께 무가(武家)의 명예를 높인 사례로 평가받았다.
- 에도 대화재 당시: 정확한 연월은 불분명하지만, 에도(江戸)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이오리는 와다쿠라(和田倉) 방어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 불길이 거세 번주(藩主)에게 불똥이 쏟아지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번주는 태연히 지휘를 계속했다. 한 실무자가 이오리에게 번주의 안전을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하자, 이오리는 크게 분노하며 “무슨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가? 번주께서 이렇게 진두지휘하시는데 모두 필사적으로 불을 막아야 할 때다. 지금 와다쿠라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며,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목숨 걸고 불을 막겠는가?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말라!”라고 호되게 꾸짖었다. 이 일화는 이오리의 강직함과 충성심을 잘 보여주며, 그는 '15만 석 사무라이 장군(侍大将)', '국가의 기둥과 같은 신하'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6. 이오리의 소령(所領)
미야모토 무사시의 추천으로 오가사와라 타다자네를 섬기게 된 이오리는, 주군이 히고국 구마모토번에서 부젠국 고쿠라번으로 이봉(移封)된 간에이 9년(1632년)에 2500석의 봉록을 받으며 고쿠라번의 가신이 되었다. 이후 간에이 15년(1638년) 시마바라의 난에서 사무라이 대장(侍大将) 겸 총군봉행(惣軍奉行)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그 결과 1500석이 추가되어 총 4000석의 지행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는 번 내의 푸다이(譜代) 가신이나 번주 일족(一門衆)보다 높은 대우였으며, 이오리는 가로 중 최고 서열인 필두 가로(筆頭家老)의 자리에 올랐다.
이오리가 생전에 소유했던 구체적인 영지(소령, 所領) 내역은 연보(延宝) 5년(1677년)에 작성된 「고쿠라번 지행첩(小倉藩知行帖)」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미야모토 가문의 명목상 총 석고(石高)는 4000석이었으며,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다.
지행지 | 석고(石高) | 비고 (현재 지명 등) |
---|---|---|
미나미(南) | 740.558 | 고쿠라미나미구 일대 추정 |
토쿠미츠(徳光) | 611.9904 | - |
시라노에(白野江) | 387.7333 | 몬지구 스오나다(周防灘) 해안 지대 |
벤죠(弁城) | 191.4128 | 타가와군 |
시모이가타(下伊方) | 937.6026 | - |
카미사키(神崎) | 977.6935 | 타가와군 |
미야도코(宮床) | 238.5125 | - |
총합 (세부 합계) | 4085.5031 | 7개 마을 합계 |
위 표에 나타난 7개 마을의 석고를 합하면 4085석이 넘는데, 기록된 4000석 중 2000석은 '상리지(上り知)'였다. '상리지'는 형식상으로만 받은 봉록으로 실제 수입은 번(藩)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제외하면 미야모토 가문의 실질적인 지행 규모는 약 2085석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오리의 영지는 부젠국 곳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미나미(南)는 현재의 기타큐슈시 고쿠라미나미구 일대, 시라노에(白野江)는 몬지구의 스오나다(周防灘)에 면한 해안 지역이며, 벤죠(弁城)와 카미사키(神崎)는 타가와군 내에 현재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이오리의 후손들은 대대로 고쿠라 오가사와라 번(小倉小笠原藩)의 필두 가로직을 이어받았다. 5대손인 미야모토 사다토시(宮本貞陳) 대에는 지행이 2100석으로 조정되었고, 이 봉록 수준은 메이지 유신으로 번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7. 이오리의 자손
이오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고쿠라번 오가사와라번의 필두 가로 직책을 세습했다. 미야모토 가문의 지행지였던 테무케야마(手向山) 산기슭에는 양아버지 미야모토 무사시와 이오리 본인을 비롯한 역대 미야모토 가문 사람들의 묘소가 있다. 미야모토 가문의 자손들은 현재도 고쿠라번 사족의 후예로서 고쿠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Miyamoto Musashi: His Life and Writings
Shambhala Publications
2021-05-20
[2]
서적
The Lone Samurai: The Life of Miyamoto Musashi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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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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