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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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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키는 663년 백강 전투 패배 이후 일본이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지쿠시 국에 건설한 방어 시설이다. 오노 성과 우시쿠비 고원 사이의 좁은 지점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총 길이 약 1.2km, 높이 9m의 토루와 해자를 갖추고 있었다. 덴지 천황의 명령에 따라 664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백제 부흥 운동 실패 이후 망명해 온 백제 기술자들이 축조에 참여했다. 훗날 1274년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개축되었으나, 실제 전투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현재는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 중이며, 2017년 속 일본 100명성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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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유적)
지도 정보
후쿠오카현 지도
후쿠오카현 지도
개요
이름미즈키 성
원어 이름水城跡 (일본어)
로마자 표기Mizuki-jō ato
종류조선식 산성
위치후쿠오카현오노조시
상태유적
문화재 지정국가 지정 특별 사적 "미즈키 성터"
역사
축조 시기660년대 (추정)
축조 주체야마토 조정
사용 시기아스카 시대
구조
형태고대 성곽
잔존 구조토루, 성문 터, 외호 터
추가 정보

2. 역사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부흥군은 한반도에서 당나라·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사이메이 천황 사후 칭제(称制)의 형식으로 즉위식도 제대로 올리지 않고 왜를 다스렸던 나카노오에 황자는 나·당 연합군이 왜로 공격해 올 것을 우려하여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

덴지 천황 3년(664년) 쓰시마 섬·이키 섬·지쿠시 국 등에 사키모리봉화를 배치하고, 지쿠시 국에 '''수성'''을 쌓았다. 미즈키성은 오노 성과 서쪽의 우시쿠비 고원 사이의 가장 좁은 지점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3] 총 길이가 약 1.2킬로미터, 높이 9미터, 기저부 폭 약 80미터, 상단부 폭 약 25미터의 2단 토루로, 양쪽 끝에 동쪽과 서쪽 문이 있었다.[3] 동쪽 문은 황실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쪽 문은 외국 사절, 상인 및 일본 사절의 출발을 위해 사용되었다.[4] 토루 기저부에 걸쳐 있는 나무 도랑은 길이가 79.5미터, 폭 1.2미터, 높이 0.8미터이다.[3] 토루의 하카타 쪽에는 너비 약 60미터, 깊이 4미터의 바깥 해자가 현재 표면 아래 5미터에 존재한다.[3]

665년에는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에 걸쳐 오노 성, 기이 성(基肄城), 나가토 성(長門城) 등 고대 산성(조선식 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들 성의 축조에는 억례복류(憶礼福留), 사비복부(四比福夫) 등 백제 부흥운동 실패 이후 왜로 망명해 온 옛 백제 무장들이 나서서 그 축조를 감독하였다.

미즈키성은 덴지 천황의 명령에 따라 664년에 시작되었지만,[3], ''일본서기''에는 단지 "쓰쿠시 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한 큰 제방"으로 묘사되어 있다.[3] 미즈키 서쪽에는 여러 개의 소규모 토루 유적이 있으며, 이들은 외부 요새의 고리를 형성한다. 이들을 통틀어 ''쇼미즈키'' (작은 미즈키)라고 한다.[4] 가미다이-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80미터, 오도이-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100미터, 덴진야마 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80미터의 토루가 있다.[4] 또한 인근 기야마에는 세키야 토루 유적과 토레기 토루 유적이 있다.[4]

나당 전쟁 (670–676)의 발발을 알지 못한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나라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 건설을 계속했다.[2]

훗날 1274년에 일본을 공격했던 고려몽골의 연합군에 맞서 서부 방어선으로써 미즈키의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실제 전장으로 미즈키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

2. 1. 백제 부흥 운동과 미즈키 축조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부흥군은 한반도에서 당나라·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사이메이 천황 사후 칭제(称制)의 형식으로 즉위식도 제대로 올리지 않고 왜를 다스렸던 나카노오에 황자는 나·당 연합군이 왜로 공격해 올 것을 우려하여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다.

덴지 천황 3년(664년) 쓰시마 섬·이키 섬·지쿠시 국 등에 사키모리봉화를 배치하고, 지쿠시 국에 '''수성'''을 쌓았다. 미즈키성은 오노 성과 서쪽의 우시쿠비 고원 사이의 가장 좁은 지점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3] 총 길이가 약 1.2킬로미터, 높이 9미터, 기저부 폭 약 80미터, 상단부 폭 약 25미터의 2단 토루로, 양쪽 끝에 동쪽과 서쪽 문이 있었다.[3] 동쪽 문은 황실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쪽 문은 외국 사절, 상인 및 일본 사절의 출발을 위해 사용되었다.[4] 토루 기저부에 걸쳐 있는 나무 도랑은 길이가 79.5미터, 폭 1.2미터, 높이 0.8미터이다.[3] 토루의 하카타 쪽에는 너비 약 60미터, 깊이 4미터의 바깥 해자가 현재 표면 아래 5미터에 존재한다.[3]

665년에는 기타큐슈(北九州)에서 세토 내해(瀬戸内海) 연안에 걸쳐 오노 성, 기이 성(基肄城), 나가토 성(長門城) 등 고대 산성(조선식 산성)을 쌓도록 하였다. 이들 성의 축조에는 억례복류(憶礼福留), 사비복부(四比福夫) 등 백제 부흥운동 실패 이후 왜로 망명해 온 옛 백제 무장들이 나서서 그 축조를 감독하였다.

미즈키성은 덴지 천황의 명령에 따라 664년에 시작되었지만,[3], ''일본서기''에는 단지 "쓰쿠시 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한 큰 제방"으로 묘사되어 있다.[3] 미즈키 서쪽에는 여러 개의 소규모 토루 유적이 있으며, 이들은 외부 요새의 고리를 형성한다. 이들을 통틀어 ''쇼미즈키'' (작은 미즈키)라고 한다.[4] 가미다이-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80미터, 오도이-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100미터, 덴진야마 코미즈 성은 길이가 약 80미터의 토루가 있다.[4] 또한 인근 기야마에는 세키야 토루 유적과 토레기 토루 유적이 있다.[4]

나당 전쟁 (670–676)의 발발을 알지 못한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나라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 건설을 계속했다.[2]

훗날 1274년에 일본을 공격했던 고려몽골의 연합군에 맞서 서부 방어선으로써 미즈키의 개축이 이루어졌는데, 실제 전장으로 미즈키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

2. 2. 미즈키의 역할과 변천

미즈키(水城)는 하카타 만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맞서 다자이후를 방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 직선상의 해자와 토루를 갖추고 있다. 토루는 높이 10m 이상, 너비 80m 이상, 길이 1.2km 정도이며, 하카타 만 쪽으로 판 해자는 폭이 60m에 깊이 4m로 물을 채웠다. 토루에는 두 곳의 개구부가 있었고, 발굴 조사 결과 성문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토루 내부는 미카사 강(御笠川)에서 끌어들인 물이 흐르도록 나무 물길을 설치했다.[4]

미즈키의 용도에 대해서는 단순히 성벽의 역할 뿐 아니라, 유사시 미카사 강의 물을 막아 두었다가 적병이 빈 해자로 들어오면 물을 방류해 수공(水攻)을 가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물을 가두기에 불편한 문과 나무 물길의 존재, 그리고 쇼미즈키(小水城)의 존재 의의를 고려하면 이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야마토 일본 연합군이 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은 당나라나 신라의 침략을 우려하여 600년대 후반에 걸쳐 해안 요새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백제 기술자, 장군 및 장인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나당 전쟁 발발을 알지 못했던 일본은 신라가 당나라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 건설을 계속했다.[2] 덴지 천황의 명령에 따라 664년에 미즈키성 건설이 시작되었지만,[3] ''일본서기''에는 "쓰쿠시 국에 물을 저장하기 위한 큰 제방"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미즈키성은 오노 성과 서쪽의 우시쿠비 고원 사이의 가장 좁은 지점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2단 토루는 양쪽 끝에 동쪽과 서쪽 문이 있는데, 동쪽 문은 황실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들을 맞이하고, 서쪽 문은 외국 사절, 상인 및 일본 사절의 출발을 위해 사용되었다. 토루 기저부에 걸쳐 있는 나무 도랑은 길이가 79.5미터, 폭 1.2미터, 높이 0.8미터이다. 토루의 하카타 쪽에는 너비 약 60미터, 깊이 4미터의 바깥 해자가 존재한다. 이 요새는 미카사 강이 중앙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흐르는 충적토 위에 건설되었으며, "시키소다" 건설 방법을 사용하여 기초를 강화했다.[4] 성을 통과하는 도로는 8세기 후반까지 다자이후와 하카타 항을 연결하는 주요 경로이자 외국 사절들이 통과하는 경로였다.[4]

미즈키 서쪽에는 여러 개의 소규모 토루 유적이 있는데, 이들은 외부 요새의 고리를 형성하며 ''쇼미즈키''(작은 미즈키)라고 불린다. 가미다이-코미즈 성은 길이 약 80m, 오도이-코미즈 성은 길이 약 100m, 덴진야마 코미즈 성은 길이 약 80m의 토루가 있다. 또한 인근 기야마에는 세키야 토루 유적과 토레기 토루 유적이 있다.

1913년 토루 단면 조사, 1930년 나무 도랑 조사 등 유적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졌고, 197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1975년에는 요새의 하카타 쪽에 있는 바깥 해자가 발견되었고, 1978년에는 8세기 후반의 "미즈키"라는 잉크 글씨가 있는 하지기 도자기가 발굴되었다. 미즈키성은 2017년에 속 일본 100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 다자이후 정청(大宰府政庁) 유적에 인접해 설치된 「다자이후 전시관」에는 미즈키를 하늘에서 올려다 본 파노라마나 구조를 보여주는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3. 구조

미즈키는 하카타만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맞서 다자이후를 방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써 직선상의 해자와 토루를 갖고 있다. 토루는 높이 10m 이상, 너비 80m 이상, 길이 1.2km 정도이고, 하카타 만 쪽으로 판 해자는 폭이 60m에 깊이 4m로 물을 채웠다. 토루에는 두 곳의 개구부가 있고, 발굴 조사 결과 그곳이 성문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토루 내부는 미카사강에서 끌어들인 물이 흐르도록 나무 물길을 설치했다.

남서쪽 산능성이 너머 장소에는 현재 쇼미즈키(小水城)라 불리는 길이 80m 토루가 있다. 이것은 미즈키와 함께 다자이후를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되고 있다.

다자이후 정청 유적에 인접해 설치된 「다자이후 전시관」에 미즈키를 하늘에서 올려다 본 파노라마나 구조를 보여주는 리플리카(정밀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4. 고고학적 조사

1913년(다이쇼 2년) 구로이타 가쓰미・나카야마 헤이지로가 토루 단면을 조사하고, 1930년(쇼와 5년) 나가누마 겐카이・카가미야마 타케시가 나무 홈통을 조사했다.[19]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70년(쇼와 4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후쿠오카현 교육위원회, 규슈 역사 자료관, 다자이후시, 오노조시가 지속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19]

1975년(쇼와 50년) 발굴 조사에서는 수성 대제방의 하카타 쪽에 외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1] 1978년(쇼와 53년)에는 8세기 후반대의 "수성" 명의 먹글씨 하지키토기가 발굴되었다.[20]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후쿠오카현 교육위원회는 100년 만에 토루 단면을 재조사했다.[21]

규슈 관내의 성, 세토 내해 연안의 성의 배치 및 구조는 일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7세기 후반 일본이 추진한 대규모 국가 사업으로 평가받는다.[22]

2019년 2월 26일, 오노조시 시모오리에 있는 "부자지마(父子嶋)"가 국 특별 사적 "수성 유적"에 추가 지정되었다.[23]

5. 현대의 미즈키

현재 부지에는 자동차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빈터 외에는 다이파루 지방 본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장에는 영어와 일본어로 된 정보가 있는 작은 박물관인 미즈키관이 2017년 4월 1일에 개관하였다.[26] 인근의 큐슈 국립박물관에는 미즈키 성의 모형이 있다.[6]

현장은 니시테쓰 텐진 오무타 선의 토후로마에역에서 도보로 약 25분 거리에 있다.[4] 규슈 여객철도의 가고시마 본선의 미즈키역은 『일본서기』의 "미즈키"에서 유래되었다. 미즈키역 근처에서 열차는 "미즈키의 토루 절단부"를 통과한다.[21]

헤이세이 25년(2013년)부터 27년(2015년)까지 3개년에 걸쳐 "미즈키·오노성·키이성 1350년 기념 사업"이 기획되어 관계 자치단체 외에 관민도 연계한 각종 기념 사업이 전개되었다.[24] 2017년에는 속 일본 100명성(182번)으로 선정되었다.[25]

2017년 11월, 국제천문연맹(IAU)은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후루카와 키이치로에 의해 발견된 소행성에 "Mizuki"로 명명, 등록했다.[27]

참조

[1] 웹사이트 水城跡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09-15
[2] 서적 Japanese Castles AD 250--1540 https://books.google[...] Osprey 2008
[3] 간행물 The Japan Magazine: A Representative Monthly of Things Japanese, Volume 11 p 185
[4]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5] 웹사이트 続日本100名城 http://jokaku.jp/jap[...] 日本城郭協会 2019-07-25
[6] 문서 Japanese Castles AD 250–1540 Osprey Publishing
[7] 문서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8] 문서
[9] 서적 倭国から日本へ 吉川弘文館 2002-08
[10] 문서
[11] 서적 日本の古代遺跡 保育社 1987-10
[12] 문서
[13] 문서
[14] 학술지 古代遮断施設(防塁)についての一考察 九州古文化研究会
[15] 문서
[16] 문서
[17] 학술지 小水城の調査ー大土居水城跡を中心にー 古代山城研究会
[18] 문서
[19] 문서
[20] 학술지 水城跡の発掘調査 ー外濠の調査成果を中心にー 古代山城研究会
[21] 문서
[22] 문서
[23] 웹사이트 「父子嶋」が国史跡に 大野城市、保存整備の方針 古代水城の関連地 伝説とともに後世へ https://www.nishinip[...] 2019-03-10
[24] 문서
[25] 뉴스 真田丸ゆかりの城など「続日本100名城」に 2016-04-09
[26] 웹사이트 水城跡東門に市の便益施設「水城館」が開館しました! http://www.city.daza[...] 2017-03-27
[27] 웹사이트 小惑星に「鴻臚館」「道真」 九州ゆかりの4件命名 天文学者故古川さん発見 https://www.nishinip[...] 20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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