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성 (후쿠오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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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노성(大野城)은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고대 산성으로, 663년 백강 전투에서 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했다. 덴지 천황 4년(665년)에 키이 성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백제 망명인 억례복류와 사비복부가 성곽 건설을 담당했다. 오노성은 다자이후 정청 북쪽의 시오지산에 위치하며, 총 둘레 약 6.8km의 토루와 석루로 이루어져 있다. 다자이후구치 성문이 세 차례에 걸쳐 재건되었으며, 70여 동의 건물터와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현재는 후쿠오카현립 시오우지 현민의 숲으로 정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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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노성 (후쿠오카현)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로마자 표기 | Ōno-jō |
| 위치 | |
| 소재지 | 우미, 오노조, 다자이후, 후쿠오카, 일본 |
| 군사 시설 정보 | |
| 종류 | 한국식 산성 |
| 건설 시기 | 기원후 660년대 |
| 건설 주체 | 야마토 조정 |
| 사용 시기 | 아스카 시대 |
| 현재 상태 | 유적 |
| 각주 | {{Location map many | Japan Fukuoka Prefecture#Japan | width = 260 | float = right | relief = 1 | label = | pos = bottom | mark =Steel pog.svg | marksize = 8 | coordinates = | label2 = 부젠 고쿠후 | pos2 = right | mark2 = SpringGreen pog.svg |size = 8 | coordinates2 = | label3 = 다자이후 | mark3 = SpringGreen pog.svg | pos3 = bottom | coordinates3 = | label4 = 아사쿠라 궁? | mark4 = SpringGreen pog.svg | pos4 = bottom | coordinates4 = | label5 = 오노 | mark5 = | pos5 = right | coordinates5 = | label6 = | mark6 =Steel pog.svg | pos6 = bottom | coordinates6 = | label7 = | mark7 =Steel pog.svg | pos7 = left | coordinates7 = | label8 = | mark8 =Steel pog.svg | pos8 = right | coordinates8 = | label9 = | mark9 =Steel pog.svg | pos9 = bottom | coordinates9 = | label10 = | mark10 =Steel pog.svg | pos10 = bottom | coordinates10 = | label11 = | mark11 =Steel pog.svg | pos11 = bottom | coordinates11 = | label12 = | mark12 =Steel pog.svg | pos12 = bottom | coordinates12 = | label13 = | mark13 =Steel pog.svg | pos13 = bottom | coordinates13 = | label14 = | mark14 =Steel pog.svg | pos14 = bottom | coordinates14 = | label15 = 지쿠고 고쿠후 | mark15 = SpringGreen pog.svg | pos15 = bottom | coordinates15 = | label16 = | mark16 = Steel pog.svg | pos16 = bottom | coordinates16 = }} |
| 역사 | |
| 건설 연도 | 덴지 천황 4년 (665년) |
| 문화재 정보 | |
| 문화재 지정 | 일본의 특별 사적 |
| 유적 | |
| 잔존물 | 토루, 석루, 수문, 성문, 건물 터, 물 저장소 |
2. 역사적 배경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왜국은 나·당 연합군에 대패했다.[35] 이후, 덴지 천황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4년 북큐슈의 쓰시마, 이키, 쓰쿠시에 사키모리(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35] 다자이후 서쪽인 쓰쿠시에 평지성인 미즈키를 축조했다.[36] 665년 8월에는 나가토에 성을 쌓고,[37]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인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쓰쿠시에 파견하여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로 오노성과 기성(椽城)을 쌓게 했다.[38][39] 이것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 지도하에 축조했으며, 일본에서는 이를 조선식 산성이라 부른다.[38][39]
백촌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한 후, 야마토 조정은 왜(일본)의 방어를 위해 고대 산성을 축조하였다.[27] 665년(덴지 천황 4년), 키이 성과 함께 축조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다.[27] 성곽 건설을 담당한 것은 망명백제인으로, "병법에 능하다"고 평가받은 군사 기술 전문가인 억례복류와 사비복부이다.[27] 『일본서기』에는 "...'''오노'''(大野)와 틔(椽) 두 성(二城)을 쌓게 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25] 또한, 『속일본기』에 "다자이후에게 '''오노'''(大野), 키이, 쿠쿠치 3개의 성을 수리하게 했다"라고 기재된 성이다.[26] 698년(몬무 천황 2년)에는 오노성・키이 성・쿠쿠치 성의 3성 수리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27]
덴지 정권은 백촌강 패전 이후, 당・고구려・신라의 교전에 가담하지 않고, 우호 외교에 전념하면서, 쓰시마~큐슈 북부~세토 내해~기나이와 연계하는 방위 체제를 정비한다.[28] 또한, 다자이후도성의 외곽은 험준한 연산의 지형과, 이에 연하는 오노성・키이 성과 평야부의 미즈키 다이테이・코미즈키 등으로 방비를 굳힌다.[28] 이 원형은 백제사비도성에 있다고 한다.[28]
나당 전쟁 (670–676)의 발발을 알지 못했던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과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를 계속 건설했다.[2]
2. 1. 백강 전투와 나·당 연합군의 승리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왜국은 나·당 연합군에 대패했다.[35] 이후, 덴지 천황은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4년 북큐슈의 쓰시마, 이키, 쓰쿠시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35] 다자이후 서쪽인 쓰쿠시에 평지성인 미즈키를 축조했다.[36] 665년 8월에는 나가토에 성을 쌓고,[37]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인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쓰쿠시에 파견하여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로 오노성과 기성(椽城)을 쌓게 하였다.[38][39]2006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대 명성 가운데 86번째로 선정되었으며,[5] 2007년 6월부터 전국 규모 일본 100대 명성 스탬프 릴리가 개시되었다.
백강구 전투에서 신라와 당(당)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은 당나라 또는 신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600년대 후반까지 해안 요새를 건설하였으며, 백제 엔지니어, 장군, 장인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2] 나당 전쟁 (670–676)의 발발을 알지 못했던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나라와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를 계속 건설했다.[2]
고고학 발굴을 통해 다자이후 문이 3단계로 재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키타 이시가키 문에는 입구 앞에 약 1미터 높이의 계단이 있는 매달린 문 구조가 있으며, 이는 문기둥에 베어링 금속 부품이 발굴된 일본 최초의 사례이다. 약 70개의 건물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여러 개의 건물은 성 내 8곳에 분포된 그룹을 형성하며, 여기에는 본성의 기초 석재도 포함된다. 기둥이 서 있는 건물과 기초 석재가 있는 건물이 있으며, 창고로 추정되는 기둥과 기초 석재가 모두 있는 건물도 많은데, 이 건물들은 초기 성 건설 기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된 유물에는 서예가 새겨진 토기, 기와와 탄화된 쌀 등이 있다. 발굴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다.[4]
2003년 7월, 유례없는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했으며, 2004년부터 6년에 걸쳐 약 30곳에서 유적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토루 붕괴로 인해 외곽 전체에 걸쳐 토루 기저에 돌들이 줄지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또한 돌줄 앞에서는 일련의 구멍이 감지되었다.
『일본서기』에는 "...'''오노'''(大野)와 틔(椽) 두 성(二城)을 쌓게 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25] 또한, 『속일본기』에 "다자이후에게 '''오노'''(大野), 키이(基肄), 쿠쿠치(鞠智) 3개의 성을 수리하게 했다"라고 기재된 성이다.[26]
오노성은 백촌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한 후, 야마토 조정이 왜(일본)의 방어를 위해 축조한 고대 산성이다. 665년(덴지 천황 4년), 키이 성과 함께 축조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다. 성곽 건설을 담당한 것은 망명백제인으로, "병법에 능하다"고 평가받은 군사 기술 전문가인 억례복류 (오쿠라이후쿠루)와 사비복부(시히후쿠부)이다.[27] 그리고 『속일본기』의 698년(몬무 천황 2년)에는 오노성·키이 성·쿠쿠치 성의 3성 수리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덴지 정권은 백촌강 패전 이후, 당·고구려·신라의 교전에 가담하지 않고, 우호 외교에 전념하면서, 쓰시마~큐슈 북부~세토 내해~기나이와 연계하는 방위 체제를 정비한다. 또한, 다자이후도성의 외곽은 험준한 연산의 지형과, 이에 연하는 오노성·키이 성과 평야부의 미즈키 다이테이·코미즈키 등으로 방비를 굳힌다. 이 원형은 백제사비도성에 있다고 한다.[28]
『일본서기』에 기재된 백촌강 전투와, 방어 시설 설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덴지 천황 2년(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왜(일본)·백제 부흥군은 한반도에서 당·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 덴지 천황 3년(664년): 쓰시마 섬·이키 섬·지쿠시 국 등에 사키모리와 봉화 (토부히)를 배치하고, 지쿠시 국에 미즈키를 쌓는다.
- 덴지 천황 4년(665년): 나가토 국에 성을 쌓고, 지쿠시 국에 '''오노성'''과 키이 성을 쌓는다.
- 덴지 천황 6년(667년): 야마토 국에 타카야스 성·사누키 국에 야시마 성·쓰시마 국에 카네다 성을 쌓는다. 이 해, 나카노 오에 황자는 오츠로 천도하고, 다음 해 정월에 덴지 천황이 된다.
2. 2. 야마토 조정의 국방 강화
663년 백강 전투에서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왜국은 나·당 연합군에 대패했다.[35] 이후, 덴지 천황은 나·당연합군 침공에 대비하여 방비를 견고히 하기 위해 많은 방비 시설 건설에 주력하게 되는데(《일본서기》) 664년 북큐슈의 쓰시마(対馬)[35]이키(壱岐)[35]쓰쿠시(筑紫)에 사키모리(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35] 다자이후 서쪽인 쓰쿠시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를 축조하고,[36] 665년 8월에는 나가토(長門)에 성을 쌓고[37]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인 억례복류(憶礼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쓰쿠시에 파견하여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로 오노성과 기성(椽城)을 쌓게 한다.[38][39] 이것은 이전 일본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방어시설물로서 백제 망명세력 지도하에 축조했으며, 일본에서는 이를 조선식 산성이라 부른다.[38][39]백촌강 전투에서 당・신라 연합군에게 대패한 후, 야마토 조정은 왜(일본)의 방어를 위해 고대 산성을 축조하였다.[27] 665년(덴지 천황 4년), 키이 성과 함께 축조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다.[27] 성곽 건설을 담당한 것은 망명백제인으로, "병법에 능하다"고 평가받은 군사 기술 전문가인 억례복류 (오쿠라이후쿠루)와 사비복부(시히후쿠부)이다.[27] 『일본서기』에는 "...'''오노'''(大野)와 틔(椽) 두 성(二城)을 쌓게 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25] 또한, 『속일본기』에 "다자이후에게 '''오노'''(大野), 키이(基肄), 쿠쿠치(鞠智) 3개의 성을 수리하게 했다"라고 기재된 성이다.[26] 698년(몬무 천황 2년)에는 오노성・키이 성・쿠쿠치 성의 3성 수리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27]
덴지 정권은 백촌강 패전 이후, 당・고구려・신라의 교전에 가담하지 않고, 우호 외교에 전념하면서, 쓰시마~큐슈 북부~세토 내해~기나이와 연계하는 방위 체제를 정비한다.[28] 또한, 다자이후도성의 외곽은 험준한 연산의 지형과, 이에 연하는 오노성・키이 성과 평야부의 미즈키 다이테이・코미즈키 등으로 방비를 굳힌다.[28] 이 원형은 백제사비도성에 있다고 한다.[28]
나당 전쟁 (670–676)의 발발을 알지 못했던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과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701년까지 요새를 계속 건설했다.[2]
2. 3. 백제 유민의 역할
백제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왜국은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 · 당 연합군에 대패했다.[38][39] 이후, 덴지 천황은 나 · 당연합군 침공에 대비하여 664년 북큐슈의 쓰시마, 이키, 쓰쿠시에 사키모리(防人, 변경수비대)와 봉수를 설치하고,[35] 다자이후 서쪽 쓰쿠시에 평지성인 미즈키(水城)을 축조했다.[36]665년 8월에는 나가토에 성을 쌓고,[37] 망명해온 백제 유민들인 억례복류(憶礼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쓰쿠시에 파견하여 쓰시마로부터 북큐슈, 기나이 왕도에 이르는 국방상의 요새로 오노성과 기성(椽城)을 쌓게 하였다.[38][39] 이는 백제의 망명세력 지도하에 축조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이를 조선식 산성이라 부른다.[38][39]
덴지 정권은 백촌강 패전 이후, 당・고구려・신라의 교전에 가담하지 않고, 우호 외교에 전념하면서, 쓰시마~큐슈 북부~세토 내해~기나이와 연계하는 방위 체제를 정비하였다. 다자이후도성의 외곽은 험준한 연산의 지형과, 이에 연하는 오노성・키이 성과 평야부의 미즈키 다이테이・코미즈키 등으로 방비를 굳혔으며, 이 원형은 백제사비도성에 있다고 한다.[28]
663년 백제와 야마토 일본 연합군이 백강구 전투에서 신라와 당나라(당)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은 당 또는 신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600년대 후반까지 해안 요새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건설되었으며, 백제 엔지니어, 장군, 장인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2]
『일본서기』에는 덴지 천황 4년, 즉 서기 665년에 억례복류 (오쿠라이후쿠루)와 사비복부(시히후쿠부)등이 오노성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27] 또한 속일본기에 698년으로 기록된 내용에는 오노성에서 이루어진 수리 작업이 언급되어 있다.[4]
3. 오노성의 구조
3. 1. 위치와 규모
오노성은 다자이후 정청터 북쪽 뒤편에 솟아 있는 해발 410m의 시오지산(다이조산)에 위치해 있다.[8] 산 정상 부근을 중심으로 말굽 모양의 능선에서 계곡을 따라가는 토루와 석루의 외곽 성벽은 약 6.8km이다. 남쪽과 북쪽의 토루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성벽 총길이 8.4km) 방비를 굳건히 하고 있다. 성역은 동서 약 1.5km × 남북 약 3km로, 일본 최대 규모의 고대 산성이다.[9] 성문은 다자이후구치 성문 등 9곳이 열려 있다.[10] 계곡 부분에서는 침투식 자연 배수 방식의 햑켄 이시가키(百間石垣) · 미즈노테 이시가키(水ノ手石垣) 등에 더해 수구가 있는 톤스이 이시가키(屯水石垣) 등이 확인되었다.[11][12]오노시의 명칭은 이 오노성에서 유래한다.[13] 2006년 4월 6일에는 일본 100명성 (86번)으로 선정되었다.
3. 2. 성문과 방어 시설
3. 3. 건물터와 출토 유물

4. 오노성 연구
발굴 조사에서는 다자이후구치(大宰府口) 성문이 세 시기에 걸쳐 재건되었다. 북 석축 성문은 입구 앞에 1미터 정도의 단차를 둔 현문 구조이며[14], 문주의 축받이 쇠붙이의 출토는 국내 최초의 사례이다[15]。약 70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수 동이 한 무리를 이루어 주성원(主城原) 초석군 등, 성내 8곳에 분포한다. 흙기둥 건물과 초석 건물이 있으며, 창고로 여겨지는 총주 초석 건물이 다수 존재하지만, 축성기 이후의 건물로 여겨진다. 출토 유물은, 묵서토기・처마둥근기와・처마평기와・탄화미 등이 출토되었다[16]。
성터 연구는 1926년(다이쇼 15년) 시마다 지로가 발표한 '오노성터(大野城址)'를 효시로 한다[17]。고고학적 연구는 1950년 ~ 1960년의 카가미야마 타케시의 답사 연구[18]를 바탕으로, 1973년(쇼와 48년)부터 규슈 역사자료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발굴 조사의 성과는 후쿠오카현 교육위원회 편집/발행 『특별사적 오노성터・I~IV』(1976년~1991년)에서 보고되고 있다[19]。
2003년(헤이세이 15년) 7월, 이상 호우로 토사 재해가 발생하여 2004년(헤이세이 16년)부터 6년 동안 약 30곳에서 유구 관련 복구 공사가 시공되었다[31]。 토루의 붕괴로 인해 외곽선의 전역의 토루 기저부에 열석이 존재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한, 열석의 전면에서 기둥 구멍 열이 검출되었다[20]。
규슈 관내의 성도, 세토 내해 연안의 성도, 그 배치·구조로부터 일체적·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7세기 후반의 일본이 추진한 대규모 국가 사업이다[21]。
1898년 (메이지 31년), 고량산의 열석 유구가 학회에 소개되어, '신령 석'의 명칭이 정착되었다[22]。그리고, 그 후의 발굴 조사에서 성곽 유구로 여겨졌다. 한편, 문헌에 기재된 오노성 등은, '고대 산성'의 명칭으로 분류되었다. 이 두 분류에 의한 논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술적인 용어로 취급되어[23], 모든 산성을 공통의 사항으로 검토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또한 일본의 고대 산성의 축조 목적은 대외적인 방비의 군사 기능만으로 이야기되어 왔지만, 지방 통치의 거점적인 역할도 인식되게 되었다[24]。
4. 1. 발굴 조사
발굴 조사에서는 다자이후구치(大宰府口) 성문이 세 시기에 걸쳐 재건되었다. 북 석축 성문은 입구 앞에 1미터 정도의 단차를 둔 현문 구조이며[14], 문주의 축받이 쇠붙이의 출토는 국내 최초의 사례이다[15]。약 70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수 동이 한 무리를 이루어 주성원(主城原) 초석군 등, 성내 8곳에 분포한다. 흙기둥 건물과 초석 건물이 있으며, 창고로 여겨지는 총주 초석 건물이 다수 존재하지만, 축성기 이후의 건물로 여겨진다. 출토 유물은, 묵서토기・처마둥근기와・처마평기와・탄화미 등이 출토되었다[16]。
성터 연구는 1926년(다이쇼 15년) 시마다 지로가 발표한 '오노성터(大野城址)'를 효시로 한다[17]。고고학적 연구는 1950년 ~ 1960년의 카가미야마 타케시의 답사 연구[18]를 바탕으로, 1973년(쇼와 48년)부터 규슈 역사자료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발굴 조사의 성과는 후쿠오카현 교육위원회 편집/발행 『특별사적 오노성터・I~IV』(1976년~1991년)에서 보고되고 있다[19]。
헤이세이 15년 7월, 이상 호우로 토사 재해가 발생하여 헤이세이 16년부터 6년 동안 약 30곳에서 유구 관련 복구 공사가 시공되었다[31]。 토루의 붕괴로 인해 외곽선의 전역의 토루 기저부에 열석이 존재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한, 열석의 전면에서 기둥 구멍 열이 검출되었다[20]。
규슈 관내의 성도, 세토 내해 연안의 성도, 그 배치·구조로부터 일체적·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7세기 후반의 일본이 추진한 대규모 국가 사업이다[21]。
1898년(메이지 31년), 고량산의 열석 유구가 학회에 소개되어, '신령 석'의 명칭이 정착되었다[22]。그리고, 그 후의 발굴 조사에서 성곽 유구로 여겨졌다. 한편, 문헌에 기재된 오노성 등은, '고대 산성'의 명칭으로 분류되었다. 이 두 분류에 의한 논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술적인 용어로 취급되어[23], 모든 산성을 공통의 사항으로 검토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또한 일본의 고대 산성의 축조 목적은 대외적인 방비의 군사 기능만으로 이야기되어 왔지만, 지방 통치의 거점적인 역할도 인식되게 되었다[24]。
4. 2. 학술적 논의
오노성터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1926년 시마다 지로가 발표한 '오노성터(大野城址)'가 시초이다.[17] 1950년부터 1960년까지 카가미야마 타케시의 답사 연구[18]를 바탕으로, 1973년부터 규슈 역사자료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는 후쿠오카현 교육위원회에서 편집 및 발행한 『특별사적 오노성터・I~IV』(1976년~1991년)에 보고되어 있다.[19]발굴 조사 결과 다자이후구치(大宰府口) 성문은 세 시기에 걸쳐 재건되었다. 북 석축 성문은 입구 앞에 1미터 정도의 단차를 둔 현문 구조이며[14], 문주의 축받이 쇠붙이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일본 내 최초의 사례이다.[15] 약 70동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으며, 수 동이 한 무리를 이루어 주성원(主城原) 초석군 등 성내 8곳에 분포한다. 흙기둥 건물과 초석 건물이 있으며, 창고로 여겨지는 총주 초석 건물이 다수 존재하지만, 축성기 이후의 건물로 추정된다. 출토 유물로는 묵서토기・처마둥근기와・처마평기와・탄화미 등이 있다.[16]
2003년 7월, 폭우로 인한 토사 재해가 발생하여, 2004년부터 6년 동안 약 30곳에서 유구 관련 복구 공사가 시행되었다.[31] 토루 붕괴로 인해 외곽선 전역의 토루 기저부에 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열석 전면에서 기둥 구멍 열이 검출되었다.[20]
규슈 관내의 성, 세토 내해 연안의 성들은 배치 및 구조를 볼 때 일체적·계획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7세기 후반 일본이 추진한 대규모 국가 사업으로 평가된다.[21]
1898년 고량산의 열석 유구가 학회에 소개되어 '신령 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22]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성곽 유구로 밝혀졌다. 한편, 문헌에 기록된 오노성 등은 '고대 산성'으로 분류되었다. 이 두 분류에 대한 논의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나, 최근에는 학술 용어로 취급되어[23] 모든 산성을 공통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정착되었다. 또한 일본의 고대 산성 축조 목적은 대외 방비를 위한 군사 기능뿐만 아니라 지방 통치의 거점 역할도 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24]
5. 현대의 오노성
성역은 "후쿠오카현립 시오우지 현민의 숲"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현민의 숲 센터"에 주차장(150대)과 휴게소 등이 있다. 니시테쓰 다자이후 선다자이후역에서 "현민의 숲 센터"까지 차로 약 15분, 도보 약 50분 걸린다. JR 큐슈(큐슈 여객철도) 카시이 선우미역에서 "현민의 숲 센터"까지 차로 약 15분 거리이다. 큐슈 자동차도 다자이후 인터체인지에서는 약 6km 떨어져 있다.
5. 1. 문화유산 지정
5. 2. 보존 및 활용
성역은 "후쿠오카현립 시오우지 현민의 숲"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현민의 숲 센터"에 주차장(150대)과 휴게소 등이 있다. 니시테쓰 다자이후 선다자이후역에서 "현민의 숲 센터"까지 차로 약 15분, 도보 약 50분 걸린다. JR 큐슈(큐슈 여객철도) 카시이 선우미역에서 "현민의 숲 센터"까지 차로 약 15분 거리이다. 큐슈 자동차도 다자이후 인터체인지에서는 약 6km 떨어져 있다.6. 기타
오노성터 사적 지정 면적의 8할은 우미정(宇美町)에 속하며, 백간 석축, 증장천 초석군 등의 유구가 있다.[30] 증장천 초석군은 내주 토루에 접한 4동의 초석 건물터로, 견학자가 많아 "일러스트 복원 설명판"으로 변경이 검토되고 있다.[31]
774년 외적 구축을 기원하는 호국 사찰인 사왕사(사천왕사·사왕원) 건립으로 "시왕사산(四王寺山)"이라는 성지 명칭이 유래되었다.[29] 그 후 가람은 현재의 비사문당으로 변천하였고, 12세기에는 많은 경총이 조성되었으며, 18세기 말에는 산내 요지에 33 관음 석상이 안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9]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 "수성·오노성·기이성 1350년 기념 사업"이 기획되어 관련 자치단체와 더불어 관민도 연계한 각종 기념 사업이 전개되었다.[32]
6. 1. 시오지산의 유래
774년 고닌 천황(光仁天皇) 호키(宝亀) 5년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꼭대기에 시오인(四王院)을 건립하면서 산 이름이 시오지산(四王寺山)으로 불리게 되었다.[30][29] 현재 창고 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주춧돌 주변에서 탄화미가 발견되기도 했다.[30]성지로서의 "시왕사산(四王寺山)"이라는 명칭은 774년 외적 구축을 기원하며 호국사찰인 사왕사(사천왕사·사왕원)를 건립한 것에서 유래한다.[29] 이후 가람은 현재의 비사문당으로 변천하였다.[29] 12세기에는 많은 경총이 조성되었고, 18세기 말에는 산내 요지에 33 관음 석상이 안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9]
6. 2. 기념 사업
774년 외적 구축을 기원하는 호국 사찰인 사왕사(사천왕사·사왕원) 건립으로 "시왕사산(四王寺山)"이라는 성지 명칭이 유래되었다.[29] 그 후 가람은 현재의 비사문당으로 변천하였고, 12세기에는 많은 경총이 조성되었으며, 18세기 말에는 산내 요지에 33 관음 석상이 안치되어 현재에 이른다.[29]오노성터 사적 지정 면적의 8할은 우미정(宇美町)에 속하며, 백간 석축, 증장천 초석군 등의 유구가 있다.[30] 증장천 초석군은 내주 토루에 접한 4동의 초석 건물터로, 견학자가 많아 "일러스트 복원 설명판"으로 변경이 검토되고 있다.[31]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 "수성·오노성·기이성 1350년 기념 사업"이 기획되어 관련 자치단체와 더불어 관민도 연계한 각종 기념 사업이 전개되었다.[32]
참조
[1]
웹사이트
大野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3-09-15
[2]
서적
Japanese Castles AD 250--1540
https://books.google[...]
Osprey
2015-06-20
[3]
간행물
The Japan Magazine: A Representative Monthly of Things Japanese, Volume 11
[4]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5]
웹사이트
Japan Castle Foundation
https://web.archive.[...]
[6]
웹사이트
電子国土基本図(地図情報)
http://www.gsi.go.jp[...]
[7]
데이터베이스
大野城跡
[8]
문서
福岡県では、通称の「四王寺山(しおうじやま)」が一般的に使用されている。本項目も「四王寺山」を主とする。
[9]
서적
日本の古代遺跡 34 福岡県
保育社
1987
[10]
문서
太宰府口・坂本口・水城口・宇美口の城門に加え、2003年の集中豪雨の復旧事業で、原口・観世音寺口・北石垣・小石垣の城門が発見された。その後、新たに中嶋聡(古代山城研究会会員)により、クロガネ岩城門が発見された。
[11]
서적
大野城
雄山閣
2016
[12]
서적
城の石垣と堀
至文堂
1999
[13]
서적
大野城市 ーふるさととしての古代山城ー
第一法規
2016
[14]
문서
朝鮮半島の山城をルーツとする様式で、城門の入口に進入しにくい段差のある城壁を設け、普段は梯子・木段などで出入りし、戦闘時は撤去する門で、防御性能を高める構造。
[15]
서적
大野城とは
九州歴史資料館
2015
[16]
서적
建物
九州歴史資料館
2015
[17]
서적
大野城跡における最近の調査成果
古代學協会
2010
[18]
서적
大宰府都城の研究
風間書房
1968
[19]
서적
大野城跡
東京堂出版
2007
[20]
서적
よみがえる古代山城
吉川弘文館
2017
[21]
서적
西日本の古代山城が語るもの
岩波書店
2015
[22]
서적
論争・学説 日本の考古学
雄山閣出版
1987
[23]
문서
1995年(平成7年)、文化財保護法の指定基準の改正にともない「神籠石」は削除され、「城跡」が追記された。
[24]
서적
古代山城研究の現状と課題
第一法規
2016
[25]
문서
『日本書紀』の天智天皇四年(665年)八月の条に、「・・・築 大野及椽 二城」と、記載する。
[26]
문서
『続日本紀』の文武天皇二年(698年)五月の条に、「令 大宰府 繕治 大野、基肄、鞠智、三城」と、記載する。
[27]
서적
倭国から日本へ
吉川弘文館
2002
[28]
서적
大宰府都城の形成と東アジア
雄山閣
2016
[29]
서적
聖地四王寺山
九州歴史資料館
2015
[30]
서적
宇美町 ー1400年を目指してー
第一法規
2016
[31]
서적
史跡整備の現場より -大野城跡における取り組ー
第一法規
2016
[32]
서적
水城・大野城・基肄城 1350年記念事業について
第一法規
2016
[33]
웹사이트
일본서기 권 제27 천지천황(天智天皇) 4년 > 8월
http://contents.nahf[...]
[34]
웹사이트
일본서기 권 제27 천지천황(天智天皇) 6년 > 11월
http://contents.nahf[...]
[35]
문서
일본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있던 군사제도
[36]
서적
일본서기
[37]
서적
일본서기
[38]
서적
일본서기
[39]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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