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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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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1875년 창당된 독일의 정당으로, 유럽식 정당 운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지한다. 1969년부터 1982년까지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총리 시기에 집권했으며,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2021년부터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끌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빌리 브란트, 헬무트 슈미트, 게르하르트 슈뢰더, 올라프 숄츠 등이 있으며, 역대 선거에서 주요 정당으로 활동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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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지도부
공동 대표사스키아 에스켄
라르스 클링바일
사무총장마티아스 미어쉬
부대표클라라 가이비츠
후베르투스 하일
토마스 쿠차티
세르필 미드야틀리
안케 렐링거
의회 의석
독일 연방의회}}
주의회}}
유럽 의회}}
주총리}}
정치적 입장
정치적 위치중도좌파
이념사회민주주의
친유럽주의
자유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사회자유주의
기타
국제 관계사회주의 인터내셔널 (2017년까지)
이미지
독일 사회민주당 깃발
깃발

2. 당의 구성

독일 사회민주당은 미국 민주당과는 달리, 매달 일정 금액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이 운영하는 정통 유럽식 정당 운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대한민국 민주노동당의 운영 방식에 모델로서 영향을 주었다.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도 이 당처럼 매달 일정 금액의 당비를 자동이체로 납부하는 당원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의 당원들은 매달 당비를 내는 의무가 주어지는 대신, 지역 공동체에서 일할 공직 후보자와 지역 당원협의회 간부를 선출할 수 있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현재 약 60만 명의 진성당원들은 각 지역마다 의결권을 가지고 지역의 일꾼들을 지역 전당대회에서 직접 선출하며, 여기서 선출된 대의원들은 연방(전국)전당대회에서 기초 당원들의 의견을 전달하고 정당의 의장 선출 및 당의 강령과 핵심 정책 등의 결정에 찬반 의사를 표시한다.

또한, 독일 사민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전통적으로 산업별 노동조합의 지도자도 겸하는데, 이는 주요 지지층인 중산층 및 서민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위한 조치이다. 일례로 23년 동안 최장수 의장을 역임한 빌리 브란트 제4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의 경우, 제지언론 노조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안드레아 날레스 당의장(2017-)과 아울러,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상임 중앙위원들이 현재 당을 이끌고 있다.

이 당에는 흑적금 국기단과 같은 준군사조직, 청년조직, 학생조직이 존재하며, 여성조직으로는 사회민주여성동맹이 있다.

3. 당의 정책

경제적으로는 사회민주적 시장경제를 지향하며,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시기에는 토니 블레어 시기의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로 제3의 길을 지향한 적도 있다.

사민당(SPD)은 주로 케인스 경제학(Keynesian economics)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제3의 길(Third Way)을 지지하는 온건 사회민주주의자들(제하이머 서클(Seeheimer Kreis) 소속)의 두 주요 파벌로 구성되어 있다. 보다 온건한 제하이머 서클은 일반적으로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 총리가 도입한 아젠다 2010(Agenda 2010) 프로그램을 지지하지만,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좌파 정책과 복지 국가를 옹호한다.[50][51]

케인스주의적 좌파는 최근 몇 년 동안 아젠다 2010, 하르츠 IV(Hartz IV), 그리고 중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지한 사민당의 보다 경제자유주의(economic liberal)적인 입장으로 인해 복지 국가가 축소되었다고 주장한다. 아젠다 2010에 대한 반발로 당내 반대파 운동이 일어났고, 2005년 새로운 정당인 노동과 사회 정의 – 선거 대안(Arbeit & soziale Gerechtigkeit – Die Wahlalternative, WASG)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2007년 좌파당(Die Linke)에 합당되었다.[52] 의회 좌파(Parlamentarische Linke)는 좌파 성향의 사민당 독일 연방의회 의원(Member of the German Bundestag)들로 구성되어 있다.

4. 내부 정파

사회민주당(SPD) 내 정파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 당 내 좌파: 케인스주의를 지지하며, 고전적인 좌파 정책과 복지 국가 체제 유지를 주장한다. 이들은 어젠다 2010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이 복지 국가를 축소시켰다고 비판한다.
  • 당 내 우파: 제3의 길을 추구하며, 어젠다 2010을 강력히 지지한다.


2003년 발표된 어젠다 2010에 대한 반발로 2005년 당내 탈당 운동이 발생했다. 탈당파는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이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2007년 좌파당에 합류했다.[54]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전독일노동자협회, 사회민주노동자당,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관련 인물들. 아우구스트 베벨(좌상),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우상), 카를 마르크스(중앙), 카를 빌헬름 텰케(좌하), 페르디난트 라살(우하)

5. 사회민주당의 역사

1863년 5월 23일 페르디난트 라살라이프치히에서 만든 전 독일 노동자 협회와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1869년 8월 아이제나흐에서 만들어진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뿌리이다.

1875년 5월 고타에서 합동 대회를 열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하였다.[53]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 사민당은 독일 제국의 내외 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면서 12년간 어려움을 겪었으나,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집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면 다른 나라에서 갖는 등 지혜를 발휘하여 극복하였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는 1890년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de)으로 당명을 개정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지향하였다.[116]

초기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가까웠으며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 민주주의 정당과 비슷하게 이념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1891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에르푸르트 강령[67]을 제정하여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회개량주의적인 일상적인 당 활동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수정주의파, 중앙파, 급진 좌파로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베른슈타인에 의해 수정주의 이론이 제기되었다.[117]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여 사회주의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 수정주의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받아 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당은 정식으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곳곳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공채 발행 문제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당원 및 의원들이 전시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고, 소수 세력들이 이에 반발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한동안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찬성표를 던진 다수파 세력들은 다수파 사회민주당이라 불렸으며, 소수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라는 당을 창설했다. 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주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독립사회민주당은 그들보다 더 급진적 좌파인 독일 공산당(KPD)과 다수파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결국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다시 통합하게 된다.

1918년 11월 독일혁명 직전에 정권에 참여했고, 혁명 속에서 사회민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정권을 장악했다. 노병평의회의 전권 장악(프롤레타리아 독재)을 요구하는 야권의 급진 좌파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국민의회를 소집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졌던 바이마르 헌법의 제정을 주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는 중앙당(Zentrum)이나 민주당(DDP)과 함께 온건 좌파, 중도, 자유주의의 연립 정부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에베르트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와 1928년부터 1930년까지는 총리로 내각을 구성했다(필립 샤이데만 내각, 구스타프 바우어 내각, 헬만 뮐러 내각).

1933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나치)이 정권을 잡자 활동이 금지되고 해산당했다.

1933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사민당은 나치에 의해 구속 및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히틀러의 수권법에 반대하였고, 당수 오토 벨스는 의회 내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반대 연설을 하였다.[119] 하지만 1933년 6월 22일에 사민당은 모든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조직이 분쇄되고 당원들은 추적 및 감금을 당했다.[119]

제2차 세계 대전서독과 동독에서 모두 재건되었지만, 동독에서는 1946년 공산당에 강제 합병되어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이 되었고, 이후 1989년 재건될 때까지 사회민주당은 금지되었다.

쿠르트 슈마허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국회의원으로, 2차 대전 직후 하노버에 본부를 두고 사민당을 재창당하였다. 한편 오토 그로테볼은 베를린에서 사민당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했다. 슈마허는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이에 반발, 당 대회를 개최하여 중앙위원회의 활동 범위를 소련 점령지역으로 한정시켰다. 결국 동독 지역 내 사민당은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이에 반대한 당원들은 숙청되었다.[120]

서독에서는 중도우파의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양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고, 1959년에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제정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투쟁과 결별하고 계급 정당에서 중도좌파의 국민 정당으로 노선을 변경했다.[120] 1960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서방 군사 동맹도 수용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1966년에는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전후 처음으로 정권에 참여했고, 이어 1969년부터 1982년까지는 자유민주당(FDP)과 연정을 구성하여 총리로 정권을 담당했다(빌리 브란트 내각, 헬무트 슈미트 내각).

1989년 10월 동유럽 혁명에 따라 민주화가 진행되던 동독에서 사회민주당이 재건되었고, 서독 사회민주당의 지원을 받았다. 1990년 9월 독일 재통일을 앞두고 동독 사회민주당은 서독 사회민주당에 합류했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연방90/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하여 총리로 정권을 담당했고(게르하르트 슈뢰더 내각), 이어 2005년부터 2009년까지와 2013년부터 2021년까지 CDU/CSU와 대연정을 구성하여 연립 여당이 되었으며, 2021년부터는 연방90/녹색당, 자유민주당(FDP)과 연정을 구성하여 총리로 정권을 맡고 있다(올라프 숄츠 내각).

5. 1. 공화국 이전 (1863-1918)

1863년 5월 23일 페르디난트 라살라이프치히에서 만든 전 독일 노동자 협회와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의 주도로 1869년 8월 아이제나흐에서 만들어진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뿌리이다. 두 조직은 "독일 문제"에 대한 의견차이로 갈라졌었다. 라살레주의자들은 소독일주의를, 아이제나흐 쪽은 대독일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그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게 되고 1875년 5월 고타에서 합동 대회를 열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통합하게 된다.

독일 제2제국 시기 독일 사민당은 독일 제국의 내외 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제국의회에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면서 12년간 어려움을 겪었으나,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집회를 가지지 못하게 하면 다른 나라에서 갖는 등 지혜를 발휘하여 극복하였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되는 1890년 독일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de)으로 당명을 개정하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식적으로 지향하였다.[116]

초기 사민당은 노동조합과 가까웠으며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 민주주의 정당과 비슷하게 이념적으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베른슈타인에 의해 수정주의 이론이 제기된다.[117] 민주적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여 사회주의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주요 내용인 수정주의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받아 들여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당은 정식으로 채택하기 이전부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곳곳에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시 공채 발행 문제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대부분의 당원 및 의원들이 전시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고, 소수 세력들이 이에 반발했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한동안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찬성표를 던진 다수파 세력들은 다수파 사회민주당이라 불렸으며, 소수파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이라는 당을 창설했다. 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 등이 주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독립사회민주당은 그들보다 더 급진적 좌파인 독일 공산당(KPD)과 다수파 사회민주당 사이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결국 다수파 사회민주당과 다시 통합하게 된다.

1889년 라이히스타크의 SPD 의원들. 왼쪽부터 앉아 있는 사람들: 게오르크 슈마허, 프리드리히 하름, 아우구스트 베벨, 하인리히 마이스터, 카를 프로메. 서 있는 사람들: 요한 하인리히 빌헬름 디츠, 아우구스트 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카를 그릴렌베르거, 파울 징어.


1875년 5월 22일부터 27일까지 고타에서 열린 대회에서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하파는 고타 강령에 따라 합쳐져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을 창설했다. 이 강령은 거의 아이제나하 강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초안을 읽은 카를 마르크스는 라살레파의 영향이 강하다고 비판했다(『고타 강령 비판』). 예를 들어 "노동자 계급은 우선 민족 국가 내에서 해방을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을 라살레 특유의 민족주의적 영향으로 간주하여 "비스마르크 씨의 입맛에 딱 맞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라살레적인 표현이 들어 있고, "자유로운 국가"라는 부르주아적인 목표를 내세우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도,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의 국가 조직"에 대해서도 기술이 없다는 점 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마르크스의 항의를 받아 리프크네히트는 "민족 국가 내에서 노력한다"는 부분을 "이러한 노력은 국제 연대를 향한 예비 단계이다"라는 것을 명기하는 초안 수정을 가했지만, 그 외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을 거부하고 강령을 제정했다.

고타 대회 후에도 탄압은 계속되어 1876년 3월 베를린 시 법원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불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당은 같은 해 8월 19일부터 23일까지 "일반 사회주의 회의"라는 명목으로 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중앙 기관지를 일원화하고 『포어베르츠(전진)』를 같은 해 10월부터 라이프치히에서 발행하기로 결의했다.

1877년 1월 10일에 열린 국회(Reichstag)의 총선거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득표율 9%를 얻어 12석을 획득했다. 비스마르크에게 즉각적인 위협이 될 만한 의석은 아니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를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여 혐오했고, 또한 비스마르크 정부와 불협화음이 들리기 시작한 자유주의 우파 정당 국민자유당(NLP)을 다시 정부 측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률이 추진되었다. 1878년 5월 11일과 6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황제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고, 보수계·정부계 신문에 의해 사회주의의 위협이 부추겨지는 가운데, 총선거에서 보수파의 대승을 거쳐 10월 19일에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기존의 국가 질서·사회 질서를 전복하려는 사회주의·공산주의적인 단체나 활동(집회·축제·행진·인쇄물 등)은 금지되었고, 관헌은 위반자를 추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적인 선동에 위협받고 있는 지역은 1년 이내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이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대해 처음에는 무기한 입법을 원했지만, 국민자유당의 요청으로 한시 입법이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관헌으로부터 철저한 탄압을 받아, 의원이 국회에서 활동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금고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1500명에 달했고,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라이프치히에서는 여러 번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약 1000명의 지도자가 거주지를 쫓겨났다. 또한 사회주의자는 "조국 없는 자들"로서 사회적으로도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과 박해가 오히려 당의 결속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세는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어 "붉은 유령이 어느 술집에도 나타나게 되었다"고 평가될 정도가 되었다. 또한 당은 독일 국외, 특히 스위스에 강력한 조직을 만들었다. 1879년부터 스위스에서 『조치알데모크라토(사회민주주의)』지를 발간하여 매주 정기적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수천 부가 독일 각지에 배포되었다.

1890년의 국회선거에서는 득표율 면에서 19%를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단, 보수계 의원에게 현저하게 유리한 선거구 제도에 따라 의석 면에서는 제1당이 되지는 못했다).

1890년 9월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효력을 상실했다. 1890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할레에서 사회주의자 탄압법 실효 후 첫 번째 당대회가 열렸고, 이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당 지도부는 2명의 의장, 2명의 서기, 1명의 회계, 7명의 감사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에는 파울 징어와 알빈 게리슈가 취임했다. 또한 『조치알데모크라트』지를 폐간하고, 『포어베르츠』지를 부활시켜 중앙 기관지로 삼았다.

1891년에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에르푸르트 강령[67]을 제정하여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회개량주의적인 일상적인 당 활동과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수정주의파, 중앙파, 급진 좌파로 당내 분열이 일어났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을 지지했으나, 그 방침을 둘러싼 대립으로 중앙파 일부와 급진 좌파가 당을 떠나 독립사회민주당(USPD)이나 공산당(KPD)을 결성하게 되었다.

1892년 11월에 열린 베를린 당대회에서는 아우구스트 베벨과 징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10년 마그데부르크 당대회까지 이 두 사람이 의장으로 계속 선출되었다. 1911년 3월 징어가 사망했기 때문에, 같은 해 9월 예나 당대회에서 베벨과 함께 후고 하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913년 8월 베벨이 사망하자 같은 해 9월 예나 당대회에서 하제와 함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사민당 당원 수는 1906년 6월 30일 기준 38만 4,327명이었지만, 1907년 7월 31일에는 53만 466명, 1910년 6월 30일에는 72만 38명, 1912년 6월 30일에는 97만 1,12명, 그리고 1914년 3월 31일에는 108만 5,905명에 달했다. 사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자유노동조합도 1913년에는 조합원 250만 명을 돌파했다. 자유노동조합은 사민당 지지 기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1912년의 제국 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은 득표율 34.8%를 획득하여 득표수와 의석 수 모두에서 제1당이 되었다. 국제적으로도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며, 제2인터내셔널 가맹 정당의 모범적인 존재였다. 무수한 사회단체와 스포츠 클럽, 신문 등을 보유하여 문화적인 활동도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의원내각제가 확립되지 않은 제정 독일에서는 의회 제1당이 되어도 사민당은 여전히 "고립된" 존재로 남아 있었고, 1890년 이후 제정 시대를 통틀어 사민당원들은 곳곳에서 "조국 없는 자들"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

또한 제정 독일에서는 제국 의회가 남성 보통선거였지만, 제국에 가맹하는 각 주의 선거 제도는 프로이센 하원의 3계급 선거권 제도를 대표하듯 엄격한 제한 선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민당이 주 정치에 진출하는 것은 어려웠다. 프로이센 하원에는 사민당이 1908년까지 단 한 석도 확보하지 못했고, 작센 왕국 의회의 하원에서도 1890년대에는 약 10석을 보유했지만, 그 이후에는 1석으로 줄어들었다. 제국의 상원에 해당하는 연방참의원은 각 주 대표로 구성되지만, 최대의 대주 프로이센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에 발판을 마련하지 못한 사민당은 제국 정치 수준에서도 불리했다.

한편 남성 보통선거가 도입된 바이에른 주 의회의 하원(1906년 도입)이나 뷔르템베르크 주 의회의 하원(1906년 도입), 바덴 대공국 의회의 하원(1904년 도입)에서는 사민당이 침투했다. 이러한 주에서는 사민당이 자유당과 연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수정주의", "사회 개량주의"의 거점이 되었다.

1878년 『펀치』지의 사회주의자탄압법 풍자화 „Socialist jack in the box“.(깜짝 상자에서 튀어나오려는 사회주의자를 밀어 넣으려는 비스마르크)

5. 2.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

11월 혁명의 결과로 사민당은 여성 선거권, 비례대표제, 사회·정치 개혁, 1일 8시간 노동제, 민주공화제 등 전통적인 요구사항들을 관철시켰다.[118]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과 함께 공화제를 지지하는 다른 정당들과 연립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운영 방식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지도층은 비대화 및 관료화된 당 조직의 파괴를 우려하여 신선한 추진력을 가져올 대담한 행동을 주저했고, 이는 조직의 현상 유지를 위한 소극성과 정치적 근시안으로 이어졌다. 선전 기술 또한 경직되어 전통적 기반을 유지하는 데 그쳤고, 청년 노동자, 실업자, 중간층 등의 지지표가 나치나 공산당으로 대거 흡수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118] 다만 오랜 전통을 가진 강력한 당 조직과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관계 덕분에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반체제 정당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반까지 침식되지는 않았다.

SPD는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8년 11월 9일, SPD의 주요 인물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총리로 지명되었고, 동료 사회민주주의자인 필립 샤이데만은 독자적으로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19] 이후 정부는 다양한 시민적 자유와 노동 권리를 도입하는 등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20] 의회 자유 민주주의를 지향했던 SPD 정부는 급진적인 공산주의 단체에 대해 군사력을 동원했고, 이는 SPD와 USPD, 그리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을 구성하고 대부분의 USPD 회원을 흡수할 스파르타쿠스 동맹 사이에 영구적인 분열을 초래했다.[21][22] SPD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13년 동안 가장 큰 정당이었다. 1919년 연방 선거에서 37.9%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에베르트는 2월에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23] 1920년 연방 선거까지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SPD의 지지율은 22%로 크게 하락했다. 이후 SPD는 다른 정당에 총리직을 양보했지만, 1924년까지 정부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에베르트는 1925년에 사망했고, 보수적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뒤를 이었다. 1928년 연방 선거에서 지지율을 회복한 후 SPD의 헤르만 뮐러가 총리가 되었다.[24]

1932년 SPD의 유명한 선거 포스터. 세 개의 화살 기호는 반동적 보수주의, 나치즘,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며, "파펜, 히틀러, 탈만에 맞서"라는 슬로건이 적혀 있다.


독일이 대공황의 여파로 위기에 직면하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뮐러는 1930년에 사임했다. 나치당의 인기가 높아지고 보수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SPD는 소외되었고, 힌덴부르크의 빈번한 비상 권력 사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SPD의 준군사 조직인 Reichsbanner Schwarz-Rot-Goldde는 나치의 ''돌격대''와 잦은 격렬한 충돌을 빚었다.[25] 1932년 7월 선거에서 나치는 SPD를 제치고 최대 정당이 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로 임명되었다. 1933년 권한법 통과 당시 라이히스타크에 있던 정당 중 SPD만이 반대표를 던졌고, 공산당 의원 대부분은 투표 전에 체포되었다.[26] SPD는 6월에 금지되었다. 많은 당원들이 나치 정부에 의해 투옥되거나 살해되었으며, 일부는 해외로 도피했다. 망명 정부는 소파데라고 불렸다.[27]

5. 3. 나치 독재정권 시절 (1933-1945)

1933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사민당은 나치에 의해 구속 및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히틀러의 수권법에 반대하였고, 당수 오토 벨스는 의회 내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반대 연설을 하였다.[119] 하지만 1933년 6월 22일에 사민당은 모든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조직이 분쇄되고 당원들은 추적 및 감금을 당했다.[119] 이에 저항하는 지도자들은 1933년 5월부터 해외에서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고, 독일 내에서의 지하 항거 운동을 돕기 위하여 망명길을 떠났다.[119] 이들 망명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중요 거점을 처음에는 프라하에, 1938년부터는 파리에, 그리고 2차 대전 중에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다.[119] 히틀러의 강도 높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민당 지도자들은 국내외에서 히틀러 폭정의 종식과 민주주의 독일의 재건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하였다.[119]

5. 4. 고데스베르크 강령 전후 국민정당으로의 도약 (1945~1969)

쿠르트 슈마허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국회의원으로, 2차 대전 직후 하노버에 본부를 두고 사민당을 재창당하였다. 한편 오토 그로테볼은 베를린에서 사민당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했다. 슈마허는 반공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이에 반발, 당 대회를 개최하여 중앙위원회의 활동 범위를 소련 점령지역으로 한정시켰다. 결국 동독 지역 내 사민당은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이에 반대한 당원들은 숙청되었다.[120]

한편 슈마허 중심의 사민당은 서독 전 지역에서 큰 지지를 얻었으나, 1949년 총선에서 29%의 득표율로 야당이 되었다. 콘라드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과 외교적 성공을 이끈 기민당에 비해, 마르크스 사상이 잔류해 있던 사민당은 국민들의 반감을 얻어 오랜 기간 야당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120]

계속되는 총선 패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민당은 1950년대 후반 이후 노동계급 정당에서 좌파적 국민정당으로 변모를 꾀하였다.[120]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비상전당대회에서는 마르크스 사상을 내포했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폐기하고 '법치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천명했다. 이후 사민당은 아데나워의 시장경제체제, 서구 편입 정책을 찬성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120]

1963년 당수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쳐 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1966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오랜 야당 생활에서 벗어나 기민/기사당과 대연정을 구성, 9개의 장관직을 맡으며 정권에 참여했다. 대연정 시기에는 사민당이 주도한 경제정책 등이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9년 총선에서 42.7%의 득표율을 획득한 사민당은 독일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구성하게 되었다.[120]

5. 5. 브란트-슈미트 정부: 중흥기 (1969~1982)

1969년 연방 선거 이후 사민당자유민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빌리 브란트가 총리에 취임했다. 브란트 정부는 동방정책을 통해 동독 및 동부 블록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32] 사민당은 1972년 연방 선거에서 45.8%의 득표율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연방의회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33] 1969년부터 1982년까지 13년간 집권한 사민당은 적군파 등 극좌파 무장단체의 위협에 맞서 사회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장기간의 국제 경제 침체 속에서도 경제 안정을 유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악화된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1972년에는 동독과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1974년 귄터 기욤 간첩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면서, 주요 장관직을 역임했던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을 승계했다.[34]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사민당의 지지율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1980년 연방의회 선거 이후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982년, 경제 정책 등에서 사민당과 갈등을 겪던 자유민주당이 연정 파트너를 기민당/기사당으로 변경하면서 13년간의 사민당 집권은 막을 내렸다.[34]

5. 6. 독일 통일 전후의 암흑기 (1982~1998)

빌리 브란트가 당수직을 유지하였으나, 실권은 경제부와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가 수상직을 맡으면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그 후 16년간 야당에 머무르고, 연방 수상에 도전하나 계속 실패한다.[121] 199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니더작센의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연방 수상 후보가 되었고, 이 선거에서 사민당은 40.9%의 득표를 하며 녹색당과의 연정에 성공한다.[36]

독일 총리재임 기간
헬무트 슈미트1974–1982



1989년 10월 동유럽 혁명에 따라 민주화가 진행되던 동독에서 사회민주당이 재건되었고, 서독 사회민주당의 지원을 받았다. 1990년 9월 독일 재통일을 앞두고 동독 사회민주당은 서독 사회민주당에 합류했다.

5. 7. 슈뢰더 정부와 제3의 길: 도약기 (1998~2017)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독일 사민당 개혁 우파는 영국 노동당이 추구하는 제3의 길과 매우 유사한 신중도 노선을 표명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중도 급진개혁을 추진해서 심각한 사회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통주의자들이 추구한 케인즈적 총괄조정을 포기하겠다는 사민당의 결정은, 계속된 연정 실패와 맞물려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사며 내부 갈등을 초래했다.[122] 슈뢰더 총리는 라퐁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주의자들과 대립하며, 좌우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당의 현대성을 강조했다.[122]

슈뢰더는 2005년까지 집권했으며, 이 기간 동안 사민당은 녹색당과 연정을 맺었다. 슈뢰더는 아젠더 2010이라는 다소 논란이 있는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했다. 2005년 조기선거에서 흑적 연립정부를 통해 부수상을 배출했다. 2009년에는 23%의 득표율로 야당이 되었고 연정에도 실패했으나, 2013년 11월 기준으로 메르켈과의 연정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123]

5. 8. 메르켈과의 4차 대연정 : 몰락기 (2017~2021)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기민당과 연정하지 않겠다는 발언에도 불구하고 전체 득표율 20.5%, 153석으로 1933년 3월 독일 국가의회 선거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39] 당 내 좌파이자 유럽의회에서 좌파를 이끌었던 마르틴 슐츠를 내세웠음에도 이같은 결과가 나오자 사회민주당 당직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의 약진으로 메르켈이 연정 구성에 난항을 겪자 입장을 뒤집고 메르켈과 연정했다. 이후 또다른 당 내 좌파 안드레아 날레스를 당 대표로 내세웠으나 지지율은 계속 폭락하였고, 2018년 8월에는 독일을 위한 대안동맹 90/녹색당에도 밀리는 4위를 기록했다. 결국 2018년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에서 5위를 하는 참패를 당하고 얼마 뒤의 헤센주 의회에서도 녹색당에 밀려 3위를 기록했다. 안드레아 날레스는 당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고 2019년 EU 의회 선거에서의 승리를 장담했으나, 2018년 10월에는 22%의 지지율을 기록한 녹색당에 비해 14%의 지지율로 15%의 독일을 위한 대안보다도 지지율이 뒤지고 있었다. 결국 2019년 4월의 EU 의회 선거에서 독일 녹색당은 15.8% 득표율을 기록해 전체 3위, 1887년 독일 국가의회 선거(당시에는 사민당이 지하조직이었음) 이후 132년 만의 대참패를 겪었다. 안드레아 날레스는 심각성을 인정하고 대표직을 사퇴했으나 지지율은 끝없이 추락해, 2019년 6월에는 27%의 지지율을 얻어 1위를 기록한 독일 녹색당에 비해 12% 지지율로 약 15%p 격차로 뒤졌다.

2019년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가 독일 사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5. 9. 연방의회 제1당 탈환 및 올라프 숄츠 총리 취임 (2022~)

202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사회민주당은 여론조사에서 급격한 지지율 상승을 보여주었으며,[124][125] 그 기세를 몰아 전체 25.7%의 표를 획득하면서 206석을 차지해 2002년 이래 19년 만에 다시 최대 정당의 지위로 올라섰다. 그 후 녹색당, 자유민주당과 연정에 합의하면서 올라프 숄츠 총리가 취임하게 되었다.[41]

6. 주요 인물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사회민주당의 프로이센주 수상 오토 브라운

  •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주요 지도자로는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있다.
  • 1933년 3월 23일, 히틀러가 제출한 전권위임법에 대해 사회민주당은 반대했다. 반대 연설에서 사회민주당 당수 오토 벨스(Otto Wels)는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불명예스러운 입장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다."라고 연설했다.[74]


사회민주당 당수 오토 벨스(Otto Wels)


역대 당수연도
1쿠르트 슈마허1949–1952
2에리히 올렌하우어1952–1963
3프리츠 에를러1964–1967
4헬무트 슈미트1967–1969
5허베르트 베너1969–1983
6한스-요헨 포겔1983–1991
7한스-울리히 클로제1991–1994
8루돌프 샤핑1994–1998
9페터 스트룩 (1기)1998–2002
10루트비히 슈티글러2002
11프란츠 뮌테페링2002–2005
(9)페터 스트룩 (2기)2005–2009
12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09–2013
13토마스 오퍼만2013–2017
14안드레아 나레스2017–2019
15롤프 뮤체니히2019–현재


  • 2010년 8월부터 10월까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아내에게 신장을 기증한 후 회복 중인 기간 동안 요아힘 포스 의원이 부의장 직무대행을 역임했다.


역대 대통령재임 기간
구스타프 하이네만1969–1974
요하네스 라우1999–2004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17–현재



독일 총리재임 기간
빌리 브란트1969–1974
헬무트 슈미트1974–1982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
올라프 숄츠2021–현재



독일 부총리재임 기간
빌리 브란트1966년–1969년
에곤 프랑케1982년
프란츠 뮌테페링2005년–2007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07년–2009년
지그마어 가브리엘2013년–2018년
올라프 숄츠2018년–2021년


6. 1. 제1차 세계대전 전의 주요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주요 지도자들이었다.

1890년 9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효력이 사라졌다. 1890년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할레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은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당 지도부는 2명의 의장, 2명의 서기, 1명의 회계, 7명의 감사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에는 파울 징어와 알빈 게리슈가 선출되었다. 또한 『소치알데모크라트』(Sozialdemokrat)지를 폐간하고, 『포어베르츠』(Vorwärts)지를 부활시켜 중앙 기관지로 삼았다.

1892년 11월 베를린 당대회에서 아우구스트 베벨과 파울 징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10년 마그데부르크 당대회까지 이 두 사람이 의장으로 계속 선출되었다. 1911년 3월 파울 징어가 사망하면서, 같은 해 9월 예나 당대회에서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후고 하제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3년 8월 아우구스트 베벨이 사망하자, 같은 해 9월 예나 당대회에서 후고 하제와 함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6. 2. 역대 당수

의장연도
1쿠르트 슈마허1949–1952
2에리히 올렌하우어1952–1963
3프리츠 에를러1964–1967
4헬무트 슈미트1967–1969
5허베르트 베너1969–1983
6한스-요헨 포겔1983–1991
7한스-울리히 클로제1991–1994
8루돌프 샤핑1994–1998
9페터 스트룩 (1기)1998–2002
10루트비히 슈티글러2002
11프란츠 뮌테페링2002–2005
(9)페터 스트룩 (2기)2005–2009
12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09–2013
13토마스 오퍼만2013–2017
14안드레아 나레스2017–2019
15롤프 뮤체니히2019–현재



역대 대통령재임 기간
구스타프 하이네만1969–1974
요하네스 라우1999–2004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17–현재



독일 총리재임 기간
빌리 브란트1969–1974
헬무트 슈미트1974–1982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
올라프 숄츠2021–현재



독일 부총리재임 기간
빌리 브란트1966년–1969년
에곤 프랑케1982년
프란츠 뮌테페링2005년–2007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07년–2009년
지그마어 가브리엘2013년–2018년
올라프 숄츠2018년–2021년



주(州)대표의석 수정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안드레아스 슈토흐야당
바이에른주론야 엔드레스야당
베를린프란치스카 기페이 & 라에드 살레CDU–SPD 연정
브란덴부르크주디트마어 보이트케SPD–BSW 연정
브레멘팔크-콘스탄틴 바그너SPD–녹색당–좌파당 연정
함부르크멜라니 레온하르트SPD–녹색당 연정
헤센주죄렌 바르톨CDU–SPD 연정
니더작센주슈테판 바일SPD–녹색당 연정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마누엘라 슈베지히SPD–좌파당 연정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토마스 쿠트샤티야당
라인란트팔츠주로거 레벤츠SPD–녹색당–자유민주당 연정
자를란트주안케 레링거단독 과반수 정부
작센주카트린 미헬 & 헤닝 호만CDU–SPD 연정
작센안할트주율리아네 클레만 & Andreas Schmidt (Politiker, 1970)|Andreas SchmidtdeCDU–SPD–자유민주당 연정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세르필 미디야틀리야당
튀링겐주게오르크 마이어SPD–BSW–CDU 연정



2010년 8월부터 10월까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아내에게 신장을 기증한 후 회복 중인 기간 동안 요아힘 포스 의원이 부의장 직무대행을 역임했다.

6. 3. 사회민주당 출신 역대 독일 총리

독일 총리재임 기간
빌리 브란트1969년–1974년
헬무트 슈미트1974년–1982년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년–2005년
올라프 숄츠2021년–현재



빌리 브란트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헬무트 슈미트는 1974년부터 1982년까지,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 올라프 숄츠는 2021년부터 총리직을 맡고 있다.[41]

6. 3. 1. 바이마르 공화국

1891년 10월 에르푸르트 당대회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 강령은 원칙 강령과 행동 강령으로 나뉘어 있으며, 원칙 강령은 카를 카우츠키에 의해 작성되었고,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표방하는 내용이었다. 반면 행동 강령은 주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당면 요구, 즉 보통선거, 비례대표 선거,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종교와 교육의 분리, 남녀평등, 누진세 강화, 간접세 폐지, 8시간 노동제, 아동 노동·야간 노동 금지, 단결권 보장을 요구하는 사회 개량주의를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칙 강령과 행동 강령 사이에 연결 고리가 발견되지 않아 그것이 수정주의 논쟁의 원인이 되었다.[67]

이 강령의 초안을 읽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91년 사회민주당 강령 초안 비판』(에르푸르트 강령 비판)을 쓰고 카우츠키에게 보냈다. 그 안에서 엥겔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 진압법 부활에 대한 공포 때문에 타협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며, 당에 만연하는 사회 개량주의를 견제했다. 독일에서 합법적으로 내세우기 어려운 점은 인정하면서도, 노동자 계급이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하는 공화제 요구와 소국 분립주의와 프로이센주의 제거를 통한 독일 재편성(독일 통일 공화국)의 요구가 쓰여 있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68]

하지만 사회민주당의 활동이 확대됨에 따라 실제 당 활동은 사회 개량주의 운동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원칙 강령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원칙 강령은 이론적으로도 문제시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이론 체계인 수정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1899년 베른슈타인이 저술한 『사회주의의 여러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여러 과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으로 사회주의로 바꾼다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의회 활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노선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9]

이 주장은 당 안팎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수 년에 걸친 수정주의 논쟁을 야기했다. 자유 노동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수정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내에서는 정통파가 유력했다. 1903년 드레스덴 대회에서는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정통파의 강력한 반대에 의해 수정주의는 압도적인 다수표로 부결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주의는 유지되었다.[68]

베벨 등 당 지도부는 “현재는 합법적인 활동과 당 조직의 확충에 전념하고, 다가올 체제의 위기에 대비한다”는 “대기 전술”을 주창했다. 이러한 절충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당의 분열을 피하려고 애썼다. 1905년 당 대회에서는 당 지도부의 “대기 전술”에 대해 총파업·대중 파업 전술의 필요성이 결의되었지만, 그 이듬해 당 대회에서는 노조의 사회 개량주의의 압력으로 노조 측에 파업의 공동 결정권이 인정되었다.[70]

급진좌파의 로자 룩셈부르크


1908년부터 1910년경까지 정통파가 분열했다. 당 지도부와 카우츠키가 중도파(중간파)를 형성하는 한편,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 클라라 체트킨 등은 급진 좌파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71] 중도파는 개량주의적인 일상 정책을 혁명적인 이데올로기와 조화시키는 입장이며, 당내 다수파가 여기에 속해 처음에는 베벨과 징거 밑, 1911년 또는 1913년 이후에는 후고 하제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밑에서 당 지도부를 장악했다.[72] 반면 급진 좌파는 수적으로는 소수파였지만,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활발했고, 독자적인 이데올로기적 경향을 형성하여 후일 독일 공산당(KPD)의 원류가 되었다.[71] 중도파와 급진 좌파의 대립은 1910년경부터 심해지면서, 룩셈부르크 등이 거리 운동을 대중 파업으로 발전시켜 혁명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것을 카우츠키 등은 “폭동주의”라고 비판했다.[67]

이러한 당내 분열에 이른 것은 제국 독일의 정치 체제의 복잡성에도 한 원인이 있었다. 제국 독일은 서유럽적인 부르주아 의회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패비안 사회주의처럼 혁명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제정 러시아만큼의 전제 국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처럼 혁명의 선봉대로서 국가에 대해 언제까지나 혁명적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69]

1930년 7월 16일, 힌덴부르크는 대통령 내각의 기본 원칙 중 하나로 사회민주당을 정권에 참여시키지 않기로 결정했고, 사회민주당은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의 재정 법안에 반대하여 법안이 부결되었다. 이때 브뤼닝은 처음으로 대통령 긴급 명령을 발령하여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73]

1930년 9월 14일의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143석으로 제1당을 유지했지만, 나치당은 107석을 획득하여 제2당으로 약진했고, 공산당도 77석을 획득하여 제3당이 되었다. 이 선거 후, 사회민주당은 브뤼닝 내각에 정권 참여는 하지 않지만, 일정한 협력을 하는 "관용 노선"을 취했다.

193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바이마르 연합"은 히틀러의 대통령 취임을 저지하기 위해 독자 후보를 세우지 않고, 제정 복고주의자인 현직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1932년 5월, 쿠르트 폰 슐라이허 중장이 브뤼닝을 실각시키고, 프란츠 폰 파펜을 새로운 대통령 내각 총리로 추대하면서 정권의 보수 색채가 강해졌다. 사회민주당은 이 정권에 대한 협력을 일절 거부했다. 7월 20일, 파펜은 프로이센 쿠데타를 일으켜 프로이센 주의 브라운 사회민주당 정부를 해체했다.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은 133석에 그친 반면, 나치당은 230석을 획득하여 나치당에게 제1당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1932년 12월, 슐라이허 내각이 성립했지만, 사회민주당은 협력을 거부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당의 분열 공작도 벌였지만 실패했고, 히틀러와 파펜의 연계로 몰락했다.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면서 나치 정권이 탄생했다. 나치 정권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탄압했다. 1933년 2월 27일, 라이히슈타크 방화 사건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고 사회민주당에 대한 선거 방해도 심해졌다. 1933년 3월 5일 선거 결과, 나치당은 288석, 사회민주당은 120석, 공산당은 81석을 얻었다. 3월 9일, 공산당 의원들의 의원 자격이 박탈되어 나치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33년 3월 23일, 히틀러가 제출한 전권위임법에 대해 사회민주당은 반대했다. 반대 연설에서 사회민주당 당수 오토 벨스(Otto Wels)는 "정부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불명예스러운 입장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다."라고 연설했다. 히틀러는 벨스의 연설에 분노하여 "여러분은 이제 쓸모없다."라고 말했다. 결국 전권위임법에 반대표를 던진 정당은 사회민주당뿐이었고, 찬성 441, 반대 94로 가결되었다.[74]

1933년 8월, 오라니엔부르크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회민주당 국회의원들


한편 사회민주당은 존속을 위해 나치 정권의 분노를 사지 않으려고 온화한 태도도 보였다. 벨스는 사회주의노동자국제 가맹 우호당의 히틀러 비판을 "중상선전"이라고 하며 중지하도록 노력했지만, 중지되지 않자, 1933년 3월 30일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노동자국제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나치당은 1933년 5월 2일,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간부들을 체포했다. 노동조합의 자금은 몰수되어 독일노동전선자산이 되었다. 5월 10일에는 사회민주당의 모든 자산도 몰수되었다. 6월, 벨스 등 사회민주당 간부들은 독일에서 망명했다. 1933년 6월 22일, 사회민주당은 모든 활동을 금지당해 소멸하게 되었다.

사회민주당 붕괴 후, 국내에 남아 있던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은 나치스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벨스 등 망명한 당원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SoPaDe)"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정치 활동을 계속했다. 1934년에는 프라하 선언을 발표하여 나치에 대한 저항 태세를 분명히 했다.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후에는 파리로 이동했고, 1939년 벨스가 사망하자 한스 포겔이 SoPaDe의 지도자가 되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후에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1941년에는 망명 사회주의 조직과 연계했다. 또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참여자 등 국내 반나치 세력과 접촉했다.

6. 3. 2. 독일 연방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쿠르트 슈마허의 지도 아래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초기에는 사회시장경제와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노력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슈마허 사후, 더 많은 유권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회시장경제와 서방 동맹 내 독일의 위치를 수용했다. SPD는 여전히 노동조합원과 노동 계급 유권자들의 경제적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 1990년대에는 당내 좌파와 중도파 간의 분열이 발생했고, 일부 당원들은 탈당하여 사회주의 정당인 WASG(노동과 사회 정의 – 선거 대안)를 결성했다. 이 정당은 나중에 좌파당(Die Linke)과 합쳐졌다.[71]

1979년부터 2024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유럽 의회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선거득표수%의석 수증감EP 의원단
1979년11,370,04540.83 (#1)35신규SOC
1984년9,296,41737.41 (#2)331
1989년10,525,72837.32 (#1)312
1994년11,389,69732.16 (#1)4010PES
1999년8,307,08530.70 (#2)337
2004년5,547,97121.52 (#2)2310
2009년5,472,56620.78 (#2)230S&D
2014년7,999,95527.26 (#2)274
2019년5,914,95315.82 (#3)1611
2024년5,548,52813.94 (#3)142



1946년부터 1975년까지 독일 사회민주당의 주별 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도
DE

EU
rowspan=2 class="unsortable"|
BW

BY

BE

BB

HB

HH

HE

NI

MV

NW

RP

SL

SN

ST

SH

TH

SB
border

WB

WH
1946해당 없음해당 없음rowspan=81 bgcolor=lightgrey|31.928.6rowspan=2 48.7동부 지역의 사회민주당은 1946년 동부 지역 선거 이전에 SED에 강제 합병되었다.47.643.142.7rowspan=4|rowspan=4|rowspan=4|rowspan=4|
194722.4rowspan=3 |20.8rowspan=3 |41.7rowspan=2 |rowspan=3 |43.432.034.332.843.8
1948rowspan=4 |rowspan=4 |rowspan=2 64.5rowspan=3 |rowspan=3 |rowspan=2 |rowspan=3 |rowspan=3 |rowspan=2 |
194929.242.8
1950rowspan=2 33.0rowspan=4 28.044.7해당 없음rowspan=3 |44.4해당 없음rowspan=4 32.3해당 없음해당 없음rowspan=4 27.5해당 없음
1951rowspan=2 |39.1rowspan=3 |33.7rowspan=4 34.0|
1952colspan=3 28.0rowspan=3 |rowspan=3 |rowspan=2 32.4
195328.8colspan=3 rowspan=3 ||rowspan=4 45.2
195428.144.642.6rowspan=2 34.5|rowspan=4 33.2
1955rowspan=2 |rowspan=3 |47.8rowspan=3 |rowspan=2 35.2rowspan=4 31.720.1
1956colspan=3 28.9rowspan=3 |rowspan=2 |rowspan=3 |
195731.8colspan=3 rowspan=3 ||53.9rowspan=2 |
195830.852.6rowspan=3 |46.9rowspan=4 39.2rowspan=4 35.9
1959rowspan=4 |54.9rowspan=3 |39.5rowspan=4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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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36.257.4
196235.3rowspan=4 |50.8rowspan=4 43.3rowspan=5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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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39.3rowspan=5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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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56.946.0rowspan=3 |rowspan=3 |43.1rowspan=3 |rowspan=4 36.8rowspan=4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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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42.7colspan=3 rowspan=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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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rowspan=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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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42.648.8rowspan=3 |rowspan=3 |45.1rowspan=4 38.5rowspan=5 41.8rowspan=4 |


6. 4. 역대 독일 대통령(사회민주당 출신)

주어진 자료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출신 역대 독일 대통령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사회민주당이 독일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을 간략하게 언급할 수 있다.

사회민주당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집권 여당으로서 독일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 하에서 탄압을 받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재건되어 주요 정당으로 다시 부상했다. 특히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국민 정당으로 변모하면서 더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다.

6. 4. 1. 바이마르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미·영·프 점령하의 서측(후의 서독)과 소련 점령하의 동측(후의 동독)으로 분할되었다.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1945년 6월, 미국 점령 지역에서는 8월, 영국 점령 지역에서는 9월,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는 12월부터 각각 제한적으로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다.

사민당은 나치 당 정권 시대에도 유지해 온 조직을 중심으로, 해외 망명자와 강제 수용소 수용자 등이 속속 복귀하는 형태로 정당 활동을 조기에 재개하였다. 당시 사민당에는 쿠르트 슈마허를 중심으로 영국 점령 지역 하노버를 본거지로 한 그룹, 오토 그로테볼을 중심으로 소련 점령 지역에 있던 Zentralausschuss der SPD|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베를린)de , 에리히 오렌하우어를 중심으로 런던의 망명 사민당 본부, 이렇게 세 가지 흐름이 있었다.[1]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서방 3국 점령 지역에서 실시된 최초의 주의회 선거에서는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과 사회민주당이 팽팽하게 맞섰다.[2] 1947년 5월에는 미영 양국 간에 “두 점령 지역 재편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부터는 Wirtschaftsrat des Vereinigten Wirtschaftsgebietes|label=경제평의회de와 내각에 해당하는 집행이사회 및 장관에 해당하는 본부장관이 설치되었다. 경제평의회 의원은 주의회 선거의 세력 비율에 따라 선출되었고, 사회민주당은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과 같은 20석(총 의석 52석)을 얻었다.[2]

1947년 7월 24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 자당에 불리한 장관 인사안을 거부하자,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 전제는 무너졌다. 이후로는 야당으로서 협력을 거부한다”고 선언하였고, 장관직은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민주당이 자당의 당세 확대를 오판한 것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후 약 20년에 걸친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여당, 사회민주당=야당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2]

동서 대립이 격화되어 독일 분단은 불가피해졌고, 1948년 7월 미영불 점령군 정부 장관의 지시로 서방은 “의회 평의회”에서 기본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이 “의회 평의회”에서도 사회민주당은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과 같은 27석을 차지했다.[3] 사회민주당은 “건설적 야당”의 입장을 취하여, 1949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본 기본법) 제정 시에는 “동측이 배제되어 있는 한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달면서도 그 제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4]

본 기본법에 의해 연방의회가 설치되었고, 1949년 8월 제1회 연방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사회민주당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에 패배하여 야당이 되었다.[5]

사회민주당은 동독과의 통일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유럽 회의와 슈만 계획,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유럽 방위 공동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등에 서독이 가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독일 연방군의 창설과 징병제에도 반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도 사회민주당은 “건설적 야당”의 입장을 취하며 원리주의적인 반대를 계속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럽 회의에 서독이 참가하는 것이 결정되면 사회민주당은 적극적으로 유럽 의회에 의원을 파견했고, 연방군 창설과 징병제 도입의 기본법 제1차 개정에 반대하면서도 연방군 병사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에 관한 기본법 제2차 개정에는 찬성하기도 했다.[5]

6. 4. 2. 독일 연방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한 서측(후의 서독)과 소련이 점령한 동측(후의 동독)으로 분할되었다.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1945년 6월, 미국 점령 지역에서는 8월, 영국 점령 지역에서는 9월,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는 12월부터 각각 제한적으로 정당 활동이 허용되었다.

사회민주당(SPD)은 나치 정권 시대에도 유지해 온 조직을 중심으로, 해외 망명자와 강제 수용소 수용자들이 복귀하는 형태로 정당 활동을 조기에 재개한 정당이었다. 당시 사민당에는 쿠르트 슈마허를 중심으로 영국 점령 지역 하노버를 본거지로 한 그룹, 오토 그로테볼을 중심으로 소련 점령 지역에 있던 그룹, 에리히 올렌하우어를 중심으로 런던의 망명 사민당 본부 등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었다.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 당대회 포스터


1952년 8월 쿠르트 슈마허가 사망하자 에리히 올렌하우어가 후임 당수가 되어 1963년 사망할 때까지 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슈마허의 뜻을 이어 독일 재통일을 최고 목표로 삼고 서유럽 통합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냉전이 격화되면서 독일 재통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서독 국민 대다수는 경제 부흥과 더불어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유럽 통합 외교를 지지했다. 반대로 사회민주당의 서유럽 통합 정책에 대한 저항 노선은 사회민주당을 점점 고립시켰다.

사회민주당은 1953년 연방의회 선거와 1957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연패했고, 1950년대 내내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에 뒤처졌다. 또한 당원 수도 1947년에는 87만 명을 넘었지만 1950년에는 68만 명, 1950년대 중반에는 58만 명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위기감으로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노동 계급뿐만 아니라 중간 계층의 지지도 확보하기 위해 더 현실적인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나갔다. 1953년부터 1959년에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결실을 맺을 때까지 6년 동안 계급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4년 7월 베를린 당대회는 1952년에 채택된 도르트문트 행동 강령에 "사회민주당은 탄생 당시 노동 계급의 정당에서 국민의 정당이 되었다"라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에 계승될 문구를 처음으로 추가했다.

1957년 사회민주당은 서독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찬성하며 서유럽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1958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 당 조직 개혁이 결의되었고, 그때까지 당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당 집행부의 유급 간부 제도가 폐지되었다. 대신 당 간부회가 설치되었고, 그 대다수를 연방의원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 연방의회 선거 승리에 더 무게를 두는 경향을 강화했다.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 당대회에서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이 제정되었다. 이 강령에 따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투쟁과 결별하고 중도좌파의 국민 정당으로 전환했다. 경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시장, 필요한 만큼 계획"이라고 선언하여 시장 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수단은 의회주의적 개량을 자기 목적으로 삼았다.[78]

1960년 6월에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서방 군사 동맹 체제도 수용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노선 전환이 효과를 거두면서 사회민주당은 점차 대중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1961년 연방의회 선거와 1965년 연방의회 선거에서는 여전히 야당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득표율을 꾸준히 늘려갔다.

6. 5. 역대 독일연방공화국 부총리(사회민주당 출신)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당선자득표율(%)당 대표집권 여부
1890년 총선19.7파울 징거, 아우구스트 베벨야당
1893년 총선23.3
1898년 총선27.2
1903년 총선31.7
1907년 총선29.0
1912년 총선34.8아우구스트 베벨
1919년 총선37.9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여당
1920년 총선21.9헤르만 뮐러, 오토 벨스야당
1924년 5월 총선20.5
1924년 12월 총선26.0
1928년 총선29.8여당
1930년 총선24.5오토 벨스야당
1932년 7월 총선21.6
1932년 11월 총선20.4
1933년 총선18.3
1949년 총선29.2쿠르트 슈마허
1953년 총선28.8에리히 올렌하우어
1957년 총선31.8
1961년 총선36.2빌리 브란트
1965년 총선39.3
1969년 총선42.7여당
1972년 총선45.8
1976년 총선42.6헬무트 슈미트
1980년 총선42.9
1983년 총선38.2한스요헨 포겔야당
1987년 총선37.0요하네스 라우
1990년 총선33.5오스카르 라퐁텐
1994년 총선36.4루돌프 샤르핑
1998년 총선40.9게르하르트 슈뢰더여당
2002년 총선38.5
2005년 총선34.2연립 여당
2009년 총선23.0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야당
2013년 총선25.7페어 슈타인브뤽연립 여당
2017년 총선20.5마르틴 슐츠



1949년 이후 선거 결과 및 정부


사회민주당(SPD, 때때로 SAPD라고도 불림)은 의회 구성을 결정하는 총선에 참여했다. 1933년까지의 선거에서 의회는 국회(Reichstag)라고 불렸는데, 1919년 선거의 경우 국민의회(National Assembly)라고 불렸고, 1949년 이후로는 연방의회(Bundestag)라고 불린다. 국경 변화(1871년, 1919년, 1920년, 1949년, 1957년, 1990년)로 인해 유권자 수가 달라졌고, 선거법 또한 투표 방식(1912년까지는 선거구만, 1949년까지는 정당 명부만, 그 이후로는 혼합 방식), 선거권(1919년부터 여성 참정권, 최소 투표 연령은 1918년까지 25세, 1946년까지 20세, 1972년까지 21세, 그 이후로 18세), 의석 수(고정 또는 가변), 입법 기간(3년 또는 4년)을 변경했다. 이 목록은 노동 정당이 통합되어 SPD(당시 SAPD, 1890년부터 현재 이름 사용)를 형성한 1875년 이후부터 시작된다.

참조

[1] 웹사이트 Bilanz für 2023: SPD verliert fast 15.000 Mitglieder https://www.tagessch[...]
[2] 서적 Social Democracy in Power: the capacity to reform Taylor & Francis
[3] 서적 The Impact of European Integration on Political Parties: Beyond the Permissive Consensus https://books.google[...] CRC Press 2013-07-14
[4] 서적 The Death of Social Democracy: Political Consequences in the 21st Century https://books.google[...] Ashgate Publishing, Ltd. 2013-07-18
[5] 웹사이트 Year in a word: Zeitenwende https://www.ft.com/c[...] 2024-02-26
[6] 웹사이트 Where German parties stand on Europe https://www.politico[...] Politico 2017-08-28
[7] 뉴스 Germany's SPD targets voters' emotions with EU poll campaign https://www.ft.com/c[...] 2019-05-16
[8] 뉴스 SPD will Sozialistischer Internationale den Geldhahn zudrehen und den Mitgliedsbeitrag nicht zahlen https://www.spiegel.[...] 2021-09-28
[9] 뉴스 Progressive Alliance: Sozialdemokraten gründen weltweites Netzwerk http://www.spiegel.d[...] 2015-05-10
[10] 뉴스 Sozialdemokratie: "Progressive Alliance" gegründet https://www.faz.net/[...] 201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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