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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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노갑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 전쟁 시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국어 교사였다. 일본 호세이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28년 수필가로 문단에 데뷔하여 소설 《거절》로 등단했다. 이후 《춘보의 득실》, 《고양이》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했으나, 1947년 절필하고 숙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제자로는 소설가 박완서와 한말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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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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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로갑 |
본명 | 박노갑 |
필명 | 필명(筆名)은 노갑(盧甲, 로갑) 아호(雅號)는 도촌(島村) |
출생지 | 대한제국 충청남도 논산군 |
사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평양특별시 |
국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언론 기자, 중고등교원, 기업가 |
본관 | 밀양 |
장르 | 소설, 수필 |
경력 | 수선출판사 학예부 차장 |
배우자 | 풍천 임순악(任㝇㓵) |
자녀 | 2남 2녀 (그 가운데 차남 박기룡) |
부모 | 박선(부), 영산 신씨 부인(모) |
형제 | 1남 3녀(4남매) 중 막내 |
학력 |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언어 | 한국어, 영어, 일본어 |
활동 기간 | 1928년~1947년 |
작품 | |
주요 작품 | 소설 《거절》, 《청춘》, 《춘보의 득실》, 《꿀》, 《안사람》, 《사십년》 |
영향 관계 | |
영향 준 인물 | 모교 경성휘문고보 선배 계용묵 등의 영향을 받음. |
영향 받은 인물 | 1948년 서울숙명여고 국어 교사 당시의 두 제자 박완서, 한말숙 등에게 영향을 줌.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두피디아 박노갑 |
2. 생애
朴魯甲|박노갑일본어은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1932년 3월)[1] 1928년 11월, 일본 도쿄 유학 시절, 무산성 사회주의 문학 운동 관련 동인지에 '''노갑'''(盧甲)이라는 필명으로 수필 작가로 입문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 《거절(안 해)》이라는 소설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잡지사 〈삼천리〉 학예부 기자를 잠시 역임했다. 1936년 《춘보의 득실》, 1937년 《꿀》·《안사람(안해)》 등 농촌 사회 문제와 관련된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9년 《고양이》, 1940년 《이랑이》, 1945년 8·15 을유해방 이후 1946년 《사십년》 등 일제강점기 시대 도심 지역의 순탄치 못한 현실적인 괴리감 등에 관련된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6년 3월부터 1947년 8월까지 소설가 계용묵(桂鎔默)이 부사장 직으로 있었던, 〔수선출판사〕의 학예부 차장을 지냈다.
1947년 9월, 사실상 절필 및 문단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여학교 국어 교사로 봉직하다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29일, 숙명여고에 출근했다가 납북 국군 포로[1] 출신이었던 둘째 아들 박기룡(朴妓竜)[2]과 함께 납북되었다. 이후 북에서의 활동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2006년 3월 제1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3] 당시 박노갑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2006년 3월 당시 76세였던, 납북된 지 55년이 지난 북측 평양 거주자였던 차남 박기룡 씨는 '아버지가 평안남도 평양특별시에서 뇌경색과 당뇨로 쓰러져 인민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5년 4개월 후인 1985년 6월 2일 간암, 당뇨, 뇌졸중의 합병증으로 향년 81세로 돌아가셨다'라고 설명했다. 이 말에 박노갑의 아내 임순악(任㝇㓵, 1910년 5월 3일~2006년 5월 30일) 여사는 '아무리 적어도 2000년까지는 네 아버지가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라며 슬퍼했다. 두 달 후 임순악 씨도 노환으로 경기도 수원 장안구 자택에서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 1. 유년기와 학창 시절
朴魯甲|박노갑일본어은 일본 도쿄 호세이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다.(1932년 3월)[1]2. 2. 문학 활동
1928년 11월, 일본의 수도 도쿄 유학 시절, 무산성 사회주의 문학 운동 관련 동인지에 '''노갑'''(盧甲)이라는 필명으로 수필 작가로 입문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단편 《거절(안 해)》이라는 소설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학예부 기자 등으로 특채되어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잡지사 〈삼천리〉 학예부 기자를 각각 잠시 역임했다. 1936년 《춘보의 득실》, 1937년 《꿀》·《안사람(안해)》 등 농촌 사회 문제와 관련된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9년 《고양이》, 1940년 《이랑이》, 1945년 8·15 을유해방 이후 1946년 《사십년》 등 일제강점기 시대 도심 지역의 순탄치 못한 현실적인 괴리감 등에 관련된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6년 3월부터 1947년 8월까지 자신의 모교 선배인 소설가 계용묵(桂鎔默)이 당시 부사장 직으로 있었던, 〔수선출판사〕의 학예부 차장을 지냈다.1947년 9월 이후 사실상 절필 및 문단 은퇴를 선언했다.
2. 3. 한국 전쟁과 납북
1947년에 은퇴한 이후 여학교 국어 교사로 봉직하다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29일, 숙명여고에 출근했다가 납북 국군 포로[1] 출신이었던 둘째 아들 박기룡(朴妓竜)[2]과 함께 납북되었다. 이후 북에서의 활동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2006년 3월 제1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3] 당시 박노갑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2006년 3월 당시 76세였던, 납북된 지 55년이 지난 북측 평양 거주자였던 차남 박기룡 씨는 '아버지가 평안남도 평양특별시에서 뇌경색과 당뇨로 쓰러져 인민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5년 4개월 후인 1985년 6월 2일 간암, 당뇨, 뇌졸중의 합병증으로 향년 81세로 돌아가셨다'라고 설명했다. 박기룡 씨의 이 말에 박노갑의 아내 임순악(任㝇㓵, 1910년 5월 3일~2006년 5월 30일) 여사는 '아무리 적어도 2000년까지는 네 아버지가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라며 슬퍼했다. 두 달 후 임순악 씨도 노환으로 경기도 수원 장안구 자택에서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 4. 사망
1947년에 은퇴한 이후 여학교 국어 교사로 봉직하다가, 6·25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29일, 당시 대한민국 수도 서울 소재 숙명여고에 출근했다가, 납북 국군 포로[1] 출신이었던 둘째 아들 박기룡(朴妓竜,[2])과 함께 갑자기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북에서의 활동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51년 5월 29일 행방불명된 지 55년여가 지난 2006년 3월, 제1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3] 당시 박노갑의 병사(사망)가 뒤늦게 밝혀졌다.2006년 3월 당시 76세였던, 납북 55년차이자 당시 북측의 평양 거주자였던 차남 박기룡 씨의 구술에 따르면, 박기룡은 '어머님, 아버지가 1980년 2월 1일에 평안남도 평양특별시에서 뇌경색과 당뇨로 쓰러져 인민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5년 4개월 후인 1985년 6월 2일 간암과 당뇨와 뇌졸중의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81세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박기룡의 이 말에 박노갑의 아내인, 남측의 임순악(任㝇㓵, 1910년 5월 3일~2006년 5월 30일) 여사는 뒤늦게 슬퍼하면서 '아무리 적어도 2000년도까지는 네 아버지가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두 달 후 임순악도 2006년 5월 30일 노환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의 자택에서 향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주요 작품
박노갑은 소설과 수필을 집필했다.
3. 1. 소설
제목 |
---|
거절(안 해) |
홍수(洪水) |
봄 |
남풍(南風) |
무가(霧街) |
삼인행(三人行) |
청춘 |
춘보의 득실 |
꿀 |
안사람(안해) |
거울 |
새벽 |
고양이 |
이랑이 |
사십년 |
참조
[1]
문서
납북 국군 포로로 분류됨
1995
[2]
문서
1931년 11월 28일 [[일본 제국|일본]] [[도쿄도|도쿄]] 생. 박노갑 작가가 처자식들과 함께 [[일본 제국|일본]] 제국 도쿄 유학 당시, 부인 [[풍천 임씨|풍천]] 임순악(任㝇㓵) 씨와의 사이에 차남(次男)으로 득남.
1931-11-28
[3]
문서
2006년 3월 20일~3월 25일 어언 5일간 거행.
200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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