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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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대평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충청남도지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66년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에 입문하여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충청남도지사 등을 지냈으며, 국민중심당을 창당하여 대표를 역임했다. 17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사퇴했고,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대표를 맡았다. 이후 자유선진당 탈당 후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했으나, 자유선진당에 복당했다. 19대 총선에서 낙선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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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대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심대평 |
| 한자 표기 | 沈大平 |
| 로마자 표기 | Sim Dae-pyeong |
| 출생일 | 1941년 4월 7일 |
| 출생지 |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
| 국적 | 대한민국 |
| 본관 | 청송 |
| 종교 | 천주교(세례명: 임마누엘) |
| 학력 |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국방대학원 행정학 석사 수료 |
| 배우자 | 안명옥 |
| 자녀 | 3남 |
| 형제 | 2남 3녀 중 장남 |
| 웹사이트 | dpsim.co.kr |
| 미니홈피 | 심대평 미니홈피 |
| 경력 | |
| 직책 | 제1·2대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 |
| 임기 | 2013년 9월 2일 ~ 2017년 8월 25일 |
| 대통령 | 박근혜 문재인 |
| 주요 경력 | 제12대 경기도 의정부시장 제22·24대 충청남도 대전시장 제24·33·34·35대 충청남도지사 제9대 행정조정실장 노태우 정부 제4대 청와대 행정수석 제1대 국민중심당 대표 제1·4대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 |
| 부모 | 심재갑(아버지, 교육감) 김경순(어머니) |
| 정치 활동 | |
| 정당 | 국민의힘 |
| 지역구 | 대전 서구 을(17) 충남 공주시·연기군(18) |
| 의원 선수 | 2 |
| 의원 대수 | 17·18 |
| 당내 직책 | 상임고문 겸 당무위원 |
| 국회 내 직책 | (확인 필요) |
| 기타 | |
| 서명 | (확인 필요) |
2. 생애
1941년 4월 7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교육감 심재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했다. 경기도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관선 충청남도지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정무수석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민선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된 이후 3선 연임하며 2006년까지 충청남도를 이끌었고, 자유민주연합 부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2006년 1월 국민중심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으나, 같은 해 지방선거 부진으로 사퇴했다. 이듬해인 2007년 4월, 대전광역시 서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했다. 제17대 대선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12월 3일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2008년 2월, 국민중심당은 이회창 측과 합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창당되었고, 심대평은 초대 대표를 맡았다. 제18대 총선에서는 공주시·연기군 지역구로 옮겨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9년 8월,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 방식에 반발하며 자유선진당을 탈당했다.[11][12][13]
탈당 후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2011년 10월 자유선진당과 다시 합당하며 당 대표로 복귀했다. 제19대 총선에서는 신설된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으나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에게 패배한 뒤 대표직에서 물러났다.[14]
이후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되자, 새누리당 소속으로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15]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대통령 직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17][18][19][20][21] 공직 은퇴 후에는 건양대학교 석좌교수 등으로 활동했다.[16]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41년 4월 7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교육감 심재갑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 2. 행정 관료 경력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비서실 등 중앙 부처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경기도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부산광역시 기획관리실장 등 지방 행정 경험을 쌓았다.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11]주요 행정 관료 경력은 다음과 같다.
| 기간 | 주요 경력 |
|---|---|
| 1967년 ~ 1974년 |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근무 |
| 1974년 ~ 1978년 | 청와대 비서실 근무 |
| 1978년 |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근무 |
| 1978년 ~ 1980년 | 경기도 북부출장소 소장 |
| 1980년 ~ 1981년 | 경기도 의정부시장 |
| 1981년 ~ 1983년 | 대전시장 |
| 1985년 ~ 1986년 | 부산광역시 기획관리실장 |
| 1986년 ~ 1988년 | 청와대 비서실 비서관 |
| 1988년 ~ 1990년 | 제24대 충청남도지사 (관선) |
| 1995년 6월 ~ 2006년 3월 | 제32·33·34대 충청남도지사 (민선 3선) |
| 2013년 10월 ~ 2017년 | 박근혜 정부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 (초대, 제2기)[17][18][19][20][21][5] |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거쳐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초대 민선 충청남도지사로 당선된 이후 3선 연임하며 2006년까지 지방자치 시대의 충청남도정을 이끌었다. 공직 은퇴 후에는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2기(초대, 제2기) 역임하며 지방자치 발전에 관한 정책 자문에 응했다.[17][18][19][20][21][5]
2. 3. 정치 경력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에 입문한 후 경기도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관선 충청남도지사, 행정조정실장, 청와대 정무수석 등 주요 관직을 거쳤다.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에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민선 충청남도지사를 3차례 연임하였으며, 자유민주연합 부총재를 지내기도 했다.2006년 국민중심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으나, 지방선거 부진으로 사퇴하였다. 이듬해 대전광역시 서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원내에 진입했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중도 사퇴하였다.
2008년에는 국민중심당과 이회창 측 세력이 합당하여 창당된 자유선진당의 초대 대표가 되었고, 제18대 총선에서 공주시·연기군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9년,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자유선진당을 탈당하였다.[11][12] 당시 정치권에서 거론되던 국무총리직 제안에 대해서는 수락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12][13]
탈당 후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했으나[7], 2011년 다시 자유선진당과 합당하며 당 대표로 복귀했다.[8] 제19대 총선에서는 신설된 세종특별자치시에 출마했으나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에게 패배하였고,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14][9]
이후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뒤 상임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되면서 새누리당 당원이 되었다. 제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15]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대통령 직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두 차례 역임한 후 공직과 정계에서 은퇴하였다.[17][18][19][20][21][5]
정계 은퇴 후에는 건양대학교 석좌교수 겸 세종미래비전연구원 원장,[16][1] 청송심씨대종회 회장 등을 지냈다.[5]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소속 충청남도지사 후보였던 김태흠의 후원회장을 맡았다.[10]
| 연도 | 주요 경력 |
|---|---|
| 1967년~1974년 |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근무 |
| 1974년~1978년 | 청와대 비서실 근무 |
| 1978년 | 국무총리실 기획조정실 근무 |
| 1978년~1980년 | 경기도 북부출장소 소장 |
| 1980년~1981년 | 경기도 의정부시장 |
| 1981년~1983년 | 대전시(후의 대전광역시) 시장 (관선) |
| 1985년~1986년 | 부산시 기획관리실 실장 |
| 1986년~1988년 | 청와대 비서실 비서관 |
| 1988년~1990년 | 제24대 충청남도지사 (관선) |
| 1990년~1992년 | 행정조정실장 (부총리급) |
| 1992년~1993년 |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 |
| 1993년~1995년 | 한국공단 이사장 |
| 1995년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당선 (초대 민선, 자유민주연합) |
| 1995년~1998년 | 제32대 충청남도지사 (민선) |
| 1998년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재선 (자유민주연합) |
| 1998년~2002년 | 제33대 충청남도지사 (민선) |
| 2002년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 3선 (자유민주연합) |
| 2002년~2006년 3월 | 제34대 충청남도지사 (민선) |
| 2006년 1월 | 국민중심당 창당, 공동대표 취임 |
| 2006년 6월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부진 책임지고 대표직 사퇴 |
| 2007년 4월 |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 (대전광역시 서구 을, 국민중심당) |
| 2007년 12월 | 제17대 대선 후보 사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 |
| 2008년 2월 | 자유선진당 창당, 초대 대표 취임 |
| 2008년 4월 | 제18대 총선 당선 (충청남도 공주시·연기군, 자유선진당) |
| 2009년 8월 | 자유선진당 탈당[6] |
| 2010년 3월 | 국민중심연합 창당, 당 대표 취임[7] |
| 2011년 10월 | 자유선진당과 국민중심연합 합당, 자유선진당 대표 취임[8] |
| 2012년 4월 | 제19대 총선 낙선 (세종특별자치시), 자유선진당 대표직 사퇴[9] |
| 2013년~2017년 |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 (2기 연임)[5] |
2. 3. 1. 3선 충청남도지사
심대평은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충청남도지사로 당선되어 초대 민선 지사(제32대)로 취임하였다. 이후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고(제33대),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같은 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3선 충청남도지사(제34대)가 되었다. 그의 3선 지사 임기는 1995년부터 2006년 3월까지 이어졌다.2. 3. 2. 국민중심당 창당과 국회의원 당선
2006년 1월 17일 신국환 국회의원과 함께 국민중심당을 창당하고 공동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5월 지방선거 결과 부진의 책임을 지고 6월 2일 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2007년 4월 25일, 열린우리당 소속 구논회 의원의 별세로 공석이 된 대전광역시 서구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이 선거에서 지역 기반 및 열린우리당의 후보 미공천 등에 힘입어 한나라당 이재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국회에 입성하였다.
같은 해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12월 3일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2008년 2월 12일, 국민중심당은 이회창이 이끌던 자유선진당과 합당하였고, 심대평은 통합된 자유선진당의 초대 대표로 추대되었다.
2. 3. 3. 제17대 대선 후보 사퇴와 자유선진당 창당
제17대 대선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2007년 12월 3일에 무소속 후보 이회창을 지지하기로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후 2008년 2월 12일, 자신이 대표로 있던 국민중심당은 이회창이 이끌던 세력과 합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흡수되었고, 심대평은 초대 자유선진당 대표가 되었다. 같은 해 제18대 총선에서는 선거구를 공주시·연기군으로 옮겨 당선되었다.그러나 자유선진당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2009년 8월 30일, 심대평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자유선진당 탈당을 선언하였다.[11] 그는 탈당 이유로 이회창 당시 총재의 당 운영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심대평은 "설득이 통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적 당 운영으로 당 지지율을 2%대에 머무르게 하는 이회창 총재와 당을 같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하며,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총재의 입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당의 현실을 보면서 자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12] 특히, 당시 청와대에서 거론되던 '심대평 총리론'에 대해 이회창 총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을 언급하며, "대통령과 나를 당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세력으로까지 매도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정운영에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자신은 국무총리직을 맡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12] 이에 대해 이동관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심 대표는 내부적으로 검토했던 6∼7명의 후보 가운데 한 분이었다"면서도 "심 대표를 한때 유력한 총리 후보로 검토했으나 없던 일이 됐다"고 확인했다.[13]
2. 3. 4. 자유선진당 탈당과 국민중심연합 창당
2009년 8월 30일, 심대평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자유선진당 탈당을 선언했다.[11] 그는 탈당 이유로 이회창 총재의 당 운영 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심대평은 "설득이 통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적 당 운영으로 당 지지율을 2%대에 머무르게 하는 이회창 총재와 당을 같이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말했다.[11] 또한 "충청권을 지키고 이익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총재로 인해 당의 운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총재의 입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당의 현실을 보면서 자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12]특히, 청와대에서 거론되던 '심대평 총리론'에 대해 이회창 총재가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탈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심대평은 이 총재가 "대통령과 나를 당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세력으로까지 매도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국정운영에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동시에 그는 "국무총리직 제의는 내 자신이 수락할 수 없는 상황이니 국무총리직을 맡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며 총리직 수락 가능성을 일축했다.[12][6] 당시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심대평이 총리 후보군 중 한 명으로 검토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음을 확인해주었다.[13]
자유선진당을 나온 심대평은 2010년 3월 25일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하고 당 대표로 취임했다.[7] 하지만 국민중심연합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군소정당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심대평은 자유선진당으로의 복당을 선택했고, 2011년 10월 10일 국민중심연합은 자유선진당과 신설 합당 방식으로 통합했다. 심대평은 통합된 자유선진당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8]
2. 3. 5. 자유선진당 복당과 제19대 총선 낙선
이후 심대평은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하였으나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군소정당에 머물렀다. 결국 그는 자유선진당 복당을 결심했고, 2011년 10월 10일 국민중심연합은 자유선진당과 합당하였다. 제19대 총선에서는 신설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통합당의 이해찬 후보와 경쟁하였다. 심대평은 선거 운동 중 낙선 시 자신의 정치 인생을 걸겠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이해찬 후보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하였고, 선거 다음 날인 4월 12일 자유선진당 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14]2. 4. 박근혜 정부 시절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개명된 후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가,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되자 새누리당 소속으로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15]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3년 4월 14일에는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로 위촉되었으며, 세종미래비전연구원 초대 원장도 겸임하였다.[16] 같은 해 9월 2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고,[17][18] 10월 23일 공식 임명되었다.[19][20] 2015년 9월 24일에는 제2기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연임되었다.[21] 그는 박근혜 정부 하에서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두 차례 역임한 후, 2017년에 공직 및 정계에서 은퇴하였다.[5]
2. 5. 정계 은퇴 이후
자유선진당이 선진통일당으로 개명된 후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다가,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 합당되자 새누리당 당원으로서 제18대 대선에 출마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다.[15]2013년 4월 14일 건양대학교 교양학부 석좌교수로 위촉되었으며, 동시에 세종미래비전연구원 초대 원장도 겸임하였다.[16][1] 같은 해 9월 2일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고,[17][18] 10월 23일 공식 임명되었다.[19][20] 2015년 9월 24일에는 제2기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장에 연임되어[21] 박근혜 정부 하에서 활동한 후, 2017년에 공직 및 정계에서 은퇴하였다.[5]
공직 퇴임 후에는 청송 심씨 대종회 회장을 맡았으며,[5]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충남도지사 후보였던 김태흠의 후원회장을 맡았다.[10]
3. 가족 관계
(족보명: 심용석 沈龍錫)
장면 내각 초대 참의원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심종석의 12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