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 (1595년)
1. 개요
박연(1595년)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1627년 조선에 표류하여 귀화한 인물이다.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제작과 조종을 지도하고, 병자호란에 참전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는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헨드릭 하멜 일행의 통역을 돕기도 했다. 네덜란드 데 라이프에는 그의 동상이 있으며, 2009년 드라마와 2013년 뮤지컬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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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계 한국인 -
전소미
전소미는 캐나다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3중 국적의 가수로, JYP 엔터테인먼트 연습생, I.O.I 멤버, YG 산하 더블랙레이블 소속 솔로 가수로 활동하며 여러 앨범을 발매했다. -
한국에 거주한 네덜란드인 -
헨드릭 하멜
헨드릭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원으로, 제주도 표류 후 13년간 조선에 억류된 경험을 바탕으로 하멜 표류기를 통해 조선의 모습과 풍습을 유럽에 상세히 소개하여 네덜란드와 대한민국 간의 교류에 기여했다. -
네덜란드의 해적 -
알렉상드르 엑스케멜린
프랑스 출신 외과의사이자 작가인 알렉상드르 엑스케멜린은 카리브해에서 버커니어로 활동하며 헨리 모건의 해적 무리에 합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버커니어의 역사』를 저술하여 해적 시대의 기록을 남겼고,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으나 헨리 모건과의 명예훼손 소송을 겪기도 했다. -
네덜란드의 해적 -
고이센
고이센은 16세기 네덜란드 독립 전쟁 당시 스페인 압제에 저항한 네덜란드 귀족 및 반군 세력으로, '거지'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특히 '바다의 거지들'은 해상에서 스페인에 맞서 싸워 네덜란드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2. 생애
박연(朴淵, 1595년 ~ ?)은 알크마르의 마을인 드레이프/De Rijp네덜란드어에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서는 플라르딩겐 출신이라고도 한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Holandia네덜란드어) 호'의 승무원으로 취업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하였고, 1627년(인조 5년)에는 사략선 '아우에르케르크(Ouwerkerck네덜란드어) 호'의 Hoofdman(Captain 또는 과장을 의미)으로 부임하였다. 1627년 7월 16일, 아우에르케르크 호는 중국 정크선과 중국 아모이 항구로 향하는 150명의 선원을 나포했다.
이후 아우에르케르크 호는 타이난 (포르모사)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부하 두 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부하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네덜란드어) 및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Jan Pieter Verbaest네덜란드어)와 함께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호송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남만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나중에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근무하며 구인후의 지휘를 받아 항복해 온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과 《증보문헌비고》의 ‘본조등과총목’ 기록에 따르면, 박연은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박연은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박연은 통역으로 파견되어 하멜 등을 서울에 호송하고 조선의 풍속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동양 각국의 풍물 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출신을 고려할 때 개신교의 교리를 조선인들에게 설파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2.1. 출생과 초기 생애
2.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3. 조선 표류와 정착
1627년, 얀 얀세 데 벨테브레는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네덜란드어), 암스테르담 출신인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Jan Pieter Verbaest네덜란드어)와 함께 정크선을 타고 가던 중 조선 서해안의 섬에 좌초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이들은 우위를 점한 중국인들에게 제압당하여 조선 당국에 넘겨졌다. 혹은,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다고도 한다.
1627년 7월 16일, 얀 얀세 데 벨테브레(박연) 선장이 이끄는 '아우베르케르크'는 중국 정크선과 중국 아모이 항구로 향하는 150명의 선원을 나포했다. 70명의 중국인이 '아우베르케르크'에 억류되었고, 벨테브레, 디르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테르세 베르바에스트는 다른 13명의 네덜란드 선원들과 함께 정크선에 올라 타이난으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중국 정크선은 조선 서해안의 섬에 좌초되었고, 살아남은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에게 제압당해 조선 당국에 넘겨졌다.
이후 벨테브레를 포함한 세 명의 네덜란드 생존자는 한양으로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포병 무기를 생산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남만(南蠻)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훈련대장 구인후의 지휘 하에 항복한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으며,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 중 하이스베르츠는 전투 중 사망했고, 벨테브레는 만주족의 침략 때 조선군에서 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두명의 포로가 사망한 이후에도 수도 방어군의 일원으로 남았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648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식 한국 관리가 되었다.
1627년 조선에 표류한 얀 얀세 데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박연은 조선군에 합류하여 참전하였다. 박연과 함께 표류했던 동료 두 명은 병자호란에서 전투 중 사망하였다.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항복해 온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 제작 및 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동료 두 명을 잃기도 했다.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과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박연은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고, 동양 각국의 풍물 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은 이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감독하고 통역을 하며 한국 풍속을 가르쳐 주었다.
3.1. 제주도 표류
1627년, 얀 얀세 데 벨테브레는 디럭 헤이스버르츠(Direk Gijsbertz), 암스테르담 출신인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Jan Pieter Verbaest)와 함께 정크선을 타고 가던 중 조선 서해안의 섬에 좌초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이들은 우위를 점한 중국인들에게 제압당하여 조선 당국에 넘겨졌다. 혹은,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다고도 한다.
3.2. 조선 관리와의 만남과 훈련도감 근무
1627년 7월 16일, 얀 얀세 데 벨테브레(박연) 선장이 이끄는 '아우베르케르크'는 중국 정크선과 중국 아모이 항구로 향하는 150명의 선원을 나포했다. 70명의 중국인이 '아우베르케르크'에 억류되었고, 벨테브레, 디르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테르세 베르바에스트는 다른 13명의 네덜란드 선원들과 함께 정크선에 올라 타이난으로 배를 몰았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중국 정크선은 조선 서해안의 섬에 좌초되었고, 살아남은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들에게 제압당해 조선 당국에 넘겨졌다.
이후 벨테브레를 포함한 세 명의 네덜란드 생존자는 한양으로 호송되었고, 그곳에서 포병 무기를 생산하는 임무를 맡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남만(南蠻)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벨테브레는 훈련도감에서 훈련대장 구인후의 지휘 하에 항복한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으며,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 중 하이스베르츠는 전투 중 사망했고, 벨테브레는 만주족의 침략 때 조선군에서 싸웠던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두명의 포로가 사망한 이후에도 수도 방어군의 일원으로 남았다. 그는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었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648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식 한국 관리가 되었다.
3.3. 병자호란 참전
1627년 조선에 표류한 얀 얀세 데 벨테브레는 박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조선에 귀화하였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박연은 조선군에 합류하여 참전하였다. 박연과 함께 표류했던 동료 두 명은 병자호란에서 전투 중 사망하였다.
3.4. 조선 사회 정착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며 항복해 온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 제작 및 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에 참전했다가 동료 두 명을 잃기도 했다.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과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박연은 무과에 급제했다.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고, 동양 각국의 풍물 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은 이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감독하고 통역을 하며 한국 풍속을 가르쳐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