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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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덕귀는 1911년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그리고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사회운동과 인권 운동에 헌신한 여성이다. 일신여고 졸업 후 일본 유학을 거쳐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후 윤보선과 결혼하여 제4대 대통령 배우자로서 활동했으며,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반유신 운동에 참여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 인권위원장,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헌신했고, 19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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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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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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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곡부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배우자 | 윤보선 |
자녀 | 윤상구(아들), 윤동구(아들) |
친척 | 시아버지 윤치소, 시어머니 이범숙, 시숙부 윤치오, 시할아버지 윤영렬, 시종조부 윤웅렬, 시당숙 윤치호, 사돈 민필호, 김준엽, 사돈 신규식, 사돈 남궁억 |
직함 | |
직책 | 제4대 대통령 배우자 |
임기 시작 | 1960년 8월 13일 |
임기 종료 | 1962년 3월 23일 |
대통령 | 윤보선 |
전임 | 프란체스카 도너 |
후임 | 육영수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911년 4월 21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용남군 |
사망일 | 1997년 11월 24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학력 |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 신학 학사 |
경력 | |
직업 | 신학자, 독립운동가, 교육인, 전도사, 여성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 |
웹사이트 | |
웹사이트 | 해위 윤보선 기념사업회 |
2. 생애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에서 지역 유지였던 공도빈(孔道彬)과 방말선(方末善)의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자(孔子)의 79대손[3]이며, 어머니의 다른 이름은 공마리아였다.[3] 명정동 근처에는 이순신의 영정과 전쟁 때 쓰던 물건들이 보존되어 있는 충렬사[4]가 있었다. 그의 선대는 원래 중국 출신이었지만 원나라 사람인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가 고려 공민왕에게 시집온 노국공주를 따라와 고려에 정착했다.[5]
아버지 공도빈은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나,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한 후 낙향하여 술로 소일하였다. 공덕귀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부산 진명유치원을 다녔고, 1918년 8세에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4세 때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에 살던 삼촌 집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다.[6] 졸업 무렵부터 인도 선교사의 꿈을 꾸었다.
통영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부산 동래 일신여고에 편입하였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유치원 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반 선생으로 일했다.[8]
일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10] 1943년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에 편입했으나 중퇴하고, 1944년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복귀했다. 1945년, 한국인 요시찰 인물 총살 소식에도 전도사와 강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회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8] 1946년 1월 한신대학교(한신대학교 전신) 여자신학부 전임강사가 되었고, 1948년에는 조선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1949년 1월 6일 목사 함태영의 주례로 서울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에서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했다.[8]
한국 전쟁 중 가족과 함께 피난했다가 돌아왔다.[8] 39세에 아들 윤상구를 낳았고, 피난 중 포소리에 둘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사산하였다. 그 뒤 부산 피난 중 42세에 아들 윤동구를 낳았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던 공덕귀는 의전상 대통령 배우자 접대 외에 남편을 대신해서 외국인 내빈과 저명 인사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5·16 군사 정변으로 윤보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청와대를 떠나게 되었고,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1974년 2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 참석, 한국인 원폭피해자문제에 대해 토론하였고, 같은 해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에 선출되어 1977년까지 역임하였다.[12]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참여하였다. 1977년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 해에 남영나일론과 방림방적 여성근로자들의 임금투쟁을 지원하였다. 1978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그해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임되었다.
1980년 초, 광주 학살을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미국에 발표하였다.[8] 1980년대에도 성매매와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계속했고, 1983년에는 기생관광실태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19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교회일치·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의 어머니' 운동을 지도하였다.[12] 1987년 6.10 만세 운동 당시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위문하였고, 같은 해 구로병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0년 남편 윤보선이 사망한 후, 1992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창립에 참여, 1993년에는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생애 후반에는 교회일치화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6년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5년간 활동하였다. 1993년 이스라엘 여행 후유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뒤 의사소통이 수월치 않을 만큼 건강을 잃었고 치매에 시달렸다.[1] 그러나 1994년 10월 기적적으로 정신을 회복하고 자서전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하였다.[1] 이후 모든 시민운동에서 은퇴하고 자택에서 요양하였다.[1] 199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1] 당시 그의 향년 86세였다.[1]
2. 1. 생애 초기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에서 지역 유지였던 공도빈(孔道彬)과 방말선(方末善)의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자(孔子)의 79대손[3]이며, 어머니의 다른 이름은 공마리아였다.[3] 명정동 근처에는 이순신의 영정과 전쟁 때 쓰던 물건들이 보존되어 있는 충렬사[4]가 있었다. 그의 선대는 원래 중국 출신이었지만 원나라 사람인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가 고려 공민왕에게 시집온 노국공주를 따라와 고려에 정착했다.[5]아버지 공도빈은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나,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한 후 낙향하여 술로 소일하고 있었다. 공덕귀에 의하면 "어이 없게도 일제에 의해 국군이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 뒤 아버지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 천추의 한을 품고 낙향하여 시골에 묻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당한 충격과 분노 속에서 폐인같이 되어 가셨다. 아버지는 한많은 세월을 달랠 길이 없어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술을 드셔도 결코 주정을 부리는 일이 없이 언제나 정좌하고 계셨다."[6]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부산 진명유치원을 다녔고, 1918년 8세에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14세 때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에 살던 삼촌 집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다.[6] 졸업 무렵부터 인도 선교사의 꿈을 꾸었다.
통영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부산 동래 일신여고에 편입하였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유치원 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반 선생으로 일했다.[8]
2. 1. 1. 출생과 유년기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에서 지역 유지였던 공도빈(孔道彬)과 방말선(方末善)의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자(孔子)의 79대손[3]이며, 어머니 방말선의 다른 이름은 공마리아였다.[3] 그가 태어나 자란 명정동 근처에는 이순신의 영정과 전쟁 때 쓰던 칼, 창, 활 등이 보존되어 있는 충렬사[4]가 있었다. 그의 선대는 원래 중국 출신이었지만 원나라 사람인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가 고려 공민왕에게 시집온 노국공주를 따라와 고려에 정착했다.[5]아버지 공도빈은 대한제국 당시 군인이었으나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한 후 낙향하여 술로 소일하고 있었다. 공덕귀에 의하면 "어이 없게도 일제에 의해 국군이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 뒤 아버지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 천추의 한을 품고 낙향하여 시골에 묻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본인에게 당한 충격과 분노 속에서 폐인같이 되어 가셨다. 아버지는 한많은 세월을 달랠 길이 없어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술을 드셔도 결코 주정을 부리는 일이 없이 언제나 정좌하고 계셨다. 속수무책으로 의욕을 잃고 폐인처럼 생을 포기하신 듯 세월가는 데로 시간만 보내셨다."[6]
어려서 어머니 방말선을 따라 기독교 선교사가 세운 부산 진명유치원을 다녔다. 1918년 8세에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2. 1. 2. 학창 시절
14세 때 통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래에 살던 삼촌 집에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 아버지 공도빈의 임종을 보았다.[6] 공덕귀는 공립보통학교 졸업 무렵부터 인도 선교사의 꿈을 꾸었다.통영공립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부산 동래 일신여고에 편입하였다. 일신여학교 시절 같은 반 급우는 23명이었다고 한다. 일신여학교 재학 중에는 함께 기도하는 동무(김두석)를 정하고 매일 아침 기도실에서 기도하였다.[7]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으로 ‘만 가지 약장수’로 불렸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을 받았다.[8]
한편, 학비를 벌기 위해 유치원 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반 선생으로 일했다.[8] 어려운 가정 환경과 추위, 더위,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잠을 줄이고 새벽에는 촛불로 성서와 신학 서적을 읽었다.
2. 2. 일제 강점기 후반
일제 강점기 후반, 공덕귀는 창씨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신념을 지켰다. 이로 인해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고, 대구 헌병대에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9]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10] 1943년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에 편입했으나 중퇴하고, 1944년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복귀했다. 1945년, 한국인 요시찰 인물 총살 소식에도 전도사와 강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2. 2. 1. 미국 유학 좌절과 아르바이트
일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는 코틀 선교사 부인의 어학선생이 되어달라는 제의를 수락하여[9] 부산에 한동안 머무르다가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한 선교대회에서 이광수가 지었다는 무궁화 노래를 불렀다가 바로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무궁화 삼천리 내 집인데 어디어디로 가오
봄오면 무궁화 필 터인데 어디어디로 가오
현해탄 물결이 높다는데 어디어디로 가오|무궁화 삼천리 내 집인데 어디어디로 가오
봄오면 무궁화 필 터인데 어디어디로 가오
현해탄 물결이 높다는데 어디어디로 가오한국어[9]
그 뒤 거창경찰서로부터 소환장이 왔다. 소환 이유도 모르는 채 그는 진주에서 아침 첫차를 타고 거창으로 갔다.[10]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은 뒤 4, 5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풀려났다. 그에 의하면 "성탄절 이브에 교회에서 부른 노래가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 노래는 춘원 이광수 선생이 일제의 착취에 못 이겨 조랑 바가지를 차고 살 길을 찾아 만주로, 일본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던 우리 백성을 생각하고, 또한 강제로 이리 저리 끌려가는 제 핏줄을 보며 지었던 노래였다.[10]"는 것이다.
2. 2. 2. 태평양 전쟁 전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동문인 박용길과 함께 주일학교를 인도했다.[8] 박용길은 훗날 목사 문익환의 부인이 된다. 졸업 후 29세에 송창근 목사의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국교계의 거목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8]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1940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바로 송창근이 담임목사로 있던 김천 황금동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9월 조선총독부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졌으나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기독교 신앙인임을 이유로 신사 참배를 거절했다가 2차례 대구 헌병대에 연행되어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다시 일본으로 유학, 1943년 6년제로 바뀐 일본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 4학년에 다시 편입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중퇴, 1944년 황금동교회의 전도사로 다시 복귀하였다. 그는 선을 명확히 하여 신앙과 애국은 구별하는 자세를 취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압력을 넣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지만 그는 자신은 기독교 신자라서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1945년 초, 그해 10월 무렵에 한국인 불령선인과 요시찰 인물들을 경기도 외곽의 야산으로 끌어모은 뒤 총살한다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피신하지 않고 전도사와 강사 활동을 계속하였다.
2. 3. 해방 이후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공덕귀는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회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8] 1946년 1월 한신대학교(한신대학교 전신) 여자신학부 전임강사가 되었고, 1948년에는 조선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교직에 있으면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 목사가 유학 서류를 빼돌려 무산되었다.[8] 이후 집안의 결혼 강요와 주변의 권유로 1949년 1월 6일 목사 함태영의 주례로 서울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에서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했다.[8] 김재준 목사는 40년 동안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릴 생각이냐며 만류하였다고 한다.[8]
한국 전쟁 중 가족과 함께 피난했다가 돌아왔다.[8] 39세에 아들 윤상구를 낳았고, 피난 중 포소리에 둘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사산하였다. 그 뒤 부산 피난 중 42세에 아들 윤동구를 낳았다.
결혼 초기, 공덕귀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선교사의 꿈이 실패한 것에 좌절하여 “1949년 1월 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며 자조 섞인 자평을 했다.[8] 그러나 남편 윤보선의 공직 생활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남편이 서울특별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부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윤보선은 상공부장관 시절 손수 도시락과 칫솔, 치약, 비누까지 챙겨 다녔고, 공덕귀는 남편의 장관 재직 시절 내내 도시락과 세면도구들을 챙겨주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로서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던 공덕귀는 의전상의 대통령 배우자 접대 외에 남편을 대신해서 외국인 내빈과 저명 인사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전쟁 고아와 혼혈아 구제사업을 하던 펄 벅 등을 만나 면담하기도 했다.
외교적 방문객이 있을 때 우아한 자태로 손님과 환담을 나누는 활동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대사 부인의 방문, 매카나기 미국대사 부인과의 환담, 유엔군 모범장병 초대만찬, 미 국무장관 등의 예방 시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8], YWCA에서 주관하는 외교관 부인들의 ‘가든 클럽’(Garden Club) 연차 전시회에 참석하고, 메디컬 센터의 아동병원 개설에도 대통령 배우자로서 참석했다.[8]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윤보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청와대를 떠나게 되었고,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1974년 2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 참석, 한국인 원폭피해자문제에 대해 토론하였고, 같은 해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에 선출되어 1977년까지 역임하였다.[12]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장을 방문하기도 했다.[13] 한편 사회의 도덕화를 외치며 성매매 반대 운동과 기생관광 반대 운동 등도 주관하였다.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참여하였다. 명동 구국 선언 재판 당시 참석했다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강제로 연행되어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다.[14]
1977년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 이 해에 남영나일론과 방림방적 여성근로자들의 임금투쟁을 지원하였다. 1977년 각계 지도자 100여 명으로 구성된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NCC 인권위원회 후원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남편 윤보선의 반유신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1일 감옥에 있는 양심범과 그 가족들의 모임을 주관, 박정희 정권 아래서의 모든 정치, 사법 재판에 대해 무효화 선언문을 낭독, 발표하였다.
1978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그해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의 한 사람에 선임되었다. 또한 성매매 여성의 구제와 기생관광 반대 운동도 꾸준히 진행해 나갔다. 같은 해 5월 자신이 부회장으로 있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를 이끌고 7월 5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에 참여하였다.[8] 1979년 9월 근로여건 개선 관련 YH무역 여공이 신민당사 농성을 하다 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었을 때는 YH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2. 3. 1. 광복과 결혼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도 공덕귀는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목회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전도사로 활동하던 중,[8] 1946년 1월 한신대학교(한신대학교 전신) 여자신학부 전임강사가 되었고, 1948년 조선신학대학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그 뒤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교직에 있으면서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전액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준비하였으나, 송창근 목사가 유학 서류를 빼돌려 무산되었다.[8] 집안의 결혼 강요와 주변의 권유로, 1949년 1월 6일 목사 함태영의 주례로 서울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에서 당시 서울특별시장이던 윤보선과 결혼했다.[8] 김재준 목사는 40년 동안 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릴 생각이냐며 만류하였다고 한다.[8] 윤보선과의 사이에 상구, 동구 등 2남을 두었다.
2. 3. 2. 결혼 생활 초기
한국 전쟁 중 가족을 따라 피난했다가 되돌아왔다.[8] 39세에 아들 윤상구를 낳고, 피난 중 포소리에 둘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사산하였다. 그 뒤 부산 피난 중 42세에 아들 윤동구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결혼 초기,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선교사의 꿈이 실패한 것에 좌절한 그는 해위와의 결혼 직후 “1949년 1월 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며 도미 유학의 꿈이 꺾인 것에 대해 자조 섞인 자평을 했다.[8]
그러나 남편 윤보선의 공직 생활이나 관련된 것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공덕귀 여사는 “남편이 서울특별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부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윤보선은 상공부장관 시절 손수 도시락과 칫솔, 치약, 비누까지 싸갖고 다녔다. 공덕귀는 남편의 장관 재직시절 내내 도시락과 세면도구들을 손수 챙겨주었다.
2. 3. 3. 제2공화국의 대통령 배우자
공덕귀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로서 항상 한복 차림에 단아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알았던 공덕귀는 의전상의 대통령 배우자 접대 외에 남편을 대신해서 외국인 내빈과 저명 인사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그 밖에 전쟁 고아와 혼혈아 구제사업을 하던 펄 벅 등을 만나 면담하기도 했다.
외교적 방문객이 있을 때 우아한 자태로 손님과 환담을 나누는 활동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대사 부인의 방문, 매카나기 미국대사 부인과의 환담, 유엔군 모범장병 초대만찬, 미 국무장관 등의 예방 시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8], YWCA에서 주관하는 외교관 부인들의 ‘가든 클럽’(Garden Club) 연차 전시회에 참석하고, 메디컬 센터의 아동병원 개설에도 대통령 배우자로서 참석했다.[8] 그러나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도 오래 가지 못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윤보선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그녀도 청와대를 떠나게 되었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2. 3. 4. 시민 사회운동과 반 유신 활동
1974년 2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대표로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여성평화회의에 참석, 한국인 원폭피해자문제에 대해 토론하였고, 같은 해 5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에 선출되어 1977년까지 역임하였다.[12] 1974년 4월에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 당시 가담자들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장을 방문하기도 했다.[13] 한편 사회의 도덕화를 외치며 성매매 반대 운동과 기생관광 반대 운동 등도 주관하였다.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에 참여하였다. 명동 구국 선언 재판 당시 참석했다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강제로 연행되어 길바닥에 버려지기도 했다.[14]
1977년부터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 이 해에 남영나일론과 방림방적 여성근로자들의 임금투쟁을 지원하였다. 1977년 각계 지도자 100여 명으로 구성된 방림방적체불임금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NCC 인권위원회 후원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남편 윤보선의 반유신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 1일 감옥에 있는 양심범과 그 가족들의 모임을 주관, 박정희 정권 아래서의 모든 정치, 사법 재판에 대해 무효화 선언문을 낭독, 발표하였다.
1978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그해 동일방직사건긴급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의 한 사람에 선임되었다. 또한 성매매 여성의 구제와 기생관광 반대 운동도 꾸준히 진행해 나갔다. 같은 해 5월 자신이 부회장으로 있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를 이끌고 7월 5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에 참여하였다.[8] 1979년 9월 근로여건 개선 관련 YH무역 여공이 신민당사 농성을 하다 경찰에 강제로 연행되었을 때는 YH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2. 4. 만년
1980년 초, 광주 학살을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미국에 발표하였다.[8] 그러나 남편 윤보선이 전두환 군사정권의 국정자문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자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기도 했다. 그는 남편을 극구 말려 더 참여하지 않게 하였으며 의전용으로 지급된 차량 역시 반납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윤보선은 이를 듣지 않았다.1980년대에도 성매매와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계속했고, 1983년에는 기생관광실태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날조, 모함에 의한 것임을 남편 윤보선을 통해 정부에 건의, 인혁당 관련자들의 석방과 사면, 감형 조치를 이끌어냈다.
19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교회일치·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의 어머니' 운동을 지도하였다.[12]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87년 6.10 만세 운동 당시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위문하였고, 같은 해 구로병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0년 남편 윤보선이 사망한 후, 1992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창립에 참여, 1993년에는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생애 후반에는 교회일치화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6년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5년간 활동하였다. 1993년 이스라엘 여행 후유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뒤 의사소통이 수월치 않을 만큼 건강을 잃었고 치매에 시달렸다.[1] 그러나 1994년 10월 기적적으로 정신을 회복하고 자서전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하였다.[1] 이후 모든 시민운동에서 은퇴하고 자택에서 요양하였다.[1]
1997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1] 당시 그의 향년 86세였다.[1]
2. 4. 1. 10.26 직후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강경 성향의 반공주의자였던 남편 윤보선과 크고 작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0년 초 시민운동가와 종교인들과 함께 미국에 광주 학살을 규탄하는 항의서한을 발표하였다.[8] 그러나 남편 윤보선이 전두환 군사정권의 국정자문회의 의원으로 임명되자 동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남편을 극구 말려 더 참여하지 않게 하였으며 의전용으로 지급된 차량 역시 반납하라고 촉구하였으나 윤보선은 이를 듣지 않았다.1980년 4월 정부의 산업선교회 활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여성근로자들의 호소문이 연합회로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다.[8] 1980년대에도 성매매와 기생관광 반대 운동을 계속했고 1983년에는 기생관광실태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날조, 모함에 의한 것임을 남편 윤보선을 통해 정부에 건의, 인혁당 관련자들의 석방과 사면, 감형조치를 이끌어냈다.
2. 4. 2. 5공, 6공 시절
1983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교회일치·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의 어머니' 운동을 지도하였다.[12]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87년 6.10 만세 운동 당시 시민사회 지도자들을 위문하였고, 같은 해 구로병원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990년 남편 윤보선이 노환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자 그를 간호하였다. 같은 해 7월 18일 윤보선이 사망한 후에는 숙부 윤치영 등과 함께 조문객을 맞았다. 수개월간 추도 기간을 가진 뒤, 1993년에는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1992년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창립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윤보선 사후 그의 사진 옆에 양초를 놓아 거실을 빈소처럼 꾸몄다가, 일부 보수적인 교인들로부터 귀신 숭배나 우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4. 3. 은퇴와 최후
생애 후반에는 교회일치화 운동인 에큐메니칼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86년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5년간 활동하였다. 1993년 이스라엘 여행 후유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뒤 의사소통이 수월치 않을 만큼 건강을 잃었고 치매에 시달렸다.[1] 그러나 1994년 10월 기적적으로 정신을 회복하고 자서전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하였다.[1] 이후 모든 시민운동에서 은퇴하고 자택에서 요양하였다.[1]1997년 병으로 서울대학교 대학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 같은 해 11월 24일 오전 7시 30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1] 당시 그의 향년 86세였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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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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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경향신문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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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씨 대종회 "공자후예 인정받아 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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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찾아서 인혁당 사형자 주검 탈취 막다 크레인서 떨어져 / 문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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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구국선언’이 정부 전복 음모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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