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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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각본은 조선 시대 민간 출판업자가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한 책을 의미한다.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판되었으며, 서울, 전주, 안성 등지에서 제작되었다. 방각본은 관각본, 서원판본, 사각본보다 품질은 떨어졌지만, 문자 문화 확산과 독서 인구 확대에 기여했다. 소설책 생산 비용 증가, 출판법 시행 등의 요인으로 쇠퇴했으며, 경판본, 완판본, 안성판본 등의 판본이 존재한다.
방각본은 민간 출판업자가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한 서적으로, 한학서, 유학서, 실용서, 소설 등이 주를 이루었다.[1]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출간되었으며[2], 서울, 전라도 전주, 태인, 나주, 경기도 안성 등지에서 주로 간행되었다.[4]
2. 역사
이는 관청에서 간행한 관각본(官刻本), 서원에서 간행한 서원판본(書院版本), 개인이 간행한 사각본(私刻本) 등에 비해 품질은 다소 떨어졌으나, 문자 문화 확산과 독서 인구 확대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 방각본의 등장은 독자층 및 자본의 성장, 민간 수공업의 발달 등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5],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다소 늦게 나타났다.[3] 특히 18세기 이후 방각본 소설이 활발히 간행되면서[8] 경판본, 완판본, 안성판본 등 다양한 형태가 등장했으나[9], 20세기 초 출판법 시행과 딱지본 소설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하였다.[12] 그럼에도 방각본은 문학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5][16]
2. 1. 등장 배경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방각본이 출간되었다.[2] 방각본이 등장하고 유통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사회 변화가 있었다. 우선 책을 읽고 구매할 수 있는 독자층이 성장했고, 상업 발달에 따라 출판에 필요한 자본도 축적되었다. 또한, 관청 주도의 수공업 체제가 약화되면서 민간 수공업자들이 출판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5]
이처럼 조선에서 방각본이 등장한 시기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다소 늦었는데, 이는 방각본을 소비할 만한 독자층의 성장이 상대적으로 더뎠기 때문으로 분석된다.[3]
2. 2. 발전 과정
방각본 소설은 시장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만든 상업 출판물이었다.[7] 이덕무의 《영처잡고》(嬰處雜稿)에 시골 훈장들이 소설을 지어 판에 새기고 책방에 팔았다는 기록이 있어, 방각본 소설이 18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8]
초기 방각본 소설의 간행 시기는 다음과 같다.
| 구분 | 작품명 | 간행 연도 | 지역/판본 |
|---|---|---|---|
| 한문 | 구운몽 | 1725년 | 나주 午門 |
| 한문 | 구운몽 | 1803년 | 전주 (완판본) |
| 한글 | 임경업전 | 1780년 | 서울 京畿 (경판본) |
| 한글 | 전운치전 | 1847년 | 서울 由谷 (경판본) |
| 한글 | 삼설기 | 1848년 | 서울 由洞 (경판본) |
1725년 나주에서 간행된 <구운몽>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에서 나온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나온 완판본(完板本),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본(安城板本)이다.[9]
소설책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증가하면서, 방각업자들은 소설의 분량을 줄여 생산 비용을 낮추려 했고, 새로운 작품의 판목을 만들기보다는 이미 인기를 얻은 기존 작품을 계속 찍어내는 경향을 보였다.[10] 한편,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는 판본 내용을 유연하게 고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점차 경쟁에서 밀려났고, 이로 인해 방각본 소설이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11]
2. 3. 쇠퇴
1909년에 출판법이 시행되면서 인허가를 받은 출판사만 책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세한 방각업자들은 책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고, 납활자로 인쇄되어 가격이 저렴했던 딱지본 소설이 크게 유행하면서 방각본 소설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12]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방각본 소설의 명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박성칠의 박성칠서점은 판목을 인수하여 안성판본 소설을 1910년대 말까지 간행하였고[13], 백두용의 한남서림 역시 판목을 인수하여 경판본 소설을 1920년대까지 간행하였다.[14]
방각본 소설은 필사본만으로는 충족되기 어려웠던 서민 독자층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으며[15], 이전까지 일부 계층에 한정되었던 문학 향유의 기회를 대중적으로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6]
3. 판본
방각본 소설은 대부분 한글로 간행되었다.[17] 간행 지역에 따라 서울에서 나온 경판본, 전주에서 나온 완판본,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본 등으로 나뉘는데, 각각 글씨체나 내용 분량 등에서 특징적인 차이를 보였다.[18][19] 예를 들어 경판본은 흘림체 글씨와 간략한 내용이 특징인 반면, 완판본은 해서체 글씨와 풍부한 내용을 담는 경향이 있었다. 안성판본은 경판본과 유사한 특징을 지녔다.[18][19]
지역과 관계없이, 한 방각소에서 사용하던 판목을 다른 방각소에서 넘겨받아 이름만 바꾸거나 간행 기록(간기) 없이 출판하는 경우도 흔했다.[20]
방각본은 대부분 목판으로 인쇄되었으나, 드물게 흙으로 만든 토판(土版)으로 찍어낸 사례도 있다.[45] 그러나 당시 사용된 책판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47][48][49]
3. 1. 지역별 특징
방각본 소설은 대부분 한글로 쓰였다.[17] 지역별로 특징이 나타나는데, 크게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完板本), 안성에서 간행된 안성판본(安城板本)으로 나뉜다. 경판본은 흘림체 글씨와 축약된 내용이 특징이며, 완판본은 해서체 글씨와 풍부한 내용이 특징이다.[18] 안성판본은 경판본과 유사했다.[19] 다만, 지역과 관계없이 한 방각소에서 새긴 판목을 다른 곳에서 인수하여 방각소 이름만 바꾸거나 간기(刊記, 간행 기록)를 아예 지우고 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20]아래는 각 판본의 주요 특징을 비교한 표이다.
| 구분 | 경판본 (서울) | 완판본 (전주) | 안성판본 (안성) |
|---|---|---|---|
| 글씨체 | 흘림체 (궁체 기반)[34] | 해서체 (후기 기준)[38] (초기: 초서체, 중기: 행서체)[38] | 흘림체 (경판본과 유사)[33] |
| 판광(板匡) 크기 | 약 16cm x 20cm[21] | 약 5치 x 6.2치[26] | 약 15.8cm x 20.2cm[33] |
| 한 면 행 수 | - | 13행[26] | 약 15행[33] |
| 한 행 글자 수 | 20~30자[21] | 20여 자[26] | 20~30자[33] |
| 권당 장수 | 20~30장 전후 (초기)[21] → 15~16장 (후기)[23] |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증가[27] | - |
| 내용 특징 | 축약된 내용, 세련된 문장[18] | 풍부한 내용[18], 군담소설 위주[31] | 경판본과 유사[19] |
| 간기(刊記) | 없는 경우 많음[22] | - | - |
| 주요 독자/생산층 | 중인층, 하류층 (생산)[25] 중인, 서리층, 사대부가 여성 (독자)[35] | 수공업자, 상인 (생산)[32] 초기 서리층 → 후기 농민층 (독자)[40] | - |
=== 경판본 ===
경판본 소설은 글씨는 흘림체였고, 판광(板匡)은 대략 16cm x 20cm 크기였다. 한 행에는 20~30자 정도가 들어갔으며, 책 한 권은 20~30장 내외였다.[21] 간행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22] 초기에는 권당 30장 정도로 나왔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쟁 심화와 경제적 여건 변화로 인해 15~16장까지 분량이 줄어들었다.[23][24] 방각소의 위치로 볼 때, 주로 서울 성안의 중인층과 성 밖의 하류층이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5]
경판본의 글씨는 궁체를 바탕으로 한 흘림체로, 획 굵기나 글자 크기, 글자 사이 간격(자간)이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34] 이는 당시 경판본의 주요 독자였던 중인, 서리층, 사대부 여성들이 궁체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35] 이러한 단정한 아름다움은 상류층 문화를 동경했던 한양 중인층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36] 글자 모양을 보면, 대체로 ㅇ은 둥글고, ㅌ은 ㄷ 위에 가로획을 더한 형태이며, ㅔ는 두 세로획의 길이가 다른 특징을 보인다.[37]
=== 완판본 ===
완판본 소설은 주로 해서체 글씨를 사용했으며, 판광은 약 5치 x 6.2치 크기였다. 한 면은 13행으로 구성되었고, 한 행에는 20자 정도가 들어갔다.[26] 완판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분량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27] 이는 당시 서울 지역 화폐 가치가 당백전 같은 악화(惡貨) 유통으로 불안정했던 것과 달리, 전주 지역은 기존의 엽전을 계속 사용하며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었던 점과 관련이 있다.[28] 또한, 종이 생산지로 유명했던 전주의 이점을 살려 방각업자들이 종이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책값도 비교적 비싸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29] 현재 남아있는 완판본은 1803년부터 1923년 사이에 간행된 것들이며, 특히 1850년에서 1910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간행되었다.[30] 내용은 군담소설이 주를 이룬다.[31] 완판본 방각소의 위치를 보면, 주로 성 밖의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간행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32]
완판본의 글씨체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1850년대까지는 초서체(궁체)가 쓰이다가, 1889년에서 1902년 사이에는 행서체, 1902년 이후에는 해서체가 주로 사용되었다.[38] 예를 들어 같은 춘향전이라도 간행 시기가 이른 '별춘향전'은 흘림체에 가깝지만, 더 늦게 나온 '열녀춘향수절가'는 정자체(해서체)에 가깝다.[39] 이는 완판본의 독자층이 초기의 서리층에서 점차 농민층으로 확대되면서, 흘림체인 궁체를 읽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해석된다.[40] 완판본 해서체의 특징을 보면, 가로획은 굵기 변화 없이 얇고, 세로획은 굵기 변화가 있으며 두꺼운 편이다.[41]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자간도 불규칙적인데,[42]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전주 민중들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43] 완판본 해서체의 전형적인 글자 모양은 ㅇ이 삼각형에 가깝고, ㅌ은 세 가로획이 세로획과 모두 붙어 있으며, ㅔ는 두 세로획의 길이가 같다.[44]
=== 안성판본 ===
안성판본 소설은 글씨체가 경판본과 같았고, 판광은 약 15.8cm x 20.2cm 크기였다. 한 면은 약 15행으로 이루어졌고, 한 행에는 20~30자 정도가 들어갔다.[33] 전반적으로 경판본과 유사한 특징을 지녔다.[19]
=== 판본 종류 및 현황 ===
방각본 소설은 대부분 목판본이었으나, 드물게 흙을 구워 만든 토판(土版)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45] 토판본은 완판본 조웅전(3책 전부), 장경전(1책 중 일부), 홍길동전(1책 중 일부) 정도만 알려져 있다.[46]
방각본 소설을 찍어낸 책판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경판본 책판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의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소장된 '월왕전' 책판 6점이 전부이다.[47] 완판본 책판은 개인이 소장한 '삼국지' 책판 1점만 온전한 상태로 전해지며, 그 외에는 책판을 재활용해 만든 분첩, 담뱃갑, 보석함이 하나씩 남아있다.[48] 과거 서울 한남서림의 목판은 전형필에게 넘어갔다고 전해지나 현재 행방이 묘연하고, 전주 양책방의 목판 300~400점은 국문학자 김삼불(金三不)이 소유했으나 6.25 전쟁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안성 박성칠서점의 목판 역시 1960년대까지 모두 길을 포장하거나 땔감으로 사용되어 사라졌다고 한다.[49]
3. 2. 글씨체 변화
경판본 소설의 글씨는 궁체 기반의 흘림체로, 획의 굵기, 글자의 크기, 자간 등이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34] 경판본의 주요 독자층은 중인 및 서리층과 사대부가의 여성이었는데, 이들은 궁체를 읽을 수 있었다.[35] 이러한 글씨체의 균형 잡힌 아름다움은 상층 문화를 지향했던 한양 중인층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36] 대체로 글자 ㅇ은 둥근 모양이며, ㅌ은 ㄷ 위에 가로획을 덧붙인 형태이고, ㅔ는 두 세로획의 길이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37]완판본 소설의 글씨는 시기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데, 1850년대까지는 초서체(궁체)가 주로 사용되었고, 1889년부터 1902년 사이에는 행서체가, 1902년 이후에는 해서체가 쓰였다.[38] 예를 들어, 같은 춘향전이라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된 '별춘향전'의 글씨는 흘림체에 가깝지만, 더 늦게 나온 '열녀춘향수절가'의 글씨는 정자체에 가깝다.[39] 이는 완판본의 독자층이 초기 서리층에서 점차 농민층으로 확대되면서, 상대적으로 읽기 어려운 궁체 대신 보다 판독하기 쉬운 글씨체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40] 완판본 글씨는 가로획은 굵기 변화 없이 얇은 편이고, 세로획은 굵기 변화가 있으며 두꺼운 경향이 있다.[41]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자간 역시 불규칙하다.[42]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전주 지역 민중들의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43] 완판본 글씨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해서체의 경우, ㅇ은 삼각형 모양에 가깝고, ㅌ은 세 개의 가로획이 세로획과 모두 붙어 있으며, ㅔ는 두 세로획의 길이가 같다.[44]
3. 3. 책판
방각본 소설은 대부분 목판으로 간행되었지만, 드물게 흙을 구워 만든 토판으로 찍어낸 것도 있다.[45] 토판본으로는 완판본 <조웅전>(3책 전체), <장경전>(1책 일부), <홍길동전>(1책 일부) 등이 알려져 있다.[46]방각본 소설을 인쇄하는 데 사용된 책판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아 매우 희귀하다. 경판본의 경우,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소장된 월왕전 책판 6점이 유일하게 전해진다.[47] 완판본 책판은 개인이 소장한 삼국지 책판 1점만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책판을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여 만든 분첩, 담뱃갑, 보석함이 각각 하나씩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48]
과거에는 더 많은 책판이 존재했으나 여러 이유로 소실되었다. 서울 한남서림이 보유했던 목판은 전형필에게 넘어갔다는 기록이 있지만, 현재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전주 양책방이 소장했던 300~400점의 목판은 윤규섭(尹圭涉)을 거쳐 국문학자 김삼불(金三不)의 소유가 되었으나, 안타깝게도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모두 불타 없어졌다. 안성에 있던 박성칠서점의 목판 역시 1960년대까지 길바닥을 포장하거나 땔감으로 사용되어 모두 사라졌다고 전해진다.[49] 이러한 책판의 소실은 당시 우리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이다.
4. 생산과 유통
방각본은 민간 출판업자가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하여 판매하던 책으로, 주로 한학과 유학 서적, 실용서, 그리고 소설의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1] 조선에서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출간되기 시작했으나[2], 이를 소비할 독자층의 성장이 더뎠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등장하였다.[3] 주요 생산지로는 서울, 전라도 전주, 태인, 나주, 경기도 안성 등이 있었다.[4] 독자층과 자본의 성장, 그리고 관영 수공업 체제 붕괴에 따른 민간 수공업자의 등장은 방각본 유통을 촉진하는 배경이 되었다.[5] 방각본은 관청에서 간행한 관각본(官刻本), 서원에서 간행한 서원판본(書院版本), 개인이 간행한 사각본(私刻本)에 비해 인쇄 품질은 다소 떨어졌으나, 문자 문화의 확산과 독서 인구 확대에는 크게 기여하였다.[6]
특히 방각본 소설은 시장 판매를 전제로 한 상업 출판물이었다.[7] 이덕무의 『영처잡고』(嬰處雜稿)에 시골 훈장들이 소설을 지어 판각하여 책방에 팔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방각본 소설은 18세기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8]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문 방각본 소설로는 1725년(을사년) 나주에서 간행된 구운몽이 있으며, 이후 1803년 전주에서도 구운몽이 간행되었다. 한글 방각본 소설로는 1780년 서울 경기 지역에서 나온 임경업전, 1847년 서울 유곡에서 간행된 전운치전, 1848년 서울 유동에서 나온 『삼설기』 등이 비교적 초기에 해당한다.[9] 1725년 나주본 구운몽을 제외하면, 이들 초기 방각본 소설은 대부분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完板本), 안성에서 간행된 안성판본(安城板本) 중 하나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설책 생산 비용이 증가하자, 방각업자들은 소설 분량을 줄여 생산 단가를 낮추려 했고,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기보다는 기존 인기 작품을 반복 생산하는 경향을 보였다.[10] 한편,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는 판본 수정이 유연하지 못해 점차 경쟁력을 잃었고, 이는 방각본 소설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11] 그러나 1909년 출판법 시행으로 인허가를 받은 출판사만 책을 낼 수 있게 되면서 영세한 방각업자들이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고, 납활자로 인쇄된 값싼 딱지본 소설이 대중적으로 유행하면서 방각본 소설은 점차 쇠퇴하였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성칠의 박성칠서점이 안성판본 판목을 인수하여 1910년대 말까지[13], 백두용의 한남서림이 경판본 판목을 인수하여 1920년대까지 소설을 간행하며 방각본 소설의 명맥을 이었다.[14]
방각본 소설은 필사본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던 서민 독자층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켰으며[15], 이전까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을 대중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16]
4. 1. 생산 조건
방각본이 생산되고 유통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우선, 종이와 같은 재료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했다. 또한 판에 글자를 새기는 각수(刻手)와 인쇄를 담당하는 인출장(印出匠) 같은 기술 인력이 필요했으며, 생산된 책을 소비할 수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야 했다.[50]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특정 지역에서 방각본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울은 대도시였으며, 안성은 물화의 집산지이자 서울과 가까운 곳이었기에 방각본이 발달할 수 있었다.[51] 전주의 경우, 질 좋은 한지의 생산지였고 관영 수공업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여 기술 인력 확보가 용이했다. 또한,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인 전주장이 열려 판매가 보장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부유한 소작농들이 성장하여 여가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특히, 전주 지역 농민들은 판소리를 즐겨 들었는데, 직접 판소리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이야기를 즐기려는 욕구가 방각본 소설의 발달을 촉진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52]
4. 2. 생산 방식
방각본 소설은 많은 작품이 적당히 팔리기보다 적은 수의 작품이 많이 팔려야 이윤이 남는 구조였으므로, 방각업자들은 시장성이 높고 분량이 길지 않은 작품을 선호하였다.[53] 주로 상인 계층이었던 이들은 소설 판매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방각본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54]190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방각본 소설 한 권을 간행하는 데에는 약 400여 원이 들었다. 만약 소설 한 권의 가격이 15전이라면, 최소 2,700부 이상 판매해야 이익을 낼 수 있었다.[55] 방각본 소설의 가격은 주로 종이값에 따라 변동했으며, 이후 서양에서 비교적 저렴한 백로지(白鷺紙)가 수입되면서 책값이 하락하기도 했다.[56] 이러한 종이 비용 부담 때문에 방각업자들은 지물포를 함께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57]
조선 시대에는 소설 창작 행위 자체가 명예롭게 여겨지지 않았고, 특히 방각본 제작은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 활동이었기에, 소설의 개작, 윤색, 축약 등을 담당한 작가들은 방각업자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58] 이들은 방각업자의 요청에 따라 세부적인 묘사나 설명을 생략하거나 축약하고, 이야기의 중심 사건 위주로 내용을 남겨 분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59] 필사본이 필사 과정에서 내용이 변형될 수 있는 것과 달리[60], 방각본은 동일한 판으로 여러 부를 인쇄했기 때문에 내용이 고정되는 효과를 가져왔다.[61]
4. 3. 유통 방식
방각본 소설은 상설 시장에서 주로 유통되었으며, 보부상 등에 의해 전국 각지로 판매되기도 하였다.[62]주요 독자층은 사대부와 중인 계층의 부녀자 및 평민 남성이었다.[63] 이들은 방각본을 구매하여 읽는 것 외에도 서로 돌려 읽거나 직접 필사하면서 새로운 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63] 특히,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은 사대부 부녀자, 서리, 중인, 상인 계층이 주로 찾았고[64], 전주에서 나온 완판본은 상인과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는 소작농들이 주요 독자였다.[65]
이러한 독자층의 차이는 작품 내용에도 영향을 미쳤다.[66] 예를 들어, 홍길동전의 경우, 경판본은 적서 차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서리나 중인 독자들이 주인공의 신분 상승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한 반면[67][68], 완판본은 농민 독자들이 현실에서 겪는 경제적 수탈 문제를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67][68]
방각본의 유통은 이전까지 일부 지배 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자 문화를 평민과 서민 계층까지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6][16] 이는 지식과 정보가 보다 넓은 대중에게 공유되는 과정의 일면을 보여주며, 서민들이 문학 작품을 향유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서민 문화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15][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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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월왕전의 책판」
http://suncheon.gran[...]
[48]
뉴스
19세기 한글소설 목판 5장으로 만든 보석함 첫 공개
https://www.yna.co.k[...]
연합뉴스
[4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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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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